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앉은 신호연은 미래의 사장인 박태준한테 잘 보이려고 계속 말을 걸었다. 잘 보여야만 좋은 일자리를 얻어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일 좋기는 경영층이길 바랐다.이렇게 하면 그는 매일 사무실에서 앉아, 에어컨을 틀고 차를 마시며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을 지시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매형, 저 학교에서 매년 장학금도 받고 교수님들도 저를 칭찬......” 신나게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한테 치여 엘리베이터에서 뛰쳐나와 자기 누나의 손을 잡고 있었던 남자한테 부딪치게 되었다.나유성은 잠시 신은지의 손을 놓고 신호연을 부축하였다.신호연은 바로 정신 차리고 생각했다. “제기랄, 누가 날 찬 거야?”하지만 엘리베이터 안에는 자기 부모님 빼고 다들 나 몰라라 하는 눈빛이었고 부모님은 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호연아, 왜 나갔어? 빨리 들어와, 올라가야지. 엘레베이터 문 거의 닫혀.”이때 박태준은 옆에 서 있던 신은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어당겼다. 때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게 되었다.신호연은 자기가 누구한테 차였는지 알 거 같았고 옆에 있는 나유성을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저기 우리 누나랑 무슨 사이세요?”자기 매형 앞에서 누나 손까지 잡다니 궁금해 물어보았다.나유성은 자기 옷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자네 누나를 좋아해서 지금 구애하고 있는 단계야.”“얼굴도 반반하게 생겼고 보니까 집안도 괜찮은 거 같은데, 왜 굳이 남의 가정에 끼어들려고 하세요?”“너네 누나랑 매형 이미 이혼했어.”“뭐라고요? 말도 안 돼요.”이혼이라니? 그럼 자기 일자리는 물 건너 가는 건가?“넌 기사도 안 봐? 그리고 여기서 계속 기다릴 거야?”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나유성은 안으로 들어갔다.신호연은 매일 게임질이었지 뉴스를 볼 사람이 아니다. 급히 핸드폰으로 박태준을 검색하니 온통 이혼 기사로 깔렸다. 신호연은 너무 큰 충격으로 식당에 들어가서도 계속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팽현희는 자기 아들의 멍한 표정을 보고 정신 차리게
박태준의 손에 든 담배는 이미 끝까지 블타올라 담뱃불이 손끝을 데었을 거 같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담배를 끄고 말했다. “알고 있었어......”신은지는 박태준의 말을 듣고 웃는 듯 안 웃는 듯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비록 들키지는 않았지만 얼굴에는 비웃는 표정이 한가득이었다.어색한 흐름 속에 그들의 식사가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신은지의 외삼촌은 그들을 집으로 초대했다.그러자 신은지는 외삼촌의 요청을 거절했다. “저희도 오늘 오느라 피곤해서 호텔에 가서 쉴게요. 내일 외할아버지 묘지에 갔다 오고 다시 집에 인사드리러 갈게요.”하지만 팽현희는 그들을 쉽게 보낼 일이 없다. 자기 아들 일자리 찾는 게 우선이다. 말이 좋지, 내일 혹시 묘지에 갔다가 바로 경인 시로 돌아가면 그때 다시 잡을 수도 없다. 이건 아들의 한평생과 관련된 일이니 자기 눈앞에 있어야 안심이 됬다.팽현희는 곧바로 신은지의 팔짱을 끼고 차 안으로 끌면서 혼내듯 말했다. “우리 한가족인데 여기까지 와서 어떻게 너를 호텔에서 자게 하니? 뭐 집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네 잠자리가 없을까 봐? 내일 외삼촌이랑 같이 묘지로 가면 되겠네.”“아니요, 신경 쓰지 마세요. 외할아버지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운성 시의 전통에 따르면 아들들은 설 후에 묘지로 가고 딸이랑 외손자들은 설 전에 가는 거다.“그게 이년동안 우리집이 잘 안되서 점쟁이를 모셨더니 외할아버지 묘 자리가 안 좋아서 우리 집 형편이 점점 안 좋아진거래. 너한테 알리지도 못하고 외할아버지 묘지를 옮겼어. 새로 옮긴 데가 찾기도 어렵고 네비로 가기에도 힘들어. 그러니까 내일 외삼촌이 데려다주게 해줘. 그래야 나도 안심이 되지.”묘지 옮긴 건 사실이니 팽현희이 거짓말한 것도 아니었다.이 상황에 신은지는 더 이상 마다할 수도 없어 나유성한테 말했다. “유성아, 먼저 호텔로 가, 내일 내가 다시 데리러 올게.”“나 선생님도 혹시 괜찮으시면 저희 집으로 가시죠. 먼 길 오셨는데 고생 많으세요. 설에 혼자
욕실에서 나온 박태준은 침대에 누운 사람을 보고 얼굴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네가 여기 왜 있어?”나유성은 어디에서 가져온지 모르는 고등학교 화학 교재를 보며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은지가 너랑 같은 방 쓰기 싫데.”“나도 너랑 같이 자고 싶지 않은데 굳이 여기 계속 있겠다면 그냥 바닥에서 자.”나유성은 이제야 책에서 눈을 떼, 박태준을 쳐다보고는 눈을 감고 바로 침대에 누워 잤다.박태준은 사실 어디서나 잘 잔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잠이 안 와 베란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바같만 쳐다보았다.운성의 겨울은 경인 시보다 온도는 높았지만 습기가 차 뼈에 스며 드는 추움이었다. 베란다와 거실 사이는 미닫이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문은 닫혀져 있어서 에어컨의 따뜻한 바람이 오지 않아 그의 손은 이미 얼어 아무 감각이 없는 거 같았다.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화장대에 놓인 드라이기를 보고 생각에 빠졌다. 새벽에 잠을 설친 박태준은 밖에 소리가 있어 일어나 보니 거실에서 누군가가 플래시를 쥐고 서랍장을 뒤지고 있었다. 지금 시간이 새벽 2시라 밖은 어두웠고 오직 가로등만 불빛을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외삼촌 집은 고층이라 희미한 불빛이 비쳐 들어와 간신히 물건을 볼 수 있었다. 박태준은 실눈을 뜨고 자세히 보니 신은지였다. 그녀는 머리를 풀고 편한 잠옷을 입고 이 새벽에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박태준은 조용히 신은지 옆에 다가 갔지만 슬리퍼 소리 때문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새벽에 여기서 뭐 하고 있어?”“아......”신은지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핸드폰도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식은땀이 나 안색이 너무 안 좋았다. 박태준도 걱정한 눈빛으로 그녀의 이마에 손을 놓고 물었다. “왜 그래?”한겨울에 이렇게 식은땀이 나는 걸 보니 어디 아픈 거 같았다.신은지는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목소리까지 떨면서 말했다. “배 아파, 그러니까 진통제 있는지 찾아봐줘.”정말 너무 힘이
신은지는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지금 너무 아파 힘이 다 빠진 게 아니면 정말 일어나 그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박태준은 참 보면 볼수록 가관이다.간호사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야근하는 것도 짜증 나 죽겠는데 이렇게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을 보다니 너무 어이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상황에 영화배우가 자기 앞에 서서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거다. “눌러봐야 배가 아픈지 위가 아픈지 아니면 맹장이 아픈지 알 거 아니에요?”박태준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간호사가 건넨 번호표를 받았다. “7번 방으로 가주세요.”박태준이 한 코 당한 걸 보고 신은지는 마치 자기가 복수한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일어나 혼자 걸어가고 싶었지만 박태준은 다시 그녀를 안게 되었다. “너무 좋아 보이는데?”신은지는 그의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니.”“그럼 그 귀까지 걸릴 것만 같은 입꼬리 좀 내려주지. 너무 이상해.” 그는 지지 않고 말했다. 신은지는 눈을 부릅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귀까지 걸린 입꼬리뿐만 아니라 입안의 이빨까지 보여줄까? 확 깨물어 버린다!”검사 결과는 바로 나왔다. 급성 장염이라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운성의 종합병원은 두 군데뿐이었고 여기 병실에는 1인실이 없고 3인실뿐이었다. 동행하는 사람은 제대로 된 잠자리가 없어 배낭용 침낭뿐이었다. 신은지가 늦게 입원하게 된 거라 병실 안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잠에 들었고 코 고는 소리가 천장을 뚫을 것만 같았다. 박태준은 신은지를 침대에 놓고 말했다. “물 마실래?”신은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방금 전 다 토하고 지금은 아무 기운이 없어 링거를 맞고 있었다.그리고 옆에 서 있는 박태준을 보고 말했다. “나 괜찮으니까 어서 돌아가.”잠옷만 입고 나왔는데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무조건 자기한테 뒤집어 씌울 거 같았다. 그러자 박태준은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것저것 검사하고 안겼을 때는 왜 가라고 안 하고 지금 좀 괜찮으니 가라고
시간이 점점 지나 자 분위기도 싸해졌다.두 사람을 지켜본 신은지가 참다못해 말했다. “너희 둘 죽 뜨겁지도 않아? 내가 배 아픈 거지 어디 팔다리 부러진 것도 아니니까 죽 내려놔.”신은지는 옆 테이블을 보고는 "죽을 내려놔."라고 했다. 너무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신호연은 박태준과 나유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둘 다 잘 생기고 재력 있고 따르는 여자도 많을 거 같은데 왜 자기 누나처럼 애교도 없는 여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재별들은 색다른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는 건가?신은지는 의사 선생님한테 퇴원할 수 있는 시간을 물어보고 모든 사람을 집으로 보냈다. 이제야 다시 눈을 감고 쉬게 되었다. 이때 병실에는 시끌벅적했다. 수다 떠는 소리, 밥 먹는 소리 그리고 여러 사람 들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더는 잠을 잘 수 없어 일어나 죽을 먹게 되었다.신은지는 병원에서 이틀 동안 입원했고 팽현희는 집에서 반찬을 만들어 보냈다.“외숙모, 병원에 식당도 있으니 힘들게 만들 필요 없어요. 날씨도 추운데 안 오셔도 돼요.”“집밥이 더 깨끗하고 맛있지. 이건 내가 아침에 시장 가서 산 거니까 싱싱하고 좋은 거야. 넌 지금 위장이 약하니까 기름진 거 먹으면 안 돼. 나중에 퇴원하면 내가 맛있는 거 많이 해줄게.” 팽현희는 준비한 음식을 꺼내며 말했다. 팽현희가 자기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는 신호연 일자리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박태준이랑도 이혼한 사이인데 도와줄 수도 없는 상황이고 이혼 안 했어도 이런 일에 도와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외숙모, 부탁하신 거에 제가 도움이 안 될 거 같은데 만약 호연이가......”사실 신호연이가 정말 경인 시에 일자리 찾고 싶다면 먼저 자기 집에서 머물다가 천천히 찾은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팽현희는 그녀의 말을 끊고 말했다. “아이고, 아직 아픈데 나중에 얘기하자, 먼저 몸부터 챙겨야지.”외숙모의 표정과 말투는 정말 조카를 생각하고 아끼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신은
“제가 결정할 수 없으면 외삼촌한테 물어보죠. 자기 아버지를 귀신도 안 나올 거 같은 곳에 두겠는지?” 신은지는 옆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외삼촌을 가리키며 말했다.모든 사람의 시선이 자기한테 쏠리니 더는 모르는 척할 수 없이 외삼촌이 말했다. “은지야, 이번에는 외숙모 말 듣자. 우리가 풍수 보는 사람도 찾아서 여기를......”신은지는 실망한 듯 더 이상 외삼촌의 말을 듣지 않고 담배 세 대로 외할아버지한테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팽현희는 신은지가 받아들였다고 생각해 그녀한테 다가가 말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거는 팽현희의 주특기다. 신은지의 옆에 앉아 뭐라고 말하려 했으나 그녀의 혼잣말을 듣게 되었다. “외할아버지, 제가 다시 묘지 찾아서 좋은 곳으로 모실 테니까 여기서 조금만 참아주세요.”팽현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외삼촌 말 듣겠다며? 외삼촌이 내말 들으라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절대 묘지 옮기면 안 돼.”신은지는 일어나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결정하라고 했지 그 결정을 따르겠다고 말 안 했는데요. 저랑 의견이 같으면 듣는 거고 다르면 그냥 제 뜻대로 하면 돼요.”팽현희는 너무 화가 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신은지를 한 대 치려 했다.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외할아버지가 어디에 있던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너네 엄마가 혼전임신해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년이 어디 감히 여기서 말대꾸야? 내가 네 엄마 대신 혼내줘야겠어.”너무 빨리 일어난 일이라 신은지는 아무 반응 없이 멍 때리고 있었다. 팽현희의 손이 신은지의 얼굴에 닿으려는 차에 박채준한테 잡혔다. 그러자 팽현희는 고통스러운 표정을지었고 팔목이 부러질 것만 같은 아픔이었다.“이 손 놓지 못해?”박태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팽현희를 쳐다보았다. “어디 감히 손을 데? 손목 부러지고 싶지?”팽현희는 너무 아파 주저앉았고 손목은 박태준한테 잡혀 보기 불편한 자세였다. “아니야, 손 안 델게.”팽현희도 너무 화가 나 정신을 잃은 채 신은지를 신호연으로 착각
며칠 전까지 신은지한테 살갑게 대해주는 팽현희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완전히 사라져 어느덧 다른 모습을 드러내며 쉴 새 없이 말했다.외삼촌은 박태준의 표정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고 그의 눈빛에 소름 끼칠 정도 놀라워했다. “그만해 그만해.”“잘 생각해, 묘지를 여기로 옮기도 나서 당신 사업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아니면 트럭도 살 형편이 안되는데 벤츠까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해?”팽현희는 자기 남편이 맹꽁이처럼 행동하는 걸 보니 너무 화가 나 그의 손을 뿌리쳤다.평현희 말을 듣고 박태준은 마음속으로 참고 있었던 분노를 퍼붓기 시작했다. “당신들 얼마나 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잘 풀리지 못하게끔 해주죠.”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살기가 가득해 팽현희는 이제야 정신 차린 듯 조용해졌다. “아버님도 여기서 2년 동안 조용하고 좋아했을 거야. 이렇게 너희들 마음대로 옮기면 오히려 싫어할 수도 있어.”팽현희는 박태준한테 뭐라고 할 수 없고 외할아버지 핑계를 댔다.박태준은 어이없다며 웃었다. “외숙모 말씀이 틀린 말이 아니네요. 그럼 외할아버지께 말씀드리세요. 혹시라고 싫어하시면 꿈에서 저한테 알려달라고 하세요.”꿈에서 말하라고? 팽현희는 이건 분명히 자기를 위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가 신도 아니고 무슨 재주가 있어서 꿈에서 외할아버지를 모시겠는가?묘지에서 떠나 다시 외삼촌 집에 가 짐을 챙기러 갔다. 신호연은 게임을 하고 있었고 그들이 짐을 챙겨 나온 걸 보자 핸드폰을 옆에 던지고 말했다. “매형, 둘째 매...... 유성 형님, 경인 시로 돌아가는 거예요? 설 쉬고 간다고 했잖아요.”하마 터 면 다들 보는 데서 나유성을 둘째 매형이라고 부를 뻔했다.신호연도 그들이 떠나는 걸 보자 황급히 자기 짐을 정리하게 되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아직 짐 정리가 안돼서요. 이렇게 빨리 가다니, 설에 친구들이랑 게임 약속까지 잡았거든요.”짐 정리도 다 못했는데 밖에서는 다시 문 닫고 또 열리는 소리가 들려 나와보니 신은지는
신진하는 너무 격동되어 눈을 부릅뜨고 얼굴 표정까지 흉악스럽게 변했다.신은지도 그의 반응에 놀랐지만 바로 진정하고 말했다. “그냥 물어본 거니까 흥분하지 마세요.”신진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 표정은 여전히 굳어져있었다. “혹시 너네 외숙모가 뭐라고 한 거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래? 돈이라고 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드는 사람인데 쓸데없는 말 믿으면 안 돼.”신은지는 소파에 앉았고, 그녀의 손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럼 머리카락이라도 주세요. 검사해서 이런 쓸데없는 말 더는 못하게끔 해야죠.”신진하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여전히 긴장하고 화난 표정이었다. “넌 그 별 볼 거 없는 여자의 말을 믿고 싶니? 아니면 내 말을 믿는 거니?”신은지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신진하의 머리카락을 받고 싶었다. 이렇게 5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신진하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나가! 지금 당장 나가!”신은지도 기운이 빠져 온몸이 쑤씨듯 힘들고 피곤해했다. “이제 알겠네요.”신진하는 눈을 부릅 뜨고 말했다. “뭘 알겠다는 거야?”“저 아빠 딸이 아니네요. 그리고 우리 엄마의 죽음에 당신이 연루되지 않았으면 해요. 정말 뭔가 있다면 그때 당신 용서하지 않겠어.” 신은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진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기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기운을 뿜어 신진하도 무서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밖으로 나왔다.신진하는 신은지의 마지막 눈빛을 잊을 수 없어 입술을 꾹 닫고 있었다. 별장에서 나온 신은지는 바로 떠나지 않고 집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약 10분 뒤 아주머니가 쓰레기 버리러 나왔는데 신은지를 보고 놀라워했다. “아가씨.”신은지는 아주머니를 향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혹시 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그게 뭔데요?”아주머니는 방금 주방에 있었지만 두 사람의 말을 다 듣게 되었다. “아빠가 쓰고 있던 젓가락이나 그릇 하나만 가져다주세요. 제가 두둑히 챙겨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