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맞은편에서 들려왔다.“이런 젠장. 어디서 나타난 놈이길래 영웅인 척하는 거야! 죽고 싶어서 그래?”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 남자가 씩씩거리면서 걸어왔다.하지만 여이현이 걷어차는 바람에 또다시 저 멀리 날아갔다.퍽!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여이현은 한 손으로 온지유의 허리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 누군가에게 전화했다.“주하야. 여기 해결해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사람 좀 보내. 그리고 석훈이한테 구급상자를 들고 VIP 룸으로 오라고 해.”여이현은 전화를 끊고 온지유를 데리고 VIP 룸으로 들어갔다.통화하는 말투를 들은 아까 그 남자는 여이현이 심상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도망쳐봤자 소용없었다.오늘은 최주하, 지석훈과 나도현이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맡기고 오래간만에 놀아보기로 했는데 이렇게 끝날 줄 몰랐다.최주하는 바로 클럽 매니저한테 전화했고, 2분도 안 되어 그 남자는 결국 잡히고 말았다.지석훈도 구급상자를 들고 VIP 룸에 도착했다.“상태 좀 확인해 봐.”여이현은 구급상자를 들고 나타난 지석훈에게 말했다.지석훈은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소파에 앉아있는 온지유를 발견하게 되었다.“어디 다쳤어요?”여이현이 또 버럭 화를 낼까 봐 온지유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온지유가 나지막하게 말했다.“그냥 뺨 한 대 맞았을 뿐이에요.”온지유는 기운이 없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이런 재수 없는 일을 맞이하게 될 줄 몰랐다.‘역시 내가 생각한 것이 맞았어.’여이현은 검은 기운을 내뿜는 것이 마치 저승사자와도 같았다.‘형수님을 많이 걱정하는 눈치네.’“여기 직원한테 얼음을 가져오라고 할게요. 잠깐 얼음찜질하고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네, 고마워요.”온지유가 예의를 지키자 지석훈이 피식 웃었다.“저한테 고마워할 것이 아니라 형한테 고마워해야죠. 하긴, 부부 사이에 고마워할 거 뭐 있겠어요. 저 먼저 갈게요. 무슨 일
“고마워요.”다른 건 몰라도 여이현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원래 화나 있던 여이현은 아까 그 남자의 도발에 결국 폭발한 것이다.그런데 온지유가 고맙다고 할 줄 몰랐다.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가는 정 오는 정이라고. 고마워할 필요 없어.”온지유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오히려 좋아. 이러면 서로 빚진 것도 없잖아.’온지유가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말했다.“집으로 갈까요?”“잠깐만.”“네.”온지유는 별다른 생각하지 않았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얼음을 건네고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말했다.“얼음찜질하고 있어. 그래도 아직 여진 그룹을 대표하는 얼굴이잖아.”그 말투는 차갑기만 했다.온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아내라서 도와준 것이 아니라 여진 그룹의 이미지를 위해서였다.그리고 가는 정 오는 정이라는 말은 두 사람 사이를 명확하게 갈라놓는 것 같았다.--아까 그 남자는 옆방에 묶여있었다.최주하는 여이현이 직접 해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의자에 묶여있는 그 남자는 미친듯이 발버둥 쳤다.그러나 여이현이 나타나자 바로 조용해졌다.여이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옆에 있는 맥주병으로 그의 머리를 쳤고, 가장 뾰족한 부분으로 손목을 그었다.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상대는 창백한 표정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최주하는 놀라운 표정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바람둥이인 최주하의 곁에는 여자가 끊임없었고 집에 돈이 많아 놀고 싶은 대로 놀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해결해 줄 보디가드도 따라다니고 있었다.그 남자의 목숨이 간당간당할 때, 여이현이 보디가드들한테 차갑게 말했다.“병신으로 만들어서 경성에서 쫓아내!”병신이라 하면 눈이 멀고, 손 다리가 부러지는 것이었다.최주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이현아, 난 이제부터 네가 지유 씨를 그저 법적인 아내라고 하는 말 믿지 못하겠어.”여이현은 아무런 대답 없이 다시 온지유의 곁으로 돌아갔다.비록 몸에 피 흔적은 없었지만 다
온지유는 클렌징폼을 듬뿍 짜서 얼굴을 씻고, 핸드워시, 바디 클렌저까지 총동원했다.공기 속에는 향긋한 꽃향기가 가득했다.온통 온지유가 좋아하는 냄새였다.이렇게까지 하는 목적은 몸에 묻은 여이현의 담배 냄새, 술 냄새, 그리고 피비린내를 없애기 위해서였다.온지유는 그러다 멈칫하고 말았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혼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있잖아.”시간이 다 된 지금, 여이현이 잡지도 않는데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그렇다고 노승아와 잘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없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석이라고 불리는 나민우의 곁으로 돌아갈 거라는 생각에 피식 웃고 말았다.온지유는 유난히 조용했다.집에 돌아와서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여이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목덜미를 잡으면서 말했다.“온지유, 나 지금 후회하는 중이야. 너랑 이혼하기 싫어.”“이현 씨!”온지유는 그가 약속했던 일을 후회할지 몰랐다.그러다 왜 이혼 숙려기간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온지유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이혼하든 말든 괜찮아요. 어차피 가는 정 오는 정이라고 했는데 오늘 저녁... 웁!”온지유는 여이현과 이 일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이현이 키스를 퍼부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허리를 감싸 쥔 채 서서히 침대 앞으로 끌고 갔다.여이현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그는 온지유를 침대에 눕혀 두 손을 꼭 잡았다.온지유는 그런 그가 두렵기 시작했다.“이현 씨! 정신 차려요! 제발 이러지 마요!”의사 선생님은 엽산과 칼슘을 먹는 처음 3개월 동안은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고 했다.‘이러다 아이가 잘못되면 어떡하지?’여이현은 동작을 멈추는 대신 깊숙하게 온지유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이 순간 온지유는 꼼짝하지도 못했다.여이현은 우연히 쓰디쓴 그녀의 눈물을 맛보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온지유를 놔주었다.온지유는 옆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여이현은 그러다 어지러운 느낌에 침대에 고꾸라지고 말았다.술을 많이 마셔서
나도현의 명확한 말투에 온지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두 달 뒤면 배가 선명히 나와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이현이 절대 놔주지 않을 수 있었다.그러다 온지유가 이상한 점을 확인하고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물었다.“이현 씨 친구라고 불러야 하나요?”나도현은 잠깐 당황하더니 웃으면서 말했다.“형수님 눈치도 빠르시네요.”비록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심 온지유가 대단하다고 느꼈다.단번에 알아차리다니.“제 이혼소송 건을 맡아주시지 않을 거면 이만 가볼게요.”온지유가 떠나고, 나도현은 바로 여이현에게 전화했다.아직 자고 있던 여이현은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가 삭신이 쑤신 느낌을 받았다.나도현은 여이현의 피곤한 듯한 목소리를 듣고 피식 웃었다.“아직도 자고 있어? 형수님이 아침부터 찾아왔어. 내가 누군지 알고 있더라고.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여이현은 바로 정신을 차리더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고 다시 온지유에게 전화했다.온지유는 아직 변호사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찾는 변호사마다 손사래를 쳐서 여이현의 연락을 받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받을 수는 없었다.전화기 너머에서 여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 어디 있어.”“밖에서 물건 사고 있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오늘은 월차 내고 싶은데.”온지유는 핸드폰을 꽉 쥐고 말했다.집에서 나올 때 여이현은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다.변호사 만나러 간 사실을 들켰어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어제 시킨 일은 다 했어?”여이현이 차갑게 묻자 온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지금 바로 회사로 갈게요.”“그래.”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일 뿐 바로 출근하지 않았다.아직 집에 있는 여이현이 그렇게 일찍 출근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은 전화를 끊자마자 피팅룸으로 들어갔다.바로 이때, 핸드폰이 또 울렸다.온지유인 줄 알고 차갑게 말했다.“했던 말 또 하게 하지 마.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으니까.”노승아는 멈칫하고 말았다
강하임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온지유에게 다가갔다.전보다 태도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았다.온지유도 따라서 웃으면서 인사했다.“괜찮습니다. 송서연 씨, 여기 와서 인사하세요.”아무리 강하임의 태도가 좋아졌다고 해도 여이현이 시킨 대로 이번 건은 송서연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강하임은 내심 불쾌했지만 그래도 애써 괜찮은 척했다.“온 비서님께서는 요즘 후임을 양성하시나 봐요?”이채현도 모자라 송서연까지, 그런데 여이현은 끝내 나타나지 않을 줄 몰랐다.강하임은 이 상황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그저 온지유와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갈 뿐이다.“혹시 비즈니스에 영향이 갈까 봐 그러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프로젝트는 대표님께서 직접 관리하고 계십니다.”강하임이 입술을 깨물더니 말했다.“그러면 여진 그룹에 가서 얘기하는 건 어떤가요?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온 비서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뒤늦게야 온지유가 여이현을 7년이나 모신 비서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온지유를 통해 직접 여이현을 만나고 싶었는데 또 온지유가 올 줄 몰랐다.온지유가 웃으면서 말했다.“아직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계약서 체결 15일 이후 매일 20% 기준으로 돌려준다는 건 무슨 뜻이죠?”이채현은 그날 금강 그룹 책임자 데리러만 왔지 계약서를 만져보지도 못했다.그런데 오늘은 미리 계약서를 미리 확인하고 찾아왔다.물어본 김에 자세히 이야기해 보려고 했다.강하임이 웃으면서 말했다.“저희 첫 계약서잖아요. 온 비서님께서는 아직 계약서를 잘 확인하지 않으셨나요? 마지막 세 번째 조항에 한 달 내에 모두 갚는다고 되어있어요.”온지유는 시종 미소를 잃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강하임 씨, 이런 계약서는 본 적도 없습니다. 계약 첫날 일정한 계약금을 내고 나머지 계약금을 갚는 날짜를 정하는 것입니다. 이 계약서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강하임은 표정이 확 변하더니 냉랭하게 말했다.“여 대표님도 문제없다고 하는데 온 비서님이 여기
강하임이 커피잔을 놓친다는 건 온지유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하임 씨가 놓칠 줄 몰랐어요.”온지유가 빠르게 차가워지는 강하임의 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내가 놓쳐요? 내가 커피잔 하나도 제대로 못 든단 말이에요? 여 대표님, 계약 좀 잘 마무리해보려고 왔는데 비서가 일을 너무 못하네요.”강하임은 연속 되물으며 온지유에게 핀잔을 주었다.그리고 마지막에는 여이현을 향해 언짢은 티를 내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여이현은 냉소를 흘리고는 말했다.“CCTV 한번 돌려드릴까요?”온지유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여이현이 강하임의 말을 받아쳤다.강하임이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아직 퇴사 전이니 자신의 일을 잘 마무리하고 싶어 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 상황에서 여이현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다.한편 강하임은 한낱 비서를 대신해 나서는 여이현에 표정을 굳혔다.“여 대표님이 직원 챙기는 건 이해하는데 커피가 내 손에 떨어졌잖아요. 우리 쪽 직원이 이런 실수를 했다면 대표님은 기분이 어떠셨을까요?”이때 온지유가 담담히 말했다.“만약 제 실수라면 저는 바로 인정했을 겁니다. 비서로서 실수까지 했는데 그걸 떠넘길 수 있을 만큼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제가. 강하임 씨가 계속 제 실수라고 생각하시면 사람 불러서 확인해 보셔도 좋아요.”자신의 잘못이 아닌 건 절대 사과하지 않는 게 바로 온지유였다.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 사람까지 불러서 확인하는 건 너무 자존심이 상했기에 강하임은 화를 누르며 이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그럴 필요까진 없고요. 내가 손까지 뎄는데 화가 안 나겠어요? 그리고 이 일 전에도 트러블이 좀 있었잖아요 우리.”강하임은 여전히 삐딱한 태도로 말했지만 온지유는 더는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말했다.“강하임 씨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지금은 두 회사가 파트너 계약을 맺는 자
그에 강하임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여 대표님,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온 비서와 저 사이에 트러블이 좀 있었어요. 그러니까 아까는 제가 충분히 온 비서의 고의라고 오해할만한 상황 아닌가요?”“그리고 내가 누군지 정말 잊은 거예요?”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막 나가는 강하임에 여이현은 표정이 굳은 정도가 아니라 서늘하기까지 했다.“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요. 그리고 만약 고의라 해도 나는 상관없어요. 안될 건 없잖아요?”여이현의 말에 강하임은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리고 마지막 질문만 의도적으로 빼놓고 대답을 한 거 보면 여이현은 정말 저를 기억 못 하는 것 같아 강하임은 그게 더 분하고 부끄러웠다.“강하임 씨, 얼음 가져왔어요.”그때 얼음을 들고 온 온지유가 부드럽게 말했다.온지유의 차분한 표정은 아까의 일을 전부 잊기라도 한 듯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여이현은 서늘한 표정을 유지한 채 강하임에게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 마치 지금 당장 사과를 하지 않으면 이 계약은 체결하지 않겠다는 듯이.게다가 이 계약 건은 강하임이 아빠와 오빠를 한 달 넘게 졸라 따낸 일이었기에 이렇게 망쳐버릴 수도 없었다.그래서 강하임은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온 비서님, 아까는 죄송했어요, 내가 놓친 건데 집에서 이러던 게 습관이 돼서 괜히 온 비서한테 화풀이했네요. 용서해 주세요.”갑자기 태도가 바뀐 강하임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던 온지유가 여이현을 바라보았다.역시나 굳은 표정에 누구 하나 잡아먹어 버릴듯한 눈빛, 여이현이 강하임에게 사과를 시킨 게 틀림없었다.그래서 온지유도 억지로 웃으며 그 사과를 받아주었다.“이 얘기는 아까 다 끝났잖아요, 마음 쓰지 않으셔도 돼요.”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빨리 끝나길 바랐던 온지유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얼음팩부터 일단 대고 계세요. 그럼 두 분 말씀 천천히 나누세요, 전 먼저 나가 있을게요. 필요하면 부르세요.”온지유가 나가고 여이현이 강하임을 보며 입을 열었
지금 2할이나 양보하는 건 당연히 큰 손해였고 계약을 따낸다 해도 별로 이득이 없었다. 하지만 강하임이 이 계약을 포기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여이현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수 있었던 것이다.역시나 여이현의 예상대로 강하임은 웃으며 말했다.“협업이라는 게 원래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거잖아요, 지금이야 조금 손해를 보겠지만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여진그룹 같은 큰 회사랑 계약한다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 2할이 최대에요. 저도 더는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그래요.”그제야 여이현이 강하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강하임은 여이현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그럼 계약 건도 마무리되었으니 내일 제가 단풍 별장에서 여는 파티엔 와 주실 거죠?”“네, 가야죠.”금방 계약을 체결하고 파티 참석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기에 여이현은 마지못해 알겠다고 대답했다.“그럼 전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강하임이 인사를 하며 말하자 여이현은 온지유를 불렀다.“온 비서, 손님 배웅해드려요.”강하임은 그 배웅이 내키진 않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여이현이 보이지 않는 곳에 도착해서야 온지유에게 삐딱한 투로 말했다.“내가 오늘 온 비서한테 사과한 건 여 대표님을 봐서예요.”강하임은 오늘의 치욕을 꼭 갚아주겠다는 투로 말했지만 온지유는 오히려 웃으며 그 말을 받아쳤다.“그 얘기는 아까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요. 그리고 강하임 씨가 굳이 강조하지 않으셔도 알고 있었어요. 이제 지나간 일은 그만 언급하죠, 전 앞으로도 여 대표님 옆에 계속 있을 건데 서로 얼굴 붉히면 불편하잖아요.”온지유는 저를 난처하게 만들려는 강하임의 속내를 알고 일부러 더 뾰족하게 쏘아붙였다.이 계약에서 더 절실한 쪽은 강하임이었고 계약의 갑이 바로 제 상사인 여이현이니 더 이상 여이현 앞에서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라는 경고였다. 어차피 그래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까. 온지유는 여이현이 늘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그래
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걱정 끼쳐서 미안해.”“무열 씨, 제발 꼭 좋아져야 해요. 이렇게 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아쉬움으로 남았잖아요.”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끌어안으며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만약 신무열의 마음속에 모든 분야에 출중한 완벽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아린의 경우는 달랐다. 모든 조건을 떼어 놓고 보면 말이다.김혜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남은 생이 죄책감 속에서 허비되지 않기를 바랐다.신무열은 김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하려는 말 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전의 일들에서 벗어나려고 할게.”김혜연은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이때, 인명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신무열의 약물 의존은 법로가 책임지고 있었고, 인명진은 그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되었다.신무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아린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다.인명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는 최면을 통해 신무열의 내면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신무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저 때문에 죽어가요. 죽음이 이렇게도 불공평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신무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나왔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모든 일에는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열 씨는 최선을 다했고 아린을 방치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현실은 잔혹해요. 무열 씨에게는 방법이 없었고, 아린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이었을지도 모르죠.”“노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이었어요
신무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럽게 절규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본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졌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김혜연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온지유는 신무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하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힘겹게 말했다.“아니, 내 잘못이야. 만약 내가 더 잘했다면 아린은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죽음을 많이 봐왔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지유야, 너도 알잖아? 난 아린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직접 봤어...”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낮은 톤으로 하나하나 쏟아져 나왔고, 온지유는 처음으로 신무열이 이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됐다.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신무열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웠던 온지유는 급히 법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법로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신무열의 상태를 본 법로는 마음이 아팠다.신무열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다!상태를 점검한 법로는 신무열이 몰래 페노바르비탈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더욱 심각한 것은, 이 약물은 한때 법로거 개량했던 중독성을 유발하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신무열의 방금 전 감정 폭발은 약을 제때 복용하지 못해 나타난 금단 증상이었다.법로는 즉시 실험실의 약물 사용 규정을 엄격히 강화했다.앞으로는 모든 약물 사용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또한, 신무열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관리했다.신무열은 Y국의 수령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리고 새 인물을 세우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만약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법로가 이를 막아섰다.“신무열이 자리를 비우는 건 공적인 이유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
케빈은 단 한 가지 뜻만을 품고 있었다.반드시 Y국을, 그리고 신무열을 지키겠다는 결심이었다.신무열과 이 나라는 그의 누나 아린이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케빈이 떠나는 날 온지유가 그를 배웅하러 나왔다.케빈은 돈도, 지위도, 그 외의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원하지 않았다.온지유가 케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직접 구해 온 평안을 비는 부적뿐이었다.“케빈, 국경은 힘든 곳이야. 건강히 지내야 해. 네 누나는 떠났지만 우리는 언제까지나 네 가족이야. 언제든 돌아와도 돼.”온지유의 말에 케빈은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누나가 죽은 이상 이곳에는 더 이상 자신의 집은 없었다.온지유가 그렇게 말해줬지만 그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삶이 있었다.케빈은 이제 네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케빈이 떠난 뒤 아린에 관한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하지만 온지유는 신무열의 정신 상태를 걱정해 한동안 Y국에 머물렀다.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졌다.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표정은 지쳐 보였으며 전혀 활기가 없었다.온지유는 더 이상 그를 방치할 수 없었다.“이렇게 지내는 건 정말 위험해 보여요. 밤마다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거죠? 도저히 안 되겠으면 내가 명진 씨에게 연락해서 좀 봐달라 할게요.”신무열의 성격상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인명진이라면 다를 것이다. 같은 또래라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었다.“아무것도...”신무열은 온지유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그의 말을 김혜연이 끊어버렸다.“어떻게 아무 일도 없겠어요! 밤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계속 아린을 되뇌고 있잖아요! 무열 씨, 지금 당신은 아직도 아린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잖아요!”신무열은 전쟁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김혜연도 아린이 신무열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케빈은 여전히 고집스러운 태도로 소리쳤다.“제 생각은 달라요! 당신들은 신분 문제 때문에 제 누나를 구하려 하지 않은 거예요!”법로는 조용히 말했다.“미안하다. 과거에 내가 너무 집착했었지.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자 하는 욕망,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했던 욕심... 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내가 만든 환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네 누나의 죽음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하지만 Y국의 발전은 멈출 수 없다. 네가 원한다면 그들을 너에게 넘겨주게 할 것이다. 또 너에게 필요한 보상도 줄 거고 내가 방금 한 약속들도 모두 지킬 테다.”법로는 한숨을 쉬며 케빈 쪽으로 걸어갔다.그는 이미 결심했다. 만약 케빈이 자신에게 손을 올리거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는 저항하지 않을 것이고 온지유와 신무열에게도 케빈을 막지 말라고 당부할 생각이었다.비록 법로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온지유와 신무열은 이미 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케빈! 네 누나를 죽게 한 건 우리가 아니야! 너희는 Y국의 국민이잖아. 네 누나가 무열 씨에게 사랑이 없었다 해도 애국심은 분명히 있었을 거야. 안그래?”온지유의 말은 케빈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과거 자신과 아린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아린은 신무열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품고 있었고, 신무열과 관련된 모든 소식을 모았다.신문에서 오려낸 사진들, 비디오에서 캡처한 화면, 심지어 직접 인쇄한 이미지까지.케빈은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누나와 선생님의 신분 차이가 이렇게 큰데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설마 나중에는 선생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하는 건 아니지?”그는 자신의 말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아린이 그때 했던 대답이 선명하게 기억났다.“내가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선생님은 이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셔. 만약 내가 선생님을 위해 죽는다면 그건 모두를 위한 죽음이고 정말 영광스러운 일일 거야.”온지유가 같은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야 케빈은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케빈은 고통 속에서 절규했다.노예 수용소에는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결국 그들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Y국에는 그렇게 많은 약초가 있는데 그의 누나 하나 살리지 못했다는 말인가?결국 케빈은 그의 누나가 신무열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가 신무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워해서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케빈은 가슴을 움켜쥐며 외쳤다.“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고, 그렇게 많은 실험을 해왔잖아요. 그런데 왜 제 누나만큼은 구하지 않으려 한 거죠?”이성을 잃은 케빈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를 상황에 신무열은 법로 앞에 서서 그를 막아섰다.그의 목소리는 처연했다.“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네 누나를 살리지 못한 건 내 무능함의 결과다. 복수를 원한다면 내 목숨을 가져가.”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안 돼요! 당신은 지금 Y국의 수령이에요. 꼭 누군가 죽어야 분이 풀리겠다면 차라리 제 목숨을 가져가세요!”김혜연은 신무열을 사랑했다. 그녀는 신무열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즉시 두 팔을 벌려 신무열을 막아섰다.그들은 이제 막 신혼이었다. 결혼식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고, 신혼 첫날밤도 여러 사정으로 아쉬웠다.이제 둘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처참한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이때 법로가 앞으로 나섰다.“내가 네 누나를 구하지 못한 게 문제다. 나를 죽여라.”그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신무열은 법로가 가장 신뢰하는 후계자였고 Y국의 미래는 모두가 인정할 만큼 밝았다.신무열이 죽는다면 이는 나라의 큰 손실이 될 것이다.법로는 자신이 죽더라도 신무열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삶을 이어가야 한다.신무열과 김혜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잘못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며 법로는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했다.케빈은 자신의 누나가 죽은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로 마음의 균형을 잃었다.그가 정말로 법로나 신무열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나라 전체의
이것은 신무열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동시에 가장 무력한 축복이었다.처음엔 아린의 독을 법로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법로에게는 아무런 방법도 없었고 결국 그는 아린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아린의 곁에서 밤을 지새우고 마지막엔 직접 그녀를 안치했다.김혜연은 그를 찾지 않았다.그녀는 신무열이 지금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충분히 이해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삶은 원래 아쉬움이 남는 법이었다.돌아온 신무열을 김혜연은 꼭 끌어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침묵은 가벼운 몇 마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샤워하고 푹 자요. 살아 있는 우리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요. Y국의 사람들은 아직 우릴 필요로 하니까요.”김혜연은 신무열의 내조자로서 Y국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도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신무열은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목이 막혀오고 가슴은 무거운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했다.심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린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던 사람들을 막아줬잖아요.”만약 아린이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그들과 협력해 신무열을 해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아린은 그러지 않았다.그녀 덕분에 신무열은 위협의 존재를 미리 알아차리고 그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무열 씨, 우리 앞으로 매년 아린 산소에 찾아가고 가족도 잘 보살펴줘요.”“그래.”“신혼 첫날 밤인데... 미안해.”천천히 입을 연 신무열의 목소리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아린은 진심으로 그를 위해 생명을 바쳤지만 김혜연 역시 진심으로 그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심지어 결혼식과 신혼 첫날밤에도 그는 다른 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김혜연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해해요. 모든 걸 알고 있는 제가 어떻게 무열 씨를 원망할 수 있겠어요? 이번 결혼식은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것이잖아요. 난 전혀 신경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큰 부담을 가지지 마요.”온지유는 김혜연을 다독이며 말했다.김혜연은 곧 마음속 불안했던 감정을 털어내고 안정을 되찾았다.그들의 결혼식은 화려하게 열렸고 신무열은 이 기회를 이용해 아린에게 독을 투입한 범인들을 찾아냈다.그는 그들에게 조건을 내걸었다.“목숨은 살려줄 테니 해독제를 내놔.”결혼식은 일부러 범인들에게 자신이 행복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한 연출이었다.그들은 허상에 속아 방심해 결국 덫에 걸려들었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곁에 있는 법로조차도 해독제를 못 개발했나봐? 그런데 우리에게 있을 리가 없잖아.”만약 해독제가 있었다면 법로는 이미 아린을 살렸을 것이다.지금 아린은 며칠밖에 못 살아갈 상태였다.그들은 아린을 이용해 정보를 얻은 후 그녀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아린은 신무열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심지어 그녀는 죽음을 선택하더라도 신무열을 해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더군다나 신무열이 자신의 결혼식을 덫으로 사용해 이들을 잡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신무열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해독제가 없다면 너희도 죽어야지.”그는 총알을 장전하고 무기를 아린에게 건넸다. 직접 복수하는 것만큼 후련한 건 없다.하지만 아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이들을 처치한다고 해도 자신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신무열이 직접 건네준 무기였기에 아린은 그의 뜻을 따랐다.‘탕! 탕! 탕!’눈앞의 사람들은 총소리와 함께 차례로 쓰러졌다.그러나 아린은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신무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그 순간 아린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신무열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외쳤다.“누구 없어! 빨리 이쪽으로 와!”아린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신무열 선생님.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버티려고 했는데 자신을 과대평가했나 봐요... 기대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아린은 애초에
법로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온지유는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지금은 침묵이 가장 좋은 답변일지도 모른다.신무열 또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아린에게 꼭 살리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신무열은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아린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미안해. 한 몸 바쳐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네 목숨을 결국 지킬 수 없었어.”아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속의 독으로 인해 얼굴은 이미 다 망가졌지만, 신무열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렇게 대단한 정보도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결국 무열 씨는 모든 걸 알게 됐을 거예요.”그녀는 자처해서 한 것이었고 이 일로 인해 신무열이 어떤 마음의 짐도 가지지 않길 바랐다.신무열은 보이지 않는 손에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자신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운 아린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목이 막혔다. 따로 방법이 없다면 이대로 그녀가 죽어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그녀가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결심했다.신무열은 아린에게 약속했다.“내 무능함 때문에 네 독을 풀어주지 못했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놈들한테 건 현상금도 아직 유효해. 정 안 된다면...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게.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줘.”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아린이 어떤 소원이든 말하든 그는 반드시 그것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아린은 신무열이 김혜연과 결혼할 것을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하거나 결혼 전에 그의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아린은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신무열 선생님, 제가 당신에게 이 정보를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당신이 저를 살리려 노력해 주고 제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혜연
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농담을 던졌다.“결혼 후엔 아이도 빨리 낳아야겠네요.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도 좀 같이 놀아줘야죠.”“넌 이제 Y국에 있지도 않고 아버지도 같이 경성에 갔잖아. 차라리 Y국으로 와. 내가 널 고용할게.”신무열은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리가 그들 사이의 큰 걸림돌이었다. 온지유가 경성에 남기로 한 건 그녀의 선택이지만 신무열은 그녀가 Y국에 머물러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Y국은 그들의 뿌리와 영혼이 있는 곳이며 오빠로서 여동생에게 여러모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온지유도 신무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이현이 경성에 있고 양부모도 그곳에 있는 온지유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는 Y국을 관리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형수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내가 와서 돌봐줄게요.”두 사람에겐 어머니가 없었고 신무열의 능력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 산후조리사는 고용할 수 있다 해도 가족의 보살핌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혜연은 온지유가 ‘형수’라 부르는 말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신무열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신무열 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신무열은 아린의 문제에 대해 법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아버지, 제 친구가 노석명이 개발한 독약의 개량품에 감염되었습니다. 직접 한 번 살펴봐 주실 수 있을까요?”법로는 노석명의 이름을 듣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약이라니? 그놈은 이미 처형되어 사람의 형체조차 잃고 혀마저 잘려 매일 돼지처럼 살고 있다. 노석명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혹은, 눈치도 없는 누군가가 아직도 노석명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한편, 온지유는 ‘아린’이라는 이름을 듣자 과거 Y국 북부에서 처음 신무열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내가 아는 그 아린 맞아요?”“그래.”신무열은 숨기지 않았다.당시 전쟁 중에 아린은 온지유에게 식사를 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