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용은 여성용처럼 커다란 다이아몬가 없었지만 크기는 더 컸다.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작았지만 그마저도 예뻤다.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반지에 이니셜을 새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을 보았다.“제 이름을 새겨도 돼요? 한 달 후에 반지를 다시 저한테 주시면 돼요. 돈은... 돈은 제가 낼게요.”김혜연은 신무열이 거절할까 봐 두려웠다. 온갖 상상을 했지만 신무열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신무열은 비록 난처하지 않았지만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지갑을 연다면 그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새기고 싶으면 새겨. 돈은 내가 낼 테니까.”신무열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말을 마친 후 그는 몸을 돌려 직원에게 눈빛을 보냈다.“카드로 계산할 거고 포...”포장이라는 말을 전부 꺼내기 전에 김혜연이 급하게 말허리를 잘랐다.“포장은 해주지 않아도 돼요. 지금 바로 낄 거거든요.”김혜연은 기대하는 눈길로 반지를 보았다. 기쁘면서도 흥분되기도 했다.그녀가 손을 뻗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신무열은 거절하지 않았다. 반지를 낀 김혜연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쁜 건 둘째치고 이건... 커플 반지였으니까.비록 한 달뿐인 여자친구지만 신무열은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반씩 더치페이라도 할까요?”김혜연은 신무열의 돈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신무열이 담담하게 말했다.“난 절대 여자한테 결제하라고 하지 않아.”김혜연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떤 감정이든 일단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돈도 써 보아야 시작될 수 있다.“뭘 먹을래?”신무열은 휠체어를 밀면서 밖으로 나간 후 말했다. 그리곤 침묵했다. 김혜연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있다.김혜연은 곰곰이 생각했다.“그냥 집밥 같은 걸 먹고 싶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몸 상태가 좀 나아지면 아가씨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요.”“...그래, 나아지면 가.”온지유와 김혜연은 처음에는 싸웠지만 나중엔 화목하게 잘 지냈다.
여재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여이현을 보았다.여이현에게 여재호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잘해준 사람이었다.여씨 가문을 전부 그가 맡고 관리해도 여재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진숙이 그런 짓을 했을 때도 여재호는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하지만 지금은...“할아버지께서 드리신 건 저도 돌려받을 생각은 없습니다.”여이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으나 표정은 싸늘했다.그 말인즉슨 여호산이 여재호에게 준 물건은 하나도 가질 생각이 없으니 자신에게 준 것도 빼앗지 말라는 의미였다.여재호는 여이현이 이렇게 뻔뻔한 사람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지 바로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여이현, 벌써 잊은 건 아니지? 넌 우리 가문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게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었을 것 같아? 난 원래 네 체면을 생각해서 말을 아끼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그래서 제가 여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다니시려고요?”여이현은 차갑게 픽 웃으며 여재호의 말허리를 잘랐다.여재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당황한 기색은 역력했다. 여이현도 이젠 나이가 꽤나 있었다. 게다가 해외에서 죽을 뻔하지도 않았는가.이런 상황을 여이현은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너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분명하게 말하지. 네가 그동안 우리 가문에서 지내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행복을 누렸느냐. 여이현, 애초에 네 것이 아니었던 걸 뭐하러 굳이 들고 있는 거지?”여재호가 이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이미 여이현과 담판을 짓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었다.여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굳이 빼앗아 가시려는 거면 그럼 법적으로 하죠. 저도 흔쾌히 상대해 드릴 테니까요. 배 비서, 손님 나가신다고 하니 배웅하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가 성큼성큼 들어왔다.그러면서 여재호의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문 쪽을 가리켰다.“나가주시죠.”그는 먼저 예의를 갖추고 여재호를 쫓아냈다.여재호는 여이현의 수단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네 말은 나더러 손을 떼라는 거니? 여씨 가문 재산이 남한테 들어가는 꼴을 그냥 지켜만 보라고? 희영아, 그동안 많이 변했구나!”여재호는 바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여희영은 독신주의로 살아갈 뿐 아니라 지금은 생각마저 달라져 있었다.그 순간 여재호는 여희영의 생각을 바로 알아채게 되었다.여희영은 이미 여이현의 손에 들어갔으니 여이현이 혼자 알아서 회사를 잘 관리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이미 줘버린 것을 다시 돌려받을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하지만 여이현은 여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그래, 맞아. 난 변했어. 내가 지금 남을 도와주는 거로 보인다면 그럼 오늘 대화는 여기서 끝내는 거로 해.”여희영은 싸우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의미 없는 대화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지금 온지유와 여이현의 아들을 보러 가고 싶었다.두 사람의 아이가 두 사람의 훌륭한 유전자를 얼마나 물려받았는지 보고 싶었다.여재호는 여희영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원래부터 씩씩대면서 찾아왔지만 여희영의 태도를 보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여희영, 다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데 넌 밖으로 굽는구나! 여이현이 어떤 사람인지 나보다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넌 우리 집안 재산이 피도 이어지지 않은 남의 손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거냐? 그렇게도 이 오빠를 도와주기 싫다는 거냐?”여재호는 말을 하면 할수록 더 화가 치밀었다.심지어 성큼성큼 여희영에게 다가가기도 했다.여희영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까만 그녀의 두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내는 여재호와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확고했다.그녀는 여재호가 정말로 자신에게 손찌검할지 궁금했다.여재호는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여희영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오빠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여진 그룹이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전부 이현이가 혼자 관리해서 그런 거야. 그리고 여진을 이현이에게 넘긴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어. 오빠가 다시 돌려받으려고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오빠, 전에 여진을
만약 결혼식과 아이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온지유는 당연히 아이를 선택할 것이다.“지금 별이는...”“그동안 우리가 함께 해보지 못한 거 나랑 해보고 싶지 않은 거야?”여이현이 말허리를 자르며 물었다.못해 본 것을 한다니... 온지유는 여이현을 오랫동안 사랑했다. 그녀는 여이현보다 더 못해본 것을 그와 함께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과 달리 나이를 먹었다.별이도 학교 갈 나이가 되었다. 만약 못했던 결혼식을 한다면 사람들이 유난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다.“오늘 일단 혼인 신고하러 가자.”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다가가 손을 잡은 뒤 꽃다발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맛있는 것은 별이에게 건넸다.지금까지 별이도 여이현과 온지유의 사이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눈치 백단인 별이는 바로 음식을 들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거실엔 여이현과 온지유만 남았다.“혼인 신고하러 가는 거라면 오늘 가도 돼요. 하지만 결혼식은...”“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거야.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결혼식을 해. 그런데 우린 고작 마흔일 뿐인데 왜 결혼식을 다시 올리면 안 된다는 거야?”여이현은 말허리를 자르며 확고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는 법로 앞에서 약속했었고 브람의 앞에서도 확고한 모습을 보였다. 5년이나 떨어져 지내서야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다.온지유에게 그간 못 해준 것을 해주지 못한다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나는 두려워...”“대체 뭐가 두려운 거야? 결혼식은 우리 둘이서 하는 거야. 돈도 우리 돈을 쓰고 앞으로도 너랑 나랑 별이 셋이서 같이 살 건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뭐가 중요해. 지유야, 두려워할 거 없어.”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꼬옥 잡으며 확고하게 말했다.결혼식에 대해서 그는 이미 계획을 세워두었다.모든 사람에게 알릴 생각이다. 그와 온지유가 결혼한다고. 그리고 결혼식장에 온지유의 손을 꼭 잡고 등장한 후 둘이서 행복한 여생을 보낼 것이다.아니, 이젠 세 명이었다. 그는 온지유와 별이와 함께
아이가 먹고 있는 것은 베리나인의 디저트였다.여이현이 얼마나 아이를 아끼는지 알 수 있다.별이는 여희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비록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별이는 여희영을 빤히 보고 있었다.여희영은 젊어 보였을 뿐 아니라 이쁘기도 했다.특히 여희영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온화했다.“누... 구... 세... 요...”별이는 천천히 말했다.비록 그동안 별이의 곁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더는 혼자가 아니었지만 별이는 여전히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설령 말을 한다고 해도 아주 느리게 말했다.여희영은 바로 눈앞에 있는 아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눈치챘다. 말을 이상하리만큼 천천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나는 네 아빠의 고모야. 그러니까 별이는 나를 고모할머니라고 부르면 돼.”“고모할머니랑 같이 놀러갈까?”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보석 같은 두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리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전... 엄마... 를... 기... 다... 릴... 거... 예... 요...”현재 별이는 ‘엄마'라는 단어만 완벽하게 말할 수 있었다. 별이가 원치 않자 여희영도 강요하지 않았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여이현과 온지유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여이현과 온지유는 구청에 도착하자마자 강윤희와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강윤희는 두 사람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벙긋거렸다.“두, 두 사람...”심지어 강윤희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남몰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너무 아팠다.그녀는 환각이 아니라 정말로 두 눈으로 여이현과 온지유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이현 씨는 죽지 않았어. 그리고 나도 종군 기자는 그만뒀고.”온지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꼬리는 눈에 띄게 올라가 있었다.“정말 잘 됐어요! 그런데 여기는 왜...”여이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강태규와 강윤희는 아주 슬퍼했다. 하지만 더 안타까웠던 것은 온지유에게 아무 도움도
강윤희는 조금 민망해졌다.“제 남자친구는 아마 못 올 것 같아요.”“뭐?”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이내 빠르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이런 중요한 날에 바람맞히다니. 내가 보기엔 앞으로도... 이 사람은 안 될 것 같아. 다시 신중하게 생각해 보기를 바랄게.”“네, 고마워요. 지유 언니.”강윤희는 감사 인사를 했다.여이현은 강윤희를 보며 물었다.“도움이 필요해?”강윤희는 강태규의 손녀였던지라 이런 상황을 알게 되고도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이 일은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결혼 상대가 바람을 맞혔으니 두 사람이 도와줘봤자 그저 그를 찾아내 주고 혼낸 뒤 합의금만 낼 뿐이다.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더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니 이 일은 그녀가 직접 처리하는 것이 맞았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를 감쌌다.“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해.”“네.”그렇게 여이현은 온지유를 데리고 구청에서 나왔다.강윤희는 여전히 구청에 혼자 남아 있었다. 다만 눈빛은 확고해지고 싸늘해졌다.여이현과 온지유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결혼식이 생각난 여이현이 물었다.“들러리로 누굴 부를 생각이야?”여이현은 이미 생각해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는 사람들을 전부 부를 생각이다.“부를 사람이 있겠어?”그녀에게 유일한 친구는 백지희였다. 그러니 불러도 백지희를 부를 것이다.“결혼식은 사흘 뒤야. 지금 친구들이나 지인에게 알려야 해.”여이현은 얼른 온지유에게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올려주고 싶었다.그때가 되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와 온지유가 부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사흘 뒤라고? 그렇게나 빨라?”온지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여이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안 빨라. 우리가 결혼식을 몇 년 동안이나 미루고 있었잖아. 이제야 돌아왔는데 얼른 해야지.”만약 더 미뤄두다가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겠는가.“이미 준비도 다 한 것 같은데
온지유는 고개를 숙였다. 나이는 이미 서른이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부끄럼을 탔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여희영을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여이현이 말했다.“일부러 앞에서 염장을 지른 건 아니에요. 제가 그동안 지유한테 못 해준 게 많아서 그래요. 지유만 원한다면 제 능력껏... 전부 해줄 거예요.”능력이 닿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그는 어떻게든 구해서 온지유에게 줄 것이다.“그래, 그래. 나한테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너희들만 좋으면 되니까.”여희영은 얼른 손을 저었다. 더는 닭살이 돋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별이를 아주 좋아했기에 본가에 남아 있었다.두 사람의 결혼식에 관해 여이현은 정성을 쏟아부었고 자그마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결혼식 당일, 최주하와 지석훈, 그리고 나도현과 백지희도 참석했다. 물론 강윤희도 왔다.강태규는 고령에도 직접 결혼식에 참석에 여이현을 축하해주었다. 강태규뿐 아니라 법로롸 신무열, 김혜연도 왔다.홍혜주와 용경호도 참석했다.두 사람은 원래 올해에 결혼할 계획을 세웠으나 용경호에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던지라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온지유와 여이현이 두 사람보다 먼저 결혼할 줄은 몰랐다.물론 그들은 온지유와 여이현의 곁에 오래 있은 사람들이었던지라 두 사람이 그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축복하고 기뻐하였다.두 사람의 결혼식에 당연히 인명진도 빠질 수 없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돈도 어떠한 물건도 부족하지 않았다.인명진은 온지유에게 핑크빛 다이아몬드가 걸린 목걸이를 결혼 축하의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직접 만든 약을 건넸다.그는 온지유에게 직접 건네며 꼼꼼하게 당부했다.“이 약은 내가 고서를 읽으면서 만든 거야. 그러니까 가지고 있어. 언젠가 만약 목숨이 위험한 때가 온다면 이게 도움이 되어줄 거야.”약의 수량은 온지유와 여이현, 별이를 고려해 만들었다. 심지어... 그는 만약에 태어날 둘째의 것도 준비해 주었다.온지유는 마음이 무
마침 온지유와 여이현이 반지를 서로에게 끼워주던 상황이었다.찾아온 불청객은 강서현이었다.강서현은 찾아와 소리를 질렀다.“잠깐만요! 제가 준비한 선물도 드리지 못했는데 벌써 결혼식 시작한 거예요?”그녀가 등장하자 하객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표정을 구겼다.법로는 신무열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신무열은 성큼성큼 걸어 나와 강서현의 앞으로 왔다.“그런 건 결혼식이 끝난 후에 다시 줘도 되지 않나요?”실무열 뿐 아니라 김혜연도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들의 추종자이자 수호자였다.그러자 강서현이 픽 웃었다.“전 분명히 말했어요. 전 축하하러 온 거라고요. 그런데 왜들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거죠? 게다가 전 혼자인데 말이죠. 설마... 제가 이 결혼식을 엎기라도 하겠어요?”강서현은 확실히 혼자였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된다. 브람이 여이현에게 맺어주려고 한 약혼자였으니까. 게다가 제일 중요한 것은 강서현은 아직도 여이현을 포기하지 못했다.행여나 무슨 일을 저지를까 봐 걱정되었다.신무열은 강서현의 손목을 확 잡았다.“결혼식을 엎을 수나 있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대하지 않았는데 굳이 왜 온 거죠?”김혜연은 강서현의 허리를 잡았다.강서현은 눈치채고 있었으나 그녀의 행동은 김혜연보다 빠르지 못했다. 김혜연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혜연은 신무열과 온지유를 지켜줘야 했다.김혜연은 온지유의 결혼식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거기에다 신무열과 함께 경성으로 오면서 그녀는 특별히 무기도 챙겨왔다.그랬기에 총이 강서현의 허리에 닿을 때 강서현은 순간 당황하게 된 것이다. 강서현은 이내 입꼬리를 씩 올리며 비꼬았다.“그래도 한때 약혼까지 하려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절 버린 것에 관해서도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반겨줄 줄은 몰랐네요.”강서현은 높은 소리로 말하면서 여이현을 보았다. 일부러 모든 책임을 여이현에게 돌렸다.그러자 현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
설마 특수한 취향이라도 있어서 다른 사람의 욕을 듣는 걸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진호 오빠...”석규리는 배진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녀는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서 묵묵히 일어나기만 했다.배진호가 보여준 혐오는 거짓이 아니었다. 석규리도 바보는 아니니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미진이 약속한 물건은 너무나도 달콤했다.둘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기만 하면 집안의 모든 것은 아이의 것이 되고 회사도 수중에 들어올 수 있다.여이현도 배진호를 가족처럼 대해주니 그 인맥을 이용해 배진호의 회사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테다. 지금 이 대우만 참아내기만 하면 그녀를 기다리는 건 호화로운 부잣집 며느리 생활이었다.남편이 잘 대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아이의 얼굴을 봐서라도 배진호는 독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배진호는 좋은 남자였다. 그를 따내기만 하면 그 뒤에는 달콤한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석규리는 치밀하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포기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권다솔 쪽.그녀는 단걸음에 자신의 방으로 달려와 방문을 잠갔다. 창밖의 풍경을 보며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자신에게 한번, 또 한 번 배진호 따위를 위해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고 되새김했지만 감정이라는 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똑똑똑.”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따라온 것일 테다.권다솔은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밖에는 아버지가 아닌 남태건이 서 있었다.“다솔아, 괜찮아? 나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진호 씨와 여자분이 하도 너무 심한 말을 하길래. 입 밖에 오빠, 오빠라며 얼마나 시끄럽게 구는지. 아버지의 성격도 잘 알잖아. 그렇게 너를 사랑하시는데 얼마나 화가 나셨겠어.”남태건은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많이 속상할거라는건 잘 알고 있어. 뭔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 말하고 나면 좋아질 거야.”“졸려요. 전 그냥 빨리 자고 싶어요.”
“다솔 씨, 우리 꼭 이런 결말로 끝을 보아야겠어요?”배진호는 차갑게 식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의 마음도 덩달아 식어가기 시작했다.이 순간 배진호는 과거의 추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권다솔이 그를 바라보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었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정오의 햇빛처럼 따뜻했다.지금은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권다솔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여기까지 온건 다 당신 탓이 아닌가요? 진호 씨, 선택은 당신이 했으면서 이제 와서 후회를 하는건 재미가 없어요. 성인인데 자신이 한 결정에는 책임을 져야지 않겠어요?”그가 어머니의 말을 듣기로 하고 석규리와 함께 이 자리에 나타난 순간부터 둘 사이에는 일말의 가능성도 남지 않았다.권다솔은 이 모든 것을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대인배가 아니었다. 남편이 밖에서 여동생을 만들어 오는 것도, 시어머니가 시시각각 남편에게 바람 상대를 소개해 주는 것도 참을 수 없다.그래도 좋다는 사람이 그와 함께 살면 된다. 어쨌든 권다솔은 사서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다솔 씨, 제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에요. 인터넷 여론도 사람을 시켜서 해결하도록 했어요. 어머니 쪽도 제가 잘 처리할 수 있어요. 우리 좋았던 때로 다시 돌아가면 안 돼요?”배진호는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권다솔은 손을 뻗어 옆의 나무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왔다.그리고 그 나뭇가지를 배진호의 손에 쥐여주었다.“이 가지를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어요? 안 되겠죠. 엎지른 물은 다시 주어 담을 수 없어요. 저희 사이는 완전히 끝났으니까 이만 애인을 데리고 돌아가세요.”권다솔은 이미 이 모든 것에 질려버렸다.사랑이며 혼인이며 결국은 다 헛된 것뿐이다. 다시는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배진호는 그래도 권다솔을 쫓아가고 싶었으나 석규리가 그의 팔을 잡아끌며 온몸의 힘으로 멈춰 세웠다.“진호 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 오빠가 이렇게까지 맞았는데 또 모욕을 받게 내버려둘 수 없어요!”그러나 배진호는 힘껏 그녀의 팔
“비켜, 방해하지 말고! 석규리 너 내 손에 죽고 싶은 거야?”배진호는 두 눈을 붉히며 말했다.그는 권용민과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런데 어째서 상관없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의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해오는 걸까.“진호 씨, 절 죽이고 싶다면 그대로 목을 졸라 죽이세요. 전 상관없어요.”석규리는 턱을 들고 가녀린 목을 배진호 앞에 드러냈다.한 가닥의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려왔다.그녀는 배진호가 아무리 화가 나도 여성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보고 있는 곳에서 그녀는 목 졸라 죽일 리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모든 일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다. 이번 일로 정말 그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하더라도 권다솔의 집안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버릴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었다.권용민은 두 사람이 일부러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이곳은 그의 집이다. 드라마 촬영현장이 아니다.차오르는 화를 못 이겨 권용민은 다시 한번 배진호를 향해 발길을 날렸다.“양심의 가책은 무슨!”“아저씨, 때리려면 저를 때리세요! 진호 오빠를 때리지 말아 주세요!”석규리는 급히 배진호의 앞을 막아섰다.권다솔은 메시지를 받고 달려 온 순간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석규리는 배진호의 앞에 막아선 것도 모자라 권용민을 손으로 밀어내기까지 했다.아버지가 비틀거리는 것을 본 권다솔은 재빨리 달려가서 그를 부축하려 했다.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초인이 아닌 이상 그렇게 빨리 도착할수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아버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곁에 남태건이 있었기에 권용민은 바닥에 넘어지지 않았다.권다솔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는 남태건의 손에서 아버지의 손을 전해받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배진호를 보는 권다솔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가세요. 전 이제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당신 아버지라는 사람이 진호 오빠를 때려서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그러고 돌아갈 생각이에요?”석규리는 쉽게 돌아설
“당연히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배진호는 급히 해명했다.하지만 석규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더 쏟아졌다. 그녀는 먼저 배진호를 한번 바라보고 억울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치 큰 결심을 한 것처럼 말했다.“저는 진호 씨를 단순히 오빠로만 생각해요. 우리 둘은 남매처럼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러니 제발 저희 관계를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그런 말씀도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이 말은 권용민의 분노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석규리의 표정만 보아도 이 두 사람 사이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런데 무슨 남매 같은 사이라니.“오빠 동생은 무슨. 이혼도 했겠다 집에 가서 실컷 마음껏 해 봐라. 왜 여기서 연극을 하면서 날 역겹게 만드냐!”권용민은 분노에 차서 배진호의 옷깃을 놓고 손을 털어냈다.그는 자신의 딸이 이런 남자에게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아니에요! 우리 사이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진호 오빠, 빨리 말 좀 해 봐요! 오빠가 형수님이랑 이혼한 건 저 때문이 아니잖아요!”석규리는 서둘러 배진호의 옆으로 다가섰다.그녀는 손을 뻗어 배진호의 손을 잡으려 하며 연약한 척 그의 쪽으로 기댔다.남태건은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사진을 찍어 권다솔에게 보내고 메시지를 덧붙였다.배진호는 석규리를 거칠게 밀어내며 혐오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그는 어머니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유로 석규리를 양녀로 받아들이는 것을 묵인했지만 그것이 자신과 석규리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석규리가 계속해서 배진호의 앞에 나타나 관심을 끌려는 행동에 그는 진절머리가 났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말이다.석규리는 남태건과 비등할 정도로 성가셨다. 둘이야말로 천생연분이니 그와 권다솔 사이를 방해하지 말고 같이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배진호는 생각했다.권용민은 배진호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서 보이는 혐오는 거짓으로 보
딸이 결혼 생활 동안 겪은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게다가 인터넷에 퍼진 여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권다솔을 욕하고 악독한 말들로 그녀를 공격했다.이 모든 것을 떠올린 권용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결국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분노에 찬 주먹을 휘둘렀다.배진호의 몸에 주먹이 연달아 날아들었다.“아버님, 남태건은 비열한 사람입니다. 남태건의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저는 다솔 씨를 때린 적도 없고, 욕하거나 모함하려 한 적도 없어요.”배진호는 권용민에게 손을 대고 싶지 않아 반격하지 않고 계속 몸을 피하며 말했다.하지만 권용민은 이미 분노에 휩싸여 있어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며 말했다.“콩 심은 데서 콩 난다는데 당신 어머니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잖아. 매일 우리 딸을 괴롭힐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당신이라고 뭐가 다르겠어?”배진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그 역시 남자로서 권용민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만약 상처받은 사람이 자신의 딸이었다면 자신도 다른 사람의 해명을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권다솔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그녀를 깊이 아프게 한 건 사실이었다.그리고 혈연관계는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가 어머니와 다르다는 걸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어 줄까?“이렇게 찾아와서 변명하는 건 무슨 뜻인데? 다솔이 부모님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회사에 피해 갈까 봐 말이지.”남태건은 이 틈을 이용해 발길질을 더 했다.남태건의 발길은 거칠었다. 특히 한 번은 배진호의 허리를 강하게 찼다. 배진호가 권다솔과 부부였다는 사실, 그들이 모든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남태건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했다.권다솔은 그의 것이다. 영원히!“네가 우리 딸을 진심으로 대하고 처음에 나와 한 약속을 지켰다면 우리도 널 도와줬을 거다. 내가 소중한 딸을 고생하게 놔두겠냐? 그런데 약속은커녕
밖으로 가는 도중 남태건은 권용민을 진정시키는 척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말만 계속했다.문 앞에 도착한 그들은 마침 배진호와 마주쳤다.“무슨 담으로 여기에 온 거냐! 딸을 그렇게 해코지해놓고 지금 와서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권용민은 소매를 걷고 주먹을 꽉 쥐었다.쭉 신사적인 태도로 살아왔던 그는 말로 처리할 수 있는 일에는 절대 손을 올리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딸을 위해 배진호의 얼굴에 한 방 날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아버님, 죄송합니다. 제가 다솔 씨를 지키지 못한 탓입니다. 제가...”배진호는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태건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는 진실이 밝혀질까 봐 불안해 급히 배진호를 쫓아내려 했다.“두 분은 이미 이혼하셨지 않나요. 지금 이곳에 있을 자격은 없다고 봅니다만. 당장 여기서 떠나세요, 될수록 멀리요. 이미 다솔이를 죽을 만큼 괴롭게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부모님들도 편치 않게 만들 작정인가요!”“태건 씨, 사람을 모함하는 데에도 정도가 있습니다!”배진호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둘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누구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남태건은 인품에 문제가 있었다. 그가 한 짓들은 비겁하다는 단어 외에 묘사할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짓들을 벌이고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호 씨는 이미 내기에서 졌어요. 당장 다솔이 곁에서 떨어져서 다시는 접근하지 마세요. 뒤에서 꼼수를 부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요.”배진호는 인터넷의 여론을 떠올렸다.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권용민의 모습을 보고 그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권용민은 분명 이 모든 것이 배진호가 벌인 짓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하지만 배진호가 권다솔을 해칠 리가 있는가?“아버님, 인터넷의 그...”“퍽!”남태건은 급한 마음에 결국 배진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그는 배진호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게 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비서가 그에게 모든 일을 설명하고 나서야 배진호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배진호는 자신이 어떤 모욕을 들어도 상관없었으나 권다솔이 상처를 받지는 않았는지가 걱정이었다.“다솔 씨는 제게 미안할 일은 전혀 한 적이 없어요. 이런 말들을 들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죠?”설령 권다솔이 정말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 하더라도 그 남자가 좋은 사람이면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배진호가 권다솔에게 험한 말을 할 리가 없었다.권다솔은 좋은 여성이었다. 둘이 헤어지게 된 건 다 배진호가 잘해주지 못해 그녀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잘 모르겠어요. 누군가가 동영상을 업로드 한것이 지금 곳곳에 퍼져 나가고 있어요.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라가서 권다솔 씨 집에서 반격을 하고 있습니다.”비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전해주었다.배진호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바로 사람을 시켜서 해명하도록 하세요. 함부로 루머를 퍼뜨리고 있는 계정에는 고소장을 보내고요. 앞으로 또 근거 없는 말들을 하면 법적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배진호는 당장 권다솔을 만나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비서는 바로 해명 글을 올리러 갔다.하지만 밀접히 인터넷 여론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남태건이 이 일을 쉽사리 해명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배진호가 해명 문장을 올린다면 그 문장들 사이에서 트집을 잡아내 또 네티즌들을 자극 시키면 된다.동시에 권용민과 김영은에게 배진호가 한 ‘악행’들을 전해주기도 했다.“다솔이는 너무 순진했던 겁니다.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곱게 키우셔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잘 몰랐던 거죠. 그래서 배진호의 본성을 알아 채지 못한 겁니다. 배진호라는 사람도 정말 지독하죠. 아무리 그래도 부부였던 사이인데 남은 정도 없는 걸까요.”“우리 딸에게 욕받이를 시키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건가!”권용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힘껏 상을 내리쳤다.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