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우가 떠난 후, 개인실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신은지는 박태준의 얼굴을 쳐다볼 엄두도 안 났다. '못 하겠어'라는 말은 남자로서 큰 수치와 모욕이었다.박태준의 성격이라면 그녀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었다.게다가 신은지는 지금 혼란에 빠져있다. 잠자리 후 그녀가 다른 여자들보다 더 심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그가 지금 그녀와 할 수 없는 이유가 뭘까?이건 그의 업보가 아닌가?게다가 박태준이 못하다니? 그 사람은 분명히...아, 고연우가 몸이 아픈 게 아니라 정신적 문제여서 그냥 그녀랑만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분위기는 점점 더 긴장되고 있다.신은지가 분위기를 밝게 하기 위해 말을 할까, 아니면 먼저 떠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박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숨통을 옥죄는 침묵을 깨뜨렸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응."신은지는 차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엔조이 클럽 정문을 지나갈 때서야 생각났다. 그녀는 박태준을 바라보았다.그의 얼굴은 반쯤 그림자에 가려져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그러나 신은지는 지금 박태준의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2초 동안 머뭇거린 후 엄청난 호기심을 억제했다.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드러날까 두려워 창가 쪽으로 얼굴을 돌리기까지 했다.박태준은 무표정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감정이 없었지만,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손등의 쭉 뻗은 핏줄과 곧게 다문 입술이 그의 조급함을 드러냈다. 그는 신은지가 이 사실을 알기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았을 때 생각보다 화를 내지 않았다.그녀가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지 생각해 본 적도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까지 묻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처음에는 참을 수 있었지만 아파트에 가까워지자 박태준은 조금 초조해져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 묻고 싶은 거 없어?”심은지는 진작 묻고 싶었지만 박태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까 봐 참고 있었다. 3년 동안 비밀로 지켜왔으니 이 일
푹신한 큰 침대 위에 하얀 이불이 덮여 신은지 위에 박태준이 올라와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밀자 그녀의 몸이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그녀의 입술에 강하게 키스했다.신은지는 목을 뒤로 젖히며 압박당하듯 그의 키스를 받았다. 이따금씩 그녀에게서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방은 어두웠지만 상대방의 얼굴은 또렷이 보였다. 신은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눈 밑은 물방울로 가득해 멍하고 흐릿했으며 눈꼬리는 붉은색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딱 봐도 괴롭힌 당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방 안의 공기가 뜨거워지자 신은지의 손가락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움츠러들었다.박태준의 눈길이 핑크빛으로 물든 그녀의 살결에 닿자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안팎으로 열기가 달아올랐다.신은지의 손가락이 그의 목에 닿자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그의 목젖을 쓰다듬었다. 박태준은 더 빨리 키스했고, 손마디마디가 도드라진 손으로 신은지의 손을 잡고 하얀 침대 시트에 꽉 눌렀다. 박태준의 낮고 쉰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은지야..."그 순간, 신은지가 발로 그의 어깨를 밀었다. 마치 장난치듯이 약한 힘이었지만 그는 그녀의 몸에서 떨어졌다.강력한 무중력 상태가 느껴졌다——박태준이 눈을 떴다.머리 위로 순백색 천장이 보였고 몸 아래에는 어두운 색의 이불이 있었다. 방 안은 어두웠고 커튼 틈새로 조금의 빛만 비치고 있었다.신은지도 없었고 그 좋았던 장면도 없었다. 그는 신당동 빌라에 누워있었다. 꿈꾸고 있었던 것이었다.방금 일은 다 꿈이었다...꿈속의 일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깨어났을 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극도의 공허함이 느껴졌다.박태준은 멋진 눈썹을 찌푸리고 침대등을 켜고 이불을 들어 올려 침대에서 일어나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웠다.움직이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그는 고개를 숙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결혼 생활 3년 동안 이렇게 강한 적 없었으면서 옆에 사람이 없으니까 더 열심히 일하네.”그는 다시 이불을 억지로 덮더니 "
신은지의 텅 빈 머릿속에 누가 어떤 이미지를 쑤셔 넣은 것 같았다. 그녀는 너무 화가 나서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수화기 반대편에서는 박태준도 말을 하지 않아서 분위기가 그의 숨소리와 함께 점점 더 모호해졌다.신은지는 가까스로 진정된 그의 호흡이 다시 가라앉는 걸 느꼈다. 에로틱함과 섹시함이 가득했다. 그녀의 이마에 볼록한 정맥이 두근거렸다. "박태준, 좀 자제해 봐. 전화 걸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남자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참고 있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은지는 전화를 끊었다. 이 놈의 마음은 음란함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신은지는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버리고 이불을 끌어당겨 계속 자려고 했지만 눈을 감고 보니 박태준 때문에 졸음이 사라졌다.그녀는 불을 켜고 한동안 인스타 스토리를 보다가 어찌 된 일인지 육지한의 인스타를 클릭했다. 마지막 DM은 그녀가 강이연에 대해 물어본 것이었다. 육지한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스토리를 클릭했는데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그녀는 그가 그녀를 차단했는지 궁금해했다.그러나 신은지는 육지한에게 DM을 보내면서 확인하진 않았다. 육지한은 자신인 고용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가 어떤 부탁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부탁할 만큼 그렇게 뻔뻔하지 않았다. 그러나 육지한 때문에 신은지는 또 다른 일이 기억났다.A시의 차 안에서 그녀는 의문의 남자에게서 염주를 받아왔다.신은지는 침대 옆 탁자 서랍을 열고 작은 잎이 달린 붉은 백단향 구슬을 꺼내 두 손가락으로 쥐고 불빛에 비춰보았다.붉은 구슬 중앙에는 '부처'라는 글자가 아주 작게 금가루로 쓰여 있었다. 비록 글씨는 작았지만 또렷하고 날카로워 보기만 해도 맹렬한 기세를 느낄 수 있다. 마음까지 꿰뚫는 것을 보고 만든 사람의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그 외에는 특별한 점은 없었다.작은 잎 붉은 백단향 염주는 흔해서 여기저기서
조태오가 소리를 지르자 조사하러 온 지도자들이 임 관장을 바라보았다.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 관장의 안색이 변하더니 경고하듯 그를 한 번 보고,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태오 씨, 제 사무실로 가서 기다리세요. 나중에 얘기하죠. 이분들께서는 조사 후에도 할 일이 있어요."조태오는 임 관장이 방금 자기가 신은지를 본 걸 알았을 것이라 단언했다.임 관장은 그저 그 여자를 감싸주고 싶었을 뿐이다.이렇게 감싸 주니, 어찌 된 일인지 모를 추잡한 관계인 것 같았다.그들의 업무 분야에서는 항상 연장자들이 신입을 주도해 왔다. 신은지의 나이에 이런 직함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이렇게 중요한 복원 사업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그는 이번에는 업계의 룰을 훼손한 이 사람을 제거할 것이다."관장님, 저희 가족의 문제가 아니에요. 저희 가족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조태오는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오히려 올라왔다. "은지 씨가 진행한 복원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는 신은지를 노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그녀처럼 어린 사람이 혼자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없을 것 같다 했잖아요. 보세요. 진짜 일이 터졌네요.” 등을 곧게 펴고 리더의 지시에 귀를 기울였던 신은지는 주위의 흐릿한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의 긴장을 풀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조태오는 그녀가 아무렇지 않아 하자 놀랐다. 임 관장은 분노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미친 녀석을 때려죽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됐습니다. 억지도 정도껏 하셔야죠. 높으신 분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다니 이만 나가 주세요.”"그냥 은지 씨를 감싸주고 싶은 거 아닌가요?" 조태오도 한 고집했다.임 관장이 다른 사람을 시켜 그를 내쫓으려 할 때, 옆에 있던 지도자가 말했다. “계속 말해보시죠. 당신네 이곳은 유일무이한 문화재의 보고예요.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죠.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당신네 평판을 손상시킬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모두 그렇게 말하자,
강이연의 신분과 성격을 알게 된 신은지는 비밀을 지켰다. 강이연이 자신 때문에 여기에 왔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너무 우연한 일은 대개 좋은 것이 아니었다.원래는 긴급 상황용으로만 사용하려 했는데 이렇게 빨리 쓸 날이 올 줄은 몰랐다."..."현장은 조용했다.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신은지를 바라봤다.스스로 감시하는 것이 정상인가?신은지는 들고 있던 노트북을 열었다. 비녀는 3일 전에 복원되어 원래 오늘 제출할 예정이었지만 리더의 불시 조사로 인해 지연되었다.사흘 전 CCTV 영상을 클릭하니 수리한 비녀를 상자에 넣고 라벨을 붙이는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그 이후로 그녀는 임시로 지정된 작업장에서 여러 전문가들과 함께 왕관을 복원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다.휴대폰 케이스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어 그녀의 움직임을 계속 따라다녔기 때문에 누가 비녀를 빼앗아 이렇게 만들고 다시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신은지가 영상에서 말했듯이 그녀는 혼자였고 누군가 다가오면 얼굴을 피했다.이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적어도 그녀가 남을 엿보는 변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신은지는 얼굴이 어두워진 조태오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 "태오 씨, 비녀가 이렇게 된 게 제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겠나요?"조태오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아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당신이 누군가에게 하라고 명령했는지, 혹은 이 바쁜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이 당신의 열쇠를 훔칠 수 있는지 누가 알겠어요?""아." 신은지는 미소를 지으며 느릿느릿 말했다. "이 박물관에 저와 공모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요? 게다가 저한테만 열쇠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캐비닛 관리자와 임 관장 모두 여벌키를 가지고 있었다.조태오는 조롱하며 비웃었다. "그건 아닌데..."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이 신은지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모든 사람들이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봤다. 특히 임 관장은 그에게 나가라고 쏘아붙였다.만약
신은지는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박태준의 손도 뿌리치지 않았다. 자신이 발버둥 쳤다가 남자가 허리 위에 느슨하게 두르고 있던 타월이 떨어질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이제 고작 스물다섯이었기에 남자의 나체를 보고 싶을 정도로 배고프진 않았다.박태준은 신은지보다 키가 컸기에 고개를 숙이자마자 그의 턱에 매달려있던 물이 그녀의 몸에 떨어졌다.5월의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아 두 사람 모두 얇은 옷을 입고 있어 물에 젖은 천이 피부에 달라붙어 축축했다.신은지는 이런 느낌을 유독 싫어했다."진영웅이 너 지금 곧 죽으려고 하는데 자기는 시간이 없어서 나한테 와보라고 했어, 너 정말 집에서 죽어버릴까 봐 걱정된다고."갑자기 일을 그만둔 아주머니가 생각난 신은지가 다시 덧붙였다."구천 떠도는 귀신처럼 이런 골짜기에서 혼자 사는데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시체 썩어도 누구도 모르잖아."잔뜩 화가 난 신은지를 본 박태준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키득거리며 웃었다."진 비서가 걱정하는 거야, 아니면 네가 걱정되서 그런 거야?"그 말을 들은 신은지가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나."박태준이 걱정되지 않았다면 마지막에 차를 돌려 이곳으로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는 속일 것이 못 되었다, 속일 수도 없었다.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을 내뱉는 신은지를 보니 박태준의 심장이 덜컥했다. 심지어 피가 모두 한곳으로 쏠리는 것 같았다."어머님 나이 드셔서 몸도 안 좋은데 자극 견디기 힘들잖아, 아주머니 갔으면 한 분 더 모셔 와."신은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주머니께서 집에서 지내지 않아도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 들렀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신당동에는 경호원이 있지만 분부 없이 방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그 말을 들은 박태준이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하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방금 신은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반짝였던 눈도 어두워졌다."은지야…"부드러운 불빛 아래, 단둘이 머문 거실 안
"얌전히 있어, 약 발라줄게."박태준이 신은지를 소파로 데리고 가 말했다.신은지는 박태준이 그저 약을 발라주려는 핑계로 자신을 강제로 집안으로 들인 것이 조금 의외였다. "내가 안 된다는 거 너가 아는데 내가 너한테 뭘 하겠어?"신은지가 고개를 들자 박태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옆에 있던 서랍에서 약상자를 꺼냈다."누가 괴롭혔어?"박태준이 면봉에 약을 묻혀 신은지의 상처에 발라주며 물었다.하지만 신은지는 자신이 괴롭힘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스스로 상대방이 자업자득하게 만들었다. 그랬기에 조태오에게 밀쳐져 손을 다쳤다고 해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했다고 해도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하지만 박태준이 이렇게 물으니 그녀는 숨이 멎었다, 그리고 억제할 수 없는 억울함이 치고 올라왔다. 그녀는 그렇게 그의 눈과 콧대를 보며 멍때리다 갑자기 시선을 옮겼다."아니."떨리는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억울함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녀는 완강하게 부인했다.그 목소리를 들은 박태준이 고개를 들더니 담담한 얼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내가 있잖아."곧 약을 다 바른 박태준이 약상자를 치우더니 일어서서 신은지를 내려다봤다."배고파?"신은지는 퇴근하자마자 이곳에 들른 것 같았다."아니."신은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지만 배에서는 꼬르륵하고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에 간단하게 먹은 그녀는 점심에 많이 먹으려고 했지만 그 일을 당한 바람에 입맛이 없어져 겨우 빵 하나를 먹었다."내가 밥해줄게."박태준이 신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 말을 들은 신은지가 일어서며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녀 머리 위의 힘이 강해졌다. 덕분에 신은지는 다시 소파 위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다 먹고 내가 데려다줄게. 나 아직 열나잖아, 환자 돌봐준다고 생각하고 내 기분 잡치는 말 하지 마."하지만 신은지 머리 위, 손의 온도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심지어 조금 차갑기도 했다."아니면 내가
박태준의 목소리에 금방 일어났을 때의 나른함이 담겨있었다.신은지는 그 목소리에 놀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고 방안의 익숙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몸을 일으킨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을 바라봤지만 옷은 어제와 똑같았다. 그저 하룻밤 잔 덕분에 조금 쭈글쭈글할 뿐이었다."내가 왜…"중얼거리던 신은지는 어젯밤 소파에서 잠들었던 것이 생각났다."몇 시야? 왜 안 불렀어?"신은지가 이불을 치워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깨웠던 거야?"신은지가 잠시 멈칫하더니 의심 서린 눈길로 박태준을 바라봤다.곧이어 박태준도 일어났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이 공기에 드러났다. 섹시하고 선명한 근육이 자리 잡은 몸이었다."내가 너 소파에서 침대까지 안고 왔는데도 너 안 깼잖아, 그런데 어떻게 깨울 수 있었겠어?"박태준이 말을 하다 탁자 위에 있던 시계를 힐끗 봤다."여덟 시네."밍기적거리다간 지각할 수도 있었기에 신은지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다급하게 드레스 룸으로 가 옷을 바꿔 입고 나왔다. 그 사이, 박태준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박물관 쪽에는 내가 대신 휴가 냈어."그 말을 들은 신은지가 휴대폰을 꺼내 통화기록을 확인해 보니 아침 6시에 관장님에게 전화를 건 기록이 있었다."누가 네 마음대로 나 대신 휴가 내라고 했어?"아침 6시에 남자가 신은지의 휴대폰으로 대신 휴가를 냈으니 다른 이들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할까? 신은지의 체면을 어디에 두라는 건지."아침 차려줄 테니까 씻고 천천히 내려와, 이따 손님 오시기로 했어."이혼한 마당에 손님이 오든 말든 신은지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신은지는 박태준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씩씩거리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다시 나왔을 때, 박태준은 이미 방 안에 없었다."박, 박 대표님, 무슨 일로 저 부르셨어요?"신은지가 방에서 나왔을 때, 아래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앉아요."박태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하지만 상대방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신은지는 그가 앉았는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