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주는 피를 토해내며 흉터남의 바지를 잡았다.“해독제...”흉터남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꼬리를 올렸다.“해독제는 애초에 없었어. 넌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먹고살려고 그래? 말 한마디에 바로 속네.”홍혜주는 놀란 표정으로 힘겹게 말했다.“해독제... 없...”“KA48는 해독제가 없어!”흉터남은 피식 웃으며 홍혜주의 목을 잡았다.“저승에 가서 애들한테 안부 전해줘.”그는 홍혜주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홍혜주는 아직도 그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상태였다.“저를... 속인 거예요?”홍혜주의 눈에는 빛이 없었다. 그녀는 흉터남의 손에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빠르게 칼을 뽑아내 그의 눈을 향해 찔렀다.흉터남은 빠르게 피했다. 그래도 얼굴에 상처가 남았다.홍혜주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다리가 골절했는데도 꿋꿋이 일어날 정도의 한이었다.“이것도 거짓말이면, 설마 제 부모가 저를 팔았다는 것도 거짓말이에요?”“그렇게 많은 애들이 있는데, 네 부모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역시... 거짓말이었어... 저를 도구 취급하고, 제 인생을 망쳤어요! 당신은 죽어도 싸요!”홍혜주는 총을 꺼냈다.탕! 탕!두 발의 총성이 들렸다.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던 온지유도 들었다. 그녀는 몸이 굳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슬픈 기분이 들었다. 눈물은 저도 모르게 주르륵 흘러내렸다. 모든 것이 꿈처럼 현실감이 떨어졌다.이때 그녀를 가리고 있던 문이 열렸다. 빛이 들어와서 그녀의 몸에 떨어졌다. 빛이 이토록 눈부시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사람 있습니다! 여기 사람 있습니다!”특전사가 외쳤다.온지유는 울면서 손을 뻗었다. 삶의 희망을 향해 뻗은 손이었다. 손이 잡힌 순간 그녀는 드디어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사... 살았다...”부축받고 일어난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얼어붙은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혜주...”‘혜주 씨가 기다리라고 했는데? 왜 안 돌아오지?’걱정되었던
홍혜주는 손가락을 까딱하더니 힘겹게 눈을 떴다. 온지유를 인식한 그녀는 손을 뻗어 붙잡으려고 했다. 온지유도 느끼고 허리를 숙였다.“혜주 씨!”“추워... 나 추워요...”“안아줄게요. 그럼 안 춥죠? 이쪽으로 기대요.”홍혜주는 무기력하게 말했다.“저 이제 죽는 거죠? 미안해요. 도움이 하나도 못 됐어요. 약도 못 찾고... 저... 콜록콜록...”“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요. 구급차가 오고 있어요. 제가 계속 곁에 있을게요. 곧 따듯해질 거예요.”홍혜주의 시선은 이미 흩어졌다. 그녀는 허약하게 말했다.“저 때문에 슬퍼하지 않아도 돼요. 저희 어차피 모르는 사이였잖아요. 명진이 아니었으면...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대로 죽어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아요. 이제야 좀 쉴 수 있는 느낌이랄까.”홍혜주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했다. 그녀의 인생에 행복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도 없이 혼자서 그 힘들 세월을 견뎌내는 게 쉽지 않았다. 인생도 참 재미없게 느껴졌다.“앞으로는 달라질 거예요.”온지유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나쁜 사람들이 전부 잡혔어요! 여기도 이제 탈탈 털릴 거예요! 혜주 씨는 자유예요! 이제는 예쁘게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요! 우리 같이 해봐요! 포기가 웬 말이에요!”온지유는 거의 소리 지르다시피 말했다. 그녀는 홍혜주가 희망을 잃은 채 죽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살아만 있다면 기회가 있었다.이런 그녀를 바라보며 홍혜주는 미소를 지었다.“제가 할 수 있을까요?”“네! 제가 장담해요!”온지유는 그녀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혜주 씨도 사랑받으면서 살 수 있어요. 혜주 씨가 좋아하는 예쁜 것도 실컷 해요. 그리고 혜주 씨한테는 친구도 가족도 생길 거예요. 이제는 혼자가 아니에요. 봐요, 저도 있잖아요.”이 말을 들은 홍혜주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항상 바라던 생활이었다.외롭지 않은, 어둠에 가려져 있지 않은 생활... 그녀는 평범한 사람처럼 평범하게 사는
온지유는 지금의 감정을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는 힘든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녀의 아픈 과거 정도는 보잘것없어질 정도로 말이다.적어도 그녀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홍혜주가 그리는 사랑을 받아본 적도 있다. 그런 생각에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렸다.온지유도 구급차에 살려갔다. 홍혜주와 다른 차였다. 나쁜 사람들은 벌써 제압됐는지 더 이상의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구급차 창문을 통해 경찰차를 볼 수 있었다. 현장도 청소하는 사람이 있었다.흉터남은 당연히 체포되었다. 그는 머리에 검은색 천을 뒤집어쓰고 손에는 수갑이 씌어 있었다. 몸 곳곳에 상처가 있었던 그는 절뚝거리며 걸었다.뒤이어 용경호와 성재민이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어디에도 여이현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온지유는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나 두 사람과 붙어 있던 여이현이 왜 사라졌는지를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한창 노승아와 함께 있을 때이니 떨어져 있을 만도 했다.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도 참 답답했다.모두가 여이현을 감싸고 도는 곳이니 그는 무사할 것이다. 그를 걱정할 바에는 자신을 걱정해야 한다고, 온지유는 생각했다.다행히 홍혜주가 도와준 덕분에 그녀는 별로 다치지 않았다. 몇 곳 쓸리고 까진 게 전부였다.그러나 사건이 꽤 심각했는지 현장에는 구급차가 아주 많았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라면 전부 구급차에 실려 갔다.그녀가 탄 구급차에는 군인 한 명도 있었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그는 많아서 18살 정도 되어 보였다. 어린 나이에 왼쪽 눈을 다친 그는 지금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아무리 지혈해도 소용없었다.정신은 멀쩡했던 그는 아픈데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침대 끝을 하도 꽉 잡아서 이불이 구멍 날 정도였다.이런 장면에 온지유는 심장이 떨렸다. 이 세상에 이런 곳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대신 다쳐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녀가 그동안 안전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군인들은 언제나 최
군인들은 쫓아오려고 했지만 자동차의 속도를 따라올 수 없었다.노승아는 자꾸만 백미러로 여이현을 관찰했다. 그의 움직임이 점점 적어져서 마음이 급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될까 봐서 말이다.“버텨요, 이현 오빠! 꼭 버텨내야 해요! 우리 곧 도착해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독제를 얻을 테니까, 오빠는 버텨주기만 해요!”노승아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정신이 희미한 상황에서도 여이현이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그녀는 무조건 해독제를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여이현이 조금만 버텨주면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차는 거칠게 운전해서 숲에서 시내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또 교외의 폐공장에서 급정거했다.텅 빈 CCTV 화면에 예고 없이 들어선 차는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노승아는 차에서 내리며 외쳤다.“아버지, 저예요! 살려주세요!”그녀는 뒷좌석에서 여이현을 끌어내렸다. 폐공장에서는 벌써 누군가 달려 나오고 있었다. 노석명과 같은 편에 있는 사람들이었다.노석명은 CCTV 화면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노승아와 여이현이라는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이번 작전은 여이현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여이현이 진짜 흉터남을 제거해 줄지 궁금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여이현을 믿어도 되는지 의심했다.비록 얘기를 많이 나눠보지는 못했지만, 노승아가 이것저것 알려줬다. 이번 작전이 처음으로 여이현과 직접적으로 연락하는 것이었다.여이현은 점점 그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노승아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했다.“뭐해요? 빨리 와서 부축하지 않고!”노승아는 급한 마음에 언성을 높였다.노석명도 밖으로 걸어갔다. 노승아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는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별일 없으면 찾아 오지 말라고 했잖아. 쟤는 왜 또 데려와?”“아버지, 이현 오빠 좀 살려주세요. 오빠가 저를 구해주려고 대신 약에 중독됐어요. 다 저 때문이에요. 이제는 제발 이현 오빠를 믿어줘요. 오빠는 저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다고요. 오빠가 죽으면 저는 평생 제정
실험실에는 다양한 약과 도구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약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이곳은 노석명이 만든 실험실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곳에는 독약도 있고 해독약도 있었다. 이름 없이 숫자만 적혀 있는 약이라 전문가만 알아볼 수 있었다.실험실에는 10 여명의 연구원이 있었다. 그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채 일하는 중이었다.여이현은 정신을 잃은 채 소파에 놓였다....병원에 간 온지유는 정밀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홍혜주가 지켜준 덕분이었다.그녀는 혼자 수술받고 있을 홍혜주가 너무 걱정되었다. 홍혜주는 외로운 걸 싫어했다. 수술은 잘 받고 있을지 너무 다급하고 불안했다.홍혜주가 혼자라고 생각하는 게 싫었던 그녀는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홍혜주가 눈을 뜨자마자 곁에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봤으면 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 지지 않을까?수술은 장장 3시간이나 계속되었다.잠시 후 홍혜주가 마취 상태로 수술실에서 나왔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온지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수술은 성공적입니다. 총탄을 전부 빼냈어요. 이제 경과만 지켜보면 됩니다.”“감사합니다, 선생님.”홍혜주가 나오자 경찰들이 몰려왔다. 그들이 용경호를 대두로 홍혜주의 병실에 깔리는 것을 보고 온지유가 물었다.“왜 경비가 이렇게 많아요?”“조직과 연관이 있는 범인이니까요. 도망치지 않게 잘 감시해야죠.”온지유는 긴장하기 시작했다.“강요로 한 일도 범죄가 되나요?”“그건 판사님이 판단할 일입니다.”온지유는 걱정되는 마음에 한 마디 더 물었다.“혹시... 사형에 처할 수도 있나요?”“저는 잘 모릅니다. 주범이 맞는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지겠죠.”“언니는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에요. 그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 많아요.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여자애 혼자 어떻게 하겠어요.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는 곳이었어요. 언니는 그냥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거예요.”용경호는
온지유의 질문에 용경호는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아닙니다, 사모님.”생각 끝에 그는 계속 감추기를 선택했다. 여이현도 그걸 원할 것이다.“소대장님은 현장에 남아서 지휘할 일이 많아요. 증거 수집도 해야 해서 밖에서 안 보였을 거예요.”“노승아 씨는요?”“그건 저도 잘 몰라요.”용경호는 철저히 대답을 회피했다. 그래서 온지유도 계속해서 물을 수 없었다.“제가 혜주 씨 곁에 있는 건 괜찮죠?”“아... 그게...”“안 돼요?”“됩니다.”용경호는 잠깐 난감해하다가 허락했다.“하지만 허락 없이 드나들 수는 없습니다. 이동할 때마다 검사가 있을 겁니다. 사모님이라고 해도 규정은 지켜야 하니까요.”군인들은 항상 이렇게 딱딱했다. 그러나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던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그 정도는 감수할게요.”온지유는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용경호는 밖에서 지키고 있었다.여이현의 소식을 마냥 기다리기만 해야 했던 용경호도 일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보는 눈이 있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침대 가에 앉아 창백한 안색의 홍혜주를 바라봤다. 생기를 잃은 그녀는 빨간 머리카락마저 칙칙하게 보였다.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면봉에 물을 묻혀 닦아주고 나서야 약간 윤기가 돌았다.주변이 잠시 조용해지자 그녀는 납치당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차 안에는 장다희도 함께 있었다. 그녀는 무사한지 문뜩 걱정되기 시작했다.그녀는 밖으로 나가 용경호에게 상황을 물었다.“장다희 씨는 다쳐서 입원했어요. 참, 이건 사모님이 떨어뜨린 핸드폰이에요.”용경호는 그날 차에 있었던 핸드폰을 건넸다.“안에서 심심하실 텐데 핸드폰이라도 가지고 계세요.”온지유는 핸드폰을 받아서 들었다. 다행히 고장 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그날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차창은 깨졌지, 길은 막혔지, 사람들은 다쳤지... 전쟁터 못지않은 상황이었다.기억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던 온지유는 용경호에게 말했다.“그러고
온지유는 침대에 누워 있는 홍혜주를 바라봤다. 어쩌면 홍혜주는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일단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서 인터넷을 관찰했다. 도로 한복판에 폭탄이 설치된 일은 역시 토론되고 있었다.사람들은 대개 두려움에 떠는 태도였다. 경찰 측은 테러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자세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었다.안정희에게 물어보니, 더 큰 혼란을 빚어내지 않기 위해 결과가 나온 다음에 보도할 예정이라고 했다. 조직을 완전히 파헤친 다음 보도할 생각인 것 같았다.그렇다는 건 현재는 보인 건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작전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이현 씨도 아직 현장에 있으려나?’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으로서는 흑막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너무나도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조금 전 봤던 핏빛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곧 밥때가 되었다. 온지유가 걱정됐던 용경호는 직접 도시락을 가져왔다.“사모님, 얼른 식사하세요.”용경호는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뚜껑까지 열어줬다. 젓가락까지 준비되어 있어서 온지유는 가서 먹기만 하면 되었다.그러나 온지유는 밥 먹을 생각 없이 질문을 던졌다.“경호 씨는 이상하지 않아요?”“네?”한순간 용경호는 음식이 이상하다는 줄 알았다.“저는 이현 씨랑 이혼했어요. 근데 왜 계속 사모님이라고 불러요? 혹시 제가 이현 씨랑 다시 만날 거로 생각하는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했죠? 혹시 이현 씨가 무슨 말을 해줬던가요?”온지유는 예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납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분명히 다 잡혔어요. 그런데도 작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했죠. 이현 씨는 대체 무슨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거예요?”질문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용경호는 무엇부터 대답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사... 아니, 온지유 씨. 도시락 여기 있어요. 천천히 드세요.”용경호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온지유의 질문에 응하는 것이 전쟁보다 어렵게
“마취가 풀려서 아플 거예요. 이틀 정도 참으면 괜찮아진다고 했어요.”홍혜주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괜찮아요. 이 정도 고통쯤이야... 지유 씨 다시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온지유는 곁에 앉아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앞으로도 자주 볼 거예요. 혜주 씨 소원도 전부 이뤄질 수 있어요.”홍혜주는 머리를 끄덕였다.사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온지유가 그녀를 걱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물 마시고 싶어요.”온지유는 후다닥 물을 따라줬다. 홍혜주는 빠르게 물 한 잔 비웠다. 그러자 말하기 훨씬 편해졌다.“조금 더 쉴래요?”“아뇨. 잠들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요. 이 순간을 조금 더 즐길래요. 병실에서 꼼짝 못 한다고 해도, 일반인이 된 느낌을 누리는 건 흔치 않잖아요.”흉터남만 사라지면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나니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밖에 누군가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궁금한 듯 물었다.“밖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예요? 왜 여기 있는 거예요?”“군인들이요. 신경 쓰지 말고 몸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요.”홍혜주는 곧장 알아차렸다.“이해해요. 어찌 됐든 저도 그쪽 사람이니까 감시를 해야겠죠.”온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기분이 다운될까 봐서 말이다.그러나 그녀의 걱정과 반대로 홍혜주는 웃으면서 말했다.“어리벙벙하게 생긴 게 좀 귀엽네요.”온지유는 홍혜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보고 있던 사람은 용경호였다. 그는 꼼짝하지 않고 동상처럼 서 있었다.“저 사람은 용경호라고 해요. 이현 씨 쪽 사람이에요.”“아하. 여이현 씨가 저렇게 어리숙한 사람도 거둘 줄은 몰랐네요.”온지유는 피식 웃었다. 홍혜주의 눈에는 용경호가 꽤 웃기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녀만 즐겁다면 뭐가 됐든 상관없지만 말이다.그러나 온지유는 아직 물어볼 일이 있었다.“혜주 씨, 혹시 노승아 씨 아버지에 대해 아는 거 있어요?”용경호가 말해주지 않는 걸 어쩌면 홍혜주는 알지도
밖을 내다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이던 거리가 이제는 적막이 흘렀다.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노점상들이 한창 손님을 맞이하며 돈을 벌어야 할 때였다. 모두가 한꺼번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건 말이 안 됐다.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모든 게 남태건이 꾸민 짓이라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었다.“너, 정말 비열하고 추잡하구나.”권다솔은 그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심해졌다.하지만 남태건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칭찬 고맙다. 내가 노점상들한테 각각 200만 원을 줬거든. 이제 너한테 선택지는 한 가지야. 나랑 만나.”그는 그녀를 꼭 얻어야 했다.권다솔은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지퍼에 올렸다.“난 선택하지 않을 거야.”어찌 인간이 짐승과 어울리겠는가.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지퍼를 열어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려는 순간 남태건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너한테서 정말 좋은 향이 나는 거 알아? 다음 주에 네가 이혼하면 그날 바로 결혼하는 게 어때?”“꺼져!”그녀는 힘껏 뒤로 발길질하며 그를 걷어차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행동을 예상한 듯 순식간에 그녀의 다리를 잡은 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보아하니 너도 나랑 함께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모양이네. 난 지금 바로 널 갖고 싶은데, 여기서 할까? 얼마나 짜릿하겠어?”그는 원래는 그녀에게 멋진 밤을 선사하려고 했다. 7성급 호텔에 장미로 덮인 침대와 로맨틱하게 촛불까지.하지만 그녀가 너무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원래 말 안 듣는 고양이는 잘 길들여야 발톱을 감출 줄 알게 되는 법이다.“남태건!”그녀는 화가 치밀어 오른 채 소리를 질렀다.“너 지금 무슨 짓 하는지 알아? 너 그러다 감옥 갈 거야!”그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종아리를 따라 손을 위로 더듬었다.“우리가 부부가 된 후에도 날 감옥에 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이 지난 뒤 네 뱃속
그럼 처음부터 딱 잘라 거절하는 편이 나았다.김영은은 그녀의 편에서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 돈은 바로 계좌로 보낼게. 물건은 혼자 옮길 수 없을 테니 경호원을 불러서 도와줄게.”경호원이라는 말을 들은 남태건은 더욱 씁쓸해졌다.이 또한 은근히 그를 경고하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집에는 경호원이 있으니 즉시 제압할 수 있고 그는 결국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남태건은 마지막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솔아, 잘 지내. 몸조심하고.”‘가급적이면 외출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물론 남태건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그는 예전에도 권다솔을 스토킹한 적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기회를 보면서 그녀를 강제로 데려갈 계획이었다.그때 두 사람의 친밀한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게 되면 그녀의 부모님은 이를 악물고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사회는 여자에게 항상 더 가혹한 법이다.그녀의 부모님이 딸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를 사위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남태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우리 딸, 이제 모든 물건은 돌려주었어.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해도 돼. 엄마, 아빠는 언제나 네 뒤에서 지켜줄게.”김영은은 그녀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그녀는 김영은을 꼭 안아줬다. 아무래도 미리 대비하는 게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다음 날, 출근길에 권다솔은 가방 안에 호신용 스프레이 한 병을 넣었다. 여러 종류의 고춧가루로 만들어졌기에 아주 소량만으로도 사람을 울릴 수 있었다.하루 종일 별다른 일은 없었고 퇴근 후에 동료들과 근처 먹자골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권다솔이 그중 한 골목 입구를 지나던 순간 옆에서 손을 뻗어와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갔다.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남태건이 서 있었다.그는 예전의 신사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엄마는 지금 병이 매우 심각해요. 아마 수술을 받는다 해도 남은 인생을 병상에 누워서 보내야 할 가능성이 커요.”배진호는 엄마에 대해 자업자득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처음에 권다솔은 그녀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매사에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자주 찾아뵈러 가서는 다양한 보신탕을 끓여주기도 했다.만약 그녀가 터무니없는 행동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어쩌다 그렇게 됐어요?”분명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만 해도 정미진은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에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다.“계속 아픈 척하다가 이제 진짜 병이 든 거죠. 악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미 치료의 최적 시기를 놓쳤어요.”배진호는 간단히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권다솔은 하마터면 꼴좋다고 말할 뻔했다.하지만 정미진은 어디까지나 그의 친어머니라는 점을 고려해 그만 삼켜버렸다.전화를 끊고 난 뒤 그녀는 혼자 방에 앉아 많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정미진은 자신을 돌보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비록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에 간섭하고 싶어 할지라도 이제는 그럴 힘조차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혼해야 할까?그녀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남태건이 김영은 앞에 서 있었다.“지난번에 이미 할 말을 다 했고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할 필요도 없는데 이제 와서 또 뭘 하려는 거니?”김영은은 다소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증거가 모두 드러났는데도 남태건은 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걸까?그녀는 외간 남자의 몇 마디 달콤한 말에 딸을 내어줄 사람이 아니었다.“저와 다솔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감히 그런 기대를 할 수도 없고요. 오늘은 전에 드린 물건을 돌려받으려고 온 거에요.”남태건은 최대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고 그
“전 치료 받지 않았어요.”정미진은 크게 후회했다.온갖 계산을 다 해가며 일을 꾸몄지만 결국 제대로 걸려든 사람은 본인이었다.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왜 했을까?“하지만 환자분 차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요.”“약은 먹지 않았고 링거도 다 버렸어요.”정미진은 말할수록 후회가 밀려왔다.이제는 의사조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치료받기 싫으시면 그냥 퇴원 수속 밟으세요. 집에서 지내는 게 나을 거예요. 약값도 아낄 수 있고 요즘 젊은이들 돈 벌기 얼마나 힘든데요. 게다가 소문나면 우리 병원 체면도 말이 아니거든요.”“안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부터는 치료에 협조할게요.”정미진은 순순히 의사의 의견에 따랐다.입으로는 죽고 싶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했다.그녀는 진심으로 살고 싶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돈 걱정도 없고 배진호도 권다솔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효자였다. 그녀가 죽게 되면 모든 게 끝나버리는 셈이다.그녀는 계속해서 지금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일단 병실로 돌아가세요. 치료를 받으시려면 가족분께서 동의서를 작성하셔야 하고 저희 병원 측에서도 다시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의사는 그녀를 설득해 병실로 돌려보낸 뒤 이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저녁, 배진호는 정관수술을 마쳤다.잃어버린 아이를 떠올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을 느꼈다.아버지로서 아이를 지키지 못한 건 어쩌면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남은 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때 권다솔이 전화를 걸어왔다.권다솔?배진호는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다솔 씨, 이제야 저한테 연락하는 거예요?”“전 그냥 월요일에 이혼 절차를 마치러 가는 걸 잊지 말라고 전하려던 것뿐이에요.”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임신 사실을 숨기기
“걔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정미진은 비웃음을 흘렸다.“지난번에 의사한테 물어봤더니 걔 체질은 워낙 임신하기 힘들대. 특히 유산까지 한 번 겪고 나면 더더욱 그렇지. 아무리 우리 진호를 유혹한다 해도 아이는 못 얻을걸.”갑자기 병실 문이 열렸다.배진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서 문밖에 서 있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그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그는 자신의 엄마가 이렇게 비열하고 이기적인 사람일 줄은 차마 상상도 못 했다.“진호야, 갑자기 어쩐 일이야?”정미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방금까지 병실 안에 누구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다만 배진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 엄마가 뒤에서 이런 짓들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엄마도 여자인데 어떻게 다솔 씨한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어요?”배진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권다솔을 유산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그녀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대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그제야 권다솔이 왜 확실하게 선을 긋고 떠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해치고 싶지 않았다.“방금 그냥 해본 말이야. 엄마가 무슨 짓을 하진 않았잖아...”“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저 오늘 바로 정관수술 예약할 거예요. 제 아이를 잃은 이상 앞으로도 다른 아이는 절대 갖지 않을 거예요.”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그는 오늘 중으로 수술을 예약하고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이 말을 들은 정미진은 마치 청천벽력을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애써가며 미래의 손자를 위해 준비했는데 결국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만약 배진호가 진짜 정관수술을 한다면 그녀는 평생 손자를 보지 못할 것이다.“불효 중 가장 큰 불효가 자손을 남기지 않는 것이야. 네가 정말 그렇게 한다
악역은 그가 맡기로 했다.“아니에요. 애초부터 태건 씨의 아이가 아니에요.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배진호의 아이예요.”그녀는 손을 뻗어 배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설마, 잃어버렸던 그 아이가 다시 그녀한테 돌아온 걸까?그녀는 권용민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어찌 됐든 간에 전 이 아이를 꼭 지킬 거예요. 저랑 진호 씨는 이미 이혼했지만 진호 씨는 저를 괴롭힐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잘 알아요.”“그렇다면 배진호 어머니는 어떡하려고? 그처럼 고약한 시어머니를 만나면 누구든 불행할 수밖에 없어.”권용민은 그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남태건과 비교하니 이제는 배진호가 조금 나아 보이기까지 했다.게다가 그가 찾아본 증거에 따르면 권다솔에게 달린 악플들은 배진호가 퍼뜨린 것이 아니었다. 석규리가 권씨 가문의 경쟁업체를 찾은 것이었다. 더 이상 배진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다.만약 배진호 혼자였다면 권용민은 아이를 위해 그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아빠가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미안하다만 배진호의 어머니가 있는 한 너희 둘이 다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그건 저도 잘 알아요.”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 역시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이미 시어머니 때문에 아이를 한 번 잃었지만 하늘의 축복으로 다시 아이를 가졌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그녀가 명확히 결정을 내린 것을 보고 권용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배진호는 매일 병원에 들러 정미진을 보살폈다. 정미진은 그의 앞에서 약을 먹고 링거를 맞는 척하며 완벽히 연기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배진호는 병원 문을 나서다 병실에 물건을 두고 온 것이 떠올라 급히 되돌아갔다.문 앞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며칠째 연기하느라 들어간 병원비만 해도 적지 않잖아요. 오빠도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제가 병원비를 봤는
그는 바닥에 쓰러진 딸을 보더니 깜짝 놀라 그녀를 안아 들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얼른 구급차 불러!”지나가던 직원이 급히 응급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권용민은 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그는 응급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왔다 갔다 오간 지도 셀 수 없었다. 권용민은 평생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만약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그조차 견딜 수 없는데 만약 아내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하늘이 무너질지도 몰랐다.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떠다니던 찰나 의사가 걸어 나왔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권용민은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물었다.“의사 선생님, 지금 제 딸은 어떤 상태인가요?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겁니까?”권용민은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의사는 그의 손을 보며 한 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너무 세게 잡고 있는 바람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는 속으로 어쩌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지도 모른다며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히 설명했다.“따님은 괜찮습니다. 단순히 저혈당 증상이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지금 따님이 임신 중이라 반드시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권용민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완전히 멍해졌다.‘임신이라니?’그럼 이 아이는 남태건의 아이인가?원래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남태건은 지나치게 계산적인 데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 딸과 엮이는 것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권다솔이 남태건의 아이를 임신했다니, 그녀는 얼마 전에도 아이를 잃었는데 또 낙태 수술을 한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뻔했다.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남태건의 성격상 아이를 두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권용민은 걱정을 가득 안고 딸을 만나러 갔다.“아빠, 지금 아빠 상태를 보면 마치 제가 정말 큰 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잖아요.”권다솔은 병상에 누운 채 창백한 얼굴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