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비친 자동차 불빛이 한순간 내 온 세상을 밝혔다. 난 너무 기뻐서 서둘러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가 허둥지둥 전자레인지에 음식들을 넣어 데웠다. 이런 설렘에 손이 떨렸다.나도 모르게 화장실로 달려들어 가 내 모습이 어떤지 사진을 찍어보기도 했다. 오늘은 최상의 컨디션으로 배현우를 만나고 싶었다.배현우가 나도 그의 가족이며 항상 그의 곁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그의 생일을 우리가 함께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드디어 문이 열렸고 나는 반갑게 맞이하였다. “왔어요!”배현우는 약간 어리둥절해 하긴 했지만, 행복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뻗어 나를 품에 안았다.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요?”술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고 나는 배현우가 이렇게 많은 술을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얼른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고 몸을 굽혀 슬리퍼를 집어 든 후 그를 끌어당겨 식탁으로 데려와 의자에 앉혔다.재빨리 생일케이크 초에 불을 붙이고 그를 바라보며 온화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어서 소원을 빌어요!” “생일 축하해요! 해마다 오늘이 있고 앞으로의 세월은 오늘과 같기를 바라요. 행복은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할거에요.”내 말이 끝났을 때 배현우는 천천히 일어났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이...“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지아 씨?” 배현우는 원래 술에 취한 흐리멍덩한 눈이었는데 갑자기 내 두 눈을 바라보았다가 먹빛 가득한 차가운 눈빛을 띠며 순식간에 음산하기 그지없게 변하더니 악기로 가득한 쉰 목소리로 힘을 다해 소리쳤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고요!”눈앞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겁이 났다. 배현우는 미친 듯이 식탁 위의 모든 것을 쓸어내렸고, `와르르` 쏟아지는 큰 소리가 고요한 밤중에 귀를 찌르듯 자극했다.배현우의 몸에선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 순간이 무서웠고 갑자기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낯설게 느껴져 두려웠다.나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나의 어떤 말
여느 때와 같이 깨끗해진 주방을 보고 세수를 한 후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딸의 방으로 가서 아이 곁에 누워 그렇게 잠이 들었다.내가 깨어났을 때, 내 딸은 일어난 지 오래되었고 인형 놀이를 하고 있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딸에게 말했다. “옷을 갈아입자. 엄마랑 같이 아침 먹으러 갔다가 엄마 사무실에 함께 가자. 그리고 별일 없으면 오늘 외할머니 집에 가는 게 어때?”콩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내게 바비 동생을 데리고 가도 되냐 물었다.나는 장영식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늦게 간다고 말했다.그런 다음 딸아이의 몸단장을 해준 후 콩이의 면 옷을 꺼내 작은 캐리어에 담고 내 것도 함께 넣고 나서야 콩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아침을 먹은 후 바로 회사로 갔고, 콩이는 회사에 처음 와 보았다.갑자기 총애를 받는 공주처럼 이해월은 콩이를 데리고 온 사무실을 돌아다녔다.나는 장영식과 함께 몇 가지 회사 문제를 처리했고, 장영식에게 오늘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모셔오고 싶다고 말했다.장영식은 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회사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와. 이동철과 나는 아무 문제 없을 거야. 특별한 일이 생기면 전화할 테니 맘 편히 부모님을 모셔와. 돌아오기 전 전화해 주면 내가 마중 나갈게. 이따 공항에 데려다줄게!”나는 미루지 않았고, 이해월도 서둘러 우리 둘의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공항으로 가는 동안 장영식은 룸미러로 줄곧 나를 보았지만, 나는 해명하지 않았다.사실 오늘 내 상태가 너무 안 좋았고, 다크서클도 심한데 그걸 장영식이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하지만 장영식은 캐묻지도 나를 난처하게 하지도 않았다.공항에 도착하자 장영식은 우리 모녀를 보안검색대로 데려다주며 아이 잘 돌보고 추우니 아이가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하라며 거듭 당부했다.은빛 눈이 덮인 북쪽에 착륙하자 맑고 투명한 차가운 공기와 맞닥뜨렸다. 나는 어지러움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깊게 심호흡했다.택시를 타고 바로 만덕동으로 들어섰
그날 밤, 술에 취한 나를 장영식이 데려다주었다. 차에서 내렸을 때 그는 나를 등에 업었고 나는 깔깔대며 크게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영식은 무던하게 나를 업고 동네 길을 천천히 걸으며 대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들과 그가 나에게 얼마나 잘해줬었는지, 또 내가 몸치는 아니었다며 내가 그의 등에서 잠이 들 때까지 계속 얘기해 주었다.어떻게 집으로 돌아와서 방에 온 건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집에 부모님이 계셔서 딸도 돌봐주시니 안심이 된다. 난 조금도 두렵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몇 시나 됐을까, 나는 전화 소리에 잠이 깨었다. 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오늘은 쉬는 날이라는 걸 의식적으로 깨달았다. 난 핸드폰을 더듬더듬 찾아서 끄고 베개에 나를 묻었지만 억지로 잠을 청하지는 않았다.다시 잠들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도 남을 위력의 수많은 슬픔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와 떨쳐 내려 해도 떨쳐 낼 수가 없다.갑자기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핸드폰을 보니 배현우로부터 걸려온 전화였고, 잠시 망설이던 나는 전화를 받았다. 필경 이것은 내가 이제까지 받고 싶었던 전화였다.“여보세요.” 나는 잠에서 막 깨어 약간 잠긴 목소리였다.“어째서 전화를 안 받았어요?” 배현우는 내 목소리에서 비슷한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물었다. “왜 울어요?”“아니에요, 막 잠에서 깼어요.”“마음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고요.” 비록 배현우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알 수 있었다. 그의 말투는 딱딱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조금 답답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배현우도 오랫동안 침묵했다. “내 전화를 받아도 즐겁지 않나요?”“제가 또 말실수할까 봐 겁이 나요! 분명 전 어리석으니까요.” 나는 희미한 목소리로 원망의 의미를 담아 말했다.저쪽에서 냉랭한 불만의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마치 내 말에 코웃음을 치는 듯했다.“당신은 스스로 반성을 해야죠.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는 비아냥거렸다.“현우 씨, 전 이혼
전화는 배현우가 건 것이었고 나는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아빠는 내 감정을 확인하려는 듯 내 표정을 살폈고 난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반대편에서 바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 공항이에요. 데리러 와요!”또 명령이야!말문이 막힌다. 배현우에겐 특별한 비서와 수행원이 있고, 그를 도울 사람이 겹겹이 쌓여 있는데 내가 공항에 그를 마중 나가야 하나? 그는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운전기사인가 아니면 하인인가.“미안해요. 집에 손님이 와서 나갈 수가 없어요.” 나는 담담하게 거절했다.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 개자식, 또 전화를 끊었다.핸드폰을 티 테이블에 막 올려두려는 순간 `뜨르르`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메시지를 열어보니 장영식이 큰 가방을 들고 문을 두드리는 CCTV 사진 한 장과 함께 글 한 줄이 와 있었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손님이었죠? 그가 당신이 나갈 수 없을 만한 귀빈인 된 건가요? 콩이는 나와 식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사진을 보니 이가 갈리게 화가 났다. 배현우도 우리 집 CCTV 영상을 가지고 있다. 왜 우리 집을 감시한 걸까? 그의 횡포가 정말 너무 지나치다.“뭐 하는 거예요?” 나는 불쾌함에 몇 마디 적어 메시지를 보냈다.무력감이 느껴진다. 정말 막무가내인 사람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다.“받아들일래요, 안 받아들일래요?” 배현우가 이번에 보낸 글은 더욱 강력했다. 나는 확신한다. 이 사람은 담력이 있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대답하면 그는 한 시간 내로 우리 집에 나타날 것이다. 난 지금 장영식이 겪을 난감함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나는 화가 나서 얼굴이 싸늘해졌다. 고개를 들자 아빠와 두 눈이 마주쳤고 내가 지은 어색한 웃음은 우는 것보다 더 봐주기 힘들었다.“저……. 저 좀 나가봐야겠어요!” 아빠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열쇠를 챙겨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혹시라도 아빠가 잡을까 봐 걱정되었다.하
그동안의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과분하게만 느껴졌던 단어에 나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나는 망부석이 된 것마냥 그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의 시선은 어느새 창밖의 풍경에 못 박힌 듯 고정되었고 입에서는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게 바로 배현우가 말하던 아직 완공되지 못한 집이구나.’ 눈 앞에 펼쳐진 웅장한 광경에 나는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배현우는 차에서 내려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짐을 챙기고는 차 문을 열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창밖만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는 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뒤 배현우는 성큼성큼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는 그 뒤에서 부지런히 그의 뒤를 쫓았다.집안의 광경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이 호화로웠다. 지금 내가 천국에 온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집안을 들어서자 하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오셨습니까, 회장님.”몇몇 하인들이 다급히 달려와 배현우의 손에 들려있던 짐을 넘겨받았다. 분위기가 이토록 화기애애한 것을 보아하니 이 집의 하인들은 모두 배현우에게 충성심이 상당히 강한 모양이었다.배현우의 방으로 돌아오자 그는 갑자기 문을 닫아 버리고는 나를 그의 품속에 가둬 조금 잠긴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나 별로 안 보고 싶었나 봐요?”배현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애써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켜 보았지만 차마 그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할 수가 없어 애꿎은 바닥만 바라보며 어색하게 살짝 웃어 보였다. 사실 나는 조금 고지식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저번에 배현우가 나에게 불같이 화를 냈던 일이 여전히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은 채 묵혀버린 탓인지 무어라 입을 열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내가 계속하여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배현우는 그대로 내 몸에 기댄 채 뚫어져라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마치도 나를 꿰뚫어 보고 있듯이 날카
그날 밤, 나는 영식 씨와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닌 배현우의 별장에 남기로 하였다. 오늘과도 같은 날은 절대 배현우 혼자 외로이 이 크나큰 별장에서 새해를 맞이하게 둘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배현우는 주절주절 열 살 전 부모님과 함께 보낸 행복한 시절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의 얘기는 조금도 털어놓지 않았다. 나도 그 시절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분명 그 시절은 배현우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이제야 배현우가 왜 그리도 가족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지, 콩이에게 왜 그리도 잘해주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모습들을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배현우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면서 나는 점점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오늘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바로 내가 많은 기억을 잃은 것 같다는 점이었다. 나의 첫 기억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머물러 있다. 그 후의 일들은 대부분 또렷이 기억이 나지만 이상하게도 그 전의 일들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다 하더라도 조금은 기억이 날 법도 한데 이상하리만치 내 머릿속에서 전부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옛날 부모님의 모습 등등 그 어떤 기억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이유에선지 나에게는 친구도 없었다.행복한 얼굴로 자신의 동년을 말하는 배현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그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에게만 모두가 가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지? 혹시 사람들이 말하는 선택성 기억상실증 뭐 이런 건가? 풀리지 않는 의문들에 조금 답답해지기 시작했다.배현우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임윤아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턱 끝까지 차올랐던 의문을 끝내 도로 삼켜버렸다.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한 채 함께 새해의 첫날을 맞이했다.하지만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다. 그날, 호주의 본가에서 열렸어야 할
지금 이세림이 작정하고 나에게 시비를 걸려고 온 것이라면 나라고 하여 그녀의 함정을 역이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세림이 먼저 제 발로 찾아왔으니 내 쪽에서 또 다른 단서들을 꿰어내기 좋은 기회였다.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세림의 말을 맞춰주었다. “역시 세림 씨가 세심하네요.”“별말씀을요, 어쨌든 이건 현우 오빠 트라우마잖아요.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예요, 그 누구도.”이세림은 힘을 실어 마지막 한 마디에 강조를 더하는 듯 했다. 그러고는 고소하다는 듯이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이세림이 강조한 “그 누구도”에는 내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필경 그날 밤 배현우는 실제로 나에게 불같이 화를 냈으니 말이다. 장담하건대 이는 분명 이세림이 원했던 결과일 것이다.“사실 현우 오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잖아요. 천우 그룹은 현우 오빠 아버지, 배천석 씨가 창립했으니 그럴 만도 하죠.” 이세림의 말속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이세림이 배씨 가문에서 발언권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배씨 가문은 조상님 때부터 전해져오던 사업이 있었나 봐요?” 이 화제는 확실히 나의 관심을 끌 만했다. 이토록 규모가 큰 천우 그룹이 기반이 다져져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원래 배씨 가문의 사업은 항상 어르신께서 맡아오셨어요. 어르신께서 환갑이 되시는 해가 되어서야 그 사업의 결정권이 아버님 손에 들어오셨죠. 아버님은 정말로 대단하신 분이예요. 사업을 손에 쥐시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사업의 규모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하게 달라졌다고 들었으니 말이예요.”이세림은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이어 말을 이어갔다. “그 뒤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버님께서 그 사업을 어머님께 맡기시고는 혼자 또 천우 그룹들 창립하셨어요. 지아 씨, 천우 그룹이 왜 천우 그룹 인지 알아요?” 말을 마치고 이세림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나는 그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배천석, 고석우, 배현우잖아요!” 이세림은 말을
나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이세림은 깜짝 놀라더니 곧이어 이성을 되찾은 듯 다시금 차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이세림의 반응을 보아하니 임윤아의 죽음에 기필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이세림은 곧바로 눈치를 채고는 말을 바꾸기 시작했다. “제 말은 현우 오빠는 자주권을 가지면 안 된다는 거죠. 아무리 현우 오빠 마음속에서 임윤아가 중요한 존재라고 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는 없어요. 임윤아가 죽지 않았다고 해도 사업을 물려받을 수는 없었을 거고요.”“윤아 씨가 현우 씨 마음속에서 그토록 중요하니 세림 씨가 많이 서운하겠네요.”나는 일부러 한마디 더 거들었다. “어쨌든 세림 씨한테도 영향이 크잖아요.”이세림은 순간 표정이 살짝 굳는 듯 했지만 다시금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저야 딱히 신경 쓸 이유가 없죠. 임윤아 같은 존재가 백만 명 있다 해도 현우 오빠는 제 의지와도 상관없이 오직 저만 차지할 수 있거든요.”이세림은 말을 하며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나는 이세림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방대한 배씨 가문이 그녀의 뒤를 받쳐주고 있으니 이세림이 저렇게 설치고 다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그런데 임윤아는 어떻게 죽은 거예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이세림이 나에게 임윤아와 관련된 화제를 꺼내면 무작정 피하기만 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저렇게도 계속하여 임윤아 얘기를 고집하는 걸 보면 나에게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그러자 나는 문득 이세림이 알고 있는 임윤아 얘기가 들어보고 싶어졌다. 아까 이세림이 실수로 흘려버린 정보를 들어보니 확실히 알려지지 못한 진실이 숨겨져 있는듯하다. 임윤아의 죽음은 분명 배씨 가문,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배유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벼랑 끝에서 떨어져서 죽었어요.” 임윤아의 죽음을 말하는 이세림의 말속에서는 연민의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볼 수가 없었다. “후에 어머니께서 현우 오빠를 데리고 가서 시체를 확인시키기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