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요. 이윤구 그 사람은 기개가 있는 사람이에요. 천천히 두고 보세요.”이동철은 내가 힘들까 봐 당부했다. “한지아 씨, 우선 좀 쉬어요. 저는 마침 약속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요.”“아, 맞다. 요 며칠 울산에 한번 가려고 하는데 그쪽에 볼일 있어요?”나는 이동철에게 한마디 언질을 줬다. 그러자 이동철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가능하다면 제가 같이 갈게요. 소개해 주고 싶은 고객이 한 명 있어요. 제 생각에 한번 만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좋아요. 그럼 일정 확정되면 알려줄게요. 길에서 다시 그 사람 소개해 줘요.”내가 이동철에게 말하고 있는데 마침 이해월이 약을 갖고 들어와 이동철을 보더니 말했다. “이 대표님, 사인하셔야 할 보고서가 있어요.”“알겠어요.”“한 대표님, 천우 그룹이랑 10시에 약속 잡았어요. 조금 쉬시고 출발해요.”이해월이 나에게 귀띔했다. 나는 얼른 전해준 약을 받아 입에 한 알 넣은 후 물을 한모금 마셨다. 이동철은 이해월에게 보고서를 가져오도록 하고 사인한 후 나에게 전해줬다. “이건 이랑의 대금 납부 상황이에요. 한 대표님, 한번 확인해 보세요.”이해월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한 대표님, 이제 출발해야 해요.”나는 할 수 없이 모든 자료를 서랍에 넣고 잠근 후 일어나 가방을 갖고 이해월, 이동철과 함께 회사에서 나와 천우 그룹으로 갔다. 가는 길에 내 상태를 보고 이해월이 물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많이 안 좋아요.”“괜찮아요. 아마 피곤해서 그런 것 같아요.”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 조금 있다 계약서 체결이 끝나면 어디 가서 좀 쉬어요.”이해월이 제안했다. “너무 긴장하신 것 같아요. 제가 라온하제에 모셔다드릴 테니 스파 하시고 조금 쉬세요. 다친 곳이 금방 나았는데 너무 무리하시면 몸이 버티지 못해요. 자기 자신을 아껴야죠. 지금 장 대표님이 잘하고 계셔서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요. 저희도 있잖아요.” 이해월은 내 마음을 잘 알고
아직 놀라움을 거두지 못한 내 이마 위로 큰손이 포개지며 가볍게 이마를 어루만졌다. “어디 아파요? 네?”걱정 가득한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남자가 진짜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건가? 사랑이 넘치는 걸 보니 정력이 왕성한 것 같다. 내가 몸부림치자 그의 입술이 뜻밖에도 내 이마에 닿았고 뺨에도 한 번 닿았다. “뜨겁진 않은데 왜 안색이 이렇게 안 좋아요?”그의 말투가 여전히 다정해서 나는 황홀하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나는 그의 따뜻함이 만든 소용돌이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억제했다. 그는 날 뭐로 생각하는 거지?“그건 배 대표님이 걱정할 일이 아니에요.”나는 그를 단번에 밀어내고 억지로 비꼬며 뒤로 한 발 물러섰는데 문에 ‘쿵’하고 부딪혔다.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두 팔이 내 몸 양쪽을 문에 누른 후 깊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을 보며 머릿속에 갑자기 하나의 화면이 떠올랐다. 똑같이 얼굴 하나가 천천히 다가오며 조급하고 당황스러우면서도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품에 안은 후 머리를 꼭 감싸고 끊임없이 말했다.‘정신 차려, 아무 일도 없을 거야.’나는 그 장면에 흠칫 놀랐고 머리가 움찔하더니 찢길 것같 은 고통이 찾아왔다. 나는 짧은 신음과 함께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고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듯 축 늘어졌다. “너무 아파요.”배현우는 얼른 문을 짚은 손을 떼고 늘어지는 내 몸을 부축했다. “왜 그래요? 지아 씨.”“머리가 너무 아파요.”나는 내 머리를 감싸 안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순식간에 내 몸이 들려서 나는 당황함에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는 나를 안고 성큼성큼 소파로 걸어가 나를 소파에 놓은 후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많이 아파요?”나는 그를 밀면서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그는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고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아 씨, 도대체 어디 아픈지 알려줘요.”“머리가 너무
나는 이 뜻밖의 놀라움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고 이때 한소연이 완전무장 한 채 병실에 들어왔다. “배현우 씨...”병상에 누워있는 날 보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배현우 옆에 다가와 고개를 들어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배현우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배현우는 직접적으로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고 의사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함께 병실을 나갔다. 배현우가 나가는 것을 본 한소연은 불쾌한 표정으로 앞으로 한발 다가왔다. “한소연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요?”“당신이 여기 어떻게 왔어요?”나도 불쾌한 말투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한소연에게 되물었다. “하... 내가 어떻게 왔냐고요? 웃기네요, 당연히 현우 씨가 불러서 온 거죠.”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한소연의 말을 들은 나는 피식 웃었다. 배현우는 무슨 생각으로 그녀를 부른 걸까?한소연은 팔짱을 끼고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불쌍한 척하는건가요? 그와 엮이고 싶어서 이런 방법까지 쓰다니 너무 치사하네요.”그녀의 말이 듣기 아주 거북했지만 나는 대꾸할 말이 없었고 그녀와 논쟁하기 귀찮았다. 몸부림치며 일어나 앉아 조금 쉬니 두통은 거의 없었지만 온몸이 쑤셨다. 한소연은 내가 대꾸하지 않자 시큰둥하게 바라보더니 싸움에서 이긴 수탉처럼 나에게 경고했다. “경고하는데 한지아 씨, 더 이상 염치없이 배현우 씨에게 매달리지 말아요.”“왜 내가 매달리는 거라고 확신해요?”내가 반문했다. “당신이 아니면 누구예요? 설마 그 사람이에요? 소용없어요, 당신이 이렇게 됐는데 내가 오해할까 봐 날 불러왔잖아요. 경고하는데 당신이 계획하고 있는 음모는 접어둬요. 그가 누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한눈에 보이잖아요. 정신 차려요.”마침 이해월이 내 가방을 들고 들어왔고 손에는 CT 결과도 들고는 초조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앉아있는 것을 보고 해월이 얼른 달려왔다. “한 대표님, 왜 일어나있어요?”
그의 동작은 아주 빠르고 또 터프했다. 그가 아주 급박한 것을 보아낼 수 있었는데 김우연이 배현우의 여자를 이렇게 거칠게 미는 것을 보고 나는 조금 놀랐다. 그리고 나에게 당부했다. “한 대표님, 죄송하지만 안에 들어가서 조금 숨어있으세요. 밖이 잠잠해지면 얼른 피하시고 병원에 온 사실은 비밀로 하세요.”말을 마치고는 곧바로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이해월이 병실을 둘러보니 확실히 작은 방이 있었다. 그녀는 얼른 나를 데리고 안으로 숨었다. 곧바로 밖의 복도에서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는데 나와 이해월은 누가 여기로 찾아올까 봐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나는 밖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배현우가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일단 따랐다. 머릿속에서는 그가 이렇게 한 이유를 줄곧 생각했다. 나와 이해월은 밖이 잠잠해질 때까지 안에 숨어있었다. 밖이 조용해지자 우리는 조심스럽게 나와 이해월이 복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그제야 밖에 나가 병원을 떠나 바로 회사로 돌아갔다. 한소연 옷에서 나는 향수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팠고 도대체 이게 뭐가 좋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히 사무실에 여분의 옷이 있어서 나는 얼른 한소연의 치마를 갈아입었다. 내가 옷을 갈아입고 휴식실에서 나오자 이해월이 전화를 들고 재빠르게 걸어들어왔다.“대표님, 이것 좀 보세요.”그녀는 급박하게 손의 전화기를 나에게 주었고 받아서 확인해 보니 배현우가 내 옷을 입은 한소연을 보호하며 나가는 영상이었다. 영상 속의 한소연은 병약하고 얼굴이 창백한 모습으로 배현우에게 기대어 있었는데 진짜 좋은 배우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병실에서 나오자마자 기자들에게 포위되어 걷기도 힘들었지만 기자들은 끊임없이 두 사람에게 질문을 건넸다. 후에 여러 명의 경호원이 와서 포위하고 있는 기자들을 강제로 떼어내고 두 사람을 문 앞까지 보호했다. 문 앞에는 배현우의 마이바흐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들은 차를 타고 쏜살같이 떠나갔다. 나는 눈을 조금 찡그리고
나도 전화를 받아 확인하자 역시나 새로운 내용이 있었는데 한소연이 급성 담낭염이라는 내용이었고 주치의의 인터뷰도 있었다.이것을 보고 나는 배현우가 나를 보호하고 이 일에서 나를 배제하려고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외부 사람들에게 아픈 사람이 한소연이고 나랑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는 것을 쉽게 보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이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그와 내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고 그가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온 것을 숨기고 싶었다면 내 병까지 숨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검사한 의사도 바꾸다니, 중요한 일이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내 병을 외부 사람들이 아는 것이 뭐 어때서? 그리고 내 증상은 병이 아니라 단순 기억상실일뿐인데. 갑자기 내 마음이 움찔했다, 설마 내가 기억을 잃은 것과 상관있는 건가?설마?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눈앞에 어릴 적 일들에 관한 여러 가지 가설들이 화면으로 나타났고 임윤아와 이세림의 사진, 오토바이에서 떨어지던 화면 등이 떠올랐다. 그 화면들이 전부 괴이해서 또 머리가 은근히 아파졌다. 나는 또 극심한 두통이 생길까 봐 얼른 심호흡하며 기분을 컨트롤했다. 그 통증은 너무 두려워서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눈앞에 점차 나타나는 화면이 나를 왠지 두렵고 불안하게 했다. 내 낯빛이 어두운 것을 본 도혜선이 얼른 말했다. “다른 주제로 바꾸자. 너 문기태 만나고 싶다며?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그녀가 말하지 않았으면 나는 이 일을 까먹을뻔했다. 이것도 지금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왜?”나는 도혜선을 바라봤다. “이 사람의 행적이 너무 은밀해서 그와 연락이 닿는 사람이 별로 없어.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도혜선이 나에게 말했다. “낯선 번호로 그와 약속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내가 보기에는 힘들 것 같아.”“아직 시도도 안 해보고 어떻게 알아? 그 사람 번호만 알게 된다면 내가 직접
문기태가 방에 들어왔을 때 나는 이미 차를 끓여놓고 이 우아하면서도 세월과 경험이 담겨있는 눈빛을 가진 남자를 담담히 바라봤다. 내가 전혀 놀라지 않는 것을 본 그는 담담히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저희 만난 적 있죠?”나도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네, 만난 적 있어요. 이미연의 절친, 한지아라고 합니다.”“들은 적 있어요.”그의 담담함에 나는 조금 긴장되어 손에 힘을 꽉 줬다. 어쨌든 이 사람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고 차가운 호수처럼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저 자기 친구를 보호하고 싶은 소녀로서 레벨 차이가 너무 컸다. 우리 모두 자리에 앉았고 꽤나 평온한 마음가짐이었지만 어딘가 조금 거리감이 느껴져 급히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나는 입을 떼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이런 사람을 겪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말을 떼야 할지 몰랐다. 나는 직접 차를 따라주고 말했다. “문기태 씨, 차 한잔 드세요.”“한지아 씨가 저와 무슨 용건으로 만나자고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오히려 그가 먼저 입을 열어 용건을 물었다. “이미연이요.”나는 직접적으로 말하고 그를 바라봤다. 마음속으로 ‘내가 당신과 할 얘기가 이미연 말고 뭐가 있겠어? 왜 모른 척이야?’ 라고 생각했다. 이때의 나는 문기태를 신비한 사람이 아닌 그저 내 절친이 평생을 바쳐 함께하고 싶은 남자로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어차피 그도 사람인지라 칠정육욕의 고비는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경청해서 들을게요.” 그는 더 이상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저는 이미연의 절친이에요. 이미 이미연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요. 몇 년간 이미연이 줄곧 저를 보살펴줘서 그녀의 모든 것이 저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고 이미 제 가족이랑 다름없어요.”내가 한 말은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 사실 이미연은 내 가족 이상으로 일생 중에 없으면 안 되는 존재이다. 문기태도 나를 빤히 바라보며 눈동자 속에 고민하는 눈빛이 보였는데 이
사실 그가 나를 이렇게 바라보는 게 나는 조금 두려웠다. 그의 잘생긴 두 눈은 심연처럼 깊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검은 눈동자가 더욱 깊어져 나의 표정을 탐색하듯 바라봤다. “한지아 씨, 이미연에 대해서 저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어요.”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는데 처음에는 가볍게 느껴졌던 말이 문기태처럼 진중한 사람에게는 또 아주 무겁고 진지한 듯 했다. “포기할 거예요?”나는 여전히 그를 몰아붙였다. “그녀를 품에 안았을 때부터 그녀를 놓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어요.”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고 마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 같았다. 왜인지 그 순간 나는 조금 감동하였다. 이런 말은 원래 여자를 감동하게 하는 유리한 무기인데 더군다나 문기태가 이런 말을 하다니. 나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태를 살폈다. 무엇을 더 물어볼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원래 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런 남자에게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나는 차갑게 말했다. “솔직히 대답이 마음에 안들어요. 당신에게는 아주 무거운 말일지 몰라도 저는 가볍게 느껴졌어요.”“모든 일이 다 순식간에 변하고, 또 남미주 쪽에 변수가 너무 많아요. 만약 어느 날 당신에게서 이미연의 목숨을 달라고 하면 당신은 보호할 수 없을 거예요. 저는 이런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아요. 이미연이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해도 제가 그걸 어떻게 두고 보겠어요.”나는 내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언뜻 그와 이미연을 쟁탈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문기태는 깊은 두 눈을 무의식적으로 내리깔더니 정교한 찻잔을 한번 바라보고 길쭉하고 흰 손가락으로 찻잔을 돌리며 말했다.“그럼 한지아 씨가 원하는 건 맹세예요?”“아마 저도 여자여서 맹세를 받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지아 씨의 총명함이라면 어떠한 맹세도 허황한 것이라는 걸 잘알 텐데요? 특히 제 맹세는. 당신이 말했다시피 남미주 쪽
내가 동문서답하자 도혜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그녀는 내 옆에 앉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마 내가 갑자기 한 말에 그녀가 일시적으로 반응하지 못한 것 같다. “만약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사람을 만난다면 이렇게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되잖아. 너, 나, 그리고 이번에는 이미연! 왜 우리 모두 알맞은 타이밍에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까?”나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내 말을 해석했다. 도혜선은 바로 내 말뜻을 이해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때 내가 옆에 있는 장영식을 알아보고 순풍에 돛단 듯이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다면 우리를 평범하고 따뜻한 날들을 보냈을 거야. 얼마나 행복한 일이야.”내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너는 알맞은 타이밍에 서강민을 만났다면 서로 더 아끼고 사랑했을 것 같아. 얼마나 행복했겠어. 이미연도 만약 알맞은 타이밍에 문기태를 만났더라면 지금처럼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됐잖아.”나는 마음이 심란해서 다리를 뻗고 벽에 기대 앉았다. “너는 어떻게 이게 알맞은 타이밍이 아니라고 확신해?”도혜선이 내 말들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한 사람의 감정을 일반적으로 첫눈에 반하는 것과 시간이 지나서 애정이 생기는 것, 두 가지로 나뉘잖아.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어서 두 가지 감정 모두 피할 수 없었던 거야.”그녀도 나와 같이 기대왔다. “우리 중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어. 어떤 감정이든지 요약하면 다 이 두 가지에 속하는 것 같아.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애정이 생긴 경우고, 이미연은 첫눈에 반한 경우야. 넌... 아마 너도 첫눈에 반한 경우인 것 같아. 첫눈에 반한 건 능동적인 거고,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이 생긴 건 피동적인 거야. 그런데 능동적이든지 피동적이든지 마지막에 남는 건 정밖에 없어.”그녀는 해탈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그가 ‘나와 이미연은 서로 부속된 것이 아니라 생명이에요.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