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성인이었으니 일시적인 감정과 평생의 약속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이준에게 호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과거의 불쾌한 기억은 단순히 '재결합'이라는 세 글자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진안영에게 솔직하게 말했다.“나도 잘 모르겠어. 이준 씨가 좋은 결혼 상대인지! 오늘은 나한테 잘해 주지만 며칠 지나면 내가 그의 덕을 보려고 접근했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워. 이준 씨는 내 모든 걸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이고 우리 사이엔 아직 풀지 못한 문제들이 많아! 안영아, 난 한 번도 열등감을 느껴본 적 없는데 그의 앞에서는 그런 감정이 들어. 난 그가 나를 무시할까 봐 두려워. 그리고 전에...”그녀는 조진범을 좋아했었다.그래서 그 뒷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던 것이다.진안영은 그녀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그녀도 언니가 이렇게 속상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언니는 유이준을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다.좋아하기 때문에 앞뒤를 재고, 좋아하기 때문에 얻고 잃는 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겠는가.진은영은 보지 못했지만, 유이준은 화장실 문 앞에 서서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분석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녀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분명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환한 불빛 아래 유이준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그는 후회했다. 그녀를 좀 더 일찍 사랑하지 않은 것, 다른 남자처럼 아이 달래듯 그녀를 달래주지 않은 것, 늘 그녀를 상업적 인물인 진은영으로만 여겼던 것 그리고 그녀도 사실은 사랑을 갈망하는 소녀라는 것을 간과했던 것에 대한 후회였다.진안영은 그를 보았다.유이준은 진안영에게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조용히 떠났다.진안영은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이준 씨도 이제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 같네.’...깊은 밤, 그녀는 조진범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부부는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
밤늦은 시간, 진은영은 소파에서 깨어났다.어머니를 보려 했던 것이다.그런데 눈을 뜨자 그녀는 침대 옆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는 유이준을 보았다. 그는 이미 검은 셔츠에 정장 바지로 갈아입었는데 멋지고 우아해 보였다.그는 자지 않고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은영의 시각에서 그의 측면은 마치 조각상처럼 잘 생겼다.그녀가 입을 열자 목소리가 갈라졌다.“왜 아직 안 갔어요?”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유이준은 노트북을 닫고 그녀 옆에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옆에 앉아 손을 내밀어 이마에 손을 얹어 보고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열이 좀 내렸네요.”어?진은영은 얼떨떨하게 물었다.“내가 열이 났었나요?”그러자 유이준은 진지하게 대답했다.“열이 좀 있었어요! 아니면 왜 자면서 나를 붙잡고 놓지 않았겠어요? 은영 씨, 나를 안고 자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진은영은 머릿속이 멈춰버렸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남자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간파한 듯했다.방금 열이 있다고 말하던 그는 곧 그녀의 몸 양옆으로 손을 짚고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몇 초간 키스한 후 그는 잠시 멈추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아까 그 키스는 아직 안 끝났어요. 지금 마저 해야죠.”진은영은 온몸에 힘이 없었다. ‘열 때문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정신이 말짱한데 왜 저항하지 못하는 걸까.’한밤중, 하연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또다시 그 아찔한 광경인 걸 보자 그녀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눈을 감으면 남은 한쪽 다리는 지킬 수 있을 테니까...나이가 들었으니 더 이상 다치고 싶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진은영이 깨나 보니 유이준은 없었다.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어젯밤은 마치 꿈같았다. 유이준으로 가득한 춘몽...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속에는 안정감이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 일은 잠시 미뤄 두기로
연회 장소는 여기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원래 김 비서는 차로 진은영을 데려다주려 했지만, 진은영은 택시를 타겠다며 거절했다.C 성의 봄밤은 꽤 차가웠다.진은영은 얇은 패딩을 입고 있었지만, 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사실 그녀 스스로도 날씨가 추운 건지, 마음이 더 시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이준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그 스캔들을 보는 순간, 그녀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아무리 유이준을 좋아한다 해도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끝없는 기다림이 될 테니까.남자는 결혼 전에 길들이는 것이 좋다. 결혼한 후에 이런 일들로 시끄럽게 싸울 거라면 그런 결혼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파란색 택시가 천천히 다가오자 진은영은 몸을 굽혀 차에 탔다. 그녀가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자 기사는 감탄하며 말했다.“오늘 거기 아주 떠들썩하더라고요. 호텔 입구에 고급 차들이 줄지어 서 있고 예쁜 여배우들이 한가득 이에요.”진은영은 무표정하게 응수했다.그녀는 오랫동안 사업을 해왔기에 그런 자리의 음탕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별이를 데리러 C 성에 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유이준이 아무리 방탕하더라도 아이를 데리고 그런 곳에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문득 그녀의 마음속에 서글픔이 밀려왔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과 유이준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라 너무 불안했다...택시 뒤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따라왔다.김 비서였다.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그녀도 참 난감했다.하지만 그녀도 여자인 만큼 유이준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 그녀도 마음속으로 유이준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유 대표님이 진은영 씨를 선택했다면 마땅히 다른 여자들과는 거리를 두어야지 이렇게 진은영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잘못된 것이었다...반 시간 뒤, 진은영은 연회장에 나타났다.유이준은 임하민과 춤을 추고 있었는데 이 바닥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단지 춤 파트
조은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두 개의 핸드폰을 갖고 다니는 건가?유선우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애인이 셀카 한 장을 보냈다.아주 젊은 여자였는데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비싼 옷들을 입고 있으니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선우 씨, 생일 선물 고마워요.」조은서는 눈이 아플 때까지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유선우 곁에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이런 여자일 줄은 몰랐다. 마음이 아픈 외에, 남편의 취향을 알게 되어 놀랐다.그녀는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유선우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등 뒤에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선우가 물기에 살짝 젖은 채로 나왔다. 새하얀 샤워 가운은 선이 분명한 복근과 가슴을 가려주고 있었는데 더욱 섹시해 보였다.“언제까지 볼 거야.”그는 조은서 손에서 핸드폰을 뺏고 그녀를 힐긋 보더니 옷을 입기 시작했다.유선우는 아내에게 불륜을 들켜서 미안하다거나, 마음이 찔린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태도가 그의 경제 수입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조은서는 결혼 전에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지금은 그저 유선우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가정주부니까.조은서는 그 사진으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 따지고 들 수 없었다.나가려는 유선우를 본 조은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선우 씨,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유선우는 천천히 벨트를 매고 조은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아마도 아까 침대에서 가냘픈 목소리로 반응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또 하려고?”이건 사랑이 아닌 그저 관계일 뿐이다.유선우는 조은서를 아내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실수였을 뿐이고,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니까.시선을 거둔 유선우는 침대맡에 놓인 파테크 필리프 시계를 손에 차며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오 분 정도밖에 없어. 운전기사가 밑에서 날 기다리고 있고.”조은
6년이다. 조은서는 유선우를 6년 동안 좋아했다.힘이 빠진 조은서는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았다....유선우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금요일 저녁, 조은서의 친정에는 큰일이 생겼다.조씨 가문의 장남인 조은혁이 JH 그룹의 경제 범죄 사건 때문에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0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 충분한 시간이다.그날 밤, 조은서의 아버지는 급성 뇌출혈로 병원에 실려 갔고 상황이 긴급해 수술이 필요했다.조은서는 병원 복도에 서서 계속 유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유선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은서가 포기하려고 할 때, 유선우가 문자를 보냈다.여전히 짧은 문자였다.「H시에 있어. 일이 있으면 진 비서에게 연락해.」조은서가 또 전화를 걸자 유선우는 전화를 받았다. 조은서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선우 씨, 지금 우리 아빠가...”유선우는 그런 조은서의 말을 끊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얘기했다.“돈이 필요한 거잖아? 몇 번을 말해. 돈이 급한 거면 진 비서를 찾아가라고. 조은서, 듣고 있어?”...조은서는 고개를 들어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YS의약 그룹 대표 타워랜드 대절, 이성 친구를 위한 불꽃 축제」화면 속에는 불꽃이 예쁘게 터지고 있었다.젊은 여자가 휠체어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조은서의 남편인 유선우는 바로 그 휠체어 뒤에서 핸드폰을 쥔 채 그녀와 통화하고 있었다.조은서는 눈을 깜빡였다.그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선우 씨, 지금 어디예요?”유선우는 잠시 멈칫했다. 조사받는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대충 대답했다.“바빠.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 진 비서한테 연락해.”유선우는 울먹이는 조은서의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고개를 숙여 옆의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꽤 다정했다.조은서는 눈앞이 까매지는 기분이었다.아, 유선우에게도 부드러운 면이 있구나.등 뒤에서는 새엄마인 심
3일 후, 유선우는 B시로 돌아왔다.저녁, 어둠이 드리워진 별장에 검은색 차량이 들어와 시동을 껐다.운전기사가 내려서 차 문을 열었다.차에서 내린 유선우는 문을 닫았다. 물건을 들려고 하는 운전기사를 보며 담담하게 얘기했다.“내가 직접 올려갑니다.”거실에 들어서자 고용인들이 몰려왔다.“며칠 전, 장인어른께서 쓰러져서 사모님의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위층에 계십니다.”조씨 가문의 일은 유선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조금 무거운 심정으로 짐을 들고 올라와 침실 문을 여니 조은서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짐을 내려놓은 유선우는 넥타이를 풀면서 침대 옆에 앉아 조은서를 쳐다보았다.결혼 후, 조은서는 항상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물건 정리라거나, 디저트 만들기라거나. 만약 그녀의 예쁜 외모와 몸매가 아니었다면 유선우에게는 진짜 가정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한참이 지나도 조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출장을 다녀온 유선우는 피곤했다. 조은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옷장에서 가운을 가진 후 샤워실로 들어갔다.샤워를 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조은서처럼 나약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유선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이미 그의 짐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원래의 부드러운 아내로 돌아올 것이라고.유선우는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하지만 샤워실에서 나온 그가 원래 자리에 있는 캐리어를 봤을 때, 유선우는 조은서와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유선우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잡지나 들었다.한참 지나서야 시선을 들어 조은서에게 물었다.“아버님은 좀 어떠셔? 그날 밤은... 이미 진 비서를 혼냈어.”성의 한 톨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조은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거울 속의 유선우와 시선을 맞추었다.거울 속의 유선우는 선명한 이목구비에 우아한 자태를 가진 남자였다.한참을 보던 조은서는 눈이 뻐근해질 때야 입을 열었다.“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유선우는 놀라서 굳어버렸
“그래요, 우리 집이 어려우니까 매달 2천만 원씩 주고 있죠. 하지만 그 수표를 받을 때마다 나는 내가 싸구려 여자로 느껴져요. 당신 욕구나 받아주고 받는 돈 같다고요!”...유선우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정말 그렇게 생각해?”유선우는 조은서의 턱을 잡고 물었다.“당신처럼 남자한테 못 맞춰주는 여자가, 신음도 낼 줄 몰라서 고양이처럼 소리 내는 여자가 본인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혼하고 싶다고? 당신이 날 떠나서 어떤 삶을 살 것 같아?”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손길이 아파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하지만 유선우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차갑게 조은서의 약지를 봤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약지를 본 그가 물었다.“결혼반지는?”“팔았어요.”조은서는 슬픈 말투로 얘기했다.“그러니까 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그말을 마친 조은서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유선우는 그녀가 6년 동안 사랑한 남자다. 만약 그날 밤이 없었다면, 그날 화려한 불꽃을 보지 못했다면, 이곳에 남아서 사랑도 없는 혼인 생활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봐버린 이상, 조은서는 더는 유선우와 함께 지낼 수 없었다.이혼하면 이것보다 더욱 힘들지도 몰랐다. 유선우의 말처럼 상사의 눈치를 보며 몇백만 원의 월급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말을 마친 조은서는 천천히 자기 손을 빼냈다.그리고 캐리어를 꺼내 자기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유선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조은서의 여린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조은서가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이혼하겠다니.유선우의 마음속에는 화가 피어올랐다.그리고 그는 바로 조은서를 안아 들어 침대로 던져버렸다.조은서 위에 유선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선우는 조은서와 얼굴을 맞댔다. 눈과 눈, 코끝과 코끝이 닿았다. 뜨거운 기운이 둘 사이를 감쌌다.그러더니 유선우가 입술을 조은서의 귓가로 가져가더니 얘기했다.“
유선우의 이성의 끈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게다가 유선우 밑에 깔린 조은서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유선우는 조은서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 몸은 사랑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매우 당연하게 이 몸을 소유하고 싶었다.조은서는 유선우의 어깨를 밀며 흐트러진 호흡으로 얘기했다.“선우 씨, 저 요즘 약을 안 먹어서 임신할지도 몰라요.”그 말을 들은 유선우는 그대로 굳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두 사람의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참 지나서 그는 웃더니 얘기했다.“요근래 생각할 게 많았나 봐?”조은서의 반항은 유선우의 눈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선우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서랍에서 아직 포장지를 뜯지 않은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작은 상자에는 영어 자모 세 개가 적혀있었다.포장을 뜯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유선우는 신경 쓰지 않고 한 손으로 포장을 뜯고 몸을 숙여 조은서에게 입을 맞췄다. 조은서는 여전히 반항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은 계속 울렸다.결국 유선우는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받았다.전화를 건 사람은 유선우의 어머니인 함은숙이었다.함은숙은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선우야,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 돌아와 봐야 할 것 같아. 맞아, 그 애도 데려와. 할머님이 그 애가 만든 영양 찰떡이 먹고 싶으시대.”함은숙도 조은서를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말투는 차가웠다.유선우는 진유진의 몸을 한 손으로 누르며 그녀를 내리깔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곧 데리고 갈게요.”조은서는 힘이 풀려 침대에 퍼질러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유선우는 바지 지퍼를 올리고 조은서의 가녀린 뒷모습을 힐끔 보고 또 침대맡의 박스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이고는 먼저 나갔다.조은서가 내려갈 때, 유선우는 차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이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불빛이 없이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조은서는 흰 셔츠를 입고 긴 검은 치마까지 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