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가 윙 울리는 듯했다. 간암? 게다가 말기라니.이 몇 글자가 순간적으로 내 손을 차갑게 했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 병이 났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벌써 막막해 왔다.나는 의사가 내게 치료 방안을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그는 결국 큰 희망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비록 지금은 내가 김향옥의 친척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녀는 콩이의 할머니이고, 신씨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콩이를 아껴주는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난다는 말에 마음이 답답했다.콩이가 그녀의 품에 안겨 목을 껴안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듯 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그녀가 나를 어떻게 대하든, 함께 살아온 기억들은 여전히 좋았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을 것이었다.나는 내가 어떻게 진료실을 나왔는지도 몰랐다. 시어머니가 내가 나오는 걸 보고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그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잊을 뻔했다."지아야, 의사가 뭐라고 했어?"그녀는 어두운 눈으로 나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쳐다보았고 걱정스러운 표정도 조금 보였다."아니에요. 의사 선생님은 제가 아는 선생님이에요. 사적으로 몇 마디 나눴어요. 할머니는 괜찮아요. 의사가 약을 처방해 주었으니, 평소에 잘 먹고 푹 쉬라고 하셨어요. 자신을 속이지 말고 항상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야 해요.""약을 받고 제가 모셔다드릴게요.""아니, 나 혼자 갈 수 있어!"그녀는 끈질긴 태도를 보였다."약을 처방받았는데 어떻게 먹는지 알려드릴게요."그녀를 데리고 가 약을 받고 나서 홀에 앉아 종류마다 먹는 방법을 약병에 적어 그녀의 손에 건네주면서 말했다. "제시간에 약을 먹고 잠을 잘 주무세요. 불편하면 저한테 전화해도 돼요. 물론 그들이 시간이 없는 정황에 말이죠.”"알겠어." 그녀의 눈에는 초인종을 눌렀을 때의 날카로움이 사라지고 약자 특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그럼 콩이는...”그녀는 여전히 콩이를 잊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콩이를 데려와서 만
신예 건축의 아래층에서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시어머님이 검사한 서류를 챙긴 후 그것들을 들고 차에서 내려 회사로 걸어 들어갔다.이곳에 오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인데 처음은 딸의 학교를 옮기려고 가족관계서를 요구하러 왔을 때였다. 그때는 건물 전체가 난리났었다.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겠다. '나도 정말 대단해, 이런 식구들을 만나서... 싸우지도 않고도 전사가 될 수 있겠어.''내가 오기만 하면 여기는 분명 난리가 날 거야.'아니면 신연아를 만나 도망치지 못할 또 다른 악전고투가 될 수도 있었다.그동안 신씨네 집안이 어떤 상황이었길래 김향옥이 간암까지 걸리게 되었는지,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것은 안봐도 뻔했다.신연아와 강숙자, 모녀 둘 다 보통이 아니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신호연은 눈이 멀었나? 이 모녀가 이 정도로 엄마를 괴롭히는데, 어떻게 눈감아 주고 그냥 넘어갈 수 있어? 이게 우리 엄마라면, 나라면 반드시 해명을 받아야 해.'정말 사람을 너무 업신 여겼다. 김향옥 자신이 평생을 억울하게 살아온 탓이었다. 정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이게 나라면 그가 어떻게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하긴, 나도 이런 일은 할 리 없었고.역시 신예 건축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이 놀라서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았고, 외계인을 보기라도 한 듯 시끄럽던 큰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나도 그들의 표정을 신경 쓰기가 귀찮아서 일만 말하고 갈 생각이었다.신호연의 사무실에 도착해 문 앞에 있는 비서에게 물었다."신호연 씨 계신가요?”비서는 새로 온 사람이었다. 통통하고, 인형 같았고 귀여운 얼굴에 큰 눈을 깜박이며 나에게 물었다."예약하셨나요?”분명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아니요, 급한 일이에요."이렇게 말하며 나는 손을 뻗어 문을 두드렸다.비서의 말을 듣자마자 그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비서는 내가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문을 두드리는 걸 보고 약간 어리둥절해서 얼른 일어나 문가에 섰다.
신연아는 신호연의 물음에 곧바로 책상으로 갔다."한지아, 너 무슨 뜻이야? 병원을 왜 가? 어머님께 뭘 한 거야?"그 사람들도 모두 나를 쳐다보는데, 신연아의 말은 오해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아마 그 사람들은 정말 내가 할머니를 어떻게 했는지 알고, 모두 멈춰 서서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이걸 가지고 병원에 가서 상담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아.”나는 신호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서류에서 의사 카드를 찾아 신호연에게 건넸다. "이분이 주치의님이고 전문가셔.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봐. 당신의 어머니가 간암 진단을 받았어. 게다가 말기!"내 말은 마치 폭탄처럼 신호연의 사무실에서 터졌다. 모두가 숨을 들이쉬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 해하던 신호연을 바라보았다.“뭐라고?”신호연은 벌떡 일어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누구? 누가...간암이라는 거야?”"한지아,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멀쩡한 사람을 데려다가 저주하다니, 그러고도 사람이야?"신연아는 불쾌해하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나서 신호연을 바라보며 말했다."한지아가 무슨 말을 해도 오빠는 믿기만 하지, 한지아는 나쁜 마음으로 이러는 거야! 우리가 편히 지내지 못하게!”신호연은 신연아의 말에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믿거나 말거나. 나는 이미 병원으로 데리고 갔고, 약도 처방받았고, 방금 집으로 돌려보내고 오는 길이야. 나는 시어머니에게 병세를 알리지 않았어, 네가 아들이니까 네가 결정해. 그럼 난 이제 너에게 맡기고 가볼게.”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돌아섰다. 여기에서 1분도 더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나는 가고 싶었지만 신연아가 허락하지 않았다."거기 서, 한지아. 네가 뭔데 어머님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 봐 어머님을 핑계로 대려나 본데 어머님을 병원으로 데려간다고 해서 신씨 가문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신연아가 나를 향해 날뛰고 있었다.전지훈이 뒤에 앉아 재밌다는 듯이
"그만!" 신호연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때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고통, 그리고 조금의 어쩔 수 없었다는 듯한 표정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다 입 다물어!”그의 이 고함은 나로 하여금 그를 경멸하게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지금까진 뭐 하다가 이제 와서?'"신호연 너 눈멀었어? 내가 맞는 걸 못 봤어? 한지아가 날 아주 심하게 괴롭히는데, 아직도 그걸 보고 있어?"신연아는 서강훈이 감싸고 있는 나를 가리키며 소리를 쳤다. "서강훈, 너 다 컸다? 누가 너에게 돈을 줬는지 모르니?”나는 서강훈을 한쪽으로 끌어당겨 신연아를 노려보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내가 때린 건 너고 네가 또 나한테 덤비면, 나는 또 때릴 거야.”"네가 감히!"신연아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나를 향해 소리쳤다."해 봐!"나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발걸음을 내디뎠다.'나는 진작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어, 앞으로 기회만 있으면 널 때릴 거야. 어쩔건데?'신호연이 쫓아내려고 했던 그 몇 명은 사실 한 명도 가지 않았고,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며 즐거워했지만, 조금 놀라기도 했다.'아무도 내가 사람들 앞에서 신연아의 뺨을 때릴 줄은 몰랐겠지.'나는 몇몇 사람들의 얼굴에 있는 통쾌함을 보았다.나는 당연히 이런 자리를 헛되이 보지 않았고 신연아를 가리키며 말했다."네가 또 함부로 지껄이면 네 입을 찢어버릴 거야. 너는 네 똥을 치우면서 널 키운 양어머니를 어떻게 대하는 거니? 널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니?”신연아는 도리가 없음을 알고 자신의 입을 손으로 쓱 문질렀다. 그러자 입가가 새빨개졌다.나는 못 본 척하고 계속 말했다."양어머니든 신호연 엄마든 너의 시어머니든 그렇게 대해서는 안 돼. 그녀의 집까지 네가 가져가서 하루도 너를 키우지 않은 너의 친어머니에게 주었어. 너희 모녀가 할머니를 심하게 때렸잖아. 너 여기서 맹세할 수 있어? 할머니를 건드린 적 없다고?”나는 신
“한지아, 너무 그러지 마!”신연아는 막무가내였다.“네가 신씨 가문이랑 무슨 상관이야?”“그래, 난 이제 신씨 가문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난 단호하게 이 부분을 인정했다. 그러고 나서 신호연을 다시 쳐다보며 계속 세뇌를 했다.“신호연, 우리 결혼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는 사람 없어. 나는 신씨 가문의 일을 상관하지 않아도 돼. 당신 엄마도 마찬가지야, 시어머님은 당신이 나한테 싸움을 거는 것을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말리지 않았어. 신씨 가문의 사람은 모두 양심이 없어.”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전지훈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경멸의 눈빛으로 신호연을 쳐다보았다.신호연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하지만 지금 시어머님의 상태가 불쌍해 보여. 그게 바로 내가 그녀를 병원에 데려간 이유야. 신연아의 말처럼 이간질하고 싶은 게 아니야. 새 신발을 신고 개똥을 밟을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아.”나는 의도적으로 신호연의 심기를 건드렸다.“하! 신씨 가문에 돌아가려 한다고? 나는 당신이 바람을 피워줘서 정말 고마워. 당신네 집안이라는 불구덩이에서 탈출하게 해줬잖아. 당신들처럼 징그러운 것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참 다행이야! 난 지금 내 딸을 위해 덕을 쌓는 거야. 애가 당신들처럼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되게하고 싶지 않아.”“됐어! 그만해!”신호연은 나를 보고 힘없이 소리쳤으나 곧 의자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표정으로 화를 참았다. 나는 그가 체면을 차리기 위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지금 여기에 사람이 없다면 그는 울어버렸을 것이다.자기 엄마가 심한 병에 걸렸는데도 냉담하게 무시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신연아를 제외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향옥은 그녀의 친엄마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신호연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더는 변명을 못하고 있는 신연아를 바라보았다.“신연아, 잘 들어. 만약 네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한다면, 나는 반드시 네가 후회하게 만들어 줄 거야. 너의 새언니였을 때도, 지금 아무 상관
병원에 도착하니 고급 병동 구역의 경계가 더욱 심해지고 1층에서부터 이미연의 병실 앞까지 사람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지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렇게 큰 소란을 피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마음이 불안해서 빠른 걸음으로 병실에 도착했는데, 병실에는 도혜선만 있을 뿐 문기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이미연은 깨어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허약했다.“왜 이렇게 늦었어?”분명 그녀는 진작에 내가 오기를 바랐다.“아, 말도 마!”김향옥 얘기를 하며 투덜거렸다.두 사람 모두 내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했고 도혜선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쯧쯧... 순전히 신연아에게 당한 거네. 그럴 운명일지도 몰라. 전생에 이 노부인이 신연아에게 빚을 진게 틀림없어. 그래서 이번 생에 신연아가 빚을 받으러 온 거지.”이미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녀도 불쌍하지 않아. 신씨 가문에는 동정할만한 사람이 없어. 지아야, 또 선심 쓰지 마, 다 쓸데없어.”나는 이미연의 이 말을 이해할수 있었다. 처음에 신씨 가문이 나와 콩이에게 했던 악행을 이미연은 모두 눈여겨보았기 때문이었다.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이미연의 병상으로 다가가서 물었다.“무슨 일이야?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동원되다니. 병동 전체가 모두 사람들로 붐벼.”도혜선은 나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남미주가 아침에 왔었다고 하는데 들어오지 못했어. 문기태가 밖에서 막았대. 그녀가 무리하게 쳐들어갈까 봐 사람을 더 보낸 것 같아. 문기태는 지금쯤 밖에서 담판하고 있을 거야!”“언젠가 한 번은 나서야지.”나는 이미연의 손을 잡고 그녀를 위로했다.“문기태는 남자야. 이 일을 잘 처리할 거야. 이건 그에 대한 시련이기도 하잖아.”문기태의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걸 나도 속으로 알고 있었다.사실 지난번에 문기태를 만났던 일을 나는 줄곧 이미연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미연의 행동으로 봤을 때 문기태도 분명 이미연에게 말하지
“그렇게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집안의 일이니 넌 그럭저럭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다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야.”도혜선이 입을 열어 이미연을 달랬다.“명철보신을 배워야 문기태를 지지할 수 있어. 그가 너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다만 그의 상대가 너무 강해. 이게 내가 항상 걱정했던 거야.”나는 여전히 내 생각을 고집했다.갑자기 전화가 울려서 얼른 핸드폰을 들여다봤더니 장영식이었다.나는 돌아와서 아직 그와 통하지 않고 이미연만 돌보고 있었다.“여보세요! 영식아!”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돌아왔어?”장영식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태도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응! 미연이에게 일이 생겨서 급히 돌아왔어!”나는 대충 설명했다.“너 이미 울산에서 돌아왔어?”“이미연이 왜?”장영식의 말투는 그제야 다급함을 알아챘듯 했다.이미연은 나를 보고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더는 다른 사람이 그녀의 일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서둘러 말했다.“작은 일이 생겼었는데, 이미 괜찮아졌어. 내일 회사에 갈 거야.”“응, 그래! 그럼 내일 회사에서 봐. 나 돌아온 지 며칠 됐어, 그쪽은 아주 순조로워. 다음 주에 민여진과 함께 건축 자재 전시회에 갈 예정이야. 가기 전에 한 번 만나자. 상의해야 할 일이 좀 있어.”장영식은 내게 전화 한 목적을 말했다.“콩이의 상황은 어때?”“콩이는 괜찮아. 후유증이 있을까 봐 제주도에 계속 머물러 있는 거야. 하지만 곧 돌아올 거야. 어차피 유치원에 가야 하잖아.”나는 콩이 할머니의 일을 숨겼다.“넌 괜찮아?”그는 열심히 일하는 중인 것 같았는데 그제야 내 정황을 물었다.“난 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나는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영식에게 항상 성의가 부족했다. 그는 항상 한발 늦었는데 나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이미연은 어디 있어?”장영식이 갑자기 물었다.“너랑 같이 있어?”나는 이미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미연이랑 같이 있어.
시간이 아직 일러서 골드 빌리지에서 가장 가까운 슈퍼에 갔겠다. 집에 채소가 다 떨어져서 좀 사가야 했다.진열대에 있는 신선한 채소가 마음에 들어서 나는 채소와 과일을 잔뜩 사들고 좋은 소고기 한 조각을 골라 무작정 슈퍼를 돌아다녔다.배현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짐작하며 내가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마음이 달콤했고 희망으로 차올랐다.하지만 나는 어딘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면 또 아무 일도 없어서 조금 의아했다.계산할 때, 예쁜 소녀 한 명이 작은 노트를 들고 수줍은 얼굴로 내 앞으로 달려와 용기를 낸듯한 모습으로 나에게 말했다.“한소연 씨, 사인 좀 해줄래요?”한소연...나는 의아하게 소녀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었다. 나를 한소연으로 생각한 것이다.여자아이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또 이따금 내 뒤를 쳐다보았는데, 내 뒤에는 여자아이와 비슷한 나이의 풋풋한 소년이 서 있었다.나는 돌아서서 앞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아가씨,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아요! 저는 당신이 좋아하는 한소연이 아니에요.”“네?”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한듯했다. 뒤에 있는 남자아이가 앞으로 나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한소연 씨,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저희는 사인을 받고 싶을 뿐이에요.”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전 한소연이 아니에요,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요.”두 사람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자 주변 사람들도 술렁거렸다.“어머, 한소연 아니야?”“뭐? 한소연이 우리 마트에 온 거야? 설마?”“못 올 게 뭐 있어, 다 먹고 사는 인간인데 그녀도 먹고 살아야 되잖아!”“그런 일들은 매니저가 하는 거 아니야?.”“하긴...”눈 깜짝할 사이에 술렁이는 사람이 많아져서 나는 얼른 계산하려고 줄을 섰다. 사람들 속에서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내가 한소연과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