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났을 때 폐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의 냄새가 나에게 이곳은 병원이라고 알려주는 듯했다.“깼어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매력적인 목소리가 울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에 보이는 건 배현우였다.“내가 왜 여기 있어요...?”내가 무기력하게 물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전에 있던 일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그는 손을 뻗어 벨을 눌러 의사를 불러왔다. 의사는 얼른 들어와 나의 상태를 검사하며 물었다.“어디 불편한 곳 없어요?”“없어요. 그냥 힘이 없고 피곤해요.”난 곧이곧대로 대답했다.마침 김우연이 밖에서 들어왔다. 손에는 커다란 가방이 있었는데 의사를 보고 그 가방을 건네며 얘기했다.“의사 선생님, 이건 엑스레이 사진입니다. 한번 봐주세요.”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꺼내 몇 장을 유심히 보다가 물었다.“환자분, 전에 쇄골이 골절된 지 얼마나 된 겁니까?”나는 멍해서 의사를 보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저 말이에요?”“네. 엑스레이를 보면 쇄골이 골절된 지 오래된 것 같아요. 오래된 골절입니다. 평소에 조심하셔야 해요. 이런 부위는 쉽게 다치니까요. 다른 문제는 없습니다. 다행히 차 속도가 느려서 큰 문제는 없어 보여요. 돌아가서 잘 휴식하시면 됩니다.”의사의 말에 나는 매우 놀랐다. 입을 딱 벌린 채 의사를 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제가 골절했었다고요?”내 말에 의사도 꽤 놀란 듯했다. 그리고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이건 금방 찍은 엑스레이입니다. 배현우 씨께서 환자분의 목뼈 건강이 걱정된다고 전면적인 검사를 받아보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쇄골 부위의 골절은 확실히 있는 겁니다.”의사의 말에 나는 너무도 두려웠다. 내가 언제 골절되었다는 거지?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배현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하긴, 내 상처를 그가 알 리가 없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쇄골을 만졌다.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하지만 의사의 말이 틀릴 수도 없었다. 엑스레이는 그의 손에 있었고 그것이 증
집에 들어가니 부모님이 주무시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오는 나를 본 엄마가 얼른 내 가방을 받아주며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밥은 먹었어?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밥 아직 안 먹었어요. 엄마, 저 배고파요”말을 마친 나는 어쩐지 코가 찡해 났다. 누구든지 엄마 옆에만 있으면 아이가 되는 것 같다. “알았어, 바로 반찬 데워줄게.” 엄마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가방을 놓은 후 주방으로 달려가 저녁 준비를 했다. “아빠, 저 옷 갈아입고 올게요.”말을 마친 나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딸이 보고 싶어 곧장 콩이 방으로 향했다. 단잠을 자는 콩이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작고 통통한 다리를 조심스럽게 이불 속으로 넣어주었다. 콩이가 돌아눕자 작은 손에 내 옷깃이 닿았다. 내가 온 것을 의식한 듯 졸린 눈을 뜨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그 순간, 나는 온 세상을 가진 듯 행복했다.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똑똑한 딸이 내 옆에 있는데 뭘 더 바라겠는가. 토닥토닥 두드려 주니 콩이는 웃으며 다시 잠에 들었다. 사실 콩이에게 온전한 가정을 주지 못하고 자주 함께하지 못해서 마음속 한구석에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눈물이 차올라 눈 앞을 가렸고 코가 시큰거렸다. 나는 앞으로 비현실적인 꿈을 생각하는 것보다 콩이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이런 생활을 선택했으니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옷을 갈아입고 내려가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포만감이 나를 행복하게 하였고 엄마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안도감으로 가득 찼다. 집의 온기가 내가 내 것이 아닌, 허황한 것들에서 멀어지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하였다. “이것 봐, 음식을 먹으니, 안색도 많이 좋아졌어.” 엄마가 테이블을 정리하며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 일이 적으면 적게 해.”나는 얌전히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곧 설이잖아요. 설에 푹 쉴 거예요. 맞다
나는 대문 밖에 아직 그 차량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마음이 갑자기 심란해졌고 피하고 싶었지만, 방 안의 무드등이 켜져 있어 그가 날 분명히 보았을 것이다. 나는 제 자리에서 한참을 바라보다 마음을 굳게 먹고 손을 뻗어 커튼을 닫았다. 그리고 불을 끈 후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눈가가 붉어졌고 마음속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는데 나한테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각자 자기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안 되는 걸까?한참 후에야 밖의 차가 천천히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았던 눈물이 결국 두 볼을 타고 떨어졌다.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급히 커튼을 열고 밖을 쳐다보았는데 점점 멀어져가는 빨간색 후미등만 보였다. 나는 가슴이 아려왔다. 밤이 늦었는데 그는 떠났다. 더 이상 예전처럼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다시 커튼을 천천히 닫고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한참 동안 앉아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들기 위해 애썼다. 이튿날내가 깨어났을 때 이미 점심이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잤고 피곤도 풀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간을 확인했다. 씻은 후 일 층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고 고민하다 회사에 가보기로 했다. 연휴 전 일도 많고 전부 중요한 일들이라 압력을 모두 장영식에게 주면 안 될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은 후 엄마에게 말했는데 마침 시장에 갈 준비를 하고 계셨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 시장 가시게요? 내일부터 연휴에요?”엄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희 아빠랑 뭐 파는지 그냥 구경하러 가는 거야. 미리 봐둬야 나중에 살 때 안 까먹지. 올해 오는 사람도 많은데 예전처럼 대충하면 안 되지.”“그럴 줄 알았어요. 제가 안 올 때 대충 보냈죠.”나는 마침내 트집을 잡을 기회를 잡았다. 두 사람은 만면에 꽃을 피우며 웃고 있었는데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나도 귀찮아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이 한바탕 바쁠 것이라고 확신했다. 문을 나서니 내 차가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이번 설은 많은 사람들로 이례적으로 북적거렸다. 나도 계속 집에 있으면서 대가족의 화목한 분위기를 만끽했다. 집에는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다만 아이들이 적어 콩이가 모든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이미연도 본가에 갔다 연휴 3일째 되는 날, 우리 집으로 왔다. 여기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요리 솜씨를 뽐냈고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마당에는 엄마가 빨간색 등을 가득 매달아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낮에는 나도 아무 일 없는 듯 즐겁게 보냈지만, 저녁이 되자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긴 설 연휴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서울에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배현우는 더 이상 내게 전화하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전화할 이유가 없어 새해 안부 전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내가 통제력이 얼마나 강한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다행히 이미연과 신혜선이 옆에 있어 주었다. 이미연이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한소연은 이미 한물간 것 같아. 말로는 해외에 가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고 했는데 애초에 해외에 가지도 않았어. 배씨 도련님이 또 새로운 사람이 생긴 것 아니야?”이미연이 입을 열자, 도혜선이 얼른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치를 줬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사람이 새로운 사람이 생기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으면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야.”이미연이 도혜선을 보더니 입을 삐죽했다. “들었지? 우리 이제 지아 아가씨가 결심을 어떻게 유지하는지 지켜봐야 해.”둘은 박장대소했고 나는 마음속으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내 마음이 얼마나 씁쓸한지 그들은 모르고 있다. 나는 자꾸 가족, 분위기, 집, 아무 기댈 곳 없이 홀로 서 있는 배현우의 모습이 생각났다.왜인지 집이 떠들썩할수록 마음이 더 아팠고 머릿속은 배현우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다. 비록 진짜 내가 생각한 모습인지 모르겠지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했다. 하지만 곧바로 또 다른 자아가 나와 내게 그는
내가 뛰어 내려갔을 때 풀숲 앞은 텅텅 비어있었다. 나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방금 본 것이 내 착각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잠시 후, 장영식이 언제 왔는지 내 옆에 서 있었다. “같이 산책할래?”나는 고개를 들어 자상하게 웃는 얼굴을 봤다. 내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우리는 나란히 마당에서 걸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무안하게 하지 않았다. 왜 갑자기 뛰어나왔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는 나랑 학창 시절 얘기를 했고 나는 갑자기 물었다. “영식 오빠, 왜 난 어릴 때 기억이 안 날까?”“언제 기억 말하는 거야? 나에 관한 기억이 있으면 꼭 기억해 낼 수 있게 도와줄게.”말하곤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더 어렸을 때 기억 말이야. 오빠에 관한 기억은 다 있어, 우리 아빠가 우 선생님께 내 물리 과외를 부탁해서 그때 우 선생님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잖아. ”“맞아, 우 선생님 사무실에서 처음 봤어. 네가 교복 입은 모습이 다른 사람이랑 달랐어. 까만 윤기 나는 머리에, 큰 눈, 그리고 속눈썹이 엄청나게 길었어. 그래서 누가 뒤에서 속눈썹 요괴라고 불렀어.”“진짜? 난 왜 몰랐지?” 나는 웃었다. 속눈썹 요괴는 너무 과장됐다. “그때가 고1 두 번째 학기였어.”장영식이 흐뭇해하며 말했다. “그니까! 중학교 이전의 기억이 없어. 고등학교 입학시험 이후의 일들만 기억나. 오빠는 이런 적 있어?”나는 몸을 돌려 뒤로 걸으며 그를 보았다. 그런 나를 보더니 장영식이 다정하게 말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그러고는 머리를 저었다. “난 없어, 기억력이 엄청 좋아.”“안 좋은 건 아닌데...”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발이 걸렸다. 장영식은 재빨리 손을 뻗어 날 잡고 팔짱을 꼈다. “제대로 걸어! 이젠 엄마인데 아직도 장난꾸러기야.”장영식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는 갑자기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해외에 오래 있었
장영식의 말에 말문이 막힌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반어법이야?”“말하는 것 좀 봐.”날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 내가 뭐?” 장영식이 내 말을 유도하는 것을 느낀 나는 갑자기 긴장되었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일 때문에 그러는 거지?”나는 장영식이 일만 하느라 모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민감하고 감성적이었다. 실시간 검색어까지 알 줄이야.“난 괜찮아. 많은 일들은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몸부림칠 바에 포기하는 게 나아, 안정감 있고.” 나는 장영식의 말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는 내 맘속에서 항상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오빠 같은 느낌이었다. “영식 오빠, 나도 오빠가 나한테 잘해주는 거 잘 알고 있어. 내 맘속에 누구도 대체할수 없는 좋은 오빠야. 고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오빠가 있으면 든든했어. 지금 나도 막막해, 며칠 동안 쉬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 정신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헤어 나오기 힘들어. 일단 회사 일부터 잘하고 보자.”‘알았어. 난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말을 마치고 손을 뻗어 친구에게 용기를 주듯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영식 오빠,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 부모님 나이도 있으신데, 걱정이 많으셔. 내가 오빠한테 진 빚이 많다는 걸 나도 알아, 하지만 난 오빠랑 어울리지 않아. 난...”이번에는 진짜 나를 품에 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다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근데 내가 너무 용기가 없어서 너한테 말 못 했어. 그래서 널 놓쳤어. 이건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거야.”날 꼭 끌어안은 장영식을 나는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장영식에게 감정이 담긴 포옹을 빚졌는데 나는 그를 속이면서 줄 수 없었다.최소한 지금은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담고 있어서 줄 수 없었다. 비록 그 사람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유령처럼 내 마음속을 가득 차지하고 있어 내쫓을 수 없었다.
소리에 깜짝 놀란 우리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림자 몇 개가 신속히 마당으로 뛰어갔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고 장영식이 말했다. “큰일 났어, 누가 봤나 봐. 우리 들킨 거 아니야?”나는 깔깔 웃으며 터프하게 팔짱을 꼈다. “집에 가자!”문을 들어서니 다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지만, 우리 둘에게 추궁당했다. 순간, 온 집안에 또다시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역시 연휴는 아름답고 짧았다. 어느새 연휴가 끝났고 우리는 다시 출근해야 한다. 이번엔 진짜 바빴다. 영식 오빠의 부모님도 다음 설에도 같이 보내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내려가셨다.나와 장영식의 궁합도 더욱 좋아졌다. 그가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나는 협력업체를 담당했다. 이동철은 장영식의 프로젝트와 시장 업무를 도왔다. 나는 오랫동안 배현우의 소식을 듣지 못한 것 같다. 그가 서울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생각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소식을 얻을 수 있는 일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가 없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펜은 내가 사무실에 있을 때면 늘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연휴가 끝난 후 신호연을 처음 만난 곳은 결석 초음파를 찍으러 간 병원이었다. 연휴에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가끔 통증이 있었다.초음파실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그는 신연아와 함께 태아 초음파를 하러 왔다. 신연아의 배가 꽤 불러 있었고 신호연의 옆에서 힘겹게 걸어왔다. 나를 본 순간, 신연아는 재빨리 신호연의 팔을 잡았다. 설령 누가 뺏어갈까 봐 몸에 매미처럼 착 달라붙었다. 신호연은 역시나 정장 차림에 훤칠한 외모로 많은 사람들을 뒤돌아보게 하였다. 그는 코너를 돌아 날 확인한 순간부터 호시탐탐 나와 눈 맞출 기회를 찾아 말을 걸려고 했지만 나는 바라보지 않았다. 지금 신연아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여 내 눈을 의심했다. 못 본 척하고 앉아 내가 임신했을 때도 저런 모습이었는지 생각했다. 내가 얻은 결론은 아니었다. 절대 안
신연아는 미친년처럼 날 향해 덮쳐왔고 신호연은 불쾌한 얼굴을 하고 뒤따라왔다. “뭐 하는 거야? 발밑 조심해!”“한지아, 방금 뭘 웃은 거야?”신연아는 나에게 삿대질하며 물었다. 나는 일부러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진지하게 말했다.“나한테 묻는 거야? 우리 그냥 얘기하고 있었지. 지금 개 키우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그런데 목줄 안 해서 자꾸 사람 물어서 광견병 주사가 부족하다고 얘기하고 있었어. 왜? 넌 몰랐어?” 옆의 여자는 웃음을 참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맞아! 지금 물린 사람이 너무 많아요! 막을 수가 없어요.”주근깨로 가득한 신연아의 얼굴이 더욱 안 좋아졌다. 이때, 간호조무사가 외쳤다. “지아 씨, 들어오세요!”나는 얼른 일어나 차트를 들고 우아하게 걸어가 간호사 선생님에게 차트를 건넨 후 진료실에 들어갔다. 들어갈 때 만면에 화색을 띠고 있어 초음파 선생님도 덩달아 신나셨다. “아이고! 예쁜 아가씨가 마음가짐도 좋네. 여기에서 매일 울상을 한 사람들만 봤어요.아가씨처럼 밝게 웃으며 들어오는 사람은 처음이에요.”나는 진료실 침대에 누워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기쁨은 행운의 원천이죠!”내 말 한마디에 의사 선생님과 간호조무사의 기분도 좋아져 검사를 더 자세하게 해줬다. “괜찮아요, 작은 결석 두 개가 담낭안에 있는데 담낭벽은 모두 정상이에요. 식습관만 조심하면 돼요.”의사 선생님이 담관이 쓸개보다 통증을 더 쉽게 유발한다고 했었는데 원래 담관에 있던 결석이 쓸개로 돌아왔단 소식에 나도 기뻤다. 하늘도 날 도운 것 같다. “이거 보세요, 이게 바로 기쁨의 원천 아니겠어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감사 인사를 하고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나왔다. 나가자마자 홀로 복도에 있는 신호연을 보았다. 내가 나오는 것을 보더니 얼른 다가왔다. “어때? 결석 검사하러 온 거지? 의사가 뭐라고 했어?”관심 어린 얼굴에 나는 이 사람이 같이 검사하러 오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아야, 설에..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