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고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폭주하고 있는 신연아였다.그녀는 두 명의 젊은 직원에게 붙잡혀 있었고 민여진과 해월이도 그곳에 있었다. 신연아는 온몸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마치 싸움을 벌이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나는 해월이를 한번 쳐다보고는 턱을 쳐들고 말했다.“놓아 줘요!”풀려난 신연아는 어깨를 털고 소매를 두어 번 매만지더니 따져 물었다.“한지아, 네가 또 신호연한테 꼬리 쳤지? 양심도 없는 년, 그 사람한테 뭐라고 한 거야?”나는 건이를 한 눈 쳐다보고 입술을 달싹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건이야, 신호연에게 전화해서 부인 좀 데려가라고 해. 여기서 망신당하기 전에. 저 여자는 부끄러워하지 않을지 몰라도 내가 다 창피하니까.”나는 대문 앞에서 다른 층의 사람들이 이미 몰래 이쪽을 엿보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너 그만 좀 잘난 척해. 네가 무슨 성인군자야? 이혼당한 천한 년이 무슨 자격으로 신 씨 집안에 간섭하는 거지? 네가 무슨 짓을 했길래 신호연이 집에 돌아가자마자 날뛰는 거야?"신연아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어젯밤 신호연이 내 집에서 돌아간 후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렸다.그녀가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와서 나를 찾는다는 것은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나는 표정 변화도 없이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왜 그렇게 화를 내? 무슨 일인데? 신 씨 집안일은 나랑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이곳에 와서 난리를 피우는 이유는 뭔데? 이유라도 있어야 하잖아.”나는 일부러 차분하게 그녀를 함정에 빠트렸다. 신연아는 지금 분노로 머리를 지배당한 상태라 냉정한 사고가 불가능했다. 이래서 충동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그만 연기해! 어젯밤 호연 씨가 널 찾아왔지?”신연아는 역시 걸려들었고 나에게 시험하듯 질문을 던졌다.“응, 찾아왔어!”나는 솔직하게 인정했고 마음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날렸다. 이 일은 숨길만 한 일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너 시어머니께서 널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그게 쉬운 일 같아? 넌 그 와중에 널 낳기만 하고 키울 줄 모르는 친엄마랑 한패로 괴롭히기나 하고. 양심 같은 건 없지? 강숙자는 신 씨 집안을 헤집어놓고 온통 소란스럽게 만들었잖아. 김향옥이 마음이 약해져서 널 키우지 않았다면 네가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어?”“한지아, 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우리 신 씨네 일에 네가 끼어들 자격이라도 있어?” 신연아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 사정이 밖으로 드러나면 가십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쓸 이유가 없었고 계속 말을 이었다.“잠이 안 올 때면 네 양심에 물어봐. 어릴 때부터 몇 번이나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김향옥이 널 포기한 적 있었어? 폭우를 뚫고도 널 병원에 데려가고, 자신은 옷 한 벌 사는 것조차 아끼면서 널 돌봤어.”“나 같은 외부인도 신 씨 집안에 들어온 뒤 여러 차례 널 돌보며 돈과 노력을 들였지. 넌 양심이라도 갖고 엄마를 대하는 거야?”사무실에 모여든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건물 대부분이 신연아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들이었고 명백한 정황에 누가 들어도 신연아가 양심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한지아, 여기서 멋대로 말하지 마! 뭐 대단한 척하는데, 사실 너도 별거 아니야. 넌 그저 신 씨 집안을 분열시키려는 거지. 너 같은 속물은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를 거라는 걸 명심해. 네 딸도 이번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조심해, 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신연아는 분노에 가득 찬 채 나를 가리키며 막말을 해댔다.나는 순간 무언가에 찔린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신연아,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나...”신연아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목을 굽히고 쏘아붙이는 내 눈빛을 피하려고 했다.“난 아무 말도
바로 그때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지아야, 그만해, 놓아줘!”신호연이였다. 그는 빠르게 달려와 나의 손을 강하게 잡아끌었지만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나 미친 듯 신연아에게 달려들었다.신호연은 나를 향해 화를 내며 크게 소리쳤다.“너 뭐 하는 거야? 한지아... 경고하는데, 그만해!”신연아는 신호연의 품에 안겨 크게 숨을 몰아쉬며 계속 기침을 해댔고 푸르딩딩하던 얼굴은 점차 하얗게 돌아왔다. 잠시 숨을 돌린 후, 그녀는 나를 가리키며 신호연에게 울부짖었다.“오빠, 저 여자 좀 때려줘! 봤지? 날 죽이려고 하는 거. 오래전부터 날 죽이려고 했었어, 꼭 날 위해 복수해 줘야 해!”나는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번 생에 이렇게 미친 듯이 화를 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심지어 신호연이 나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도 오늘처럼 이성을 잃지는 않았었다. 오늘 아무도 나를 막아설 수는 없었고 이에 신연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건이, 해월이와 민여진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두 나를 막아섰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진정시켰다.신호연은 이런 나의 모습에 깜짝 놀란 채 모두에게 소리쳤다.“당신들 뭐 하는 거야? 단체로 한 사람을 괴롭히는 거지? 그것도 나약한 여자를 괴롭혀? 정말...”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나는 단번에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 신호연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신호연, 왜 아이를 제주도에 보냈냐고 물었지?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납치당할 때의 공포를 잊게 하려고 보낸 거야. 콩이가 마음에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도록. 너 이 짐승 같은 여자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며? 그럼 제대로 단속해. 아니면 언젠간 후회할 날이 올 거니까!”“지아야 그만해. 너 이렇게 손댄 게 한번이 아니야. 너무 막 나가지 마.”신호연은 나를 보며 소리 질렀고 품에 신연아를 꼭 안고 있었다. 신연아는 여전히 자신의 목을 잡은 채 눈을 뒤집으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손찌검에 신연아는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그녀는 바닥에 누워 히스테리를 부리며 나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었고 모든 사람은 그녀의 추태를 보며 비웃었다.“꺼져! 다 꺼져! 신연아 너 잘 들어, 이번 일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 경찰도 분명히 철저히 조사할 거고, 네가 관련되어 있다면 가만두지 않겠어!”“신호연, 이 악마 같은 여자랑 당장 꺼져버려! 넌 참 보는 눈도 좋지, 어디서 이런 보물을 발견한 거야? 네 어머니가 그렇게 큰 병에 걸린 것도 다 네가 저지른 죄 때문에 업보를 받는 거겠어!” 건이는 신호연을 바라보며 소리 질렀다.“너 같은 놈은 하나도 두렵지 않아, 언젠간 너 같은 놈을 망쳐놓을 거야!”신호연은 분노에 찬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고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신연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고 들어갔고, 우리 사무실을 그대로 빠져나갔다.해월이는 얼른 모두에게 손짓하며 말했다.“다들 흩어져요! 일하러 갑시다!”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고 분노를 가라앉혔다.해월과 민여진도 따라 들어왔고 민여진이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대표님,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거예요? 분명 저 여자가 콩이 일과 관련되어 있다니깐요!”나는 의자에 기댄 채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경찰에 넘기는 건 너무 쉽잖아요. 가슴을 졸이면서 모든 걸 잃는 느낌을 느끼게 해줘야죠.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고 감옥에 보낼 거예요.”해월이 커피를 따라주며 말했다.“대표님, 진정하세요. 신연아도 좋은 결말은 없을 거예요. 경찰이 멍청하진 않잖아요.”민여진은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용기가 진짜 대단하던데요. 어린아이에게까지 손을 대다니.”나는 사실 그가 가담자일 뿐 주범은 아닐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납치범은 J 국 사람이었고 그녀는 절대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가담자라 할지라도 절대 용서할 수는 없었다.“난 괜
한 시간쯤 지나 나는 그 클럽을 떠나 미연이를 만나러 갔다.병실에서 문기태가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이 남자는 겉보기에는 차분하고 냉정해 보였지만 그날 밤 그의 패닉상태를 분명히 보았었다.둘은 서로에게 애정이 넘쳐 보였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문기태가 몸을 일으키며 미연에게 말했다.“먼저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금방 돌아올게요!”그는 나에게도 점잖게 인사를 하고 병실을 떠났다.나는 미연이를 바라봤다. 오늘 그녀의 상태는 훨씬 나아 보였고 얼굴에도 혈색이 돌았다.“혜선 언니는 어디 있어?” 미연이 나를 보며 물었다.“서강민 부인한테 일이 생겼나 봐, 어제 여길 떠나서 그쪽으로 갔어.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아직 연락을 못 했네.”나는 말을 하며 자리에 앉아 미연이를 응시했다.“네 얘기나 해줘. 새로운 진전이라도 있어?”미연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낯빛도 조금 창백해진 듯했다“너무 조급해하지 마. 좀 더 여유를 가져.”나는 그녀를 위로해 줄 수밖에 없었고 주제를 바꾸려고 했지만,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사실, 그와 함께 있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는 해왔어. 그저 남미주가...”그녀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고 있었다.남미주가 어떤 사람인가? 평범한 여자일지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데 하물며 남미주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혼인을 지키려는 것은 여자에게는 가장 흥분되고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사실, 그들은 단지 약혼 상태일 뿐, 법적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미연이 무기력하게 말했고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러니까, 실제로 혼인신고는 안 했고, 결혼도 안 한 상태라는 거야?”“맞아.”미연이 미소지으며 말했다.“문기태가 나한테 말했어. 그가 사랑하는 이유는 자유롭기도 하고 책임감도 있어서라고 했어. 날 수동적인 상황에 빠뜨리지 않겠다고 말해줬거든.”“그전에는 몰랐어?”나는 의심스러워졌다.“전에는 몰랐어.
미연이는 몸을 일으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지아야, 똑똑히 알아둬, 언젠간 그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 거야! 신호연이 신연아에게 드는 감정은 보호 욕구에 가까워. 네 앞에서는 늘 자기 부족함을 느끼고, 마음속으로 압박과 불균형을 느끼고 있었지. 네가 자본을 모아 신흥을 설립했을 때부터, 모든 결정에서 그보다 한 수 위였지.“난 사실 그런 의도가 없었잖아!”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솔직하게 대했던 것들이 그에게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니.“슬프지만 현실이야. 그는 본능적으로 널 두려워하고 있지만 너에게 복종하고 싶지는 않아 해. 그래서 항상 그 상태를 바꾸고 싶어 했지. 진정한 사내대장부처럼 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할 능력은 없었잖아.”미연의 말에 나도 동의를 표했다.“거기에 신연아의 의도적인 유혹까지 더해졌지.”“맞아! 그래서 그는 신연아에게서만 자신의 강인함을 찾을 수 있었던 거야. 여자들이 그에게 의존하고 그를 존경하는 것을 즐기면서 허영심을 충족시키려고 했어.”“그래서 네가 아이를 낳을 때, 혼자 큰일을 성사시키고 싶어 했어. 그게 그가 너를 뛰어넘고 싶은 내면의 소원을 보여주는 거야. 그건 단지 신호연만의 약점이 아니라 신 씨 집안의 약점이기도 해. 그래서 그들은 너나 다른 사람들이 누가 신흥을 일으킨 진짜 주인인지 언급하는 걸 두려워하거든.”“진짜 소심한 남자라니까.” 나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이젠 신연아가 한술 더 떠 그 남자의 총애를 등에 업고 무례하게 굴고 있잖아. 마침내 그녀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고 자신이 이겼다고 의심의 여지 없이 생각하고 있잖아. 그래서 그렇게 오만해진 거야. 자신이 뭔가 믿을 뒷배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신호연의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고 하잖아.”“신호연도 그렇게 감싸주더라고!”나는 말을 이었다.“오늘 모두의 앞에서 신연아를 나약한 여자라고 말하더라고.”“너 좀만 기다려봐. 신호연은 조금씩 절망에 빠질 거야. 지금은 그가 강세에 처해 있다는 생각에 널 이겼다는 만족감에
그날 오후 우리 셋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시간이 늦어져 배현우가 전화로 저녁을 먹으러 나가자고 했고 나는 그제야 일어나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갔다.바로 그때, 문기태도 병실로 돌아왔다.계단을 내려가자, 배현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든지 그는 항상 군계일학처럼 무리 속에서 빛이 나는 존재였다.나를 발견하자 그의 차갑던 얼굴이 단번에 부드럽게 풀어졌고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피곤하죠?”“배고픈 건 사실인 것 같아요!”나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그럼 빨리 배 채우러 가야죠!”그는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야 집에 가서 내 배도 채워줄 힘이 있죠!”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배현우에 나는 바로 가시를 세웠다.그는 샐쭉 웃으며 나를 품에 끌어안고는 자신의 차에 태웠고 내 차는 그의 부하가 집까지 운전해 줬다.식당에 앉자마자 누군가가 다가왔고, 고개를 들어보니 우울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원수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바로 한소연이었다.나는 피하고 싶은 사람과 사건일수록 하필 반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한탄했다.서울은 하도 작아서 어디를 가도 원치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원망스러웠다.한소연은 나를 노려보더니 배현우를 보고는 곧 웃음을 짓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 언제 돌아온 거예요? 왜 저는 몰랐죠?”배현우가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언제부터 내 일정을 소연 씨에게 보고해야 했죠?”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피곤해졌다.“그게 아니라,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다음 시즌 홍보 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그녀는 한 발 뒤로 물러나 일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배현우의 표정이 불쾌해지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다음 시즌이요? 다음 시즌 소연 씨와 관련된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게다가, 업무는 사무실에서 이야기해야죠.
“나중에 말해줄게요!”장난기 섞인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 모습마저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내가 계속 멍하니 그를 바라보자 그가 눈썹을 씰룩거렸다.“질투하는 거예요?”나는 얼굴이 붉어졌고 황급히 마음을 감추며 말했다.“그럴 리가요!”그는 과일주스를 따라 내 앞에 조심스럽게 놓고는 깊은 눈빛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말했다.“잠깐만요!”그는 손을 내밀어 내 턱을 받치며 손가락으로 내 입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다정하고 애정 넘치는 행동이었다.나는 어색하게 피하려고 했지만, 한소연의 시선이 계속 우리 쪽을 향해있어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어려웠다.나는 확신했다. 우리의 모든 움직임이 아마 그녀의 뇌리에 똑똑히 박혔을 것이다.“뭐가 두려워서 그래요?”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담담하게 물었다.“오늘 인터넷에 올라온 것들 못 봤어요?”나는 의도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방금 그의 행동에는 의도가 다분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그게 왜요?”그는 말하며 일부러 랍스터를 집어 소스에 푹 찍은 뒤 내 입에 가져다줬고 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내가 직접 할 수 있으니 이러지 말아요!”“내가 좋아서 그러는 걸요!” 그는 고집스럽게 다시 내 입가로 가져다 대며 말했다.“이렇게 먹이는 게 좋아요! 내 꼬마 공주는 내가 아껴줘야죠!”그의 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꼬마 공주라니, 너무 과장된 것 같았다.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 그가 내 입에 넣어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동시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받아먹지 않는다면 또 너무 작위적으로 보였다.그가 내 입에 넣어준 음식을 씹으며 나는 무기력하게 말했다.“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소문에 불을 붙이고 있는 거라니까요!”“그럼 더 바쁘게 만들어야죠!” 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그의 말에 나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 웃었다. 한소연의 눈에 이 모든 행동이 불쾌하게 보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내가 어찌할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