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뇨. 후회하지 않아요.”온지유가 말했다.“그냥 저한테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거든요. 예전에는 그저 일개 비서였는데 지금은 통 크게 100억을 투자하고 나왔잖아요. 긴장이 풀려서 그래요.”장다희는 손을 들어 온지유의 어깨를 잡았다.“지유 씨는 지금 제 투자자가 된 거예요. 앞으로 지유 씨한테 의지하면서 살아야겠네요!”“그러지 말아요! 이제 시작이잖아요. 이 드라마가 끝나고 좋은 성과를 거두어야 우리 모두 편해질 수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김칫국만 시원하게 마신 것만 돼요. 우리에겐 실패란 없어야 해요!”장다희도 알고 있었다. 그녀도 온지유와 같이 도박을 하는 것이다.이번 일에 모든 승패가 달렸다.사실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왜 굳이 리스크가 큰 이 길을 걸으려 하는지. 분명 다른 편한 길도 있으면서 말이다. 아마도 온지유의 결심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았다.단호한 온지유의 모습에 그녀의 의지도 활활 타올랐고 최정상의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었다.그녀는 더는 엑스트라 장다희가 아니었다. 이제는 여주인공 장다희가 될 차례다.장다희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맞아요. 실패는 없어야 해요!”회사로 돌아오니 마침 퇴근 시간이었다.온지유는 다소 피곤했다.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최근 그녀는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피곤해졌다. 임신해서 그런 것일까?하지만 전에도 잘만 일하지 않았던가.온지유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드라마를 제작을 위해 준비할 것이 많았으니까.저녁까지 바쁘게 움직이던 온지유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안색을 눈치채지 못했다.그저 피곤한 것이라 여기며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했다.저녁이 되었건만 여전히 귀가하지 않은 온지유에 인명진은 그녀의 직장으로 찾아왔다. 온지유는 책상에 엎드리고 있었고 그녀의 주위로 컴퓨터와 원고가 있었다.창백한 그녀의 안색에 그는 고민하지도 않고 손목을 그어 핏방울을 그녀의 팔찌에 떨구어 넣었다.팔찌는 아주 신기했다. 그의 피를 흡수하면서
인명진은 과단성 있게 일하는 사람이었다.나민우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그가 한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를 믿을지 말지 생각하고 있었다.그래서 망설이고 있었다.두 사람이 몸싸움을 벌인 탓에 사무실은 난장판이 되었다.몸 상태가 한결 나아진 온지유는 눈을 뜨게 되었다. 두 사람이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에 입을 열었다.“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인명진은 온지유의 앞으로 오며 다가오는 나민우를 막아섰다.그녀는 두 사람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나민우?”온지유는 얼핏 그의 모습을 목격하고 불렀다.그녀의 목소리에 인명진은 나민우를 놓아주었고 메스도 치워버렸다.나민우도 그녀가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인명진이 그를 놓아주자마자 미소를 띠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지유야, 깼어?”온지유는 자리에 앉았다.“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나민우는 선물을 그녀에게 건넸다.“출장 갔다가 금방 돌아왔거든. 집으로 찾아갔는데 없더라고. 회사에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지. 자, 이건 네 선물이야.”장미와 함께 포장된 샴페인과 수입 초콜릿이었다.“고마워.”온지유는 그가 건넨 선물을 받고 고개를 돌려 인명진을 보았다.“인명진 씨도 언제 왔어요? 두 사람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방금 보니까 싸우는 것 같던데...”나민우가 답했다.“서로 처음 봐서 그냥 좀 경계하면서 대화를 나눴을 뿐이야.”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인명진을 보았다. 인명진은 비록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낯을 가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여하간에 평소에 사람을 잘 만나지 않으니 말이다.“그럼 제가 소개해줄게요. 나민우는 제 오랜 동창이에요.”“민우야, 이분은 인명진 씨고 새로 사귄 친구야.”나민우는 고개를 돌려 다시 인명진을 보면서 친절한 모습으로 인사했다.“반가워요.”“네, 반갑습니다.”인명진도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방금은 죄송했습니다.”“괜찮아요.”나민우는 온지유에게 시선을 옮겼다. 오랜만에 만나
“그럼 어디에 있죠?”나민우가 계속 물었다.인명진은 망설이다가 결국 말해주었다.“네로라는 조직 알아요?”나민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네로는 암흑 조직이 아니던가요? 예전에 이미 본거지를 쳐들어가 다 잡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아니요. 다 잡지 못했어요.”인명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저도 그 조직의 일원이거든요.”나민우는 생각에 잠겼다. 온지유가 납치당했던 일이 떠올라 고개를 들어 인명진을 보며 물었다.“지유가 설마 네로에게 찍힌 건가요?”인명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아닐 거예요.”“여이현과 노승아의 스캔들도 설마...”나민우는 순간 무서운 생각이 하나 들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노승아한테 해독제가 무조건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인명진이 말했다.“하지만 방법은 없죠. 노승아를 제외하고 해독제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요.'나민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두 사람 모두 온지유를 걱정하고 온지유를 위해 뭐든 시도하려고 했다.“이제야 알겠네요.”나민우는 더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이 일에 대해선 제가 방법을 생각해 볼 거예요.”인명진이 그에게 말했다.“각자의 능력이 닿는 대로 하죠.”이때 온지유가 가방을 들고 나왔다.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자 웃으며 물었다.“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거예요?”두 사람은 온지유를 보았다.온지유는 심각해진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둘 다 표정이 왜 심각해요?”인명진은 바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저녁은 뭐 먹을래요?”온지유는 그를 빤히 보았다.“왠지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 같네요. 얼굴에 혈색이 하나도 없잖아요. 안 되겠어요, 좋은 거 먹으러 가요.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민우야, 너도 가자. 내가 살게!”나민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래.”온지유는 통 크게 두 사람을 데리고 고급 레스토랑으로 왔다.“두 사람한테만 먼저 말해주는 건데, 전 지금 그냥 방송국 직원이
레스토랑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영문도 모른 채 요리를 즐기고 있던 온지유와 달리 나민우와 인명진은 상황을 빠르게 감지했다.“지유야, 불이 났나 봐. 여기서 빨리 나가야겠어.”나민우가 말했다.“뭐?”온지유는 놀라서 그들과 함께 급히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레스토랑은 1층이었기에 불이 나도 곧바로 뛰쳐나갈 수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레스토랑 안은 텅 비었다.손님들은 모두 밖에 서서 대체 어디에 불이 난 건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사장만이 아직 안에 남아 있었다.모두가 밖에서 한참 동안 기다려도 연기 한 줌 없는 데다 불이 난 것 같은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손님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정말 화재가 난 게 맞아?”“경보가 울렸으니, 분명 불이 난 거겠죠!”“봐요, 물도 뿌려지고 있어요!”레스토랑 안에 설치된 방화 시스템이 작동해서 물이 뿜어 나오고 있었다.여러 사람들이 수군대는 가운데 사장이 나와서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방화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서 갑자기 경보가 울린 것 같습니다. 불편을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그러고는 손님들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잠시 후 여기 계시는 모두에게 서비스를 준비해 드릴 테니 이번 실수는 부디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손님들은 허탈하게 웃으며 한숨을 돌렸다.“화재가 아니라니 다행이네. 그래도 안전이 제일 중요하지.”손님들은 큰 문제로 삼지 않았다.이윽고 대부분이 다시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레스토랑 내부는 이미 전기가 나가서 어두워져 있었다.더 이상 편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온지유는 이 상황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왜 갑자기 방화 장치가 고장 난 걸까? 아무 일도 없는 데에 경보가 울리는 것도 이상한데. 더 나아가 스프링클러까지 작동하다니?그녀는 자신의 테이블 위 음식들이 전부 한강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았다.“배 불렀어?”나민우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듯
“큰일 났다, 사모님이 이쪽으로 오고 있어!”온지유가 그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본 두 사람은 곧바로 주방 안으로 몸을 피했다.“어떻게 된 겁니까?”옆에 있던 성재민이 물었다.“사모님께 들킨 것 아닙니까?”“말도 안 돼!”용경호는 즉시 부정했다.“특수 부대 출신인 우리가 들킬 리 없잖아.”“하지만 사모님은 분명히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성재민과 용경호는 몸을 낮추어 걸었다.“일단 숨자.”두 사람은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겼다.“절대 들키면 안 돼. 사모님이 가면 그때 나가자.”온지유는 그들의 방화 장치를 확인하러 갔다.장치에 구멍이 난 모습을 본 온지유는 깜짝 놀랐다.형태를 보아하니 누군가가 일부러 부순 게 분명했다.주인이 급히 설명했다.“아... 아마도 직원이 실수로 부딪혀서 경보가 울린 것 같습니다.”“무슨 직원이 그렇게 힘이 세요?”온지유가 물었다.“이런 일이 전에도 있었나요?”주인은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아니요. 이번이 처음입니다.”온지유는 커다랗게 뚫린 구멍을 보고 곧바로 눈치를 챘다.“그 천하장사인 직원분도 참 운이 없었나 보네요. 부딪칠 곳도 많은데 하필이면 이 방화 장치에 부딪히고 말이에요”온지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수상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이 사고 때문에 주방의 요리사들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갔나?”테이블 밑에 숨은 둘은 장애물에 가려져 발만 보였다.주방에는 불도 꺼져 있어서 더욱이 잘 보이지 않았다.혹시나 몰라 둘은 사방을 찬찬히 둘러봤다.“아직 계실 것 같습니다.”성재민이 말했다.“서두르면 안 됩니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걸 확실히 확인하고 나서 나가야 합니다.”“알고 있어.”용경호가 대답했다.그러나...용경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쩐지 엉덩이가 축축해진 것 같아 비위가 상해 말했다.“성재민 너 미쳤어? 지금 뭐 하는 거야?”성재민이 말했다.“미친 건 제가 아니라 전우님입니다!”용경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너 진짜
용경호는 성재민을 노려보며 말했다."친형제라 생각하고 그렇게 많이 챙겨 줬는데, 그런 날 배신 해?"성재민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저만 배신 했습니까!"용경호는 어쩔 수 없이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사모님,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로 한 거예요.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다 제 잘못이에요."온지유는 냉정하게 말했다."전 아무리 봐도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요.""말도 안 됩니다.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용경호가 변명했다."저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군인입니다!"그러면서 자세를 바로 하고 경례까지 했다."그러면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거예요?"온지유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용경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성재민을 끌어당기며 말했다."밥 먹으러요!"성재민도 바로 맞장구쳤다."맞습니다. 밥 먹으러 온 겁니다!"온지유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그렇게 크지도 않은 레스토랑인데 조금 전까지 두 분을 못 봤네요. 설마 식사 하다가 갑자기 주방으로 들어가서 남의 물건을 망가뜨리기까지 한 거예요?"온지유는 진지해졌다."지금 남의 장사에 피해를 주는 거잖아요."그 말에 둘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이현 씨가 나를 따라다니라고 시킨 거예요?"온지유는 계속해서 물었다."그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대요?""그건..."두 사람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지금 어디에 있는데요?""대장님은 여기 없습니다."용경호가 대답했다."저희는 그저 부인을 보호하러 온 겁니다."온지유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 냉소했다"보호는 무슨, 말썽만 피우지 않으면 다행이지."두 사람은 다시 침묵했다."저랑 이현 씨는 이미 이혼한 사이예요. 제게 무슨 보호가 더 필요하다는 거예요?"온지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무슨 장난을 치는 건데요? 사람들한테 이혼한 전처까지 신경 써주는 성인군자라고 알리고 싶은 거래요? 현 부인도 허락한 거고?"온지유는 여이현이 곁에 없으니 말을 아끼지 않았다."당장 내 앞으로 데려오세요
2층으로 올라간 온지유는 방문이 반쯤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여이현은 분명히 그 안에 있을 것이다.온지유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차가운 표정으로 문을 열어젖혔다."이현 씨, 비겁하게 굴지 말고 당당하게 나와서 이야기 해요!"온지유는 문 앞에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이현을 발견 했다.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 주변에는 수많은 술병이 널려 있었다.손에는 아직 마시다 남은 술병이 들려 있었다.하루 종일 술을 마신 듯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을 어떻게 윽박지를지 이미 다 생각 해두고 있었다.오늘이야말로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의 독설을 퍼부어 그의 자존심을 완전히 무너뜨릴 생각이었다.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술에 취해 비굴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그를 보고 온지유는 더 이상 독한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여이현은 이미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온지유는 의아했다. 왜 이렇게까지 술을 마신 것일까?그는 노승아와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지 않았던가?그는 온지유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았던가?온지유는 처참히 농락당했고 여이현은 충분히 만족하였을 텐데.분명히 기뻐해야 할 텐데, 왜 그는 이토록 슬퍼 보이는 걸까?지금의 여이현은 온지유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그의 무력함, 좌절감, 그리고 고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온지유는 주먹을 꽉 쥐었다.복잡해진 마음에 그와 싸우려던 생각도 사라져 방을 나가기로 마음먹었다.돌아서려는 순간 뒤에서 아주 미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유야..."쉰 목소리로 낮게 부르는 소리였다.온지유는 돌아서려는 마음이 없었다."지유야..."발걸음을 떼려 했지만 여이현은 계속해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온지유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돌아보았다.여이현은 옆으로 몸을 일으켜 눈을 반쯤 뜬 채 그녀를 보고 있었고, 그녀를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고 있었다.온지유의 감정은 더욱 복잡해졌다.온지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이건... 꿈일까?"여이현은 온지유가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모르지만 온지유의 마음에도 슬픔이 깃들었다.여이현은 그녀의 품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고요한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하지만 묻지 않아도 이미 답은 알 것 같았다.결국 온지유는 소리 없이 자리를 떠났다.이번에는 처음과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더욱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사모님."용경호가 문 앞에서 말없이 서 있는 온지유를 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대장님이랑 싸우신 건 아니죠? 두 분 다 괜찮으시죠?"성재민은 용경호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을 줄이라는 눈치를 주었다.표정을 보니 아마 화해는 하지 못하고 끝난 것 같았다.온지유는 고개를 들고 용경호를 한 번 바라본 후 말했다."이현 씨를 잘 부탁드려요."그렇게 말한 뒤 온지유는 대문을 나섰다.용경호는 함께할 수 없는 두 사람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운명의 장난이었다.아파트에 돌아오자, 인명진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어떻게 됐어요?"인명진이 물었다."별일 없었죠?"온지유는 인명진을 바라보며 물었다."이현 씨를 알고 계셨어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인명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온지유는 이어서 말했다."제가 기절했을 때 인명진 씨가 곁에 있던 게 우연은 아니겠죠? 이현 씨가 보낸 건 아니에요?"여이현의 이런 이상한 행동들을 온지유가 전혀 모를 리가 없었다.오늘만 봐도 온지유는 여이현이 뭔가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것을 알면서도 온지유는 화가 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그 일을 짊어지지 않으려 했었고, 그런 그와 함께하는 것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온지유는 그에게 매달려 이혼을 막을 생각도 없었다.온지유가 필요할 때 인명진은 바로 나타났고, 이는 여이현의 지시가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인명진은 숨기지 않고 그저 웃으며 말했다."지유 씨는 못 속이겠네요."온지유는 말했다."그 사람 말은 듣지 마세요. 당신은 이현
밖을 내다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북적이던 거리가 이제는 적막이 흘렀다.지금은 퇴근 시간대라 노점상들이 한창 손님을 맞이하며 돈을 벌어야 할 때였다. 모두가 한꺼번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건 말이 안 됐다.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모든 게 남태건이 꾸민 짓이라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었다.“너, 정말 비열하고 추잡하구나.”권다솔은 그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심해졌다.하지만 남태건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칭찬 고맙다. 내가 노점상들한테 각각 200만 원을 줬거든. 이제 너한테 선택지는 한 가지야. 나랑 만나.”그는 그녀를 꼭 얻어야 했다.권다솔은 비웃음을 흘리며 손을 지퍼에 올렸다.“난 선택하지 않을 거야.”어찌 인간이 짐승과 어울리겠는가.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지퍼를 열어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려는 순간 남태건이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너한테서 정말 좋은 향이 나는 거 알아? 다음 주에 네가 이혼하면 그날 바로 결혼하는 게 어때?”“꺼져!”그녀는 힘껏 뒤로 발길질하며 그를 걷어차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행동을 예상한 듯 순식간에 그녀의 다리를 잡은 채 손으로 더듬으며 말했다.“보아하니 너도 나랑 함께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는 모양이네. 난 지금 바로 널 갖고 싶은데, 여기서 할까? 얼마나 짜릿하겠어?”그는 원래는 그녀에게 멋진 밤을 선사하려고 했다. 7성급 호텔에 장미로 덮인 침대와 로맨틱하게 촛불까지.하지만 그녀가 너무 말을 안 듣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원래 말 안 듣는 고양이는 잘 길들여야 발톱을 감출 줄 알게 되는 법이다.“남태건!”그녀는 화가 치밀어 오른 채 소리를 질렀다.“너 지금 무슨 짓 하는지 알아? 너 그러다 감옥 갈 거야!”그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종아리를 따라 손을 위로 더듬었다.“우리가 부부가 된 후에도 날 감옥에 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오늘이 지난 뒤 네 뱃속
그럼 처음부터 딱 잘라 거절하는 편이 나았다.김영은은 그녀의 편에서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 돈은 바로 계좌로 보낼게. 물건은 혼자 옮길 수 없을 테니 경호원을 불러서 도와줄게.”경호원이라는 말을 들은 남태건은 더욱 씁쓸해졌다.이 또한 은근히 그를 경고하는 것이었다. 만약 여기서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집에는 경호원이 있으니 즉시 제압할 수 있고 그는 결국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남태건은 마지막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솔아, 잘 지내. 몸조심하고.”‘가급적이면 외출은 삼가는 게 좋을 거야’물론 남태건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그는 예전에도 권다솔을 스토킹한 적이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기회를 보면서 그녀를 강제로 데려갈 계획이었다.그때 두 사람의 친밀한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게 되면 그녀의 부모님은 이를 악물고 승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사회는 여자에게 항상 더 가혹한 법이다.그녀의 부모님이 딸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결국 그를 사위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남태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우리 딸, 이제 모든 물건은 돌려주었어.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 건 마음껏 해도 돼. 엄마, 아빠는 언제나 네 뒤에서 지켜줄게.”김영은은 그녀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그녀는 김영은을 꼭 안아줬다. 아무래도 미리 대비하는 게 아무 준비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다음 날, 출근길에 권다솔은 가방 안에 호신용 스프레이 한 병을 넣었다. 여러 종류의 고춧가루로 만들어졌기에 아주 소량만으로도 사람을 울릴 수 있었다.하루 종일 별다른 일은 없었고 퇴근 후에 동료들과 근처 먹자골목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권다솔이 그중 한 골목 입구를 지나던 순간 옆에서 손을 뻗어와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갔다.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남태건이 서 있었다.그는 예전의 신사적인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엄마는 지금 병이 매우 심각해요. 아마 수술을 받는다 해도 남은 인생을 병상에 누워서 보내야 할 가능성이 커요.”배진호는 엄마에 대해 자업자득이라는 말밖에 할 게 없었다.처음에 권다솔은 그녀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매사에 세심하게 신경 써주고 자주 찾아뵈러 가서는 다양한 보신탕을 끓여주기도 했다.만약 그녀가 터무니없는 행동만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들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어쩌다 그렇게 됐어요?”분명 두 사람이 이혼하기 전만 해도 정미진은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그런데 얼마 되지도 않은 시간에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다.“계속 아픈 척하다가 이제 진짜 병이 든 거죠. 악화 속도가 매우 빨라서 이미 치료의 최적 시기를 놓쳤어요.”배진호는 간단히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권다솔은 하마터면 꼴좋다고 말할 뻔했다.하지만 정미진은 어디까지나 그의 친어머니라는 점을 고려해 그만 삼켜버렸다.전화를 끊고 난 뒤 그녀는 혼자 방에 앉아 많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 정미진은 자신을 돌보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비록 여전히 두 사람의 관계에 간섭하고 싶어 할지라도 이제는 그럴 힘조차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과연 이혼해야 할까?그녀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남태건이 김영은 앞에 서 있었다.“지난번에 이미 할 말을 다 했고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할 필요도 없는데 이제 와서 또 뭘 하려는 거니?”김영은은 다소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증거가 모두 드러났는데도 남태건은 왜 이렇게 미련을 못 버리는 걸까?그녀는 외간 남자의 몇 마디 달콤한 말에 딸을 내어줄 사람이 아니었다.“저와 다솔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감히 그런 기대를 할 수도 없고요. 오늘은 전에 드린 물건을 돌려받으려고 온 거에요.”남태건은 최대한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말했다.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고 그
“전 치료 받지 않았어요.”정미진은 크게 후회했다.온갖 계산을 다 해가며 일을 꾸몄지만 결국 제대로 걸려든 사람은 본인이었다.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이런 짓을 왜 했을까?“하지만 환자분 차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데요.”“약은 먹지 않았고 링거도 다 버렸어요.”정미진은 말할수록 후회가 밀려왔다.이제는 의사조차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치료받기 싫으시면 그냥 퇴원 수속 밟으세요. 집에서 지내는 게 나을 거예요. 약값도 아낄 수 있고 요즘 젊은이들 돈 벌기 얼마나 힘든데요. 게다가 소문나면 우리 병원 체면도 말이 아니거든요.”“안 돼요!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부터는 치료에 협조할게요.”정미진은 순순히 의사의 의견에 따랐다.입으로는 죽고 싶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가장 두려워했다.그녀는 진심으로 살고 싶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돈 걱정도 없고 배진호도 권다솔 문제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효자였다. 그녀가 죽게 되면 모든 게 끝나버리는 셈이다.그녀는 계속해서 지금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일단 병실로 돌아가세요. 치료를 받으시려면 가족분께서 동의서를 작성하셔야 하고 저희 병원 측에서도 다시 조사를 진행해야 합니다.”의사는 그녀를 설득해 병실로 돌려보낸 뒤 이 상황을 상세히 보고했다....저녁, 배진호는 정관수술을 마쳤다.잃어버린 아이를 떠올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통을 느꼈다.아버지로서 아이를 지키지 못한 건 어쩌면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남은 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때 권다솔이 전화를 걸어왔다.권다솔?배진호는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된 채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번호였다.그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다솔 씨, 이제야 저한테 연락하는 거예요?”“전 그냥 월요일에 이혼 절차를 마치러 가는 걸 잊지 말라고 전하려던 것뿐이에요.”그녀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임신 사실을 숨기기
“걔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 있겠어?”정미진은 비웃음을 흘렸다.“지난번에 의사한테 물어봤더니 걔 체질은 워낙 임신하기 힘들대. 특히 유산까지 한 번 겪고 나면 더더욱 그렇지. 아무리 우리 진호를 유혹한다 해도 아이는 못 얻을걸.”갑자기 병실 문이 열렸다.배진호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서 문밖에 서 있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그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그는 자신의 엄마가 이렇게 비열하고 이기적인 사람일 줄은 차마 상상도 못 했다.“진호야, 갑자기 어쩐 일이야?”정미진은 진심으로 당황했다.방금까지 병실 안에 누구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속마음을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다.다만 배진호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제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 엄마가 뒤에서 이런 짓들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엄마도 여자인데 어떻게 다솔 씨한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어요?”배진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권다솔을 유산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이렇게 이기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그녀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까지 대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그제야 권다솔이 왜 확실하게 선을 긋고 떠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더는 해치고 싶지 않았다.“방금 그냥 해본 말이야. 엄마가 무슨 짓을 하진 않았잖아...”“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저 오늘 바로 정관수술 예약할 거예요. 제 아이를 잃은 이상 앞으로도 다른 아이는 절대 갖지 않을 거예요.”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그는 오늘 중으로 수술을 예약하고 실행에 옮길 생각이었다.이 말을 들은 정미진은 마치 청천벽력을 맞은 듯한 충격에 빠졌다.그녀가 이렇게까지 애써가며 미래의 손자를 위해 준비했는데 결국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만약 배진호가 진짜 정관수술을 한다면 그녀는 평생 손자를 보지 못할 것이다.“불효 중 가장 큰 불효가 자손을 남기지 않는 것이야. 네가 정말 그렇게 한다
악역은 그가 맡기로 했다.“아니에요. 애초부터 태건 씨의 아이가 아니에요. 저한테 거짓말한 거예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배진호의 아이예요.”그녀는 손을 뻗어 배를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설마, 잃어버렸던 그 아이가 다시 그녀한테 돌아온 걸까?그녀는 권용민에게 단호하게 말했다.“어찌 됐든 간에 전 이 아이를 꼭 지킬 거예요. 저랑 진호 씨는 이미 이혼했지만 진호 씨는 저를 괴롭힐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잘 알아요.”“그렇다면 배진호 어머니는 어떡하려고? 그처럼 고약한 시어머니를 만나면 누구든 불행할 수밖에 없어.”권용민은 그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남태건과 비교하니 이제는 배진호가 조금 나아 보이기까지 했다.게다가 그가 찾아본 증거에 따르면 권다솔에게 달린 악플들은 배진호가 퍼뜨린 것이 아니었다. 석규리가 권씨 가문의 경쟁업체를 찾은 것이었다. 더 이상 배진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다.만약 배진호 혼자였다면 권용민은 아이를 위해 그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아빠가 말을 직설적으로 해서 미안하다만 배진호의 어머니가 있는 한 너희 둘이 다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그건 저도 잘 알아요.”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녀 역시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이미 시어머니 때문에 아이를 한 번 잃었지만 하늘의 축복으로 다시 아이를 가졌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그녀가 명확히 결정을 내린 것을 보고 권용민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배진호는 매일 병원에 들러 정미진을 보살폈다. 정미진은 그의 앞에서 약을 먹고 링거를 맞는 척하며 완벽히 연기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배진호는 병원 문을 나서다 병실에 물건을 두고 온 것이 떠올라 급히 되돌아갔다.문 앞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여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며칠째 연기하느라 들어간 병원비만 해도 적지 않잖아요. 오빠도 돈 버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제가 병원비를 봤는
그는 바닥에 쓰러진 딸을 보더니 깜짝 놀라 그녀를 안아 들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얼른 구급차 불러!”지나가던 직원이 급히 응급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급차가 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다. 권용민은 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그는 응급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왔다 갔다 오간 지도 셀 수 없었다. 권용민은 평생 딸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만약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그조차 견딜 수 없는데 만약 아내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하늘이 무너질지도 몰랐다.온갖 걱정이 머릿속을 떠다니던 찰나 의사가 걸어 나왔다. 아직 말을 꺼내기도 전에 권용민은 양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물었다.“의사 선생님, 지금 제 딸은 어떤 상태인가요?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 겁니까?”권용민은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의사는 그의 손을 보며 한 발짝 물러서려 했지만 너무 세게 잡고 있는 바람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그는 속으로 어쩌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은 다 같을지도 모른다며 한숨을 내쉬고는 차분히 설명했다.“따님은 괜찮습니다. 단순히 저혈당 증상이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지금 따님이 임신 중이라 반드시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권용민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완전히 멍해졌다.‘임신이라니?’그럼 이 아이는 남태건의 아이인가?원래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남태건은 지나치게 계산적인 데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 딸과 엮이는 것을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권다솔이 남태건의 아이를 임신했다니, 그녀는 얼마 전에도 아이를 잃었는데 또 낙태 수술을 한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 뻔했다.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도 가능하지만 남태건의 성격상 아이를 두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권용민은 걱정을 가득 안고 딸을 만나러 갔다.“아빠, 지금 아빠 상태를 보면 마치 제가 정말 큰 병에 걸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잖아요.”권다솔은 병상에 누운 채 창백한 얼굴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