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김혜연은 신무열이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는 흔적도 찾지 못했다.그녀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총 맞은 곳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왜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는 거예요? 혹시 어깨에 짊어진 책임감 때문에 그래요?”그렇지 않으면 말이 되지 않았다. 신무열에게서 아무런 흔적도 나오지 않았으니까.“이건 내 일이야.”신무열의 어투는 친절하지 못했다. 순간 그의 이목구비가 냉동실에서 꺼낸 듯 차가워지고 분위기도 서늘해졌다.김혜연은 신무열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사실은 그녀가 포기하길 바라서 그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확고하게 말했다.“그래도 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무조건 도련님이랑 함께 할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전 도련님에게 짐이 되지 않을 거니까요. 그러니까...”“아직도 모르겠어?”신무열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다.“넌 내 취향이 아니라고. 그리고 네가 요즘 한 행동은 정말이지 짜증이나 나. 난 날 짜증이 나게 하는 사람이랑 사귈 생각 없어.”신무열은 김혜연이 자신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이해해 주길 바랐다.하지만 김혜연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죽을 때까지 그를 쫓아다닐 생각인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비굴하게 말했다.“그럼 어떤 여자가 취향인데요. 전 도련님을 위해서라면...”신무열은 픽 웃어버렸다.“나를 위해 모습이라도 바꿀 생각이야? 성형으로?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김혜연, 네가 성형을 하면 네가 여전히 김혜연인 것 같아?”신무열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푹푹 찌르는 것 같았다.그랬다. 성형하면 더는 원래의 그녀가 될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신무열의 취향이 아니었다.그녀는 신무열이 방법을 알려주길 바랐다.결국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왜, 왜 저한테 기회를 주지 않는 건데요? 전 그렇게 못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도련님...”“그만 말하고 푹 쉬어. 네가 나 쫓아다니는 것에 대해 난 이미 분명히 대답했으니까.”신무열은
신무열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김혜연을 보았다.김혜연은 확고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김혜연에게 이런 음모를 꾸밀 담은 없었다.더구나 그는 이미 요한을 시켜 문제를 만든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다. 그저 불만이 많아 생긴 문제였다.그는 입술을 틀어 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믿어주지. 하지만 난 너한테 아무 마음도 없어.”“여전히 같은 말을 하시네요. 도련님, 방금 요구를 말하라고 하셨잖아요. 전 이미 요구를 말했어요.”김혜연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 진심이고 진지했다.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다만 신무열이 말을 하기도 전에 김혜연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련님, 전 도련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어요. 그런데 고작 이런 요구도 들어주지 못하시는 거예요?”“나한테 그딴 말을 하면서 자극할 것 없어. 어차피 이 일은... 안 돼.”한 달 동안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Y 국의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 사이를 알게 된다면? 나중에 기간이 끝나고 헤어질 때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설명해야겠는가.그러니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김혜연은 가슴이 미어졌다.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도련님, 정말로 매정하게 거절하실 거예요?”그녀는 목숨까지 내던졌으나 신무열은 여전히 그녀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신무열이 말했다.“한 달 뒤에 그 연극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이 너랑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김혜연은 순간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신무열의 생각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김혜연은 입술을 틀어 물더니 결정을 내렸다.“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 것이라면 한 달 뒤에 제가 나서서 설명할게요. 제가 바람을 피웠다고요. 그러면 되는 건가요?”김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여전히 기대하는 눈빛이었다.다만 그녀의 눈빛은 조금 전보다 더 확고했다.신무열은 변치 않는 그녀의 마음에 조금 흔들리기도 했다.다소 의아했다.“김혜연, 미쳤어?”그녀가
유능한 도우미... 김혜연에게 감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김혜연은 정말이지 진심으로 신무열을 사랑했다. 그러니 신무열을 위해 이런 말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신무열은 이런 이유로 그동안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만약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녀를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그러니 더욱 장난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김혜연, 정신 좀 차려. 네 인생은 네 거야. 다른 사람을 위해 살면 안 된다고. 설령 내가 없다고 해도 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아직은 김혜연의 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았다. 김혜연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김혜연은 목구멍에 무언가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지금 이 순간에도 신무열은 여전히 그녀를 설득하면서 정신 차리라고 했다.“전 그렇게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절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요. 한 달만, 딱 한 달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남자친구 역할을 해달라고요. 아니면 제가 도련님 앞에서 죽기를 바라시는 거예요?”이성을 잃은 김혜연은 히스테리를 부렸다.신무열은 그녀에게 정신 차리라고 했지만 그녀는 신무열을 사랑했다. 신무열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설령 그가 그녀를 미친 사람 취급해도 그를 사랑했다.신무열이 동의만 한다면 나중에 죽어줄 수도 있다.그런데 신무열이 어떻게 그녀에게 죽으라고 하겠는가. 그녀가 신무열을 위해 대신 총에 맞을 때부터 그녀는 신무열의 결심을 눈치채게 되었다.“죽지 마. 그 한 달이... 네 유일한 요구라면 그럼 한 달만 해주지.”“정말요?”김혜연은 눈을 반짝였다. 믿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있는 힘껏 신무열의 손을 잡았다. 마치 유일한 동아줄을 잡는 것처럼.신무열이 동의만 한다면 그녀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할 희망이 있다면 다시 진심
“그렇긴 하지만 나는 김혜연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김혜연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난 먼저 가볼게.”신무열은 느릿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그는 더는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애초에 김혜연에게 다른 마음을 느껴본 적 없었으나 자꾸 주변에서 말하니 점점 피곤해졌다.“봐요, 지금도 혜연 씨가 기다린다고 가겠다고 했잖아요. 이래도 아무 감정도 없어요? 오빠, 여자는 말과 속마음이 다르다고 하지만 남자도 똑같아요.”온지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장난스럽게 말했다.“별이는 괜찮아? 별이를 내버려 두고 한가하게 나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신무열은 일부러 정색하며 말했다.온지유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아직 안 나았어요. 별이도 신경 쓰고 오빠한테도 신경 쓸 수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난 됐고, 별이한테나 신경 써.”말을 마친 신무열은 죽그릇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온지유는 그런 신무열의 뒷모습을 빤히 보며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이런 농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미 김혜연에게 마음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다만 고집이 센 신무열이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신무열은 죽그릇을 들고 김혜연에게 다가갔다.김혜연은 신무열이 들고 있는 죽그릇을 보았다. 아무리 평범한 흰 쌀죽이라고 해도 김혜연에겐 마음마저 녹일 수 있는 따듯한 죽이었다.“절 위해 만드신 거예요?”김혜연은 고개를 들어 신무열을 보았다. 반짝거리는 두 눈은 마치 밤하늘에 뜬 별 같았다.“그래. 난 이런 흰 쌀죽밖에 할 줄 몰라. 다른 건 못해.”신무열은 침대 테이블을 당기며 죽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김혜연을 일으켜 주었다.겉보기엔 평범한 쌀죽이었지만 김혜연은 이상하게도 달고 맛있게 느껴졌다.왜냐면... 이것은 신무열이 그녀를 위해 직접 만든 것이었으니까 신무열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김혜연은 입술을 틀어 물며 나직하게 말했다.“도련님이 못하는 건 제가 할 줄 알아요. 앞으로도 제가 도련님께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릴게요. 도련님은 바
신무열은 그녀에게 시간을 주었다. 굳이 곁에 남아 감시하지 않았다.법로는 김혜연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김혜연은 입술을 달싹이며 나직하게 말했다.“전 얼른 건강해지고 싶어요. 법로님, 효과 아주 빠른 약은 없을까요?”근육이나 뼈를 다치면 백일은 지나야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백일 내내 침대에만 누워있다면 어렵게 얻은 한 달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그녀는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생각 없었다.“그렇게 효과 좋은 약은 없단다. 총알이 네 가슴을 뚫었어. 여자의 몸은 남자와 달리 원래부터 약해. 그러니까 넌 더 푹 쉬어야 해. 어차피 지금 반드시 해야 할 임무도 없잖아.”법로는 뒷짐을 진 채로 담담하게 말해주었다.김혜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에게 지금 당장 해야 할 임무가 왜 없겠는가.신무열이 바로 그녀의 임무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신무열의 곁에 남게 되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단 말인가.그녀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조금 전 신무열의 표정을 떠올리니 분명 자신을 오해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더는 법로에게 신무열을 설득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을 것이다.“전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해요.”설령 이 일을 마치고 바로 죽게 된다고 해도 그녀는 상관없었다.그래야만 죽을 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법로는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네가 말한 중요한 일이 무열이랑 감정을 만들어가는 일이냐?”김혜연은 아주 크게 다쳤고 신무열이 그녀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도 김혜연이 특효약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 중요한 일이 신무열일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굳이 숨기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네가 무열이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마. 율이도 널 도와줄 거야.”법로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들은 김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너무도 현실적이지 않아 몰래 손톱으로 손바닥을 꽉 찔렀다. 너무도 아팠
온지유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법로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법로는 전과 같은 말을 했다.“내가 주는 물건은 사양하지 말고 다 받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 다른 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곁에 있어 주고 싶어도, 사랑을 듬뿍 쏟아주고 싶어도 떨어져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 설령 온지유가 받아들인다고 해도 평범한 부녀처럼 지내기는 어려웠다.그러니 가진 재산이라도 온지유에게 주는 것이 나았다. 온지유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전부 사다 줄 생각이다.“알겠어요. 전 아버지를 탓하지 않아요.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가끔 아버지 뵈러 올게요. 물론 아버지도 경성으로 오셔도 돼요.”온지유는 법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그저 그녀가 처음 법로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이 컸을 뿐이다. 그때의 법로는 그녀에게 살인자와 같은 이미지였으니까.하지만 이 일은 전부 지나간 일이다.법로는 순간 기대하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정말이냐?”그의 유일한 소망은 온지유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다. 일반적인 아버지와 딸처럼.온지유가 그가 경성으로 오는 것을 허락만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그는 온지유의 곁에 머물면서 별이를 대신 봐줄 수 있다.심지어 틀어진 온지유와의 부녀 사이를 회복할 수 있다.“정말이에요. 시간이 되신다면 언제든 경성으로 놀러 오셔도 돼요. 아버지는 제 아버지일 뿐 아니라 별이 외할아버지니까요.”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법로의 변화를 그녀도 보았다.“그래, 바쁜 일만 다 하고 갈게. 비행기 떠나기 전에 나한테 연락해.”“네.”법로는 온지유를 안아주었다.뒤이어 그는 직접 온지유와 여이현, 그리고 별이를 직접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한편 김혜연은 특효약이 없다는 소식을 들은 후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몸이 다 뻐근할 정도로 말이다.막 침대에서 내려오던 순간 신무열이 그녀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와 내려오려는 그녀를 말렸다.“김혜연, 미쳤
그녀의 몸 상태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신무열의 마음속에 그녀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였다.“그냥 생각만 해본 거예요. 도련님이 허락해주지 않으시니 당연히 가지 않을 거예요. 전 도련님의 곁에 꼭 붙어 있을 거거든요.”김혜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웃고 있었다.신무열은 입술을 짓이겼다. 말을 하려던 순간 김혜연이 고개를 들며 기대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그럼 나가서 뭘 좀 사도 돼요? 반지 같은 거 말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제 돈으로 살 거예요.”신무열이 허락만 해준다면 그녀는 얼마가 되든지 전부 살 수 있었다.신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상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어느 남자가 여자의 돈을 쓰고 다녀?”“하지만 저와 도련님은 다르잖아요. 도련님만 허락해주신다면... 어쨌든 전 기념으로 뭔가를 사고 싶어요. 누가 돈을 쓰든 똑같다고 생각해요.”김혜연은 사실 알고 있었다. 신무열이 절대 그녀를 위해 돈을 쓰지 않을 것을. 신무열이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그녀도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그런 건 생각하지 마.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데려다줄 거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다 줄게. 그러니 그 생각은 접어.”신무열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어차피 넌 지금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해.”“네.”신무열이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가자 바로 시선이 쏠렸다.그의 곁에는 다른 이성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김혜연이 있었다. 신무열을 향한 김혜연을 마음은 너무 뻔히 보였기에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들은 부러움의 눈길로 보았다.간혹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다.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김혜연이 끈질기게 신무열의 곁에 남아 드디어 신무열의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해 부러워했다.질투하는 사람들은 김혜연이 신무열에게 한참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김혜연 같은 사람이 대체 어떻게 도련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어? 다들 잊지 마. 도련님의
다만 신무열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런데 김혜연이 그를 덩그러니 뒤에 두고 무례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할 줄은 몰랐다.휠체어에 앉아 무례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김혜연을 보니 신무열은 순간 마음이 저도 모르게 흔들려 성큼성큼 김혜연 앞으로 걸어갔다.방금까지 기고만장하게 헛소리를 해대던 사람들은 바로 표정을 바꾸며 입을 꾹 다물었다.신무열은 차갑게 픽 웃었다.“왜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지? 혹시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잊어버린 거라면 내가 다시 말해줘야 하나?”“도련님, 죄송합니다. 저, 저희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에요. 절대 그런 이상한 소문을 낼 생각은 없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도련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신무열은 현재 Y 국을 이끄는 사람이긴 했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도련님이라고 불렀다.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신무열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잘못을 알고 있다고 하니 그럼 꿇고 있어. 그리고 알아서 자기 뺨을 두 대씩 때려. 절대 오늘 일을 잊지 않게!”“네...”그들은 동시에 대답했다. 무릎을 꿇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신무열은 더는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김혜연을 태운 휠체어를 밀며 가버렸다.김혜연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믿어지지 않았다. 신무열이 자신을 위해 나서줄 거라는 것을. 꿈만 같았다.“다음부터 억지로 강한 척하지 마.”신무열은 그녀를 밀어주며 낮게 말했다.잠깐 한 눈판 사이에 김혜연이 사라져 그는 한참 찾았다. 그런데 그녀는 방금 그들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김혜연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 다소 불안감이 덮쳐왔기 때문이다. 원래 신무열 몰래 그들을 처리하려고 했었다.그런데 처리하기도 전에 신무열에게 들켰을 뿐 아니라 신무열이 대신 처리해 주었다.그녀는 자책했다.“억지로 강한 척 한 게 아니에요. 전 그냥 도련님을 도와드리고 싶었을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