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은 보통 기업인이 아니었다. 그는 재벌 중의 재벌,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는 같은 업계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계와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엄청난 이슈가 될 것은 뻔했다.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신은지의 머리속에 과거 자신이 인스타그램에서 했던 발언이 떠올랐다. 이 시점에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된다? 그녀에게 이건 재앙이었다. 커리어가 끝장나는 소리였다.그녀는 재빨리 박태준에게 차 좀 멀리 세우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한참,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돌아오지 않자, 신은지는 불안감이 점점 고조되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다른 데로 쏠린 틈을 타 얼른 밖으로 빠져나왔다.식당을 나오자마자, 신은지는 곧바로 박태준의 차 쪽으로 향했다. 동시에 박태준도 후방 미러를 통해 그녀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가 창문을 내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직전, 신은지가 그 옆을 막아섰다. “얼른 창문 다시 올려.”“….”박태준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그녀가 원하는 대로 다시 창문을 올렸다.“회식은 끝났어?”“아직, 한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아.”신은지가 좀 전에 관장이 술을 더 시켰던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여기서 어슬렁거리지 좀 마. 다른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그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입술이 오므려졌다. 박태준은 이 상황이 매우 불합리하게 느껴졌지만, 화를 표출하고 싶지는 않아 일단 참았다.“우리가 불륜이야? 왜 숨겨야 해? 연인 사이끼리 데리러 오고 하는 거지.”“오늘 식사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누군지 알아? 다 내 선배들이야. 모두 이 바닥에서 한 이름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런 사람들조차 이런 고급 외제 차 못 타고 다녀. 그런데 막내인 내가 아이바흐를 탄다? 어떻게 생각하겠어?”그녀는 이 분야에서 남들보다 경력도 나이도 어린 편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왕관 복원 같은 굵직한 프로젝트에 얼굴을 내비치자, 동족 업계 사람들한테 불
가만히 있던 신은지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신은지는 애써 분위기를 풀어 보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에이,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신은지는 긴장과 함께 술기운이 올라오자, 점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촌스럽게 보였을 수도 있는 특징이었다. 하지만 예쁜 미모를 가진 신은지한텐 오히려 장점으로 다가왔다. 처음엔 박태준의 와이프와 닮지 않았냐는 얘기에 쏠렸던 시선이, 다른 의미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박태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더 늦기 전에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여러분, 식사 맛있게 하세요. 제 와이프가 좀 많이 취해서,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박태준은 망설임 없이 신은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오늘 저희 때문에 괜히 분위기가 흐트러진 것 같네요. 계산은 제가 하고 갈게요. 마음껏 드세요.”신은지를 품에 안은 박태준이, 문득 떠오른 듯 말했다.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다시 회복되었다.계산을 마친 박태준은 신은지를 차 조수석에 태웠다. 그런 다음, 안전벨트를 메주기 위해 몸을 숙였는데 마침 눈을 뜬 신은지와 마주 보게 되었다. 그녀는 아직 술이 덜 깼는지, 눈빛이 살짝 초점이 없어 굉장히 멍해 보였다. 무방비한 모습에 박태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은지야….”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박태준의 고개가 점점 신은지와 가까워졌다. 촉촉한 입술이 몇 번이고 맞닿았다.비좁은 공간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술 냄새와 함께 두 사람의 호흡이 섞여 들어갔다.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였다면 당황했을 신은지가 적극적으로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박태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끼며 더 마음껏 키스를 쏟아부었다. 거의 이성을 놓은 듯, 여유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신은지는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호흡을 멈춘 채 그의 뜨거운 키스를 받아냈다. 그렇게 한참, 멍
상처에 아픔이 느껴졌지만, 박태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키스에만 열중하던 그의 입술이 점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처음엔 그녀의 볼이었다. 다정하게 볼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맞추는 것으로, 서서히 턱, 목덜미를 지나 마지막에는 쇄골까지 내려갔다.“읏….”신은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달뜬 신음을 흘렸다.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며,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그의 움직임이 지속될수록 그녀는 서서히 이성을 잃어갔다. 신은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젖히며 허리를 휘었다. 둘 사이의 거리가 더 좁혀지며, 박태준은 더 편하게 그녀를 탐해갔다. 그는 자세를 바꾸어, 이제는 위가 아닌 신은지의 옆으로 자리를 잡았다. 박태준은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또 한 손으론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녀를 자기 복부 위로 올라타게 했다. 신은지의 허리는 그의 두 손만으로 다 감싸질 정도로 가늘었다. 하지만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았던 신은지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박태준의 가슴 위로 쓰러진 채 숨을 들썩였다. 그녀는 상의가 짧고 바지 허리가 높은, 하이웨스트 룩을 입고 있었다. 그 탓에 이렇게 엎드려 있으면 상의가 위로 말려 올라가, 허리의 맨살이 노출되곤 했다. 신은지가 옷을 입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박태준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리면 당연히 맨살이 아닌 옷의 촉감이 느껴질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의 손에 닿은 건 부드럽고도 따듯한 신은지의 맨살이었다. 박태준은 알 수 없는 고통에 휩싸였다. 그는 이 고통이 상처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가지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가 지금 미치도록 신은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충동이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박태준은 당장이라도 신은지와 한 몸이 되고 싶었다. 그녀의 구석구석, 하나도 남긴 없이 탐하고 또 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참고 또 참았다.여자는 남자와 달리, 본능적인 것보단 감성적인
그의 집에 이렇게 당당히 경호원들의 제재를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가족 아니면 친구밖에 없었다. 박태준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급히 팔에 얼굴을 비벼 시야를 가리고 있던 넥타이를 벗었다. 그런 다음 가장 먼저 신은지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그녀는 비교적 멀쩡한 상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박태준, 자신이었다. 풀어 젖혀져 있는 셔츠와 결박되어 있는 손과 발, 아주 가관이었다. 박태준은 점점 불안해졌다. 그는 한쪽으로 수갑을 풀며 한쪽으로 계속 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던 탓에 발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계속 울어대는 핸드폰까지, 그가 파악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수갑을 푸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그제야 박태준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수갑은 진짜였던 것이다. ‘저번엔 잘 끊어지더니, 오늘은 왜 이러는 거야!’박태준은 자신이 진선호에게 또 속았음을 깨달았다.“망할 진선호!”박태준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문 쪽에서 고연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울리던 핸드폰 벨소리가 뚝 하고 멈췄다.“핸드폰이 왜 여기에….”박태준은 긴장에 몸이 뻣뻣이 굳어버렸다. “들어오지 마…!”다급히 외쳤지만,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펼쳐지고 말았다. 결국 고연우에게 이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박태준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예의 밥 말아 먹었어? 들어오기 전에 노크할 줄 몰라?”고연우가 어색하게 말했다.“미안, 둘이 벌써 진도가 여기까지 나갔을 줄은 몰랐네.”그는 둘이 다시 만나고 있는 줄도 몰랐고, 함께 잘 정도로 관계가 발전했을 줄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 ‘누구는 아직 서재에서 독방 신세인데 말이야…. 부럽다, 부러워.’그는 속으로 자기 신세를 한탄했다. 같은 여자라도 성향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다는 걸 고연우는 오늘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 근시야. 어두워서 실루엣밖에 못 봤어. 하지만 아무리 너의 집이라도, 문은 닫고 하는
그림 속 여자는 갸름한 턱선에 얇은 눈썹, 입꼬리가 올라간 웃상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 속에 담긴 강력한 야망이 인상을 어둡게 만들었다. 신은지가 그려낸 초상화는 작은 반점까지 보일 정도로 매우 생동감이 넘쳤다. 강태민이 미간을 찌푸린 채, 유심히 그림 속 여자를 바라봤다.“이건 젊었을 적 모습이지만, 오관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 나이 오십 좀 넘었으니까, 여기서 주름만 좀 더 늘었다고 보면 돼요.”신은지는 남포시에서 스치듯 한미나의 옆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면은 아니었기에,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두려워 젊었을 적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초상화를 받아들인 강태민이 말했다.“딱히 인상이 없네요.”아직 조사가 덜 된 상태였기 때문에, 강태민은 당장 답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한테 그림 복원을 의뢰했던 사람도 이 사람이고, 절 만나겠다고 했던 사람도 이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신은지가 남포시에 있을 때 알아본 바를 강태민에게 말했다.“전에 그 두 남자가 절 찾으러 왔을 때도 이 여자 이름을 댔었어요.”“그래서 따라 차에 탔던 거예요?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막 따라가다니, 목숨이 몇 개라도 되는 줄 아세요? 만약….”강태민이 잠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앞으론 그러지 마세요. 아무리 복수가 중요하다고 해도, 자기 목숨보단 더 값질 순 없어요.”“좀 전에 하시려던 말씀, 뭐였어요?”신은지는 그가 머뭇거렸던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강태민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에 이질적인 장면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것도 적혀 있지 않은 공백의 비석이었다. 신은지도 강태민을 따라 그 묘비를 살펴보았다.“뭔가 신분을 밝히기에 떳떳하지 못했던 걸까요?”신은지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보가 적혀 있어야 할 자리가 공백이라는 것 빼고는 특별할 게 없는 비석이었다. 하지만 신은지는 왠지 모를 호기심이 생겨 더 가까이에 비석을 들여다보았다. “음? 비석에 뭔가 붙어 있어요.”“붙어 있다고요?
가족란에 등록된 이름은 류정, 관계는 여동생, 전화번호는 010….결정적인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은지는 관리소를 나오기 전, 잊지 않고 서류를 사진으로 남겼다. 류정과 한미나가 동인인물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올해 6월 6일, 이 사람이 다시 방문할 때나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전까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신은지가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본 강태민이 옆에서 말했다.“이 부분은 사람 시켜 좀 더 알아보도록 할게요. 아직 배후가 명확해지기 전까진 최대한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신은지도 그의 말에 동의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알겠어요. 그럼 잘 좀 부탁드려요.”신은지와 헤어진 강태민은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강태석을 만나러 갔다. 강태석의 집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별장으로, 지난 2년 사이에 새로 개발된 주택 단지였다. 다만 위치가 외진 탓에 입주율이 별로 높지 않아 조용했다. 육지한은 부드럽게 차를 세운 뒤, 경비실을 향해 걸어갔다.“어르신, 집에 계시죠?”경비원들은 단번에 육지한과 그의 옆에 함께 온 강태민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강태민은 강씨 가문의 진짜 실세라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경비원들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계세요.”육지한이 강태민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태민은 망설임 없이 운전석에 탑승해 별장 안쪽으로 차를 몰고 갔다. 그 모습을 본 경비원 한 명이 재빨리 무전기를 들었다. 별장 내부 인원에게 보고를 넣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때, 육지한이 그의 팔을 부여잡았다.“어르신이 누군지 몰라요? 형이 동생을 좀 만나겠다는데, 그쪽이 중간에서 왜 끼어들어요?”육지한이 무전기를 빼앗으며 말했다.“저희도 당연히 이러고 싶지 않죠. 하지만 위에서 명령이 떨어진 이상, 아래 사람은 따를 수밖에 없어요. 저한테 딸린 식솔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좀 너그러이 넘어가 주세요.”경비원이 울상을 지으며
신은지는 가는 길 내내 계속 그 무덤에 대해 생각했다. 단순히 이름이 같은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엄마의 무덤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누가 그것을 세웠을까? 무슨 목적으로?빨간 신호등이 켜졌다. 신은지는 차를 멈추고 다시 한번 서류를 쳐다보았다. “류정….”그런데 이때 갑자기 박태준한테서 연락이 왔다.“응.”“어디야?”박태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거야 당연히….”신은지가 막 답을 하려던 찰나, 전화 너머 진유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지야, 너 들켰어. 이 나쁜 놈이….”진유라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췄다. 박태준이 맞은 편에서 테이블 위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테이블 위엔 온갖 케이크와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진유라는 울상을 지으며 다시 말을 고쳤다. 뇌물을 받아먹은 대가였다.“박태준 씨한테 속았어.”진유라는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지금 어딘데?”신은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위치 보내줄게.”신은지에게 위치를 보내 준 다음, 진유라는 다시 박태준을 노려보았다. “뭔가 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함부로 거짓말할 얘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히 애 잡지 마시고….”정말 예정에 없었던 일이었다. 진유라는 그저 친구 면접에 따라왔을 뿐이었다. 하필이면 신은지가 그녀의 이름을 대고 거짓말했을 줄은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알았더라면 미리 대비라도 했을 텐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협조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역시 사업가는 입이 청상유수라고, 함부로 믿는 것이 아니었다.“가보세요.”박태준이 차갑게 말했다.“….”진유라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비록 그녀도 여기에 남아 병풍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자기 발로 가는 것과 쫓겨나는 것은 달랐다.“화장실 들어갈 때 얼굴이 다르고, 나갈 때 얼굴이 다르다고…. 아까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같이 차 마시자고 하더니,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자리에서 일어난 진유라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바라봤다.“연기자 하셔도 되겠어요. 얼굴 바꾸는 실력이 아
신은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6월 13일이 무슨 날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단오절? 그건 좀 더 빨랐나?”박태준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우리 혼인 신고한 날이잖아.”그러자 신은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우리 이혼한 거 아니었어?”막상 말을 내뱉고 나니, 신은지도 아차 한 기분이 들었다. 이혼한 것도 맞지만, 최근에 다시 합친 것도 맞기 때문이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딱히 비꼬는 말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부부의 연을 맺고 3년, 그동안 박태준은 한 번도 결혼기념일을 챙긴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혼인신고 날짜도 기억 못할 줄 알았다.“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박태준이 삐진 듯, 심통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왜 전엔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어?”결혼한 상대를 마음에 두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신은지는 이해되지 않았다. 3년 내내 데이트는 물론이고 단둘이서 식사한 적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매년 사람 시켜서 선물 보내 줬잖아.”신은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언제?”신은지는 과거를 떠올려 보았다. 박태준은 그녀를 항상 차갑게 대했지만, 물질적인 부분에서는 아낌없이 지원해 줬었다. 그 덕분에 결혼생활 내내 그녀는 부족함이 없이 생활했었다. 계절마다 매장에서 새 시즌을 준비하듯, 새로운 옷들이 드레스룸을 채웠었다. 그러다 문득, 유독 6월에만 드레스룸이 두 번 바뀌었던 것이 떠올랐다. 당시 이 부분이 의아하긴 했으나, 딱히 전달받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지나갔었다. 거기에 선물이 포함되어 있었을 줄이야,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막상 넌 리액션도 없고, 선물은 포장지도 뜯지 않은 채 드레스룸에 방치되었다고 하지,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그녀의 입장에선 억울했다. 옷이 한두 벌도 아니고, 매번 바뀌는데 어떻게 다 확인한단 말인가?“말없이 보내면 내가 어떻게 알아? 최소한 쪽지라도 보냈어야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대신 말 전달해도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