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꺼져’라는 얘기를 내뱉은 게 신호연에게는 예상 밖의 일인듯했다. 이러한 상황은 신호연에게 최대의 수모이기에 표정 관리가 잘 안 되었다.하물며 지금의 신호연은 밀려들어 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대단한 사람이기에 이렇게 가방을 끼고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다.“한지아...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지금 나는 너랑 좋은 말로 상의하러 온 거였어. 근데 넌 정말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돌려 말해서 너랑 상의하러 온 거지, 툭 까놓고 말하면 난 너에게 통보하러 온 거야. 너 정말...”“대체 누가 이렇게 큰소리를 치는 거야? 어디로 옮길 건데? 얘기해봐.”불쑥 목소리 하나가 들리더니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장영식이 걸어들어왔다.신호연은 고개를 돌려 장영식인 것을 확인하고 입꼬리를 삐죽거리더니 금세 다시 거들먹거리며 비아냥거렸다.“난 또 누구라고. 이분이네~”신호연은 당연히 장영식을 알고 있다. 장영식은 신호연이 나에게 구애를 할 때도 내 곁에서 나를 많이 챙겨주었다. 장영식은 나와 관계되는 모든 일은 미리 다 준비해주었기에 당시 신호연은 장영식을 아주 경계했었다. 이후 내가 신호연의 구애를 받아준 후에야 더는 장영식을 경계하지 않았다.장영식은 신호연을 느긋하게 훑어보더니 말했다.“너 아까 뭐라고 했어? 어디로 옮겨온다고?”장영식은 이렇게 말하고는 상석에 앉아 그를 쳐다봤다.“사내대장부와 소인의 차이가 뭔지 넌 아직 모르는가 보네. 여기로 다시 들어오려고? 미안하지만 나한테 먼저 물어봐 줄래?”“너…? 하?”신호연은 뒤로 한껏 기대더니 행패를 부렸다.“넌 영원히 나한테 졌던 패자일 뿐이라고!”“그래? 그럼 이번에 한 번 해봐!”장영식은 의연하게 대답했다.“우리 한신로얄 2기를 걸고 내기를 하자! 여기는 너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아! 분량도 모자라고, 너 크게 하고 싶다며?’나는 허리를 곧게 폈다. 장영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신로얄 2기? 나는 왜 들은 적이 없지? 나는
나는 장영식을 바라보았다. 요즘 배현우의 상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회사 일은 확실히 신경 쓰지 못했다.장영식은 내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자신 있으니까 해보려는 거야!”“너... 무슨 자신이 있다는 거야? 너... 그 말은…”맞추기가 좀 두려웠다.“특별한 일이 없다면!”장영식은 갑자기 당당하게 웃었다.나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에는 농담처럼 보이지 않는 정중함도 있었다.“... 그 말은, 우리가 2기를 따낼 자신이 있다는 거야?”나는 확실하게 묻기 두려워 살짝 떠보았다.장역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안 될 게 뭐가 있어, 우린 큰 프로젝트를 따내지 말란 법이 있어?”“정말이야?!”나는 갑자기 신이 났다.“너 요즘 이 일 때문에 고생하고 있지? 어쩐지 사무실에 잘 안 보인다 했어. 프로젝트 담당자들이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정말 신호연에게 사무실이라도 만들어 줄까 봐. 우리가 어떻게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보고만 있겠어?”장영식도 조금 득의양양하게 말했다.“하하... 영식아, 빨리 자세한 얘기 좀 해봐! 도대체 넌 어떻게 따내겠다는 거야?”나는 조금 들뜬 채 말했다.“정말로 그 프로젝트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앞으로 우리에겐 아무런 난관도 없을 거야!”장영식은 그제야 모든 과정을 나에게 자세히 말했다.그를 짝사랑하는 혼혈 후배에게 감사해야 했다.“이름은 조이스고, 지금은 유명한 디자이너야. 한신로얄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를 찾고 있어. 조이스의 멘토가 그녀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대.”“이런 우연이? 그리고 또?”나는 좀 흥분했다.“사실 1기 때 내가 다니는 회사가 참여했었어. 이번에는 조이스가 2기 디자인 통보를 받았고. 관련된 문제가 있어서 기획에 계속 참여했기 때문에 조이스와 다시 연락할 기회가 생긴 거야.”“그럼 왜 전에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지? 설날 때 너랑 조이스에 관한
비즈니스 싸움은 너 죽고 나 사는 것이다. 내가 전희의 숨통을 틔워준다는 것은 나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것이다.마침 신호연의 기공식도 끝나갔다. 내 계획도 행동에 옮겨야 할 때인 것 같았는데 지금 상태는 내 계획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장영식이 자신 있게 나를 위로했다.“이번에는 편안하게 푹 잘 수 있을 거야! 우리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자본이 있어야 서울에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어.”나는 그의 이 생각에 전적으로 찬성한다.하지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은 항상 공존하는 법이다. 나는 겨우 한숨 돌리게 되었는데 천우 그룹 쪽에서 또 압력을 가해서 무게를 늘렸다.그들이 다시 제출한 검사 보고서가 나왔는데, 뜻밖에도 많은 유해 물질이 기준을 초과하여 불합격되었다고 한다.순간 폭발했다. 천우 그룹 쪽에서는 즉시 공지가 내려졌고, 마무리된 모든 공사를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잘못 처리하면 기약도 없고, 그쪽은 이미 다 팔렸으니, 업주 쪽에서 소란을 피우면 나는 죽는 거나 다름없다.일이 터지자 천우 그룹 쪽에서는 전혀 처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조업을 중단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그다음에 클레임 통지서를 보냈다. 그리고 이 클레임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죽음으로 몰고 갈 예정이다.나와 장영식, 그리고 이동철은 쉬지 않고 뛰어다니며 이 일을 해결하려 나섰다. 공급업체와 협력하여 유효한 증명서를 제시하며 관련 부서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나는 배유청이 이 일로 나를 짓누르고 다시는 일어설 기회를 없애련다는 걸 알고 있다.그제야 나는 배유정을 도발하는 것이 얼마나 현명하지 못한 행동인지 깨달았다. 그녀는 극악무도한 늙은 마녀였다.왜 배현우와 이청원이 나에게 자신의 이익부터 챙기라고 거듭 당부했는지 알 것 같았다.그들의 기습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몸을 가누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장영식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 부정적인 사
전화가 금방 걸리더니 이청원의 둔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네, 한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도혜선을 힐끗 쳐다봤더니, 그녀는 나더러 얘기하라고 눈치를 하며 신호를 보냈다.“… 저기, 지금 회사에 계세요?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데요.”나의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네. 그럼 경공관으로 오세요. 저도 그쪽으로 갈게요.”이청원은 시원하게 약속을 받아주자 나는 순간 당황해서 멍해졌다.‘경공관? 어디지?’도혜선은 내가 멍해 있는 것을 보고 손을 톡톡 치며 전화를 끊으라고 했다.“알았어요. 그럼 있다가 거기서 봐요.”나는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끊고 도혜선을 봤다.“근데 언니, 나 경공관이라는 곳 몰라.”내가 장소를 모른다고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자, 도혜선은 크게 웃으며 나를 비웃었다.“왜 웃어? 뭔 데?”“내가 알아. 하하하…”도혜선을 웃을 멈추지 못하며 말했다.“너 정말 대단하다.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너를 데리고 많이 다니면서 구경시켜 줘야 하는데. 세상에 경공관도 모르다니, 어휴… 쪽팔려!”도혜선은 웃고 나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액셀을 밟고 잠시 후 작지만 온화하고 다정한 집 앞에 멈추더니 말했다.“다 왔어. 여기가 경공관이야!”밖을 보니 아름다운 집에 아주 고풍스러운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 위에 ‘경공관’이라고 씌어져 있었다.“여기가 경공관이라고?”나는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보며 물었다.“어서 들어가자! 여기는 클럽이야, 여기도 모른다니 말도 안 돼!”도혜선은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끗 쳐다봤다.“이제 시간 내서 설명해 줄게. 지금 네 상황을 전희가 알면 아마 배를 끌어안고 웃을 거야!”도혜선과 같이 안으로 들어가자 안은 아주 넓었다. 고전적인 중식 인테리어로 되어 있었는데 매력적이고 조용하고 우아한 분위기였다.도혜선이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소개했다.“이 클럽의 사장님이 경씨인데 아주 전설적인 여성이거든. 언제 한번 소개시켜 줄게. 오늘은 일단 우리 일을 봐야 하니까.”건물 안으로
이청원은 전혀 놀라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얘기하세요!”나는 오늘 방문 목적을 간결하게 설명한 다음, 그를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도와주실 수 있을까요?”이청원은 바로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이 일은 제가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물론 서로 친분이 깊지 않았기에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 스스로 이청원이 거절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설득하고 있는데 이청원이 또 말했다.“하지만 제안은 드릴 수 있는데 한번 해보실래요?”나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이청원이 계속 말하기를 기다렸다.“에메랄드 가든을 아시죠?”이청원이 나를 보며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메랄드 가든은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부동산 브랜드 기업이다. 그들의 부동산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그들을 찾아가 봐요. 그들이 사용하는 재료들은 모두 국제적으로 엄격한 과정을 거쳐 엄선된 것들이에요. 한 대표님 회사에서 불합격 제품으로 검증받은 것도 에메랄드 가든에서 사용하는 거잖아요. 그들을 찾아가는 게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요?”이청원의 어조는 차분했지만 아주 핵심적인 제안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순식간에 막혔던 길이 열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직접 증명이 어렵다면 맞서 싸우지 말고 길을 돌아서 가면 되지 않는가?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연락처를 드릴 테니 울산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나봐요. 그 사람만 설득하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 좀… 특이한 부분이 있는데 고집이 세서 접근하기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을 감동만 시키면 모든 게 해결될 거예요.”이청원은 말을 마치고 가방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나는 순간 감격하며 이청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모든 걸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불합격을 받은 것까지
경공관에서 나와, 도혜선은 나를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나는 갈아입을 옷 두 벌을 챙겨 그녀에게 바로 공항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가는 길에 나는 장영식과 이동철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이동철이 말했다.“제가 같이 가드릴 수 있어요! 혼자 괜찮겠어요?”“이동철 씨 임무가 더 막중한걸요. 반드시 증거를 찾아내야 해요. 그것이 승리의 관건이니까요. 저는 괜찮으니 걱정 마요!”나는 엄숙히 이동철에게 신신당부했다.이동철의 말투에서는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듯한 게 여실히 보였다. 회사의 일은 이동철이 있기에 나는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이런 관계는 그가 처리할 수 없었는데, 해외에서 몇 년 동안 지낸 탓에 복잡한 인간관계에는 이미 무뎌졌기 때문이다.차 안에서 나는 도혜선을 조롱하며 말했다.“언니, 아이디어 진짜 좋은데?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역시 이런 쪽은 언니가 나보다 낫다니까.”그러자 도혜선이 나를 힐끗 째려보았다.“나이가 많아서 그렇다니, 누가 그래? 네가 몰라서 그렇지, 네 머리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좋아. 단지 신호연에게 몇 년 동안 갇혀 사느라 쓸 기회가 없어서 무뎌진 거지. 단연코 확신하는데, 만약 네가 여태껏 신흥을 관리해왔다면, 신호연이 관리하는 현재의 신흥보다 몇 배는 더 나았을 거야.”“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어. 호연 씨도 호연 씨의 장점이 있거든. 그이는 이익을 더 중요하게 여겨, 이쪽은 나보다 낫지. 나는 가끔 의리를 너무 중하게 여겨서 믿음 때문에 융통성 있게 접근하지 못해!”나는 나 자신을 검토해보았다. 사실 오늘 이청원의 가르침은, 내가 자신의 이런 약점을 더욱 명확히 알아챌 수 있게 해주었다.“인제 보니 너 더 발전할 수 있겠는데?”도혜선은 웃으며 나를 조롱했다.“다음부터는 돈이라도 받아야겠어!”그러자 나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언니, 차라리 신흥 주식을 사지? 홍보도 담당하고 말이야!”“하... 정말 모리배 아니랄까 봐!”그녀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다 같이 놀려고
가게 주인뿐만 아니라 파마를 하고 있던 여자도 같이 대화에 참여하는 걸 보니, 그들은 그 집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알고 보니 변희준이 이렇게 괴상하게 변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변희준은 학자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원래는 화학 선생님이었고 울산의 한 공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고 한다.그는 사업에 몰두하여 늦은 나이에 결혼했고 중년의 나이에 아들을 얻었다. 이것은 가정에 그야말로 금상첨화와 같은 일이었고 나날이 행복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그의 단꿈은 5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시기는 변희준이 가장 잘나갔던 시기로, 그는 가장 젊은 박사과정 지도교수로 임명되어 집도 나눠 받았다.원래대로라면 이것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큰 경사였지만, 모든 비극은 그 집에서 시작되었다. 거실 두 개에 방 세 개가 딸린 집은 그의 모든 기쁨을 앗아갔다. 바로 아들이 새집으로 이사 온 다음 해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변희준의 단꿈은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그렇게 그는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아이의 병을 고쳐주다가 결국 집안 재산을 탕진하여, 돈도 사람도 전부 잃고 말았다. 변희준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몸이 줄곧 좋을 뿐만 아니라 팔팔하고, 영리하고 총명하기 짝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런 병에 걸리게 됐는지 말이다.그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수년 동안 노력했다. 역시나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말이 있듯이 변희준은 마침내 놀라운 결론을 얻어냈다. 바로 그 집에 있는 유해 물질이 기준치를 심각하게 초과해 초래된 일이라는 것이었다. 조사하는 과정에서 또 한 명의 어린아이가 안타까운 일을 당했는데, 그 사실로서 변희준이 내린 결론은 더욱 힘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법원에 개발업체에 대한 고소장을 제출했다.“그 당시 그 일은 매우 떠들썩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듣자 하니 나중에 정말 승소해서 적지 않은 돈을 받았다고 하더라고!”파마하던
변희준의 표정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나가요! 여기 아픈 사람 안 보여요?”그의 말투는 매우 짜증스러웠는데, 이건 분명히 일종의 당황스러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제가... 아내분을 좀 봐도 될까요?”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의 의견을 물었다.“제가 보기에... 아내분이 조금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아서요!”그러자 그는 조금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마에는 어느새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나는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저 경험 있어요! 아마 도와드릴 수 있을 거예요!”몇 년간 집에서 아픈 아이를 돌봐오며, 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대부분 스스로 대처했다.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나의 얼굴에서 진정성을 읽었는지, 그제야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있는 여자를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마도 조금 열이 나는 것 같아요.”나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여자의 이마와 목에 각각 손을 대보았다. ‘이게 어딜 봐서 조금이야, 불덩이처럼 뜨거운 게 고열이라면 모를까!’이윽고 나는 다급히 물었다.“얼마나 됐어요?”“어젯밤부터예요, 아침까지 깨어있었는데, 내가...”“선생님, 일단 병원으로 가봐야 합니다. 이렇게 내버려 둬서는 안돼요! 체온계 있나요?”내가 이렇게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보아하니 그는 평소에 책벌레로, 집안의 일은 모두 그의 아내가 돌보는 것 같았다.나는 서둘러 이해월에게 말했다.“빨리 구급차 물러요, 구급차!”그리고 나는 침대 위에 있는 여자를 작은 소리로 불렀다.“저기요, 일어나보세요, 제 말 들려요?”뒤이어 나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변희준을 바라보았다.“선생님, 병원에 가야겠습니다. 이미 정신을 잃으셨어요.”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눈빛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 찬 듯 보였다. 마치 속수무책인 아이처럼, 변희준은 의지하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아... 아가씨는... 저는 뭘 해야 되죠?”“지금은 필요 없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받은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