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에 찍힌 연분홍색 보석을 본 강태민은 입술을 깨물었다.이때,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둘째 어르신, 신은지 씨, 배에 오르시죠."신은지는 단번에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전에 응급실에서 강이연의 병원 수속을 돕던 강태석 비서였다. 강태민이 신은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옛날 일에 어린애들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잖아. 내가 배에 오르면 다른 사람들은 그만 보내.""어르신.......""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잖아요?"바다가 아니면 어떤 일이 닥쳐도 박태준은 신은지를 지켜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경호원들도 이렇게 많이 대동했는데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다로 나간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바다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집어삼킬 수 있었다. 아무리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자연 앞에선 그저 무기력한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으니까."저희 어르신은 배에 안 계세요. 전 그분의 지시에 따라 여러분을 모시러 온 것뿐이에요. 그러니 신은지 씨도 같이 오르셔야 해요."강태석 비서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우려하시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거예요. 그저 대화를 나누기 위한 자리일 뿐이에요. 다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저희 어르신께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세요."여기에 이 헛소리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태민이 입을 열었다. "안 돼.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어."비서가 들고 있던 가방에서 정장 재킷을 꺼내며 물었다. "이 옷, 눈에 익지 않으세요?"남들 보기엔 그저 좀 많이 낡고 더러운 정장 재킷일 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강태민 눈엔 다르게 보였다. 정장 재킷의 소매를 본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옷이 왜 여기에...."옷소매엔 심은하의 영문 이름과 기러기가 비상하는 수필화가 수놓아 있었다. 강태민은 단번에 이 옷이 전에 심은하가 그에게 선물해 준 것임을 알아차렸다. 저 옷소매에 수놓은 사람이 심은하였기 때문이다.
이 배에는 배를 운전하는 사람과 한눈에 보아도 싸움에 소질이 없어 보이는 비서까지 15명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해결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그렇게까지 나를 경계할 필요는 없어요.”강태석의 목소리가 출입구에서 들려왔다.몇몇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양복을 입은 비서가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고 평범한 옷차림의 그는 별로 위협적이진 않았다.“난 살고 싶어서 여러분을 부른 것이고 조건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니, 피비린내를 맡은 짐승처럼 달려들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그는 자리에 앉았다.“비록 내 손이 피로 얼룩졌었지만, 목숨까지 빼앗은 적은 없고 백화점에서 일부 잘못된 행동을 했지만 법을 어긴 적은 없으니 떳떳하...”그의 느슨했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지며 화제를 바꿨다.“내가 형에서 챙기라고 했던 그림은 어디 있어?”박태준이 눈살을 찌푸렸다.“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죠?”배에 타기 전에 강태민의 부하들이 배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얼굴 인식을 했는데 지금 갑자기 그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두더지가 존재하거나 배에 은신처가 있다는 것이어서 15명이 넘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이 정도 스케이일의 배라면 한 사람 정도는 쉽게 숨길 수 있지 않겠어요?”그는 짜증스럽게 말했다.“그림은?”그는 조급해 보였다.강태민: “비서가 한 말은 뭐야? 그녀가 스스로 그것을 쫓았다는 것은 무슨 뜻이야? 대답할 때까지 그림은 줄 수 없어.”“내가 말한다고 해서 그림을 줄지 안 줄지 내가 어떻게 알아?”그는 강태민을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그림이 없어서 두려운 건 아니야?”그 그림은 그가 한미나더러 심은하에게 가서 복구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 여자는 고집불통이어서 어떻게 설득을 해도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이 돌파구여서 약간의 기교에 거액의 보상을 내걸자 순순히 받아들였다.심은하가 죽고 그는 그 그림을 찾으려고 사람을 보냈지만 심 씨 별장을 샅샅이 뒤졌어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생각을 하면 할수록 강태석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
신은하는 그림에 어떤 비밀이 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어머니가 그림을 맡기로 했는데 왜 죽이려고 한 거야!”“형 때문이잖아. 형은 승승작구했고 어딜 가나 멋쟁이였어. 모든 것을 하찮게 대했던 형은 오로지 네 엄마에게만 약한 모습이었으니 최대의 약점이 될 수밖에 없었지.”뒤 말은 강태민이 이었다.“그때 아버지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나에게 조금씩 권력을 물려주고 있었고 강씨 가문 내의 전쟁도 표면화 될 정도로 드러나 있는 상태였어.”서로가 탐탁치 않아 했었다.“만약 그때 가문을 떠났다면 다시 돌아왔을 때 내 자리는 없었을 거야. 하지만 난... 그녀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을 몰랐어.”“그건 아버지가 이 일을 묻어뒀기 때문이었어.”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가 갈렸다.“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너로 나를 경고했어. 심장이 뒤틀리는 느낌이었지.”강태민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도 아버지가 손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그때 배 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뿌우-’ 하는 소리는 마치 신호인 거 같았다.강태석은 여러 사람이 여전히 감정에 휩싸여 있는 틈을 타 재빨리 움직여 그림을 들고 도망가려 했다.너무 갑작스러운 그의 움직임과 그를 엄호하고 있는 손길에 육지한 그의 옷자락만 살짝 만졌다.거기로 가려면 먼저 1층으로 가서 작은 배를 타야 했다.그것이 제일 빠른 방법이긴 했지만 여기 상황에서는 안전하지 않았다.그래서 거리가 멀어졌고 위험이 더 커졌다.막 계단에 도착한 그는 강태민과 맞닥뜨렸다.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같은 교육을 받았으며 자기방어 기술도 코치가 가르켜주었다. 강태석은 그림을 보호하며 다른 한쪽으로 싸워야 해서 조금 힘에 부쳐 보였다.“아버지가 형만 편애하며 회사까지 물려주었는데 이 그림 속에 숨긴 금도 형에게 주려 했어. 도대체 왜!”강태민은 멈칫했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강태석이 냉소를 지었다.“아버지는 이 그림에 10톤의 황금을 숨겼다고 내 두 귀로 들었으니 모른 척 하지 마.”그의 능력이면
반응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강력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좀 전에 신은지를 죽이려 했던 강이연도 놀라 멍하니 자리에 굳어버렸다.“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아빠, 아직 배 안에 있는데.”강이연은 기본적으로 강태석을 향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호화스러운 삶이 그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제멋대로 굴며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뒤에 강태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없어진다면, 다른 이들이 그녀의 편의를 봐줄 이유가 없었다. 과거 강이연의 행동 때문에 틀어진 관계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강이연은 어떤 복수를 당하게 될지 두려웠다.불길 속에 연달아 폭발음이 들렸다. 주변은 온통 검은 연기와 떨어진 파편들로 아비규환이었다. 문제 해결 능력이 없었던 강이연은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유일하게 생각해 낼 수 있는 비책은 강태민에게 의지하는 것뿐이었다."둘째 큰아버지, 제발 아빠 좀 구해주세요. 저희 아빠 아직 배 안에 있단 말이에요."강태민은 마침 무전기를 통해 구조요청을 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보트가 흔들려 균형잡기도 힘든데 옆에서 매달리자, 휘청하고 몸이 꺾였다. 옆에 있던 육지한이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바다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육지한은 강태민을 잡아주는 동시에 강이연을 바다 쪽으로 밀쳐버렸다."다음에도 위험하게 행동하시면, 진짜 영원히 바다에 묻어버리는 수가 있어요."육지한은 쓸데없는 연민 때문에 약해지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강이연은 두려움에 차마 대꾸도 못하고, 울먹이며 바닷속에 얌전히 자리했다. "둘째 큰아버지, 꼭 아빠 구해주셔야 해요...."이때, 날카로운 칼이 강이연의 목에 위협적으로 빛났다. 이어서 신은지가 살기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안에 연락 넣어서 박태준 데리고 나오라고 해. 원한다면 비밀유지 계약서도 쓰고, 우리 엄마 죽게 만든 것도 넘어가 줄게. 그러니 당장 박태준 살려내.""신은지 씨...
강태석 본인이 없는 마당에 클라우드 계정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한 그의 말이 진실일지 아닐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강태민은 기대 어린 눈빛을 보내는 신은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알겠어요. 얼른 찾아보라고 할게요."그로부터 40분, 겨우 화재가 진압되었다. 신은지는 두 배를 연결하는 널빤지가 생긴 것을 보고, 곧바로 움직였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전혀 자각이 없어 보였다. 맨몸으로 널빤지를 걷다가 떨어질 수도 있었고, 불길에 달궈진 바다에 빠질 수도 있는데, 전혀 개의치 않았다.강태민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아직 배에 열기가 남아 있어요. 좀 더 기다려야 해요."신은지가 말없이 고개를 돌려 그가 잡고 있는 손을 빤히 쳐다봤다. 명백한 거절 의사였다.강태민은 어쩔 수 없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그럼 육지한이랑 같이 가요."널빤지는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고, 신은지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은 채 기어서 건너편으로 넘어갔다.이제 막 불길이 잡힌 배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갑판 위로 첫발을 내디딘 신은지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신은지 씨...."육지한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하지만 신은지의 손은 이미 뜨거운 쇠 바닥에 닿은 뒤였다. 순식간에 손에서 기포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처음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배는 처참하게 타버렸다. 차가운 바닷물과 달궈진 쇳덩이가 만나 뜨거운 증기를 뿜어댔고, 각종 자재가 재가 되어 코를 찌르는 악취를 풍겼다. 요란했던 밤이 지나, 어느덧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바닷물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히 반짝거렸다.신은지는 가장 먼저 선실이 있었던 곳으로 향했다. 거의 뼈대만 남은 선실 가장 안쪽, 새까맣게 타버린 시체 한 구가 누워 있었다. 여러 잔해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상체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하체만으로도 충분히 남자의 것임을 추측할 수 있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차 주변을 기웃거리는 것을 본 강태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먹어요. 전 밖에 좀 보고 올게요."박태민은 가기 전, 경호원에게 신은지를 잘 보필하라는 눈짓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이때, 밖에서 다른 경호원이 그를 찾아왔다."어르신, 저희도 지금 연락받았는데, 차 안에 마약이 있다는 제보가 있었대요."강태석의 집을 수색할 때 박태준이 썼던 방법인데, 그가 당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경찰이 수색영장을 보여주며 말했다."차 안에 마약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조사해야 하니,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경찰 배지를 확인한 강태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세요."차에서 마약이 발견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마음 준비는 했지만, 진짜 발견되자 강태민도 놀랐다.차에서 꺼낸 마약 봉지를 살짝 터트려 냄새를 맡던 경찰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이건 누구 거죠?"강태민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저도 바다 나갔다가, 지금 막 육지에 올라왔어요. 자세한 건 CCTV돌려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그가 순순히 협조하자, 경찰의 태도도 조금 유해졌다."이게 선생님 차에서 나온 이상, 예외는 없어요. 경찰서까지 동행하셔야겠습니다."밖을 쳐다보니, 강태민을 포함한 그의 사람 모두가 수갑을 차고 있었다. 신은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경호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지금 가시면 한통속으로 몰릴 텐데, 안 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어르신까지 잡혀들어가게 생겼는데, 무슨 일이라도 난다면...."그들이 육지에 올라오기 전부터 계획된 일 같았다."알겠어요."신은지는 강태민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대신, 창문에 기웃거리고 있던 식당 주인에게 다가갔다.그녀를 발견한 식당 주인이 놀라 신은지와 강태민을 번갈라 봤다."어, 저쪽이랑..."식당 주인이 차마 공범이라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신은지는 전혀 당황하지 않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아니에요.
거의 프러포즈 현장처럼 꾸며진 화려한 장식을 보며 진유라는 감탄했다. 세상 오만하고 차갑던 박태준이 이렇게 변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진유라는 독신주의자였으나,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있자니, 괜히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그런데 이때, 앞서 걸어가던 신은지가 옆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유라는 다급히 몸을 날렸다. 하지만 힘이 완전히 풀린 사람을 받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는 신은지를 잡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결국 함께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쿵.팔에서 강력한 고통이 느껴졌다. 진유라는 참지 못하고 크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곳엔 지금 둘뿐이었다. 박태준이 경호원들을 모두 데리고 떠난 탓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진유라가 응급처치를 해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도 고통스러울 텐데, 진유라는 신은지의 상태부터 살폈다. 다행히 신은지는 과도한 피로와 갑작스러운 감정 기복에 잠시 실신한 것으로 보였다.그렇지만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한 명은 실신, 한 명은 팔 부상, 구급차라도 불러야 했다. 그녀가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곽동건이 느닷없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진유라는 의아했다. 곽동건은 평소에 영상통화보단 직접 전화하거나 문자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의 사이가 영상 통화할 만큼 친하지 않았다. 그래도 걸려 왔으니, 일단 받아보기로 했다. 진유라는 현재 팔 한쪽이 깔린 채 바닥에 누워있는 자세였다. 부상도 있었고, 핸드폰을 드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결국 진유라는 초밀접 샷으로 곽동건과 통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라도 못생기게 나올 수밖에 없는 최악의 각도였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보이는 콧구멍에 곽동건은 당황했다."어쩐 일이세요?"팔이 아픈 데다가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전화까지 받으려고 하니, 태도가 좋지 않았다."핸드폰 좀 멀리 떨어뜨리면 안 돼요?"진유라의 눈빛이 짜게 식었다. 하지만 본인
눈을 떠보니, 하얀 천장과 함께 진한 소독 냄새가 맡아졌다. 그래도 정신은 맑았다. 잠을 잔 게 효과를 본 것이다. 어느새 그녀를 괴롭히던 두통도 없어졌다.신은지는 진유라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우선 머리를 정돈하고 침대 밖으로 나왔다.그녀의 손엔 붕대가 감겨 있었고 몸도 깨끗한 향기가 났다. 의식을 잃은 사이 진유라가 대신 씻겨준 것 같았다. 신은지는 화장실을 다녀온 뒤, 핸드폰을 들고 진유라를 찾아 밖으로 향했다.하지만 이때, 쾅 하고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여파로 창문 커튼이 펄럭거리며 음영을 만들어냈다.곧이어 한 사람이 씩씩거리며 신은지의 손을 거칠게 잡아챘다."신은지, 태준 씨 어디 있어? 설마 진짜 실종이야?"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전예은이었다.날카로운 손톱 때문에 신은지의 손등이 깊게 파였다."이거 놔."하지만 전예은은 힘을 풀기는커녕, 더 세게 손을 잡았다."내가 지금 묻잖아. 태준 씨 진짜 실종됐냐고?""아니, 그런 일 없는데."박태준은 한 회사의 대표였다. 대표가 실종된 회사라니, 주식이 곤두박질칠 게 뻔했다. 신은지는 최대한 이 사실을 숨겨야 했다."거짓말. 이틀이 지났어. 밖에 어떤 소문이 났는지 알아? 박태준 씨가 실종된 것도 모자라, 죽었을지도 모른대...."신은지는 뒤에 말 따위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한 단어밖에 없었다."이틀이 지났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전예은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얼굴 두꺼운 것도 정도가 있지, 지금 그게 할 말이야? 난 너 같은 년이 제일 싫어. 아주 역겨워."신은지는 상처 나는 것 따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전예은이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며 병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박태준이 실종된 게 이틀 전이었다니,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전예은은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뒤따라왔다."가긴 어딜 가. 가서 시체라도 수습해 주려고?"초라하기 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