이 건물은 사실 1층 커피숍을 제외하곤 육영 그룹의 소유가 아니었다. 1년 전 빚 때문에 나머지 층들을 모두 매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실제 육영 그룹은 외딴곳으로 이사한 상태였다. 육정현은 커피숍 가장 눈에 띄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신은지는 먼저 도착한 그를 발견하곤 허겁지겁 달려갔다."신은지 씨, 지각하셨어요. 절 만나러 오면서, 쇼핑까지 한 거예요?"그가 손목시계를 두드리며, 신은지 손에 들린 남성 브랜드 쇼핑백을 쳐다보고는 불만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녀가 늦은 데는 나름 사정이 있었다. "이건 쇼핑하던 도중에 연락을 받아서, 얼떨결에 들고 온 것뿐이에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신은지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저 얼굴을 보고 박태준이 아닌 육정현이라 불러야 한다니, 정말 고역이었다. 계속 그를 보고 있기 힘들었던 신은지는 얼른 화재를 다른 데로 돌렸다."여기 커피라떼 하나 주세요."신은지가 마침 다가오고 있던 커피숍 직원을 보며 말했다. "아니요. 그거 말고 따뜻한 우유로 가져다주세요."갑자기 육정현이 끼어들며 주문을 변경했다. 직원은 그의 기세에 눌려 후딱 알겠다고 한 뒤,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왜 제 주문을 마음대로 바꿔요?"신은지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커피가 임산부한테 안 좋다는 거 몰라요? 괜히 이따가 문제 생기면 제 책임 묻지 마시고, 우유로 만족하세요""...."실제로 임신한 게 아니기 때문에, 신은지는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음료수가 중요한 건 아니니,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대표님, 혹시 저희 재경 그룹에 무슨 악감정이라도 있나요?"신은지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아니요.""그럼 왜 사사건건 회방을 놓으시나요?"육정현이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몸을 소파에 기댔다."전에 문화재 복원하는 일을 하셨다고 했죠? 신은지 씨는 사업자질이 없으신 것 같아요. 다시 원래 직업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 사업하는
방금 신은지는 진영웅에게 아래층에서 기다리라고 말했고, 그는 줄곧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진영웅은 육정현이 갈 때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작은 사모님, 육 사장님 안색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라도 하셨나요?” 신은지는 지친 듯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지러운 테이블 위는 이미 종업원이 정리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두 가문의 오래된 원한을 풀 목적으로 나왔는걸요. 그에게 선물까지 주었어요. 그는 아마 제가 이렇게까지 예의를 차릴 줄 몰랐을 거예요. 기뻐 죽었을 걸요.” "……” 진영웅은 말이 없었다. 왜 그는 신은지의 말을 믿지 않을까? "입찰에 대한 육 사장은 어떤 태도는 어때요?” "끝까지 해보겠다는 태도예요.” 진영웅은 신은지를 힐끗 쳐다보다가 몇 번 망설인 끝에 말했다. “육 사장님은 정말 박 대표님 아니에요? 비록 둘의 성격과 옷차림, 일하는 스타일은 다르지만 견적서를 제출하는 것을 보면 재경 그룹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어요. 그리고 기획안을 제시하는 것도 그래요. 한두 번도 아니고 지난 두 달 협력하는 내내 이렇다고요.” 너무 많은 우연이 의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재경 그룹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고, 생김새도 비슷하고, 실종과 출현 시점까지 정확하게 일치했기에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신은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진영웅은 몇 가지 더 묻고 싶었지만 괜히 신은지를 우울하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화제를 돌렸다. ”서씨 가문에서 저녁 식사에 초대했어요. 장소는 봄의 향기예요.”신은지는 눈썹을 약간 찡그리며 물었다. "저녁이요?” 신은지가 가고 싶어 하지 않은 내색을 하자 진영웅은 말했다. "지금 두 가문은 지금 협력 단계에 있으니 예의상이라도 가야 해요.” "선물 하나 준비해 줄 수 있어요? 오늘 유성이 생일이라서요.” 많은 사람들이 봄의 향기로 오라고 초대받았고 그중 그와 친하지 않은 진유라도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직접 그에게 선물을 주고 가지 않을 생각이었
이 목소리는 오후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비록 바로 목소리를 인지할 수는 없었지만, 신은지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육정현이라고 확신했다. "육정현?” 그 순간, 연한 색상의 캐주얼 차림에 삐죽삐죽 앞머리에 부드러운 이목구비의 육정현이 복도 모퉁이에서 나왔다. 그가 박태준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신은지는 더 이상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육정현을 처음 본 나유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준?” 육정현은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예의 바르게 손을 내밀었다. "나유성 씨, 저는 육정현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육정현 씨?” 최근에 격동의 경인시 상업계에 다크호스처럼 나타난 육정현에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 많은 일을 비서를 통해 진행했기에, 그를 본 사람은 거의 없었고, 그에 대해 언급할 때면 모두들 조심스러워했다. 육정현의 얼굴을 마주한 나유성은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의 손을 잡지도 않았다. 육정현은 개의치 않고 손을 거둬들여 옆에서 담담한 태도로 있는 신은지를 보았다. "신은지 씨, 당신이 준 팬티 사이즈가 너무 작던데요.” "??” 신은지는 육정현의 말에 당혹스러워 바늘로 그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육정현은 어떻게 그런 말을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지? 그리고 신은지는 분명히...... 신은지는 갑자기 얼음물이 가득한 대야를 머리에 쏟아부은 듯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팬티 사이즈가 맞지 않는다는 말은 육정현이 박태준이 아니라는 뜻인가? 하지만 육정현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선물한 속옷을 입어보지 않았다.당시 신은지는 2층에서 육정현이 자신의 비서에게 그 속옷을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한 것을 똑똑히 보았다."그래요? 그럼 육정현 씨가 살이 너무 쪘다는 말인데요. 저는 정 사이즈로 샀어요.”나유성은 여전히 육정현을 보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방금 마신 술이 인생의 쓴맛으로 변해 그의 오장육
나유성과 헤어진 후 육정현은 봄의 향기에서 떠났다. 차 안. 방시혁은 차를 몰며 백미러로 육정현의 안색을 살폈다. 육정현은 눈을 감은 채 잠이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무표정이었다. 방시혁은 그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육 대표님, 오늘은 나유성 씨의 생일이었으니 신은지 씨가 선물한 그 속옷은 아마 나유성 씨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었을 것 같은데요.” 뒷자리에서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육정현은 뒤늦게 눈을 뜨며 말했다. "여자에게 생일선물로 속옷을 주면서 포장도 안 하고 그냥 아무렇지 않게 준다고? 방 비서 변태야?” 육정현의 목젖이 움직였다. "난 신은지 씨한테 관심 없어. 방 비서가 재경 그룹 사람에게 전화해. 입찰 건은 말할 필요도 없어. 경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야.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것 자체가 수준 미달이라고.” 육정현이 말을 하는 동안 방시혁은 줄곧 내색을 하지 않고 그를 훑어보았다. 육정현은 미간을 좁히며 짜증 낼뿐 다른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제가 그쪽에 한번 말해 볼까요? 신은지 씨가 성희롱 했다고?” 속옷과 같은 민감한 것을 선물하는 것은 직장 내 성희롱에 적용된다. "방 비서, 네가 왜 여자친구한테 차였는지 알아?” “?? 왜요?” "입이 싸.”"……" 방시혁은 육정현이 한 말을 알아듣는 데 2초가 걸렸다. 육정현은 방시혁이 그가 신사답지 못하게 여자에게 시시콜콜 따지고 여자에게 창피를 주고 명예를 훼손한다고 비꼬는 것이었다. 자신의 임무를 생각한 방시혁은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육 대표님은 신은지 씨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나는 원래 여자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네가 날 그렇게 보는 건 네가 모든 여자에게 감정이 있기 때문 아니야?” 육정현은 깊고 검은 눈빛으로 방시혁을 보며 말했다. "방시혁, 내 곁에 남으려면 맡은 일만 잘해. 하루 종일 내부 첩자처럼 내 속내나 캐지 말고.” …… 이튿날.
신은지는 심랑회에서 매년 풀 파티를 개최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명칭은 파티였지만 사실은 상류층 자녀들을 위한 소개팅 파티였다. 신은지가 말했다. "내가 직접 초대장을 들고 풀 파티에 같이 가자고 하라고? 그렇게 하면 육정현은 날 그의 몸을 탐내는 변태로 생각할지도 몰라.” "뭐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진유라는 개의치 않아 하며 말했다. "네 목적은 그저 그 사람 바지를 벗는 거 아니야? 풀 파티라고 해서 다 수영복을 입는 건 아니잖아. 일단 아무 핑계 대서 그를 풀 파티에 오게 하고 기회를 봐서 수영장에 빠뜨리면 되는 거 아니야? 혹시 흉터가 튀어나와 있어? 정 안 되면 네가 직접 만져 봐.” 진유라의 말에 신은지는 어이가 없었다. "너랑 곽 변호사가 이렇게 진도 나간 거야?” 진유라는 요 며칠 동안 잘 쉬지 못한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게다가 곽동건 이야기를 듣자 머리가 더욱 아팠다. 진유라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제발, 그 남자 얘기는 꺼내지 마. 나랑 곽동건은 그런 사이 아니야.” 진유라는 예전에 그에게 당한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녀는 정말 다시는 곽동건을 붙잡고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검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의젓한 표정으로 말했다. "곽 변호사는 사람들을 잘 사귀는 스타일도 아니고 사생활도 너무 깔끔해서 이런 세속적인 일에는 흥미가 없을 거야.” 신은지도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진유라가 이렇게 강력히 부인하는 걸 보고 웃으면서 이 주제를 넘겼다.진유라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몇 분도 안 되어 초대장을 받았다. 동시에 그녀들 옆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 통화 중이었는데 듣자 하니 전화를 하고, 목소리가 설렁설렁한 것이 부잣집 도련님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안 올 거야?” "방금 어떤 아가씨가 넌 안 된다고 하던데, 너 쓰레기냐?” 진유라는 눈살을 찌푸리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신은지에게 말했다. “이 사람 정말 좀 그런 것 같아. 이런 얘기를 공공
신은지는 초대장이 버려진 것을 모르고 있었다. 파티 당일 진유라는 그녀를 데리러 왔다. "이따가 파티에서 2분 정도 점등 시간이 있을 거야. 그때 기회를 봐서 손을 뻗어 엉덩이에 흉터가 있는지 만져봐. 만약 박태준이 아니어도 어색하지 않을 거야. 어두워서 누가 자기를 만졌는지 모를 거야.” “……” 신은지가 말했다. "흉터는 평평해서 만져도 알 수 없어. 봐야 알 수 있어.” "아, 그럼 됐어. 물에 들어가지 말고 기회를 봐서 달래서 방에 들어가서 바지를 벗겨.” "파티가 너무 야한 거 아니야?” 신은지는 한 번도 풀 파티에 참석해 본 적이 없어서 조금 머뭇거렸다. 그녀는 파티에서 육정현의 머리카락을 뽑아오고 파티에 참석하고 싶지는 않았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어. 보통 두 그룹으로 나뉘는데 네가 수영복을 입지 않고 물에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도 너한테 집적거리지 않을 거야. 그리고 이 파티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야. 설사 양아치 짓을 하고 싶어 한들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거야.” 목적지에 도착한 신은지는 진유라가 파티에 온 사람들의 집안 형편이 나쁘지 않다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파티에 입장하기 위해 입장료로 1억을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진유라는 카드를 긁으면서 말했다. "이 비용에는 오늘 밤 파티에서 사용하는 것들에 대한 지불이야. 성공적인 소개팅 대가를 포함해서 말이야.” 신은지는 어이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진유라를 바라보았다. "전에 다른 친구를 한 번 데리고 왔었어.”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이 무너뜨릴 듯한 강한 비트의 음악이 들렸다. 공기 중에는 습한 물기가 돌았고, 이따금 비키니 차림의 사람들이 그녀들의 곁을 지나갔다.바깥의 야외 정원에는 술과 디저트 그리고 간단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따뜻한 조명 아래 정성스럽게 차려입은 남녀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근처 전망대에는
신은지와 육정현은 마주 섰다. 신은지는 육정현에게서 은은한 머스크향의 향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박태준은 향수를 뿌린 적이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육정현의 높은 시선과 마주할 수 있었다. 육정현이 박태준과 7~80%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가까이 보니 옷차림과 성격을 제외하고 이목구비는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은지는 육정현의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걷어올리기 위해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이 그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육정현에게 잡혔다. ”신은지 씨.” 육정현의 목젖이 움직이며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육정현입니다.” 육정현이라는 이름을 들은 신은지의 눈동자는 점차 혼란스러워지는 듯했다. 맑은 그녀의 눈동자에 흐린 안개가 속수무책으로 드리워졌다. "내가 고인이 된 박 대표와 약간 닮았다는 것을 알아요. 신은지 씨가 나를 그 사람으로 착각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만, 육정현은 육정현이고 박태준은 박태준입니다. 난 누구를 대신할 수 없어요." 육정현의 손이 곡선이 살짝 생긴 신은지의 배 위에 닿았다. 하지만 신은지는 육정현의 말에 귀가 쏠려 있어 그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신은지 씨가 귀신도 홀릴 수 있는 미녀라 해도 저는 임산부에게는 관심이 없어요.” 신은지는 얼굴을 쳐들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눈에 거만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육씨 가문의 막내아들이에요?” "신은지 씨가 믿지 못하면 사람을 시켜서 조사해 봐도 좋아요. 저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양평군에서 살았어요. 양평군 10킬로미터 반경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저를 알아요.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모두 양평군에서 다녔고 몇몇 친구들은 아직 그곳에 살고 있어 증언해 줄 수도 있어요.” "고등학교와 대학은요?” 신은지는 만약 지금 거리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을 스쳐 지나간다 해도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까막눈이라 학교 생활 내내 꼴찌를 했어요. 초등
그 모델은 신은지가 또 거절할 까봐 덧붙여 말했다. "오늘 파티 주최자가 '오늘 가장 많이 새로운 사람을 카톡 친구로 추가하는 사람에게 부모님과 함께 해외여행을 갈 수 있는 여행권을 제공한다'라고 말해서요.” 남자 모델과 육정현은 키가 비슷했다. 육정현은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아래로 보는 태도로 그 남자모델에게 말했다. "뉴스도 안 봐요? 요즘 같은 시대에 회사에서 조직한 해외여행에 참여하겠다는 말이에요? 죽을까 봐 두렵지 않아요? 몸이 토막 날 까봐 무섭지도 않나?” "……” 신은지는 할 말을 잃었다. 남자 모델은 그제야 육정현에게 시선을 돌려 그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훑어보고는 결국 그의 복부를 보며 말했다. "신은지 씨, 이 사람은 딱 봐도 별로예요. 아마 근육도 없을 걸요? 이 남자랑 함께 있으면 기본적인 안정감도 못 받을 거예요. 만약 나쁜 사람을 만나면 신은지 씨가 이 남자를 보호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 모델을 힐끗 흘겨보는 육정현의 시선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보기만 해도 별로라고? 근육이 하나도 없을 거라고?” 남자 모델이 육정현을 도발했다. "아닌가요? 아니면 수영복으로 갈아입어봐요. 누구 몸매가 더 여자를 설레게 하는지 한번 보자고요.” 전문 트레이너와 함께 운동하며 조금씩 근육을 키운 남자 모델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육정현은 비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가 내쳤다. “퍽!” 1미터 80센티미터의 근육질의 남자가 순식간에 파편처럼 날아가 벽에 부딪히며 신음소리를 냈다. 육정현은 그를 경멸하듯 쳐다보았다. “보기에만 좋지 근육이 있어도 별로 쓸모도 없네.” "……” 신은지는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었다. 이 남자는 정말 독하고 뒤끝이 길다. 육정현이 자리를 뜨자 모델이 한 손으로 벽을 짚으며 힘겹게 바닥에서 일어났다. "신은지 씨, 이건 돈을 더 줘야 해요. 저 남자를 수영복으로 갈아입게 자극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고, 난 맞겠다는 말은 안 했어요.”" 돈을 더 달라고요?" 그 남자 모델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