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내 말이 다 맞다니까. 온지유가 졸업도 안 했는데 비서부터 됐다고 들었어! 그러니 부잣집에 시집갈 수도 있었겠지. 채린이는 지금 뭐 할 수 있는데. 취업도 못 해. 소문도 돌고 있고, 나중에 무슨 수로 살아가겠어!”김수미는 말이 심했다. 이 말에 온채린은 상처를 받았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외할머니, 그래도 제가 손녀인데, 지유 언니보다 못하다뇨!”온채린은 말을 마치자 또 울면서 뛰어나갔다.장수희는 온채린이 도망가는 것을 보고 걱정했다.“채린아!”장수희는 또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채린이 앞에서 무슨 그런 말을 해! 우리 모녀 좀 가만히 내버려둬!”“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너희가 힘내서 다시 제대로 살라고 하는 소리지. 무슨 수단과 방법을 쓰든 잘 살아가면 돼!”김수미는 말을 마치고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온채린이 무슨 일이 생길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온채린은 냇가에 달려가, 냇가에 있는 돌을 들고 힘차게 물속으로 던졌다.모두 온채린이 온지유보다 못한다고 한다.왜 자기가 온지유가 아니냐고 생각을 한다.온채린은 이미 클 만큼 컸는데, 자꾸 온지유과 비교된다.온지유는 어릴 때부터 성적도 좋고, 얼굴도 이쁘고, 다른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았다.다들 온지유는 철이 들고 예쁘다고 칭찬만 하는데 온채린한테는 철이 없다고 욕만 한다.온채린은 분명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대학을 갔고, 선생님들도 다들 칭찬하는데, 온지유가 명문대를 갔다고 해서 또 비교대상이 됬다.이제는 졸업을 했지만, 온지유가 부잣집에 시집을 간다고 한다. 온채린은 지금 소문도 안 좋고, 취직도 못 하고 있다.왜 온지유만 그렇게 운이 좋은 건가. 분명 같은 온 씨인데, 온채린은 온지유의 그늘 속에서만 살 수 있는가.언제쯤 온채린을 칭찬해 줄 수 있을까.온지유보다 노력하고, 예쁘고, 잘 산다고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온채린은 눈물을 훔치더니, 얼굴이 또 싸늘하게 변했다.온지유가 그들 눈에서 가장 훌륭한 아이였고, 지금은 좋은 남자한테 시집도 갔으니
방은 이미 정리해 놔서, 안이 깨끗했다.그러나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집안에는 생기가 없었고, 옅은 곰팡내도 났다.온지유는 창문을 열고, 환풍을 시켰다. 그러고 궤짝 안에서 이불을 꺼냈다.“피곤하면 일단 여기 좀 누워 계세요.”여이현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데, 몸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온지유는 여이현이 말하지 않을 걸 보니 피곤하다는 걸 알아챘다.온지유는 물건을 정리해서 그를 침대에 눕게 했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온지유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부엌으로 내려갔다.집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해장하는 것을 사려면 밖에 나갔다 올 수밖에 없다.마침, 온채린이 여기저기 밖을 내다보는데, 온지유가 집 안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온채린은 지금 여이현이 친척들과 술을 마시고, 취해 있어서 위층에서 누워있을 거로 생각했다.온채린은 이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준비한 해장국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다들 온지유가 부잣집에 시집가고 좋은 남편을 만나서, 온지유에 대한 태도가 180도 바뀐 거라고 알고 있다.그래서 온채린과 장수희는 무시를 당했다.아예 그들 안중에도 없었다.만약 온지유와 여이현 사이에 금이 깨지면 어떨까?온지유와 여이현의 혼인을 온채린이 먼저 알지 않았다면, 누가 온지유가 여 씨 집안의 사모님인 줄 알겠는가.온지유는 행복하게 살면 안 된다.온채린은 젊고, 예쁘고, 온지유보다 더 낫다.학력에서 온지유보다 못하는 것 빼고, 온채린이 온지유보다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학교에서는 수많은 남자가 그녀를 쫓아다니고, 예쁘고 몸매도 좋아서 앞으로 스타가 될 수도 있다.온채린은 온지유가 정말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온지유는 그냥 겉으로만 행복해한다고 생각했다. 온지유가 결혼생활에 무슨 문자라도 생기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온채린은 이런 목적을 가지고 여이현을 찾아왔다.방문은 닫히지 않았다. 여이현이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는데, 옆모습만
그런데 갑자기.귓가에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네 형부라는 걸 알고 있기나 한 거니?”온채린은 순간 몸이 굳어져서 고개를 들어 여이현을 바라보는데, 그의 차가운 시선이 자기를 응시하고 있었다.여이현의 눈에는 남자로서의 욕망이 없었고, 오히려 아주 차갑게 대했다.이런 여이현을 본 온채린은 식은땀이 났다.온채린은 손을 꼭 잡은 채, 진정하고 말했다.“당연히 알고 있죠.”여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이에 온채린이 말했다. “형부. 머리 아프죠? 제가 안마해 드릴까요?”온채린이 막 손을 내밀려고 하자 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형부라고 알면, 분수를 좀 알아야 하지 않겠어?”온채린은 여이현이 어렇게 나오자, 완전 예상 밖이었다.어떻게 이럴 수가.젊고 예쁜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가 없다고?온채린은 억지웃음을 짓고 말했다.“형부. 저는 난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 거죠. 언니가 집에 없으니, 제가 도와주려고요. 제가 언니보다 훨씬 나아요.”온채린의 말에는 다른 뜻이 숨겨져 있었다.여이현은 듣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네 언니가 집에 없어서… 언니를 대신하려고?”여이현의 말을 들은 온채린은 자신감이 생겨서 그윽한 눈빛으로 여이현을 쳐다보았다.“어차피 언니도 집에 없는데, 제가 언니보다 훨씬 젊고, 활기차요. 언니가 알까 봐 그러죠? 괜찮아요.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않을게요. 형부가 좋다면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온채린은 그들의 결혼을 깨뜨릴 수만 있다면 뭘 해도 상관없다.여이현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나중에 온지유를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그때가 되면 온지유는 버림받은 사람밖에 안 된다.온채린은 이번 기회를 잡으려고 했다.여이현의 몸에 손을 닿고 싶었다.여이현의 옷은 단추가 몇 개 풀어져 있었는데, 쇄골이 보이면서 아주 섹시해 보였다.여이현은 평소에 수트를 입고, 위엄 있고, 패기 넘치는 모습이었다.수트를 입는 게 잘 어울리는 남자는 몇 명 없다. 몸매 비율이 좋아야 한다. 온채린은 여이현이 헬스를 많이 해서 그
왜 여이현한테 꼬리를 치는 걸까?온채린은 팔꿈치가 까져서 걸어 나오는데, 온지유한테 웃음거리가 될까 봐 도망쳤다.온지유는 온채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또 고개를 돌려 여이현을 바라보았다.여이현은 아까와 같은 표정으로 차갑게 온지유를 쳐다보았다.“당신 동생이 나를 꼬리를 쳤는데, 못 봤어?”온지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봤어요.”온지유의 대답에 여이현의 얼굴이 더욱 어두웠다.“아무 반응도 없어?”“무슨 반응이 필요한지?”여이현은 온지유가 다른 사람이 자기한테 꼬리를 치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고, 화도 나지 않고,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것에 대해 짜증이 난 듯했다.여이현을 매우 불쾌하게 했다.온지유는 조금의 질투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사실 온채린이 그렇게 하는 걸 보고 좀 놀라긴 했어요. 근데 온채린이 나한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않다는 걸 알고, 복수하려 한다는 것도 알아서 괜찮아요. 다만 당신한테 실례를 범해서 죄송해요.”“그게 다야?”여이현은 온지유를 쳐다보았다.“네.”여이현은 눈빛이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온지유. 내 옆에 여자가 얼마 있든, 넌 아무 상관 없지? 그냥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지낼 수 있는 거지?”“그럴 리가요. 전에 당신이 만났던 여자들 제가 다 말렸잖아요. 온채린은 당신이 직접 거절했으니, 제가 뭘 하지 않아도 되고.”여이현이 말했다.“그건 네가 해야 할 일이잖아.”“업무상 필요한 건 맞아요.”온지유가 말했다.“지금도 그렇고.”여이현은 온지유가 무슨 다른 마음이라도 생긴 줄 알았는데, 역시나 업무상 필요한 일이었다.“허…”온지유는 여이현의 아내가 될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온지유가 여이현의 안색이 나빠진 걸 쳐다보는데, 아마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했다.온지유가 물었다.“해장하실 거예요?”온지유는 테이블 위에도 해장국이 놓여있는 걸 보았다.“여기도 놓여 있네요. 그거 마실 거예요? 아니면 제가 끓인 걸 마실 거예요?
“이게 너희들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김수미는 정색하며 말했다.“온재준도 쟤 형보다 못하잖아! 돈만 있으면 뭣보다 나아. 온지유를 봐! 다른 사람들한테 부러움 받고, 칭찬받고… 어디 가나 온지유가 온채린보다 낫다고 하지. 네 딸은? 영감을 만나도 돈만 있으면 평생 걱정거리 없이 살 수 있어!”“엄마!”장수희는 인정하지 못한다.“나는 엄마처럼 돈만 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이 다 나보고 그렇대. 이게 다 엄마 닮아서 그런 거였네. 난 내 딸을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아!”“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내가 뭐가 어때서!”김수미는 화를 내면서 말했다.장수희는 점점 흥분했다.“내가 지금 어떤데? 남편도 죽었고, 이 지경이 됐는데 뭐가 좋아!”“그건 네가 쓸모가 없어서 그렇지.”김수미는 장수희를 나무라기만 했다.“네. 그래요. 내가 소용이 없어서 이렇게 된 거예요. 가세요! 가서 아들이나 찾으세요. 이런 쓸모없는 딸은 찾지 마세요!”장수희는 이런 어머니를 두고 있다는 게 씁쓸했다.온지유는 문밖에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다 들었다.온지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이 화를 가라앉힐 때야 문을 두드렸다.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장수희는 동네 사람들이 비웃을까 봐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들어오세요.”온지유가 들어왔다.장수희는 온지유를 보고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오히려 김수미가 일어나 얼른 웃으며 대접했다.“지유구나. 얼른 와서 앉아라.”김수미는 유난히 다정하게 대했다.“차라도 마실래? 한잔 따라줄게.”김수미의 행동에 장수희는 더욱 이해가 안 갔다.분명 장수희와 온지유 사이가 좋지 않은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니 딸을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온지유도 김수미의 행동에 부담스러워서 차갑게 말했다.“차는 괜찮아요. 숙모 찾으러 왔어요.”그러자 김수미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그래. 네 숙모랑 이야기 나눠라.”김수미는 장수희를 보고 당부했다.“수희야. 너도 작작 해라. 지유가 그래도 조카
온지유는 장수희가 그들과 만났다는 걸 잘 알고 있다.장수희가 소리를 질러서 말했는데도, 온지유는 침착하게 물었다.“그날 삼촌이 납치된 현장에 다른 한 사람이 있었어요. 여자였는데 저한테 들키고 싶지 않아서 변성 처리를 했어요. 당신들이 다 저를 모함하는데, 누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저를 납치한 사람도 한 명 더 있었고요. 전화한 사람이랑 같은 사람이라고 봐요. 그러니 삼촌을 죽인 사람을 찾으려면 숙모가 필요해요!”“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장수희는 믿지 않았다.“그냥 자기 살려고 다른 사람 있다고 모함하나 본데, 너 그렇게 살지 마!”장수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기 때문이다.온재준이 온지유를 납치해서, 이런 응보를 얻는 것이다. 하지만 장수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잘못을 온지유한테 덮어씌우면 아무도 자기를 탓하지 않기 때문이다.“숙모. 잘 생각해 보세요. 삼촌의 죽음이 이대로 넘어갈 수 있는지. 저한테 그 여자를 알려주면, 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게요.”온채린도 듣고, 온지유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서 약간 비정상적이었다.온지유가 갔다.장수희는 화가 나서 책상을 뒤집혔다.온채린이 깜짝 놀라서 말했다.“엄마, 뭐 하는 거야?”장수희는 눈을 붉히며 말했다.“온지유가 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따로 있대. 자꾸 자기 죄를 덮어씌우려고 하잖아. 그냥 우리를 한 번도 생각해 준 적이 없어!”장수희는 또 울기 시작했다.온채린은 장수희를 끌어안았다.“엄마, 이러지 마.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보면 얼마나 속상하겠어. 그리고 엄마가 이렇게 속상한 걸 바라지 않을 거야.”발인하는 날이 밝았다.하늘에는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분위기도 이상하게 침울했다.다들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온재준을 할머니 할아버지의 묘비 옆에 묻혔다.정미리는 온경준과 함께 서 있었는데, 온경준은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다만 장수희와 온채린 모녀는 펑펑 울며 온재준의 묘비를 끌어
주소영은 피하지 않고 다만 머리를 옆으로 살짝 돌리고 다시 온지유를 쳐다보았다.“지유 씨. 화가 많이 나신 거 같네요. 사람 때는 거 폭행이에요. 범죄야!”온지유도 지지 않았다.“소영 씨가 한 짓보다는 못 하죠.”주소영은 겁먹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어떤 일이요? 지유 씨, 사람 함부로 모함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그냥 여행하러 왔어요.”“온지유! 뭐 하는 거야!”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 여진숙이 걸어왔다. 표정은 사람을 때리려는 것처럼 하고 말했다.“간이 컸구나! 소영이를 때려? 우리 집안 핏줄이 배 속에 있는데, 어디 잘못되면 네가 책임질거야?”여진숙이 이쪽으로 와서, 주소영을 편들어 주었다.주소영은 이것만 믿고, 이겼다는 표정을 지었다.“아주머니, 괜찮아요.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 제가 임신한 걸 보고 질투해서 그런가 봐요. 이해해요.”여진숙은 야박하게 굴었다.“지가 못 낳아서, 다른 사람도 못 넣게 하냐? 무슨 못돼 먹은 버릇이야!”온지유는 주소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주소영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지금 기세가 올라가 있었다.주소영이 원했던 결과였다.온지유가 자기한테 아무것도 하지 못하니, 분명 화가 날 것이다.주소영은 온재준을 살릴 리가 없다.온재준이 온지유를 어떻게 하지 못하니, 언제 가서 온지유한테 알리면 끝이다.그러면 주소영도 납치에 참여해서 감옥에 가게 될 거다.감옥에 가고 싶지 않아서, 그 죄를 뒤집혀 쓸 사람이 필요했다.그 사람이 온재준이었다.온재준만 죽으면 주소영이 한 일은 아무도 모르게 될 것이다.“가만히 서 있을 거야?”여진숙은 주소영을 부축하며 말했다.“한 번만 더 소영이 괴롭히기만 해봐. 그땐 가만히 안 있어! 내 손자가 잘못되기만 하면, 너 가만 안 둬!”주소영이 이어 말했다.“지유 씨. 아주머니랑 같이 여행하러 왔다고 했잖아요. 왜 믿지를 않아요? 여기의 공기가 좋아서 산책하기 좋고, 아이한테도 좋다고 해서 왔어요.”주소영은 배를 어루만지며 온지유 앞에서 자
주소영은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며 손바닥에 땀이 났다.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 벌 받을 일도 없어요.”여진숙은 두 사람이 암시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보고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온지유를 보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여진숙이 냉정하게 물었다. “산책하러 나왔다가 너를 만나다니.”주소영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까 물어봤는데, 온지유 언니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 같아요. 바로 이 근처에서요.”“장례식?”여진숙의 얼굴이 굳어지며 주소영을 급히 끌어당겼다. “그 사람과 같이 있지 마, 불길해!”온지유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갑고 담담하게 말했다. “여러분이 있는 이곳 전체가 다 묘지입니다.”“이런 곳이었다니, 소영아, 너 왜 이런 곳에 온 거야.” 여진숙이 말했다. “가자, 다른 곳으로 가자. 이곳은 음기가 강해서 태아에게 좋지 않아!”그들이 얘기하는 동안, 마침 묘지 입구에 서 있던 온채린은 주소영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어두워졌다.저 여자다!온채린은 손을 꽉 쥐고 눈살을 찌푸렸다. 저 여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온지유를 비방했던 것은 그녀가 시킨 일이었다.그녀가 정말 온지유를 알고 있는 걸까?온지유와 무슨 원한이 있는 걸까?갑자기 그녀는 온지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죽음에 다른 범인이 있고, 주모자가 있다고 했던 말이...“온채린.” 장수희의 쉰 목소리가 들렸다. “뭘 보고 있는 거니?”그녀는 방금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겪은 후라 얼굴이 좀 초췌해 보였다. 집에 가려던 참에 온채린이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온채린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마침 온지유의 모습을 보았다.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그 여자 뭐 하러 봐? 네 아버지가 죽었는데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어. 그녀는 정말 냉혈한 물건이야!” 장수희가 분노에 차서 말했다.온채린은 정신을 차리고 장수희를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
법로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온지유는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지금은 침묵이 가장 좋은 답변일지도 모른다.신무열 또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아린에게 꼭 살리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신무열은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아린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미안해. 한 몸 바쳐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네 목숨을 결국 지킬 수 없었어.”아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속의 독으로 인해 얼굴은 이미 다 망가졌지만, 신무열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렇게 대단한 정보도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결국 무열 씨는 모든 걸 알게 됐을 거예요.”그녀는 자처해서 한 것이었고 이 일로 인해 신무열이 어떤 마음의 짐도 가지지 않길 바랐다.신무열은 보이지 않는 손에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자신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운 아린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목이 막혔다. 따로 방법이 없다면 이대로 그녀가 죽어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그녀가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결심했다.신무열은 아린에게 약속했다.“내 무능함 때문에 네 독을 풀어주지 못했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놈들한테 건 현상금도 아직 유효해. 정 안 된다면...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게.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줘.”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아린이 어떤 소원이든 말하든 그는 반드시 그것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아린은 신무열이 김혜연과 결혼할 것을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하거나 결혼 전에 그의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아린은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신무열 선생님, 제가 당신에게 이 정보를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당신이 저를 살리려 노력해 주고 제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혜연
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농담을 던졌다.“결혼 후엔 아이도 빨리 낳아야겠네요.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도 좀 같이 놀아줘야죠.”“넌 이제 Y국에 있지도 않고 아버지도 같이 경성에 갔잖아. 차라리 Y국으로 와. 내가 널 고용할게.”신무열은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리가 그들 사이의 큰 걸림돌이었다. 온지유가 경성에 남기로 한 건 그녀의 선택이지만 신무열은 그녀가 Y국에 머물러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Y국은 그들의 뿌리와 영혼이 있는 곳이며 오빠로서 여동생에게 여러모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온지유도 신무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이현이 경성에 있고 양부모도 그곳에 있는 온지유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는 Y국을 관리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형수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내가 와서 돌봐줄게요.”두 사람에겐 어머니가 없었고 신무열의 능력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 산후조리사는 고용할 수 있다 해도 가족의 보살핌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혜연은 온지유가 ‘형수’라 부르는 말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신무열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신무열 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신무열은 아린의 문제에 대해 법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아버지, 제 친구가 노석명이 개발한 독약의 개량품에 감염되었습니다. 직접 한 번 살펴봐 주실 수 있을까요?”법로는 노석명의 이름을 듣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약이라니? 그놈은 이미 처형되어 사람의 형체조차 잃고 혀마저 잘려 매일 돼지처럼 살고 있다. 노석명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혹은, 눈치도 없는 누군가가 아직도 노석명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한편, 온지유는 ‘아린’이라는 이름을 듣자 과거 Y국 북부에서 처음 신무열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내가 아는 그 아린 맞아요?”“그래.”신무열은 숨기지 않았다.당시 전쟁 중에 아린은 온지유에게 식사를 해주
“고마워.”나민우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온지유에게 감사하고 싶지 않았다. 온지유에게서 축복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에게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이것이 그들 사이의 가장 좋은 결말일 것이다.“나도 이만 가봐야 하니까, 돌아오면... 혹시 나중에 업무상 합작할 일이 있으면 또 보자.”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뱉었다.“그래.”나민우는 온지유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돌아섰다. 심장이 조여왔다. 고통이 거대한 괴물처럼 덮쳐왔다.차라리 보지 않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민우는 생각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곁으로 돌아왔다.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마실 것을 시켜줬다.그녀뿐이 아니라 별이와 법로의것까지 준비되어 있었다.별이에게는 감자튀김, 치킨을 준비했고 법로에게는 붉은색 외투를, 그리고 이번에는 배진호도 데려왔다. 배진호가 아직 한 번도 Y국에 와보지 않은 것도 있고 함께 가면 업무 진행 상황도 보고 받기 편해지기 때문이다.배진호는 일 중독자답게 비행기 대기 중에도 일을 하고 있었다.법로는 별이를 보더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둘이 별이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별이는 몸이 안 좋으니까 너무 기름진 건 많이 먹이지 마라.”“알아요 아버님. 어쩌다 가끔 사주는 거예요.”여이현도 평소에는 아이에게 패스트푸드를 사주는 건 기피하고 있었다.하지만 여이현과 온지유는 아이에게 너무 많은걸 참게 했다.게다가 할아버지도 엄하게 대하니 가끔은 보상으로 먹을 것 정도는 줘도 괜찮다 생각했다.“천천히 먹어, 체할라.”법로는 말은 그렇게 해도 사사건건 별이를 걱정해 주고 보살펴주고 있었다. 별이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기까지 하며 말이다.한 가족의 행복이란 이런 소소한 곳에서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비행기 위에서 온지유는 꿈을 꿨다.꿈속에서 그녀는 한 여자아이가 장미를 한 송이 들고 귀엽게 웃으며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예쁜 이모, 같이 가도 돼요?”여자아
경성에 함께 돌아온 이후로 나민우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온지유는 나민우의 마음을 알았고 나민우의 희생도 잘 알고 있었다.몇 년간 그녀는 나민우에게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외에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당연했다. 그 메시지들을 나민우는 한번도 회답을 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온지유의 이 말은 비수같이 나민우의 마음에 꽂혔다.잘 지냈을 리가 있을까?집으로 돌아온 후 그의 모든 연락 수단은 뺏기고 말았다.Y국에 있는 동안 나민우는 심신이 모두 피폐해져 있었다.가족들은 그의 활동 범위를 제한해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지어는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 이어줘 둘 사이에는 아이도 생겼다.나민우는 이 몇 년간 감히 온지유에게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질까 봐 두려웠다.지금의 자신은 더 이상 온지유의 옆에 설 자격이 없었다.순간 나민우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목이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온지유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나민우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하지만 미처 무어라 묻기도 전에 여이현이 다가왔다.여이현은 나민우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했다.“민우 씨, 오랜만이네요.”여이현까지 나타난 이상 나민우도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예. 오랜만이에요.”온지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여이현이다. 여이현이 살아 있는 지금, 그가 온지유의 곁에 서있는 지금, 온지유는 더더욱 여이현과 갈라질 일은 없었다.모든 것은 이미 다 정해진 운명이었다.나민우는 웃으며 돌아섰다.“아직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네. 또 봅시다.”그저 평범한 인사치레일 뿐이었다.나민우는 돌아섰지만 온지유는 그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그 일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그렇지 않으면 온지유는 계속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다.온지유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다들 괜찮아 보이지만 나는 왠지... 나민우는
신무열은 말을 마치고 김혜연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김혜연은 순간 그의 뜻을 눈치챘다.그리고 싱긋 웃었다.“괜찮아요.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아요. 결혼식은 그저 형식적인 것일 뿐인걸요.”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김혜연 마음은 호수에 빗방울이 떨어진 듯 은은하게 일렁였다.둘의 합의로 결혼식은 1주 후에 치루기로 결정되었다.신무열은 먼저 Y국 전체에 결혼을 발표했다.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법로는 신무열이 이렇게 빨리 결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에게 한마디 했다.“전에 지유를 통해 네게 귀띔했을 때는 싫다고 하더니만 지금은 어떠냐?”신무열은 웃음을 흘렸다.이번 일은 확실히 신무열의 예상 밖이었다.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말은 조심해야 하는 게 맞았다.법로가 말했다.“결혼할 생각이었으면 지유와 같이 결혼식을 치렀으면 좋았을 텐데.”법로는 온지유의 이름을 부르는 데에 익숙해져 율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입에 익지 않게 되었다.법로에게 있어서는 딸이 곁에 있어만 준다면 이름이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율이라는 이름은 한동안 노승아가 썼던 것이기도 했기에 오히려 온지유의 이름이 마음이 편했다.온지유의 기억은 경성에서 멈춰있었다.온지유만 좋다면 어떤 신분으로 있든 상관이 없다.“경성에서 돌아오기 싫은 마음은 저도 알지만 우리의 결혼식에는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요.”아버지와 여동생마저 참석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알고 있다. 지유와도 내가 말해두마. 오늘 저녁에 바로 출발하겠다.”아들의 결혼식에 참석 안 할 리가 있을까?게다가 온지유에게 이미 잘 못 대해 줬었는데 아들에게까지 신뢰를 잃을 수는 없었다.온지유가 돌아오자 법로는 바로 이 소식을 전해주었다.온지유는 단숨에 승낙한 것도 모자라 두 사람의 결혼 소식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정말 잘됐어요. 또 한 쌍의 연인이 맺어지게 되다니.”김혜연의 집념과 노력을 온지유는 두
아린이 같은 수단으로 신무열을 그녀의 곁에서 앗아갔기 때문이다.아린에게 더 대단한 수단이 있었다면 김혜연은 인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김혜연은 마음속이 바늘로 쑤시듯 아파져 왔다.그녀는 신무열이 세심하게 아린을 보살피는 모습을, 직접 아린에게 약을 떠먹여 주는 그의 모습을 곁에서 뚫어져라 쳐다봤다.신무열은 한참이 지나고 아린이 잠들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뒤돌아선 신무열은 그제야 뒤에 있던 김혜연을 발견했다.“네가 왜 여기에?”김혜연은 신무열의 뒤에 누워있는 아린을 보며 물었다.“아린이 찾아온 게 딱히 비밀은 아니잖아요?”Y국 전국에 이미 아린이 목숨을 걸고 신무열에게 정보를 전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신무열은 그녀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아린을 살려내고 아린을 결혼식의 주인공으로 발표할 거라는 소문은 점점 더 퍼져가고 있었다.김혜연은 이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신무열은 김혜연의 눈빛에서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챘다.“아린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해주었어. 나는 아린이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을 뿐이야.”그것이 바로 신무열의 입장이었다. 그 외에는 아린에게 어떠한 다른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았다.밖에는 이미 아린이 그를 도왔기에 책임감을 느낀 신무열이 그녀를 곁에 둘 것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굳건했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주지도 않을 것이다.김혜연은 숨을 들이 삼켰다. 신무열이 그녀에게 친절히 설명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에 김혜연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무열 씨...”이름을 불렀지만 그 뒤에 무슨 말을 이어야 좋을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부인할 수 없는 건 신무열과 그녀 사이의 신분과 관계성을 고려하면 신무열이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왜? 나는 너와 약혼한 사이이기도 한데 이런 일이 일어난 뒤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건 네게 너무 잔인하지 않아? 아니면 넌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해 왔던 거야?”
신무열은 상황을 파악한 후 요한을 불러 말했다.“아린을 실험실로 데려가서 검사해 봐.”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아린은 중요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걸었다.아린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선생님, 저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 치료는 필요 없어요.”“그들이 노리는 건 바로 너의 안전이야. 지금은 네 안전이 가장 중요해.”신무열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린은 신무열의 따뜻한 배려를 느꼈다. 비록 신무열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라 해도 어떻게 되었든 신무열의 관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큰 위안이었다.그렇게 아린은 요한과 함께 실험실로 갔다.실험실에서 검사를 하던 연구원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아주 강력한 독입니다. 노석명이 개발한 독을 개량한 것이며, 지금으로선 해독제가 없습니다.”신무열의 얼굴은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은 이미 다 없어진 게 아니었나?”노석명은 처형되었고, 법로의 관심이 온지유와 별이에게 쏠리면서 Y국에는 더 이상 그런 독이 존재하지 않았다.“요한, 이 일을 추적해. Y국에 해가 되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못하게 하고,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신무열은 차가운 눈빛을 띠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리고 다른 연구원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다. 반드시 아린의 목숨을 구해!”“예!”연구원들은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아린은 마음속에 따뜻함을 느꼈다.“선생님, 제 목숨을 소중히 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셔서요. 하지만...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아린은 이미 신무열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했고, 그것으로 신무열이 대비할 수 있게 했다.그녀는 이미 명예롭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세상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신무열은 아린이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아린이 자신 때문에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평
신무열은 Y국에서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라의 미래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격을 낮추고 직접 약초를 가르치고 재배법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그 시간 동안, 신무열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아린에게도 작은 선물을 챙겨주었다. 신무열은 어떤 사람인가?그는 한 번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한다면 오히려 신무열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망칠 뿐이었다.신무열은 그녀를 계속 싫어할 것이고 아린은 혼자서 그를 바라만 보는 삶을 살게될것이다.그럼에도 아린은 지금은 그들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무열 씨를 좋아하는 여자는 많은데 왜 저를 선택한 거죠? 저는 작은 인물이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데요.”“바로 네가 작은 인물이기 때문이지. 그래야 의심받지 않아. 정말 신무열을 영원히 네 곁에 두고 싶지 않나? 신무열은 뛰어난 사람이고 너와 그의 아이라면 최고의 유전자를 가질 텐데.”아린이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계속 그녀를 부추겼다.남자의 말들은 아린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어졌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무열과 함께하는 것보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계획이 뭐죠? 말해줘요. 계획대로 따를게요.”그녀는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작은 인물이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고 조금의 이익으로도 매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계획은 내가 알려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너의 충성심을 위해...”‘푹!’남자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아린은 피부에서 느껴오는 찌릿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아린은 자신에게 독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남자는 아린에게 위협하듯 말했다.“내 말을 어기기만 해봐. 이 독은 널 죽기보다도 못한 고통을 줄 테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린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머리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
아린이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신무열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나는 이미 헤연에게 약속 했어. 남자로서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지. 게다가 난 혜연에게 특별히 불만도 없어.”아린은 숨이 막혔다.책임감 때문에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던 신무열. 그리고 김혜연에게는 불만이 없다는 말에 더해 김혜연이 늘 신무열 곁에 있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다는 점에 속이 검게 타들어 갔다.“가까이 있는 자가 먼저 기회를 얻는다”는 말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딱 들어맞았다.아린의 마음은 아팠다. 그녀는 평민일 뿐이었고 김혜연과는 신분 자체가 달랐다.신무열이 원하는 건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우수한 여성이자 내조자였지 빈민가 출신의 이름 없는 소녀는 아니었다.아린은 여러 해 동안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 사이의 신분 격차는 변할 리 없었다.“선생님,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축복할게요. 당신이 늘 행복하길 바라요.”이것이 아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고마워.”신무열도 그녀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아린은 돌아섰다.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목표가 사라진 지금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신무열의 거처를 벗어난 아린은 얼마 가지 않아 무리에게 가로막혔다.그녀보다 키도 크고 체격이 다부진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아린은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총구가 그녀의 머리에 겨눠지며 차갑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죽기 싫다면 조용히 우리 말을 듣고 따라와라!”전쟁 중 매일 총탄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았던 그녀였다. 몸은 총구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여긴 신무열의 구역이었다. 그녀 같은 작은 존재가 신무열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다.아린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순응했다.얼마나 걸었는지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꺼내 그녀를 겨눴다.“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세요. 괜히 쇼하지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