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깜짝 놀랐다. 좀 전에 배현우와 나눈 키스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배현우는 정말로 이 비열한 인간과 마주쳤던 것일까?마음이 이리도 괴로운 것은 모두 배현우 탓이다.그때 이세림도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띠며 나에게 다가왔다. “지아씨 나와 얘기할 수 있을까요? 왜 여기 있어요!"이세림은 신호연을 바라보았고 또한 신호연이 나에게 건넨 술을 바라본 후 미안해하며 말했다. "제가 두 분을 방해한 건 아니죠?"신호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을 때 마침 두 남자가 몸을 돌려 그와 부딪쳤고 그 남자는 재빨리 미안하다 말했지만 신호연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나만을 계속 바라보았다.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별거 아니에요, 우린 그냥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아! 사실 세림 씨와도 관련이 있죠!"방금 신호연과 부딪친 남자는 다시 신호연의 앞을 지나며 손을 뻗어 그를 가볍게 터치하며 말했다. "미안해요!"라고 말했다.방해를 받은 신호연은 불쾌한 듯 그를 한번 쳐다본 후 이세림을 보았다."나?" 이신혜는 조금 놀란 듯 나를 보며 조금 어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신호연, 당신 정확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난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차갑게 그에게 물었다. 이 녀석은 확실히 나쁜 짓을 했다."그건 지아 씨에게 물어보세요. 안 그래, 여보?" 신호연의 모습이 역겹기 짝이 없었다."뻔뻔해!" 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얼마든지 해, 웅얼거리지 말고. 난 너에게 할 말이 없어!""세림 씨, 당신은 배현우 씨의 동반자죠? 배현우 씨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 신호연은 이세림을 바라보며 물었다.나는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핸드백을 손으로 꾹 움켜쥐었다.이세림은 내 눈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는 신연호를 향해 물었다."이 선생님, 무슨 뜻이죠?” 하고 물었다.그는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우리 지아 씨는 당신과 배현우가 어떤 관계인지가 제
그 순간 나는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겨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난 신호연이 왜 이리 날뛰는지 알 수 없었다. 만약 그의 손안에 약점이 될만한 게 없다면 이렇게 물고 늘어질 수가 없다. 나는 신영호가 얼마나 비열한지 지금까지 모두 경험해서 알고 있다.나의 존엄성을 무시한 배현우를 차갑게 바라보았다."파렴치한!" 이 말은 저 두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몸을 돌려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아 씨 거기 서! 같이 보고 싶지 않은 거야?" 신호연은 물고 늘어지듯 나를 바라보며 고소해 하는듯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가면 이 연극은 지루할 것 같아."이세림은 재빨리 앞으로 나와 내 팔을 잡고 상황을 풀려는 듯 조심스레 미소를 지었다. "지아 씨, 이건 다 제 탓이에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폐를 끼치게 된 거 같네요... 이런..."나는 눈을 내리깔고 이세림이 나를 붙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이세림은 내가 떠날 것을 걱정하여 꼭 붙잡고 있었지만 그것은 상황을 호전시키는 게 아니라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그때 전훈이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와 이세림이 잡고 있는 나를 본 후 사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호영을 향해 말했다. "이게 무슨 소란이죠! 신 대표님!""세림 씨, 미안해요. 난 다만 모두가 흥미로워 할 사진 한 장을 보여드리려 했죠!" 신호연은 뻔뻔스레 웃었다.전훈은 무심코 이세림을 훑어보았고, 그때 나는 이세림의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보았다."그래요, 나도 보고 싶어요. 뭐예요? 열어봐요!" 이세림은 팔짱을 끼고 신영호를 바라보았고 그것은 분명 신영호를 도와 이 일을 벌이려는 것과 다름없었다.배현우는 매우 차가워진 상태로 노려보았다.신호연은 즉시 전화기를 열었고 내 손은 무의식적으로 꽉 쥐어졌다. 이세림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신호연이 꺼낸 물건으로 쏠렸다. 나 또한 그를 바라보았고 마음은 이미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그러나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얼굴은 창백
계단에서 주춤거리다 문득 깨달았다.남 망신 주려다 오히려 자기가 당한 꼴이라니... 씁쓸한 미소를 지은 후 형원빌딩에서 나왔다.올 때 장영식의 차를 타고 왔지만, 이청원의 차로 바래다주는 걸 피하고자 하지도 않은 운전을 했다고 말했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계단을 내려와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장영식을 남게 한 이유는 오늘 여기에 온 건 단순히 이청원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석한 많은 업계 임원과 어울릴 수 있는 최적의 기회였이기 때문이다. 또고 도혜선이 바로은 뒷이야기를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기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세림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뚜렷이 느꼈다.고 배현우도 결코 단순히 상대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이 뜻밖의 이벤트는 나에게 수모였다. 예전의 내가 신호연을 너무 높게 평가한 것 같다. 배현우와 이청원에 비교하면 너무나도 단순하다.택시에 탄 후 마음이 허전하고 내 자신이 너무 미련하고 뒤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종로를 지날 때 갑자기 끼어든 차로 인해 급정거하자 기사님이 욕을 뱉었다. “미친 거 아니야?”라고, 욕했다. 내가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차 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나를 택시 밖으로 끌어낸 후 다른 차에 재빨리 집어넣었다. 모든 것이 너무 갑자기 일어났다.힘겹게 일어나 손을 뻗어 차 문을 열려고 했지만 잠겨있어 당황한 표정으로 앞을 보니 신호연이었다. “당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나는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짓이냐고?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음험하게 한마디 한 뒤 빠르게 차들 사이로 운전했다. 제지하려러 달려드는 나를 피하느라 차량이 이리저리 흔들려 주위 차들의 경적을 일으켰다. 신호연이 소리를 질렀다. “당신 죽고 싶어? 그렇다면 같이 죽어.” 그러고는 액셀을 밟았다.“그놈이랑 입 맞췄지? 오늘 실컷 맞추게 해줄게.” 화가 난 신호연의 빠르고 불안한 운전에 놀란 나는 목숨 걸고 차 문을 당겼다. “쓰레기, 당신은
이미 옷을 벗어 던진 신호연이 어느새 한지아를 짓누르고 있었다. 신호연은 몸을 굽힌 채 점점 한지아에게로 다가갔다. 한지아는 미친 듯이 그를 물어뜯고 마구 발버둥을 치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신호연은 마치 미친 치타처럼 두 눈이 새빨개져서 섬뜩한 웃음소리를 냈다.“너 원래 이러지 않았잖아, 너 날 제일 좋아했었잖아… 지아야? 오늘 내가 너 기쁘게 해줄게, 다시 추억해봐! 하하…”“… 이거 놔… 신호연…”이 시각 한지아는 매우 절망스러웠다, 한지아는 속이 울렁거리면서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이 또 한 번 밀려오는걸 느꼈다. 한지아는 지금 죽는다고 해도 신호연이 자신을 만지는 게 싫었다.“짝!”또 뺨 한 대를 맞았다. 한지아는 눈앞이 빙빙 돌며 코끝이 따뜻해 지는 것을 느꼈다.“좋게 말로 할 때 가만히 있어, 그래도 내가 네 남편이었었잖아, 예전처럼 이뻐해 줄게… 지아야,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너 때리고 싶지 않아, 그냥 널 사랑하고 싶어… 떨어져 있은 지 너무 오래됐어, 나 정말 네가 많이 생각났어, 나 너랑 하고 싶어, 이런 거 좋아하지? 함께…” 쾅! 누군가 밖에서 강제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때다 싶어 소리를 질렀다.“… 살려줘… 살려줘요… 나 좀 놔줘…”살려는 본능에 한지아는 있는 힘껏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더니 우당탕하고 누군가 넘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잔뜩 화가 나 있는 목소리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인간 쓰레기 새끼! 감히 지아 씨를 건드려? 네 인생 아작 내줄께!”배현우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한지아는 침대 위 먼지 가득한 이불로 자기 자신을 감쌌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져 나왔다.고개를 돌려 보니 쉴 새 없이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배현우와 늑대처럼 울부짖는 신호 연의 비명이 들려왔다.한지아는 이불로 자기 자신을 꼭 감쌌다. 억울함과 비참함 수치스러움과 슬픔이 한 번에 몰려왔다. 신호연에게 짓밟혀 한지아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한지아는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배현우는 흠칫 몸을 떨더니 횡설수설 해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전 지아 씨가 걱정되니까 그러죠. 저랑 콩이 데리러 가는 거 같이 가요. 제가 데려다줄게요. 그리고 먼저 콩이랑 놀고 있어요. 전 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요. 정말 잠깐이면 돼요!”순간 숨이 턱 막혀온 난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일으켰지만 가슴은 여전히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현우가 이미 현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몸에 기대 아래층으로 내려와 그의 차를 타고 콩이를 데리러 이미연의 집으로 갔다.나를 본 미연은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그동안 내가 미연이와 지내온 바로는 나에게 못 박힌 듯이 고정된 저 눈빛은 나를 향해 뭔 일 있었지? 라고 캐묻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미연이는 콩이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인지 입을 열었다가도 다시금 머뭇거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어떻게든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콩이의 손을 꼭 잡은 채 미연에게 슬쩍 눈짓하고는 말을 꺼냈다. “시간 날 때 얘기해 줄게.”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화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콩이의 손을 꼭 쥐고 함께 미연이의 집을 빠져나왔다.콩이는 미연이의 집에서 대체 얼마나 온갖 난리를 치며 즐겁게 놀았던 것인지 내 품에 안긴 지 얼마 안 되어 금방 단잠에 빠져버렸다. 집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릴 때 배현우는 행여 콩이가 단잠에서 깰까 조심스레 그녀를 내 품에서 데려가 항상 그랬듯이 품에 안고는 집으로 올라가 방의 침대에 살며시 눕혀 놓았다. 그러고는 나를 껴안고 내 이마에 부드럽게 키스를 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다녀올게요.”말을 끝맺은 배현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급히 집을 떠나 어느새 어둠 속에서 종적
그 일이 있고 나서 한동안 배현우는 짬만 나면 항상 저녁시간에 우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만 신기한 건 항상 콩이가 잠이 든 후 우리 집으로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수로 매번 타이밍을 그렇게나 정확하게 잘 맞추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 나의 생활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평화를 되찾아 갔다. 그러나 의문점이 있다면 진작에 다시 나를 찾아와 괴롭혀야 했을 신호연 쪽에서 이상하리만치 감감무소식이었다. 신호연이라는 존재 자체가 내 인생에서 아예 증발해 버린 것처럼 말이다. 오랜만에 되찾은 평화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갑자기 변해버린 이 모든 상황이 그저 낯설게만 느껴졌다.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한가득 있었지만 난 차마 배현우에게 답을 요구할 수가 없었다. 배현우에게 이 상황에 관하여 묻는다고 하여도 대충 거짓말들로 둘러대며 상황을 모면해 버릴 것이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회사의 업무들도 모두 순조롭게 운영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 회사에 있어 이동철은 너무나도 훌륭한 인재였다. 그의 활약하에 마케팅 부서의 실적도 나날이 상승세를 보인다. 물론 그중에는 동철 씨와 장영식 사이의 케미도 크게 한몫 차지하고 있는듯하다.요즘 세림 씨가 계속하여 나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모두 바쁘다는 빌미로 거절해 버리고는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애초에 파티장에서부터 난 이미 그녀의 의도를 모두 파악해 버렸거니와 이제 그녀를 상대해 줄 여력이 없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정신력 싸움에서 나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기 싫었다.오늘따라 퇴근이 빨라져 마트에 잠깐 들러 이것저것 먹을거리들을 양손 가득 챙기고는 콩이를 데리러 발걸음을 옮겼다. 콩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한편으로 콩이를 돌봐주며 한편으로는 저녁 준비를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정성스레 준비한 저녁 식사를 바라보며 내심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눈치 빠른 콩이는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빛으로 푸짐한 저녁 메뉴들을 바라보더니 잔뜩 신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나에게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콩이는 작은 입술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배현우를 우주 끝까지 치켜세워 줄 기세였다.“아저씨가 최고야!”배현우는 내심 뿌듯했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아저씨가 최고야? 왜?”“아저씨가 우리 집에 오니까 먹을 것도 엄청나게 많아지고, 인형 동생들도 생겼어요! 제 인형들도 이제 가족이 생겼어요. 인형 엄마, 인형 언니, 그리고 인형 동생까지요!” 그러고는 배현우를 바라보며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엄마, 언니, 동생 이렇게 얘네가 한 가족이에요. 전 인형 아빠는 필요 없어요! 아빠는 나쁜 사람이거든요. 전 아빠보다 아저씨가 더 좋아요!”콩이의 말에 배현우의 입꼬리는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러고는 연신 자신의 젓가락으로 콩이에게 반찬을 먹여주며 콩이에게 사랑 표현을 해댔다.밥을 다 먹고 나는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배현우는 거실에서 콩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부엌에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직도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배현우가 콩이와 이토록 친하게 지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니와 그는 콩이의 어리광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모두 받아주었다.콩이는 놀다 말고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쪼르르 배현우에게 달려가 자신의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사탕 하나를 꺼내 쥐고는 직접 포장지까지 손수 까 배현우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아저씨에게 주는 답례예요! 엄마가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어야 한대요.”그날 밤, 콩이는 늦은 시간까지 실컷 놀고 나서야 겨우 씻고 잠들었다. 씻기 전 콩이는 아쉬운 듯이 배현우의 옷자락을 꼭 쥐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저씨 내일도 놀러 오실 거죠?”배현우는 그런 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되물었다. “콩이는 아저씨가 놀러 왔으면 좋겠어?”“네! 아저씨가 매일 왔으면 좋겠어요! 그럼, 아저씨가 저희 엄마 지켜 주실 거죠?”콩이는 졸린 눈을 부릅뜨고는 진지한 어투로 질문을 던지고는 배현우의 답을 기다렸다.나는 콩이의 예상 밖의 질문에 순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대체 그 조그마한
아침에 첫 알루미늄 창이 도착했기 때문에 아이를 일찍 유치원으로 데려다준 나는 차를 몰아 창고로 갔다.상품 검열을 다 마치기도 전에 알 수 없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지난번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여자가 한 번도 가본적 없는 외곽에 있는 클럽으로 오라며 전화가 왔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해 보니 평택시 외곽이었다. 꽤 먼 곳이다.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있다.나는 차를 몰고 그곳으로 가면서 배현우에게 이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생각해 보니, 됐다. 아직 그녀들이 나를 만나고자 하는 목적을 모르니. 그를 걱정시킬 필요는 없다... 게다가 나는 이기적이어서 배현우를 잃을까 두렵다.배현우와 멀리 떨어져만 있어도 난 두렵다.클럽에 도착하니 짐작했던 사람이 보였다. 멀리서 한번 본 적 있던 배현우의 고모다..그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여자는 배현우의 고모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배씨 가문의 유전자가 좋은 것인지, 배현우의 고모는 매우 아름답고 키도 컸으며 꽤 카리스마가 있어 보였다. 이세림의 말이 맞았다. 배현우의 고모에게서 온화한 기질이라고 묘사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헤어스타일, 눈썹, 옷, 몸짓 하나하나까지 차갑고 도도했다.나를 본 순간, 배현우의 고모는 실눈으로 잠시 동안 바라보더니 눈썹을 치켜올리며 "앉아요!" 하고 말했다.나는 배현우의 고모 옆 소파에 앉아 차분한 척했지만 사실은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지아 씨, 내가 왜 당신을 여기로 불렀는지 아세요?" 배현우 고모의 말투는 매우 친절하고 차분했지만 나는 배현우의 고모가 가장 절제하는 말투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질문이 매우 까다롭고 어려워 대답하기 힘들었다.내가 안다고 말한다면 내가 잘못한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른다고 말한다면 배현우의 고모에게 내가 정직하지 못하게 비칠 것이다.나는 배현우의 고모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배현우의 고모를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