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는 만들기 쉽다. 요즘 날씨도 덥고 며칠동안 남포시에서 느끼한 것만 먹는 바람에 채소가 먹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은 채소를 썰어서, 익히고 접시 위에 두었다. 드레싱을 뿌리고 나니 요리 완성 시간은 총 15분도 채 되지 않았다. 박태준은 물로 잠깐 행군 채소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가득한 초록 빛깔에 미간이 찌푸려졌다.“감사 인사야, 아니면 사료야?”신은지는 그릇을 내려 놓다가 다시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대표님, 가능한 시간대를 말씀하시라니 까요. 별 10개 식당 찾아서 제가 정중하게 감사 인사라도 하게요.”박태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말투에는 억울함도 담겨 있었다.“안 먹는다고는 안 했잖아. 그리고 국내에는 별 5개가 제일 많은 거야.”“너 같이 높은 사람이 어떻게 별 5개로 성에 차겠어.”“...”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말하다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쫓겨 날 수 있다. 이렇게 보니 진영웅의 말이 맞았다. 역시 여자와는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다.신은지는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한편 박태준의 것은 자신의 왼손 옆에 두었고 곧이어 그가 손을 뻗어 그릇을 가져갔다.의외로 맛이 없지는 않았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입맛에 맞았다.“맛있네.”식사를 마치고 신은지가 설거지를 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때, 박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내가 할게.”그리고 “너 하루 종일 일만 하다가 왔잖아.” 라며 말을 덧붙였다. 박태준은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으로 나가 지낸 적이 있다. 항상 혼자서 밥을 했기 때문에 설거지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어떻게 손님한테 설거지를 시켜, 식사가 좀 조촐하긴 했어도 남포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감사 인사는..” 그는 신은지의 손님 또는 감사라는 말에 거리감을 느꼈다. 손에 핏줄을 세우며 코웃음을 쳤다. “진 비서가 나한테 청춘 드라마 좀 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상대방의 말을 끊는 방법을 알게 됐지. 꽤 쓸모 있어 보이던데 직접 안 해봐서 모르겠네. 지금
신은지는 얄궂게 웃었다. 미간 사이에는 요염함과 비웃음이 뒤섞여 있었다."우연이라고 생각해?"그 말을 들은 박태준은 그녀를 놓아주더니 흘러내린 신은지의 머리를 귀 뒤로 꽂으며 말했다."아니, 그리고 비즈니스 하는데 이런 더러운 일 많아. 하지만 나는 그런 적 없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그런 짓 한 적 없어. 그러니까 다음에는 이런 거 묻지 마."신은지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내가 손댄 여자는 너 하나밖에 없어. 그것도 내가 직접 나를 너한테 갖다 바친 거고."박태준은 애정 표현을 잘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해본 적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늘 신은지에게 못된 말만 늘어놓기 바빴다. 신은지는 직접적이고도 열렬한 애정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대개 진선호나 학창 시절, 고백 편지에서 들은 것이었기에 박태준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애정 표현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말에 대답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신은지가 멈칫한 사이, 박태준은 이미 신발을 다 바꿨다."먼저 갈게. 그동안 수고했어. 일찍 쉬어."신은지는 요즘 궁중 암투극에 빠졌는데 황제가 매번 수청을 들고난 후궁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곤 했다. 그랬기에 박태준이 한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화끈해졌다. 하지만 곧이어 그가 자신에게 쇼핑하느라 수고했다고 말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문을 닫은 그녀는 TV를 보다 씻고 자려고 했지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박태준이 무언가를 놓고 간 줄 알았던 신은지는 문을 열자마자 진유라를 마주했다. 그녀의 손에는 과일과 간식, 포장된 회까지 있었다. "내가 꼬치랑 맥주도 시켰는데 이제 곧 도착할 거야."진유라는 물건을 신은지에게 건네주더니 익숙하게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 바꿔 신었다."방금 엘리베이터 앞에서 박태준 만났는데 그놈이 너 괴롭히러 온 거야? 그런데 그 고귀한 사람이 나한테 말을 걸더라.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이 점에서 진유라는 박태준을 오해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신은지 남편이고 한 사람은 신은지 친구였지만 사실 자
박태준이 신은지의 눈을 막았지만 그녀는 이미 신진하를 보고 말았다.신진하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피와 오줌으로 범벅이 된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무척 더러웠다.요즘 매번 신진하를 볼 때마다 그는 신은지에게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 신은지는 한 집의 가장으로서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였던 그가 아예 생각나지도 않았다."가자."신은지가 자신의 눈을 막은 박태준의 손을 내리며 말했다.박태준은 그런 신은지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그제야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축축함에 그는 자신의 손에 신진하의 피가 묻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박태준이 신은지와 맞잡은 손을 들어보니 신은지의 새하얀 손에 빨간 피가 묻어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도 피가 묻어있었다.그 모습을 본 박태준이 미간을 찌푸리자 옆에서 누군가가 물티슈를 건네줬다."손 닦으세요."물티슈를 받아 든 박태준은 신은지의 손과 얼굴에 묻은 피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그리곤 자신의 손은 대충 닦았다. 그의 주먹은 어디에 긁힌 것인지 상처가 나 있었다. 가죽이 벗겨져 피가 뚝뚝 흐르고 있어 그 피가 박태준의 것인지 신은지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박태준의 손길은 투박했다. 마치 어렸을 적, 고무로 숙제 책을 지우는 손길 같았다. 덕분에 보드랍지만은 않은 물티슈가 지나간 곳이 조금 빨개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은지를 보호하려는 박태준을 느꼈다.신은지는 거절하려고 했다, 한편으로 불편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주위에 구경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필 박태준은 어딜 가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바닥에는 생사를 알 수 없는, 명의상 신은지의 아버지인 사람이 누워있었기에 신은지는 박태준처럼 담담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가자."박태준이 물티슈를 버리고 나서야 신은지가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응."박태준은 다시 신은지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신은지가 쌩하니 그를 지나쳐 가 그의 손끝이 그녀의 옷을 스쳐 지나갔다. 박태준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응, 알았어. 아무튼 고마워."신은지가 알코올을 적신 솜으로 박태준의 상처를 소독해줬다."그 짧은 시간 안에 현장에 도착해서 모든 흔적을 지우고 희생양까지 찾아냈으니 절대 단순한 집안이 아니야. 남포시에 그런 집 10집 안 되거든. 내가 이미 사람 보내서 지켜보라고 했어, 하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남포시는 박태준 구역이 아니었기에 다른 이의 세력이 오랜 시간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다른 이에게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오랫동안 싸워온 사람들임이 분명했다.이번 일로 알 수 있다시피 상대방은 신중한 데다가 플랜 B도 많이 남겨뒀다. 혹여나 조심하지 않아 꼬리를 보이거나 시끄럽게 했다가는 다음에 그들을 잡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 분명했다.박태준은 조용하게 손을 대야 했기에 조금 어려웠다.신은지의 사진도 상대방과 깊은 연관이 있을 거라고 박태준은 생각했다. 그저 그 구체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려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박태준은 관절을 다친 탓에 붕대를 감기도 어려웠다. 신은지는 약을 바른 뒤, 물건들을 봉투에 넣어 묶어서 상자 속으로 넣었다.모든 것을 마치고 나서야 신은지는 고개를 들고 박태준을 향해 웃어 보였다."고마워."예쁘장한 얼굴을 지닌 그녀의 피부가 어둠 속에서 더욱 하얗게 비춰졌다. 불빛이 눈 안으로 비춰 들어오자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박태준은 그런 신은지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떨려와 침을 삼켰다.좁은 차 안에서 차창도 열지 않아 약 냄새와 두 사람 몸의 향기가 뒤섞여 서로의 코안으로 파고들었다. 차 안의 온도는 점점 올랐고 무수한 불꽃이 일어 곧 폭발할 듯했다.이성을 잃기 전, 박태준이 고개를 돌렸다.신은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을 불태워 버릴 것만 같은 충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보이지 않아 더 강렬해졌다.그때,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긴장된
신은지는 집에 도착하고 나서도 깊고도 어두운 박태준의 눈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진유라는 테이블 옆에 앉아 새우를 까 접시 안에 가지런히 세워두고 있었다. 문 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자 이미 신발을 바꿔 신은 신은지가 보였다."왜 그래? 뒤에 귀신이라도 쫓아와?""왜 안 먹었어?"신은지가 식탁 위에 그대로 놓여있는 음식들을 보며 물었다."너 기다렸지. 안 돌아온다는 말도 안 했잖아. 그리고 나 혼자 이걸 어떻게 다 먹냐, 새우 까면서 너 기다리고 있었지, 이거 다 깔 때까지 너 안 돌아오면 먹을 생각이었어."진유라가 신은지에게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마침 목이 말랐던 신은지는 술잔을 건네받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너 다이어트 한다며."그 말을 들은 진유라는 발끈하며 말을 쏟아냈다."이거 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야. 박태준 옆에 있는 놈들 다 좀 병 있는 거 아니야? 그 골동품들 안목 있는 사람들이 보면서 있으면 얻어걸리는 거라고 했는데 아무리 말해도 안 믿는 거 있지. 그리고 이 더운 날, 나를 끌고 보물을 사러 가자고 하는 거야. 오늘 하루 종일 가게에 있을 생각이었는데. 나 아침에 선크림도 안 발랐는데, 심지어 모자도 안 썼다고, 아무런 조치도 없이 햇빛 밑에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네가 알아. 이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니?"진유라가 신은지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이거 봐, 내 피부 다 벗겨졌어. 그리고 내가 착한 사람이라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내가 거기서 사고 있는데 그놈이 뒤에서 법률을 들먹이면서 사장님 말문 막히게 하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뭐 시장 정리하러 간 사람인 줄. 이러면 내가 앞으로 어떻게 이 바닥에서 살라는 거야.""곽 변호사님이 조금… 진지한 분이신가 보네."신은지는 진유라의 원망을 듣곤 말했다."진지한 게 아니라 병 있는 거야. 다행히 오늘 운이 좋아서 적합한 거 찾았는데 앞으로 다시는 그 얼굴 보고 싶지 않아."진유라는 곽동건에게 불만이 많아 보였다."그런데 방금 어딜 그렇
육지한에게서 무언가 알아내려던 신은지는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귀찮은 일만 뒤집어썼다."여기 당신한테 내어줄 방 없으니까 혼자 알아서 하세요."나유성의 아파트는 원룸이었기에 다른 방이 있다고 해도 신은지는 육지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그를 집안으로 들일 수 없었다."저는 경호원입니다, 당신을 보호하는 게 제 일이라고요. 어딜 가나 붙어 다녀야 보호하죠."육지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신은지의 방을 둘러봤지만 확실히 남는 방이 없어 보였다."저 소파에서 자도 돼요."하지만 신은지는 물러서지 않았다."텐트라도 사서 밖에서 자요. 저랑 그 사장님이라는 사람은 그저 파트너 관계거든요. 얼굴도 본 적 없다고요. 우리가 말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 맞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보낸 사람을 우리 집에 들이겠어요?"신은지는 그 남자가 얼굴 없는 남자라고 확신했다. 이안나와 처음 그녀를 찾아왔던 사람 모두 그를 이렇게 칭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지는 배후에 다른 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한산 별장 3층의 그 사람은 얼굴 없는 남자일까,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인 걸 까."남포시에서 당신이랑 같이 있던 그 중년 남자가 누군지 알려주면 허락할게요."신은지가 육지한을 보며 말했다."중년 남자가 누굽니까? 저는 당신을 구해주고 바로 떠났습니다. 가기 전에 경찰에 신고했으니 당신이 본 사람은 경찰이겠죠."육지한이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거짓말, 하지만 신은지는 절뚝거리며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육지한을 보내려고 했다. 그녀는 방금 전, 지하 주차장에서 돌을 밟고 발을 삐끗해서 발목이 퉁퉁 부어 바닥에 닿기만 해도 아팠다.그녀는 육지한과 자신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나가주시죠."신은지가 불퉁하게 육지한을 쫓아내려고 했다.한편, 박태준은 신은지의 문밖에서 노크를 하려고 했지만 꼭 닫혀있던 문이 열리더니 불빛과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에 박태준은 꾹 참고 있던 분노가 사르르 녹아버렸다. 덕분에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
신은지가 박태준을 무시하곤 화장실로 들어갔을 때, 얼핏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그녀가 나왔을 때, 테이블 위에는 음식과 술이 한가득 놓여있었다. 소주에 맥주, 양주, 칵테일까지 있었다.신은지는 박태준이 술을 마시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거절을 당한 뒤, 화가 나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 5병도 겨우 마시는 신은지가 저 술들을 전부 들이켰다간 병원에 갈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은지 또 화났어.]박태준이 진영웅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대표님, 또 사모님 심기 거스르는 말 하신 거예요?]진영웅이 답답하다는 듯 답장을 했다.하지만 박태준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신은지는 그를 집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아니.][대표님, 우리 칭찬하는 법을 배우거나 입 다무는 법 배워야 한다고 했잖아요. 둘 중에 하나만 배우면 돼요.]진영웅의 답장을 본 박태준이 휴대폰을 옆으로 던졌다. 그리곤 방문 앞에 선 신은지를 보게 되었다."뭐 마실래?""네 피 마셔도 돼?"신은지가 묻자 박태준이 자신의 손목을 그녀에게 건네줬다."씻어서 줘?"신은지는 박태준을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융통성이 없다고 해야 할지 몰랐다.박태준은 전에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기가 죽은 그 모습은 마치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도 만난 것 같았다.신은지는 고민하다 소파 위로 앉았다. 그녀는 박태준이 이곳에서 술을 마시다가 저세상으로 갈까 봐 걱정되었다."말해 봐, 여긴 도대체 왜 온 거야? 정말 술 마시러 왔다고 하지 마."신은지가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말했다.그러자 박태준이 도수가 높지 않은 칵테일 한 잔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시선을 빨간 그녀의 입술 위로 고정했다. 박태준이 누군가를 이렇게 뚫어져라 바라볼 때면 마치 상대방을 빨아들일 것 같았다."너랑 자러 온 거라고 하면…"박태준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칵테일이 그의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려 코와 얼굴과 함께
신은지는 정말 알아들은 건지 만 건지 얌전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박태준이 그녀를 안아도 거절하지 않았다.성인 여자의 몸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평소엔 괜찮았지만 술에 취하고 나니 조금 힘들어져 박태준은 그녀를 안고 일어서다 힘이 풀려 두 사람 모두 소파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다행히 나유성은 이 아파트를 사서 자신이 살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좋은 가구를 골라 소파도 넓고 포근했다. 박태준은 넘어지면서도 팔목으로 버티며 신은지의 위로 완전히 넘어지지 않았다.박태준은 그렇게 위에서 조용하게 자신의 밑에 누워있는 여자를 바라봤다.그림 같은 신은지의 눈은 평소처럼 비웃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박태준의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 윤곽을 따라 흘러내렸다."앞으로도 안 되면 너 정말 나 버릴 거야?"그러자 신은지가 고개를 돌렸다. 단잠을 방해하는 그의 손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하긴, 너 원래 나 안 가지려고 했지. 안 되면 더 빨리 도망갔을 거야. 그리고 나랑 이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거야."박태준이 자신을 비웃으며 말했다.곧이어 그의 입술이 신은지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 그 어떤 욕구도 담기지 않은 입맞춤은 잠시 이마 위에 머물렀다가 그녀의 눈가, 콧방울, 얼굴을 지나 마지막으로 술에 젖은 빨간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신은지의 입술은 부드럽고 차가웠다. 그녀의 숨에 칵테일 냄새가 섞여 있었다.박태준은 술에 취한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 술 취한 여자에게 이런 짓 따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입맞춤을 시작으로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신은지가 그에게 반응을 해줬기 때문이다.절반쯤 뜬 눈에 취기가 가득했다. 불빛 아래 그녀의 보드라운 팔이 그의 팔을 안고 몸을 일으켜 그에게 가까이하려 애썼다.박태준은 순식간에 긴장했다. 그는 미칠 것 같았다.품에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고 그는 오기 전, 그런 생각을 하며 왔다. 그랬기에 이런 상황에서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이튿날, 신은지는 혼란스러움을 안고 일어났다. 어지럽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