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집안의 일이니 넌 그럭저럭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다치지 않는 것이 상책이야.”도혜선이 입을 열어 이미연을 달랬다.“명철보신을 배워야 문기태를 지지할 수 있어. 그가 너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다만 그의 상대가 너무 강해. 이게 내가 항상 걱정했던 거야.”나는 여전히 내 생각을 고집했다.갑자기 전화가 울려서 얼른 핸드폰을 들여다봤더니 장영식이었다.나는 돌아와서 아직 그와 통하지 않고 이미연만 돌보고 있었다.“여보세요! 영식아!”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돌아왔어?”장영식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태도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응! 미연이에게 일이 생겨서 급히 돌아왔어!”나는 대충 설명했다.“너 이미 울산에서 돌아왔어?”“이미연이 왜?”장영식의 말투는 그제야 다급함을 알아챘듯 했다.이미연은 나를 보고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더는 다른 사람이 그녀의 일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는 서둘러 말했다.“작은 일이 생겼었는데, 이미 괜찮아졌어. 내일 회사에 갈 거야.”“응, 그래! 그럼 내일 회사에서 봐. 나 돌아온 지 며칠 됐어, 그쪽은 아주 순조로워. 다음 주에 민여진과 함께 건축 자재 전시회에 갈 예정이야. 가기 전에 한 번 만나자. 상의해야 할 일이 좀 있어.”장영식은 내게 전화 한 목적을 말했다.“콩이의 상황은 어때?”“콩이는 괜찮아. 후유증이 있을까 봐 제주도에 계속 머물러 있는 거야. 하지만 곧 돌아올 거야. 어차피 유치원에 가야 하잖아.”나는 콩이 할머니의 일을 숨겼다.“넌 괜찮아?”그는 열심히 일하는 중인 것 같았는데 그제야 내 정황을 물었다.“난 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나는 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영식에게 항상 성의가 부족했다. 그는 항상 한발 늦었는데 나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이미연은 어디 있어?”장영식이 갑자기 물었다.“너랑 같이 있어?”나는 이미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응. 미연이랑 같이 있어.
시간이 아직 일러서 골드 빌리지에서 가장 가까운 슈퍼에 갔겠다. 집에 채소가 다 떨어져서 좀 사가야 했다.진열대에 있는 신선한 채소가 마음에 들어서 나는 채소와 과일을 잔뜩 사들고 좋은 소고기 한 조각을 골라 무작정 슈퍼를 돌아다녔다.배현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짐작하며 내가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자니 마음이 달콤했고 희망으로 차올랐다.하지만 나는 어딘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았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면 또 아무 일도 없어서 조금 의아했다.계산할 때, 예쁜 소녀 한 명이 작은 노트를 들고 수줍은 얼굴로 내 앞으로 달려와 용기를 낸듯한 모습으로 나에게 말했다.“한소연 씨, 사인 좀 해줄래요?”한소연...나는 의아하게 소녀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었다. 나를 한소연으로 생각한 것이다.여자아이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또 이따금 내 뒤를 쳐다보았는데, 내 뒤에는 여자아이와 비슷한 나이의 풋풋한 소년이 서 있었다.나는 돌아서서 앞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아가씨,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아요! 저는 당신이 좋아하는 한소연이 아니에요.”“네?”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한듯했다. 뒤에 있는 남자아이가 앞으로 나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한소연 씨,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저희는 사인을 받고 싶을 뿐이에요.”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전 한소연이 아니에요,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요.”두 사람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자 주변 사람들도 술렁거렸다.“어머, 한소연 아니야?”“뭐? 한소연이 우리 마트에 온 거야? 설마?”“못 올 게 뭐 있어, 다 먹고 사는 인간인데 그녀도 먹고 살아야 되잖아!”“그런 일들은 매니저가 하는 거 아니야?.”“하긴...”눈 깜짝할 사이에 술렁이는 사람이 많아져서 나는 얼른 계산하려고 줄을 섰다. 사람들 속에서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내가 한소연과
내가 머뭇거리자 배현우는 잘생긴 얼굴에 의아한 기색을 띠고 물었다.“왜요? 싫어요?”나는 핑계를 하나 대며 콩이 할머니의 일을 말했다.“요즘은 콩이랑 더 친하게 지내도록 해야 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김씨 아주머니는 여기 살아도 돼요, 아래층에 방이 많아요. 김씨 아주머니가 오는 걸 저도 매우 환영해요. 콩이든 우리 엄마든 친구가 생겨서 좋고 집안일도 분담할 수 있어요, 고마워요.”배현우는 미소를 지으며 평소와는 달리 웃기만 할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그래요, 그럼 할머니를 잘 모시고 나중에 정하도록 해요.”밥을 먹고 난 후, 우리 둘은 소파에 기대어 모처럼 안일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제주도 때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콩이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초인종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우리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웃으면서 누굴지 궁금했다.그가 나를 놓아주자 나는 얼른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는데, 뜻밖에도 신호연이었다.나는 마음속으로 정말 원수가 따로 없다고, 정말 어찌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배현우가 있으니 나는 안심하고 문을 열었고 신호연이 문 앞에 나타났다.그의 안색이 창백해 보였는데, 나는 그가 엄마의 병세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고 생각했다.나를 보자 그는 씩 웃더니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예전처럼 나를 불렀다.“지아야!”나는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일인데?"그러면서 나는 몸을 옆으로 비켰다. 이건 그가 이혼하고 처음으로 집에 들어온 것이다.들어와 거실을 둘러본 그는 우리 가족이 보일 줄 알았는데 나른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 배현우만 있는 것을 보고 눈빛이 움츠러들었고, 언짢은 표정으로 나를 힐끗 쳐다보며 들어올까 말까 망설였다.나도 그에게 사양하지 않고 안쪽으로 걸어가다가 스쳐 지나갈 때 담담하게 말했다.“말해봐, 무슨 일이야?”그는 그제야 신발을 바꿔 신고 들어와 소파에 다가가 배현우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배현우 씨.”배현우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가볍게 대답하고 나서 몸을 일으키며
“신연아랑 똑같게 굴지 마, 철없는 애랑 뭔 싸움을 벌이려는 거야?”신호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미안! 걔가 철이 있든 없든 그건 네가 알아서 이해해 줄 부분이고, 난 그럴 의무가 없거든. 나도 걔랑 싸울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 제발 말 좀 똑바로 해줄래?”나는 신호연의 말을 가로챘다.“오늘 네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간 일로 깊게 생각하지 마. 네 엄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내 아이한테 영향 줄까 봐 그런 거니까.”“맞다! 콩이는?”인제야 콩이가 생각난 듯 질문했고 나는 그런 신호연을 힐끗 쳐다봤다.완전 0점짜리 아빠였다. 신호연의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어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제주도에 있어!”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제주도라고?” 신호연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지더니 캐물었다.“제주도에는 왜 갔는데? 너 설마 다른 남자랑 단둘이 있으려고 부모며 아이며 먼 곳으로 보낸 거 아니야? 그 더운 곳에 어린애가...”“다른 일 없지? 없으면 돌아가 봐!”나는 이 추악한 남자의 얼굴을 더는 봐줄 수가 없어 신호연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는 내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분노가 가득한 눈빛을 쏘아댔지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지아야, 내가 볼 땐 콩이 문제에서는 내 의견도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 어쨌거나 난 콩이 아빠니까!”신호연은 억지를 부리며 자신의 지위를 내세웠다.“당신이 아이 아빠라고? 그 역할이나 제대로 해오긴 했어?”나는 즉시 반박했다.“당신이랑 더 싸우고 싶지 않아. 내 집에 찾아와서 날 괴롭히지 마,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 신 씨네 일은 당신이 알아서 해, 날 찾아오지 말고.”“하지만 치료를 포기했어!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고!”신호연이 갑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해탈한 듯 말했다.“죽을 준비가 됐다고 하더군, 살 만큼 살았다고...”나는 마음이 무거워지며 그의 말에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너 진실을 말해준 거야?”“...연아가... 걔가 말했어!”신호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신호연은 그저 고개를 푹 떨구고 듣기만 할 뿐 반박할 능력조차 없었다.“남자가 돼서 자기 엄마조차 보호할 줄 모르는 거야? 이런 대가를 받기 위해 신연아를 키운 건 아닐 텐데. 신연아... 당신 신 씨 집안 모두가 걔한테 빚이라도 졌어?”나는 뼈 있는 말을 던졌다.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나는 도저히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정말, 애초에 왜 이런 멍청이를 좋아했던 건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너 진짜로 어머니가 평생 얼마나 굴욕적인 삶을 살았는지 이해 못 해? 남편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한 집안에서 내연녀와 같은 침대를 쓰고, 결국엔 그 불륜의 결과인 아이를 억지로 키워야 했어. 이제 신연아라는 양심도 없는 멍청이가 그녀에게 평생 수치를 준 여자와 손잡고 그녀를 괴롭히고 있잖아. 병이 생기는 게 정상 아닌가?”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입에 담지 못할 말까지 내뱉었고 자신도 깜짝 놀랐다.신호연은 그저 나를 바라보며 화를 내는 나에게 아무 말도 반박할 수 없었다.“돌아가서 신연아에게 물어봐. 왜 꼭 병원에 보내야 하는지, 걔 의견 좀 들어볼래? 양심을 되찾아서 제대로 치료받고 목숨을 구하게 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나는 신호연을 노려봤다.그가 여전히 말이 없자 나는 갑자기 정신을 놓아버렸다.“아닐걸! 걘 그냥 당신 어머니를 병원에 버려두고 방치하려는 거야. 신호연 너 머리에 총 맞았니? 어머니가 죽으면 너한텐 더는 엄마 따윈 없어.”나는 말할수록 더 화가 났고 거의 소리를 질러댔다.“이걸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꺼져, 꺼져버려!”신호연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고 그의 눈에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 잘생겼던 얼굴은 이제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지아야, 화내지 마. 나... 그럼 어머니 뜻대로 할게. 하지만 엄마가 콩이를 보고 싶다고 했어!”신호연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당신들 누구도 콩이를 보는 걸 막은 적 없어. 하지만 당신들은 정말로 아이가 보고 싶었던 적 있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고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폭주하고 있는 신연아였다.그녀는 두 명의 젊은 직원에게 붙잡혀 있었고 민여진과 해월이도 그곳에 있었다. 신연아는 온몸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마치 싸움을 벌이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나는 해월이를 한번 쳐다보고는 턱을 쳐들고 말했다.“놓아 줘요!”풀려난 신연아는 어깨를 털고 소매를 두어 번 매만지더니 따져 물었다.“한지아, 네가 또 신호연한테 꼬리 쳤지? 양심도 없는 년, 그 사람한테 뭐라고 한 거야?”나는 건이를 한 눈 쳐다보고 입술을 달싹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건이야, 신호연에게 전화해서 부인 좀 데려가라고 해. 여기서 망신당하기 전에. 저 여자는 부끄러워하지 않을지 몰라도 내가 다 창피하니까.”나는 대문 앞에서 다른 층의 사람들이 이미 몰래 이쪽을 엿보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너 그만 좀 잘난 척해. 네가 무슨 성인군자야? 이혼당한 천한 년이 무슨 자격으로 신 씨 집안에 간섭하는 거지? 네가 무슨 짓을 했길래 신호연이 집에 돌아가자마자 날뛰는 거야?"신연아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어젯밤 신호연이 내 집에서 돌아간 후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렸다.그녀가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와서 나를 찾는다는 것은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나는 표정 변화도 없이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왜 그렇게 화를 내? 무슨 일인데? 신 씨 집안일은 나랑 상관없어. 하지만 네가 이곳에 와서 난리를 피우는 이유는 뭔데? 이유라도 있어야 하잖아.”나는 일부러 차분하게 그녀를 함정에 빠트렸다. 신연아는 지금 분노로 머리를 지배당한 상태라 냉정한 사고가 불가능했다. 이래서 충동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그만 연기해! 어젯밤 호연 씨가 널 찾아왔지?”신연아는 역시 걸려들었고 나에게 시험하듯 질문을 던졌다.“응, 찾아왔어!”나는 솔직하게 인정했고 마음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날렸다. 이 일은 숨길만 한 일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너 시어머니께서 널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그게 쉬운 일 같아? 넌 그 와중에 널 낳기만 하고 키울 줄 모르는 친엄마랑 한패로 괴롭히기나 하고. 양심 같은 건 없지? 강숙자는 신 씨 집안을 헤집어놓고 온통 소란스럽게 만들었잖아. 김향옥이 마음이 약해져서 널 키우지 않았다면 네가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겠어?”“한지아, 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우리 신 씨네 일에 네가 끼어들 자격이라도 있어?” 신연아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 사정이 밖으로 드러나면 가십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쓸 이유가 없었고 계속 말을 이었다.“잠이 안 올 때면 네 양심에 물어봐. 어릴 때부터 몇 번이나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김향옥이 널 포기한 적 있었어? 폭우를 뚫고도 널 병원에 데려가고, 자신은 옷 한 벌 사는 것조차 아끼면서 널 돌봤어.”“나 같은 외부인도 신 씨 집안에 들어온 뒤 여러 차례 널 돌보며 돈과 노력을 들였지. 넌 양심이라도 갖고 엄마를 대하는 거야?”사무실에 모여든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 건물 대부분이 신연아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들이었고 명백한 정황에 누가 들어도 신연아가 양심 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한지아, 여기서 멋대로 말하지 마! 뭐 대단한 척하는데, 사실 너도 별거 아니야. 넌 그저 신 씨 집안을 분열시키려는 거지. 너 같은 속물은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를 거라는 걸 명심해. 네 딸도 이번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조심해, 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신연아는 분노에 가득 찬 채 나를 가리키며 막말을 해댔다.나는 순간 무언가에 찔린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신연아,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나...”신연아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목을 굽히고 쏘아붙이는 내 눈빛을 피하려고 했다.“난 아무 말도
바로 그때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리더니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지아야, 그만해, 놓아줘!”신호연이였다. 그는 빠르게 달려와 나의 손을 강하게 잡아끌었지만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나 미친 듯 신연아에게 달려들었다.신호연은 나를 향해 화를 내며 크게 소리쳤다.“너 뭐 하는 거야? 한지아... 경고하는데, 그만해!”신연아는 신호연의 품에 안겨 크게 숨을 몰아쉬며 계속 기침을 해댔고 푸르딩딩하던 얼굴은 점차 하얗게 돌아왔다. 잠시 숨을 돌린 후, 그녀는 나를 가리키며 신호연에게 울부짖었다.“오빠, 저 여자 좀 때려줘! 봤지? 날 죽이려고 하는 거. 오래전부터 날 죽이려고 했었어, 꼭 날 위해 복수해 줘야 해!”나는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이번 생에 이렇게 미친 듯이 화를 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심지어 신호연이 나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도 오늘처럼 이성을 잃지는 않았었다. 오늘 아무도 나를 막아설 수는 없었고 이에 신연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건이, 해월이와 민여진을 비롯한 사람들이 모두 나를 막아섰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진정시켰다.신호연은 이런 나의 모습에 깜짝 놀란 채 모두에게 소리쳤다.“당신들 뭐 하는 거야? 단체로 한 사람을 괴롭히는 거지? 그것도 나약한 여자를 괴롭혀? 정말...”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나는 단번에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가 신호연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신호연, 왜 아이를 제주도에 보냈냐고 물었지? 아이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납치당할 때의 공포를 잊게 하려고 보낸 거야. 콩이가 마음에 트라우마를 남기지 않도록. 너 이 짐승 같은 여자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며? 그럼 제대로 단속해. 아니면 언젠간 후회할 날이 올 거니까!”“지아야 그만해. 너 이렇게 손댄 게 한번이 아니야. 너무 막 나가지 마.”신호연은 나를 보며 소리 질렀고 품에 신연아를 꼭 안고 있었다. 신연아는 여전히 자신의 목을 잡은 채 눈을 뒤집으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