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리는 어젯밤에 박태준에게 욕을 먹고 나서부터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다. 하룻밤 내내 신은지를 욕하기 바빴다. 아침부터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민낯으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밖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진선호가 서있었다.잠시 멈칫하고 서둘러 얼굴을 가렸다. “선호 오빠, 나 얼굴만 씻고 올게. 잠깐이면 돼.”최유리는 화장을 하러 방으로 몸을 돌렸다. 이때, 진선호가 그녀를 불렀다. “여우..아니, 유리야. 너 얼굴 보려고 온 거 아니야, 할 말 있어서 온 거야.” 박태준 때문에 그만 여우라고 말해버렸다.“오빠, 뭐라고 했어?”최유리는 좋아하는 상대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줄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진선호는 아차차 싶어 정중하게 사과했다. “아, 미안. 말이 헛나왔어.”그의 사과에도 여전히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어서 붉어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얼굴을 돌려서 자신이 제일 마음에 들어 하는 각도로 진선호를 바라보았다.진선호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마치 부대에서 훈련했을 때와 같다.“유리야, 너랑 은비는 절친이잖아. 그래서 너도 내 여동생처럼 생각했던 거야. 알고 지냈을 때부터 그런 쪽으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즘 들어 부모님들이 우리를 억지로 맞추시려고 하는 데, 나는 이미 거절했어. 은비랑 잘 지냈으면 좋겠지만 더 이상 우리 엄마 데리고 은지 괴롭 히는 일은 없었으면 해.”그의 말은 더 이상 신은지를 입에 올리지도 말라는 소리다.“오빠, 그 여자를 왜 그렇게 믿는 거야? 이렇게 다그칠 게 아니라 적어도 나한테 물어는 봐야 하지 않아?”진선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 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나도 안 믿고, 은비 눈썰미도 안 믿는 거야? 내가 진짜 이모님 앞에서 두 사람을 이간질 시켰다고 생각해?”“은지는 나한테 아무 말도 안했어.”진선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난 우리 엄마를 잘 알아. 상대를 싫어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집안에 영향이 갈까
박태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리고 말투에는 부잣집 도련님의 특유의 거만함이 느껴졌다. “아니면 네 차 뒤로 차 두 대가 따라붙었으면 하는 거야?”신은지는 결국 참고 있던 화를 억누르지 못했다.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그를 노려 보았다.“너 뭐 잘못 먹었어? 꼭 데려다줘야 마음이 편하겠어?”그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무조건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달라.”아, 알겠다. 두 사람은 자신을 두고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나 차 가지고 왔다니까, 그러니까...”자신의 모친을 죽인 사람이 무려 군천시의 강 씨 집안사람인데 박태준이 무서울 리가 있을까. 하지만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언제 온 지도 모르는 진영웅에 의해 끊어졌다.“사모님, 제가 사모님 차를 가지고 가겠습니다.”“...”진선호는 옆에서 코웃음을 쳤다.“부하 직원한테 사모님 하라고 백 번 시켜도 이혼 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신은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은지 씨, 저희 얘기 좀 해요.”신은지는 잠시 생각하고는 고개를 저었다.“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진선호 모친이 진선호가 자신 때문에 가족들과 불화가 있었다고 했다. 사실 전부터 조금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이제 서라도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박태준의 차에 올라탔다.“가자.”..차는 박물관 주차장을 나가는 중이다. 신은지는 안전벨트를 매고 백 미러로 계속 뒤를 살폈다.차가 멀어지면서 진선호의 형체가 점점 작아졌다. 박태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핸들을 꽉 잡는 손에 핏줄이 세워졌다.“왜? 아쉬워? 지금이라도 내려 줄게.”아쉬운 건 아니다. 게다가 그녀는 진선호에게 단 한 번도 설렌 적이 없다. 어쩌면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닐 수도 있고,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라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진 씨 집안이 배경도 없고 이미 한 번 결혼 한 여자를 받지 않을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영웅은 박 씨와 작은 사모님과의 데이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박 씨는 최근 강 씨 가문의 일에 대해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 이번 협력도 박 사장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요구 사항을 낮추면서 성사시킨 것이었다.박태준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어디야?""방금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미 운전기사를 보냈는데요...""그럼, 레스토랑 예약한 다음 주소 보내줘."전화를 끊은 박태준은 조금 아쉬운 표정으로 신은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은 밥 먹을 시간 없어. 올라가서 집 좀 볼래? 마음에 안 들면 다음에 다른 거 보여줄게.”신은지가 대답했다. "아니."좋든 싫든 다 박태준의 집이었기 때문에 신은지는 뭐라 말할 처지가 못됐다. "할 일 있는 거 아니야? 난 택시 타고 갈게." 그녀의 한쪽 발은 이미 땅에 닿았으나 박태준이 가까이 서서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신은지는 이유도 모른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비켜서지도 않고 말도 안 하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박태준은 몇 초 동안 침묵을 지켰다가 열린 차문을 닫고 말했다. "내가 데려다줄게." 그는 그녀를 데려다준다더니 진짜로 데려다줬다. 문 앞까지 배웅하고 들어가는 것까지 보면서 말했다. "요즘 좀 바빠서 너 괴롭힐 시간도 없어. 말썽 피우지 말고, 나유성이랑 진선호랑 너무 가깝게 지내지 마. 그리고 그 육지한."그는 경호원이라고 해도 육지한이 항상 신은지를 따라다니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그와 이혼한 후 그녀의 삶은 정말 다채로워졌고, 점점 더 유명해졌고, 남자도 점점 많아졌다.잘생겼던 박태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언제 나를 블랙리스트에서 없애줄 생각이야?"신은지는 턱을 치켜들고 눈을 반짝였다. "아마 연락할 일이 없을 테니 조용히 블랙리스트에 있어."이때 박태준은 어린 시절의 활기 넘치는 어린 소녀를 본 것 같았다. 나유성에게 러브레터를 대신 전해달라 했을 때
"박태준이 최근 한 여자랑 친해져서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다고 들었어." 진유라는 말하면서 신은지에게 집중해 그녀의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하지만 그냥 들은 거여서 구체적인 건 모르겠어.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봐. 이런 건 당사자가 제일 잘 알잖아.” 사실 그녀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박태준과 그 여자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 둘의 행동이 전혀 친밀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지난 이틀간 박태준의 결혼한다는 소식이 세간에 퍼져 이미 알 사람은 다 알았다. 그녀는 신은지가 속을까 봐 두려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는 그녀 외에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 것 같았다.그리고 박태준처럼 조건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남자라면 아무리 그가 쓰레기여도 주변에 여자들이 넘쳐났다. 진유라가 위층을 가리켰다. "그두명 지금 위에 있는 개인실에 있어. 원한다면 같이 가 줄게."신은지는 좀 더 편안한 자세로 바꿨지만 다실의 의자는 모두 단단한 나무 의자였다. 아무리 자세를 바꿔도 여전히 뼈가 아팠다. "나는 왜 갑자기 차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물었어. 박태준 이젠 싱글이니까 맞선을 하든 약혼을 하든 그이의 자유야.” 진유라는 그 말을 듣고 완전히 안심해 그 자리에서 말을 쏟아냈다. "그치. 왜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을 걱정해? 그런 쓰레기는 쓰레기끼리 만나는 것이 젤 좋아. 서로 죽어라 싸우게.” 그녀는 컵에 담긴 차를 단번에 마시고 신은지를 일으켜 세웠다. "밀크티를 마시러 가자. 이 의자 너무 불편해."신은지는 개인실을 나온 뒤 말했다. "화장실 갔다 올게."웨이터에게 물어보니 화장실은 2층에만 있다고 했다.신은지는 말이 없어졌다. "..."진유라가 물었다. "같이 갈까?"신은지는 그녀에게 가방과 코트를 건네주었다. "아니야. 설마 만나겠어. 누가 다방 문 열고 차를 마시겠어.” 수시로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히는 박태준은 사생활에 더욱 신경을 쓰는 편인데, 그와 결혼을 할 상대라면 비슷한 집안과 상황일 것
신은지는 말을 마친 후 테레사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처음 가벼운 눈빛을 제외하고는 박태준을 쳐다보지 않고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신은지가 '네 남자친구'라고 말하자 박태준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지며 어두운 빛이 번쩍였다.그는 일어서서 신은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신은지의 다리는 그의 다리보다 짧았지만 달려갔기에 박태준이 그녀를 쫓아갔을 때 그녀는 없었다.그는 차가운 얼굴로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개인실에는 테레사 혼자 남았다. 티 소믈리에와 웨이터는 오래전 그녀가 내보냈다. 그녀는 방 문을 바라보다가 박태준의 찻잔을 집어 단숨에 마셨다.박태준은 2층에서 1층으로 가는 모퉁이에서 신은지를 가로막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끌어안으며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질투할 때는 분별력이 있어야지. 아무 여자랑 나랑 엮지 마."여기가 찻집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곳곳에서 차 향기가 풍겼다. 냄새를 맡으면 어딘지 모르게 차 냄새가 났다.그녀는 그를 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투닥투닥하다 보니 아래층 웨이터가 이미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신은지가 말했다. "사람들 앞에서 이러지 마. 놔줘.""그럼 가만히 있어. 도망치지 말고,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말고." 박태준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진유라는 이때 화장실에 가 있었다. 신은지는 복도에서 진유라가 안보이자 전화를 걸려고 했다. 번호를 누르자 박태준이 전화기를 가져갔다. "테레사는 영어 이름인데, 한국 이름 알고 싶지 않아?"상대가 교포여서 자신 주변에서 만난 데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신은지는 테레사에게 한국 이름이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걔는...""여기저기에 듣는 귀가 있을 거야. 차에서 말해.""..."이미 남을 배신했는데 여전히 듣는 귀가 있다는 게 걱정돼?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신은지는 여전히 순순히 박태준의 차에 탔다. "걔 강 씨 가문 사람이야?” "강 씨
강아지처럼 박태준이 그녀를 물었다.진짜 물고 있었다. 입술에서 얼얼하고 따끔거리는 느낌이 났다. 격렬하면서도 간질간질하게 키스를 했다. 허리에 얹은 손은 뜨거워졌다.그의 혀 끝이 이따금 그녀의 혀뿌리에 닿아서 신은지는 매우 불편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가슴을 밀었다.그녀가 저항할수록 박태준은 더욱 거세졌다. 심은지는 힘을 줘 혀끝을 깨물어 피가 났다."으윽."남자는 아파서 신음하며 그녀를 놓아주었다.혀끝으로 입술을 스치니 선명한 핏자국이 남았다. 박태준의 잘생긴 얼굴에 핏자국까지 있으니 마치 2차원에서 고귀한 흡혈귀 왕자가 현실로 나온 듯했다. 조금도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박태준은 손가락 끝으로 그의 입술을 닦았다. 연분홍빛 피가 묻은 손가락을 신은지 앞에 내밀어 보였다. "봐봐. 너 내 유혹에 넘어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물기까지 했잖아.” 신은지. "...""그리고 보아하니 나를 엄청 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네."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박태준은 이번에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고, 티슈를 꺼내 입술에 묻은 핏자국을 우아하게 닦아냈다.신은지는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피는 안 나고 있었다. “미인계를 사용하라고 했지 조폭처럼 강제로 키스하라고 한 건 아니야.”박태준이 대답했다. "진영웅이 추천한 청춘 드라마에서는 남자들이 항상 여자를 쫓아다니던데?”"..." 신은지는 그를 노려보며 소매로 입술을 문지르며 비웃었다. "그렇다면 이 방법으로 강이연을 꼬셔보든가. 분명 수줍은 얼굴로 네 양복바지에 드러누울 거야."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차문을 열고 내렸다.박태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더니 은은한 미소가 싹 사라졌다. 정말 무자비한 재수 없는 놈이다. 다른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미인계를 쓰라는 말이나 하다니. 진유라는 다실 문 앞에 서서 화가 나서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신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는 방금 일이 있으니 먼저 가 달라는 심은지의 연락을 받고 나오자마자 신은지가 박태준에게 조수석에 밀려 키스당하는
박태준의 표정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차가웠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주변의 활기찬 분위기를 얼어붙게 했고, 다른 곳과 어울리지 않는 아우라를 뿜어냈다.그 순간, 신은지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강이연에게 말을 하려고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똑똑히 본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얼어붙었고,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며 똑바로 앉았다.하지만 생각해보니 두 사람은 이혼했으니 그녀가 뭘 하든 자기 일이니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편하게 고쳐 앉고 말했다. "이건..."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태준은 그녀를 소파에서 끌어내 데려갔다.이 모든 과정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강이연은 갑자기 박태준을 본 기쁨에서 정신을 차리고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박태준이 정중하게 끼어들었다. "이연 씨. 아내랑 할 얘기가 있어요. 사죄를 위해 오늘 밤 엔조이 클럽에서 구매하신 모든 상품은 제 앞으로 달겠습니다."깜박이는 불빛 때문에 강이연의 눈빛을 또렷하게 보기 어려웠다. "태준 님과 은지..."그녀는 반만 말한 뒤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저와 동행하는 사람은 없네요.""제가 짝을 찾아보겠습니다."박태준이 신은지와 함께 떠난 지 2분 후, 관리인은 엔조이 클럽 직원복을 입은 20여 명의 젊은 남자와 여자들을 데리고 강이연 앞에 서서 공손하게 인사하며 말했다. “이연 님, 박 사장님께서 원하시는 분으로 고르라 하셨습니다. 모두 고르셔도 됩니다.” 이번 판은 규모가 큰 편인 데다가, 로비에서 진행되어서 관리인이 직접 서비스를 하니 있어서 단숨에 많은 관심을 끌었다.강이연은 사람들을 힐끗 쳐다본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럼 그녀로 하죠."박태준은 신은지를 위층의 개인실로 데려갔다. 고연우도 그곳에서 잔에 담긴 와인을 천천히 마시고 있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신은지를 보았을 때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신사처럼 인
고연우가 떠난 후, 개인실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신은지는 박태준의 얼굴을 쳐다볼 엄두도 안 났다. '못 하겠어'라는 말은 남자로서 큰 수치와 모욕이었다.박태준의 성격이라면 그녀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었다.게다가 신은지는 지금 혼란에 빠져있다. 잠자리 후 그녀가 다른 여자들보다 더 심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그가 지금 그녀와 할 수 없는 이유가 뭘까?이건 그의 업보가 아닌가?게다가 박태준이 못하다니? 그 사람은 분명히...아, 고연우가 몸이 아픈 게 아니라 정신적 문제여서 그냥 그녀랑만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분위기는 점점 더 긴장되고 있다.신은지가 분위기를 밝게 하기 위해 말을 할까, 아니면 먼저 떠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박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숨통을 옥죄는 침묵을 깨뜨렸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응."신은지는 차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엔조이 클럽 정문을 지나갈 때서야 생각났다. 그녀는 박태준을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은 반쯤 그림자에 가려져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그러나 신은지는 지금 박태준의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2초 동안 머뭇거린 후 엄청난 호기심을 억제했다.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드러날까 두려워 창가 쪽으로 얼굴을 돌리기까지 했다.박태준은 무표정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감정이 없었지만,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손등의 쭉 뻗은 핏줄과 곧게 다문 입술이 그의 조급함을 드러냈다. 그는 신은지가 이 사실을 알기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았을 때 생각보다 화를 내지 않았다.그녀가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해 본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묻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처음에는 참을 수 있었지만 아파트에 가까워지자 박태준은 조금 초조해져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 묻고 싶은 거 없어?”심은지는 진작 묻고 싶었지만 박태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봐 참고 있었다. 3년 동안 비밀로 지켜왔으니 이 일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