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의 목소리에 금방 일어났을 때의 나른함이 담겨있었다.신은지는 그 목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고 방안의 익숙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몸을 일으킨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바라봤지만 옷은 어제와 똑같았다. 그저 하룻밤 잔 덕분에 조금 쭈글쭈글할 뿐이었다."내가 왜…"중얼거리던 신은지는 어젯밤 소파에서 잠들었던 것이 생각났다."몇 시야? 왜 안 불렀어?"신은지가 이불을 치워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깨웠던 거야?"신은지가 잠시 멈칫하더니 의심 서린 눈길로 박태준을 바라봤다.곧이어 박태준도 일어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이 공기에 드러났다. 섹시하고 선명한 근육이 자리 잡은 몸이었다."내가 너 소파에서 침대까지 안고 왔는데도 너 안 깼잖아, 그런데 어떻게 깨울 수 있었겠어?"박태준이 말을 하다 탁자 위에 있던 시계를 힐끗 봤다."여덟 시네."밍기적거리다간 지각할 수도 있었기에 신은지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다급하게 드레스 룸으로 가 옷을 바꿔 입고 나왔다. 그 사이, 박태준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박물관 쪽에는 내가 대신 휴가 냈어."그 말을 들은 신은지가 휴대폰을 꺼내 통화기록을 확인해 보니 아침 6시에 관장님에게 전화를 건 기록이 있었다."누가 네 마음대로 나 대신 휴가 내라고 했어?"아침 6시에 남자가 신은지의 휴대폰으로 대신 휴가를 냈으니 다른 이들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까? 신은지의 체면을 어디에 두라는 건지."아침 차려줄 테니까 씻고 천천히 내려와, 이따 손님 오시기로 했어."이혼한 마당에 손님이 오든 말든 신은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신은지는 박태준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씩씩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다시 나왔을 때, 박태준은 이미 방 안에 없었다."박, 박 대표님, 무슨 일로 저 부르셨어요?"신은지가 방에서 나왔을 때, 아래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앉아요."박태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하지만 상대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신은지는 그가 앉았는
“출국한 적도 있어?”신은지는 이 사실을 정말 몰랐다. 결혼 전에 그녀는 박태준과 친하지 않아서 1년쯤 만나지 못하더라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남자는 젓가락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차갑게 대답했다.“응.”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어 보였지만 신은지는 이 외마디 대답에서 왠지 화가 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찔리는 듯 고개를 숙이고 찐만두를 입에 쑤셔 넣었다.어쨌든 대량 생산된 냉동식품이라 기대를 안 했는데, 입에 넣자마자 육즙이 넘치고 맛이 신선해 평소에 먹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포시즌호텔에서 어제 보내온 거야.”“...”‘어쩐지 다르더라니. 자본가의 사치는 아침 식사부터 시작되는구나.’그녀는 연거푸 두 개를 먹은 후에야 나지막이 말했다.“그때 우리는 서로 잘 몰랐어. 그러니까 네가 출국했던 것을 모르는 것도 정상이야. 너도 내 일을 모르잖아?”말을 하면 할수록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 신은지는 배짱도 생겨 고개를 들고 칭찬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박태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 아마 득의양양하게 흔들었을 것이다.남자는 빙그레 웃었다.이 순간 그들이 막 결혼한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반짝이고 있다. 비웃거나 가시 돋친 말, 무관심과 거부 등 부정적인 감정이 전혀 없었다.박태준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 견디기 힘들었고, 마음이 호수에 잠긴 듯 답답하고 눅눅했다.그는 손을 들어 신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학 시절에 있었던 몇 가지 일을 얘기했다. 모두가 다 아는 일이라면 모르겠는데, 하필이면 아주 일상적이지만 전혀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닌 그런 일들이었다.신은지는 의아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건... 누가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일을 이렇게 잘 알겠는가?그녀는 아침을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향긋하고 육즙이 넘치는 찐만두도 맛이 없어졌다.“너 혹시 변태야? 사람을 보내 나를 조사했어?”박태준은 웃고 있던 얼굴이 굳어지더니 바보가 아니냐는 듯 코웃음을 쳤다.분노
전화를 건 이는 강이연이었다, 저장한 이름은 제법 친근했다.박태준은 이연이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눈을 가늘게 떴다.신은지는 그 뜨거운 눈빛을 못 이겨 박태준을 피해 전화를 받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가 그녀를 잡았다. 박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뜻은 분명했다. 그는 신은지에게 여기에서 전화를 받으라고 말하고 있었다."여보세요."신은지가 전화를 받자 강이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전혀 연기 같지 않았다."은지야, 너 어제 박물관에서 무슨 일 있었다며. 조태오 그 사람 병 있는 거 아니야? 왜 그렇게 미친개처럼 너를 물고 늘어지는 거야? 네가 물건을 고치다가 망가뜨렸다고 해도 일단 너랑 얘기해 봤어야 하는 거잖아."신은지는 원래 낯선 이와 늦게 친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리 강이연에 대해 조사해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자신을 위해 분노하고 불만을 늘어놓는 강이연을 보며 그녀는 경계심을 내려놨을 것이다.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가장 약한 법이었다. 다른 이의 관심과 보호에 의지하고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경향이 있었다.강이연은 여전히 신은지를 대신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신은지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그 문물이 그렇게 된 거 내 손 타서 아니야, 어제 박물관에서 이미 다 밝혀졌어."담담한 신은지의 목소리에 휴대폰 너머 들려오던 목소리가 뚝 하니 멈췄다. 하지만 머지않아 강이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이상함도 없었다."그래, 그럼 그 사람 정말 너무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막 말한 거잖아."말을 멈췄던 강이연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은지야, 관장님한테 너 오늘 휴가 냈다고 들었는데 우리 쇼핑 갈까? 나 경인에서 친구도 없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강이연의 목소리에 기대와 흥분이 담겨 있었다, 정말 오랫동안 집에 갇혀 있다가 드디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아이 같았다.신은지는 아프게 손을 잡아 오는 박태준의 힘을 느끼곤 경고 서린
"아니야, 그냥 손님도 없어서 쓸데없는 생각 좀 해봤어."진유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괜찮아진 것 같았다."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아침부터 얼굴 빨개진 꼴로 여기 온 걸 보니 방금 어느 잘생긴 남자 침대에서 기어 나온 거 아니야?"진유라와 신은지는 평소 이런 농담을 자주 주고받았다. 자신의 말을 들은 신은지가 가자미눈을 뜰 줄 알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진유라를 놀라게 할 그 이름을 내뱉었다."박태준.""너네… 화해했어?"진유라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아니."그 대답은 차라리 화해했다는 것보다 더 놀라웠다."그럼 둘이 뭐 파트너, 그런 사이인 거야? 아니면 원나잇? 원나잇이면 박태준이 조금 아쉽겠는데, 쓰레기이긴 하지만 얼굴이랑 몸매는 흔치 않잖아. 웬만한 연예인도 얼굴로는 박태준한테 질 걸, 기술이 좋은 거면 몇 번 더 만나봐. 정이고 사랑이고 다 몸의 쾌락을 위한 거 아니겠니? 많이 자고 나면 익숙해져서 아무 충동도 없을 거야. 그때 되면 우울하지도 않을걸, 돈만 잘 주면 일주일에 7일이 아니라 매일 하자고 해도 되잖아. 너만 귀찮게 안 하면 되는 거지."신은지는 진유라가 자신이 또 박태준에게 빠져들어 지옥 같은 생활을 할까 봐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을 위로하는 건 또 처음 들어봤다."원나잇도 아니고 파트너도 아니야, 그냥 같이 잔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신은지는 진유라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아 얼른 그녀의 입을 막았다."그래, 그럼 박태준이 안 되는 거네."진유라의 목소리가 신은지의 손바닥을 뚫고 들려왔다.하지만 그 누가 알까, 개인감정이 가득 담긴 진유라의 비웃음이 정말 사실이라는 것을."그래도 박태준 성의 있네, 나도 이제 그렇게 싫지는 않아. 역시 여자는 마음이 약한 게 문제야, 아니면 진작에 세계를 지배했을 텐데. 그럼 남자들 다 필요 없지."진유라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 앞에서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세계를
그 말은 경고 와도 같았다.강이연은 말을 마치자마자 실수했다는 듯 자신의 입을 때렸다."어머, 나 좀 봐. 네 앞에서 이런 얘기하는 거 아닌데, 실버 너 이제 태준 씨랑 이혼했으니까 우리가 같은 사람을 좋아한 건 아니다, 그지?"다른 여자가 박태준의 이름을 이렇게 다정하게 부르는 것을 들은 신은지는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강이연이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말했다."이러고 보면 나랑 태준 씨도 인연인 것 같아, 4년 전에 태준 씨가 우리 학교에서 연수했다는 거 나 이제 알았잖아. 그때도 참 유명했다고 들었는데 아쉽게도 내가 아파서 1년 동안 휴학했거든, 이렇게 만난 줄 알았다면 진작 태준 씨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할걸, 그럼 4년이라는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을 텐데.""박태준 그때 여자친구 있어서 너 그때 걔한테 고백했으면 세컨드라는 소리 들었을 거야."신은지의 말을 들은 강이연이 주먹을 쥐었다.강씨 집안에서 이런 짓을 했다가는 그 악마들에게 물어뜯겨 뼈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결국 강이연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대답했다."지금 이렇게 만난 게 제일 좋지, 4년이라는 시간을 허비했지만 결혼이 목적인 거니까, 우리 두 집안에서 지금 결혼 얘기를 하고 있거든. 아마 연말쯤에 결혼할 것 같아."강이연이 말을 하며 가방에서 초대장을 꺼냈다."며칠 뒤에 우리 집안이 경인시에서 파티를 열 거거든, 경인시 각 계의 유명 인사들이 전부 올 거야. 너 우리 다섯째 오빠 팬이잖아, 너 오면 내가 서프라이즈 준비해줄게."강이연이 신은지를 향해 윙크하며 말했다.강이연의 사촌오빠는 요즘 핫한 루키였다, 신은지는 전에 강이연에게 자신이 강이연 사촌 오빠의 팬이라고 하면서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핑계를 대며 강씨 집안의 일을 많이 물어봤다."경인시에서 파티를 한다고?"이런 파티는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파티를 주최하는 측의 배경을 봐야 했다. 아니면 초대장을 보낸다고 해도 다른 이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강씨 집안이
재경 그룹. 가방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온 강이연은 박태준 사무실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진영웅에게 가로막혔다."강이연 씨, 제가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녀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박 사장님 사무실에 손님이 있어요?” 박태준의 사무실에 올 때마다 그녀는 매번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벽 전체가 투명유리에 사생활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반쯤은 공개된 장소에서 무슨 애틋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까? 진영웅이 말했다. "아니요. 하지만 박 사장님께서는 보통은 여성분들과 따로 만나실 때는 응접실에서 만나세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방금 보통이라고 하셨으면 예외가 있다는 말이네요. 예외가 있다면 왜 저는 예외일 수 없죠? 진 비서님, 저한테 일부러 이러시는 건가요?” "당신이 매번 박 사장님을 보면서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보기 때문이야. "진영웅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말했다. "강이연 씨, 뭔가 오해하신 것 같네요. 예외는 작은 사모님이신 박 사장님 부인이세요.” 강이연은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신은지, 신은지, 어디든 신은지가 있다. 진영웅이 응접실로 안내한 뒤 밖으로 나가자 박태준이 곧 들어왔다. 사업얘기를 마친 강이연은 자신의 뺨을 만지며 물었다. “박 사장님이 신은지를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얼굴 때문이에요?” 박태준과 신은지는 분명히 이미 이혼한 사이지만, 박태준은 매번 신은지를 언급할 때마다 '내 아내'라고 말했고, 그의 부하들도 ‘그의 아내’ 라고 말했다. 박태준은 고개를 들고 강이연의 얼굴을 보았다. 강이연의 눈은 맑고 호기심이 가득 차 있었으며 착하고 순수해 보였다. 얼굴만 봐서는 절대 악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강이연이 말했다. "신은지는 정말 예쁘니까 남자라면 다 좋아하겠죠.” 박태준은 다리를 꼬으며 소파에 등을 기대고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은지가 예뻐서 좋아하는 게 아니예요.” 그는 거짓말하지 않았다. 박태준이 신은지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박태준의 제안이 끝나자마자 신은지는 이를 거절했고, 감정이 격해져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다. 박태준은 따가운 귀를 누르며 몸을 바로 세웠다. “나랑 함께 살게 한 이유는 단지 너를 보호하기 위해서야. 강씨 가문이 비록 경인 시에서 세력이 많이 대단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너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돼.” 그는 신사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같이 한 집을 사용하는 것이지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해? 나도 같은 방을 쓰는 것을 원하지 않아. 너한테 뭘 해주고 싶어도 힘이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박태준은 남자의 자존심과 관련된 이런 일을 이렇게 가볍게 말하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신은지는 그의 용기을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그의 뻔뻔함을 칭찬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아파트에 사는 게 좋아.” “네가 살고 있는 그 아파트만 해도, 신진하가 마음대로 건달들을 사용해서 아파트 입구에서 쉽게 널 납치할 수 있어. 넌 그게 안전하다고 생각해?” “……” “잠깐만 살다가 이 일이 해결되면 언제든지 다시 이사 나가면 돼,” 박태준은 계속해서 무시무시한 얘기들을 퍼부었다.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기 전에 너부터 죽고 싶은 것은 아니지? 아니면 내가 네 복수를 도와서 다 죽여버리게 할 생각이야? 이건 네가 박 사모님이라는 신분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야. 지금 우리처럼......” 박태준은 '알 수 없는 사이'라는 말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신은지가 그 말을 들으면 바로 돌아설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돈을 좀 모아 집을 살 수 있어. 계속 전셋집에 살 수는 없잖아. 나유성은 조만간 결혼할 거고, 너와 그의 관계는 예민한 부면이 있어서 그의 아내가 알게 되면 부부사이에 불화가 생길 수도 있어.”신은지가 박태준의 뜻을 이해했다, 신은지가 나유성의 집으로 이사한 이유는 집을 빠르게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그 후
신은지는 자신이 정말로 그런 것에 욕심을 낼 나이인지 의심했다.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걸핏하면 비뚤어진 생각을 할 수 있을까?신은지는 박태준이 자신의 생각이 그다지 건전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챌까 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럴 필요 없어, 나 자러 갈게.”다급하게 올라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박태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오므리며 마음속에 욕망을 느꼈다.그는 사실 첫날부터 신은지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박태준은 방으로 돌아와 긴 시간 샤워했다.전날 신은지가 잠을 잔 침대 위 베개에는 아직도 그녀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박태준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어젯밤에는 이 시간쯤 이 자세로 얼마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졌지만, 오늘 밤엔 다시 불면증이 시작된 듯 잠이 오지 않았다.어젯밤만 해도 그를 안정시켰던 그 숨결들이 오늘 밤은 그의 마음을 휘저었다. 박태준은 잠이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점점 더 흥분했다.30분 뒤 박태준은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일어나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열고 옆방 문을 두드렸다.아무 반응이 없었다.‘똑똑;노크 소리가 텅 빈 복도에 메아리쳐 묵직하게 울렸다.인내심이 바닥이난 박태준은 문 손잡이를 돌렸다.예상치 못하게 문은 아주 쉽게 열렸다.불을 켤 필요 없이 창밖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통해 방안의 커다란 침대에 침구조차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신은지는 이 방에 없었다.“허.”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차갑게 웃으며 돌아서서 다른 방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마지막 방의 문 손잡이를 돌리자 문이 잠겨 있었다. 굳은 박태준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진 지는 오래였다.그가 문을 두드리자 몇 초 뒤 안에서 신은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왜?”“문 열어.”박태준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말했다. “너한테 볼일이 있어.” “그냥 문 앞에서 말해, 나 이미 침대에 누웠어.” 박태준은 벽에 기대고 앉아 말했다. “정말 이미 침대에 누워 있는 거야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