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윤희는 조금 민망해졌다.“제 남자친구는 아마 못 올 것 같아요.”“뭐?”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이내 빠르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이런 중요한 날에 바람맞히다니. 내가 보기엔 앞으로도... 이 사람은 안 될 것 같아. 다시 신중하게 생각해 보기를 바랄게.”“네, 고마워요. 지유 언니.”강윤희는 감사 인사를 했다.여이현은 강윤희를 보며 물었다.“도움이 필요해?”강윤희는 강태규의 손녀였던지라 이런 상황을 알게 되고도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그녀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이 일은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결혼 상대가 바람을 맞혔으니 두 사람이 도와줘봤자 그저 그를 찾아내 주고 혼낸 뒤 합의금만 낼 뿐이다.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더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니 이 일은 그녀가 직접 처리하는 것이 맞았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를 감쌌다.“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해.”“네.”그렇게 여이현은 온지유를 데리고 구청에서 나왔다.강윤희는 여전히 구청에 혼자 남아 있었다. 다만 눈빛은 확고해지고 싸늘해졌다.여이현과 온지유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결혼식이 생각난 여이현이 물었다.“들러리로 누굴 부를 생각이야?”여이현은 이미 생각해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는 사람들을 전부 부를 생각이다.“부를 사람이 있겠어?”그녀에게 유일한 친구는 백지희였다. 그러니 불러도 백지희를 부를 것이다.“결혼식은 사흘 뒤야. 지금 친구들이나 지인에게 알려야 해.”여이현은 얼른 온지유에게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올려주고 싶었다.그때가 되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그와 온지유가 부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사흘 뒤라고? 그렇게나 빨라?”온지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여이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안 빨라. 우리가 결혼식을 몇 년 동안이나 미루고 있었잖아. 이제야 돌아왔는데 얼른 해야지.”만약 더 미뤄두다가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겠는가.“이미 준비도 다 한 것 같은데
온지유는 고개를 숙였다. 나이는 이미 서른이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부끄럼을 탔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여희영을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여이현이 말했다.“일부러 앞에서 염장을 지른 건 아니에요. 제가 그동안 지유한테 못 해준 게 많아서 그래요. 지유만 원한다면 제 능력껏... 전부 해줄 거예요.”능력이 닿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그는 어떻게든 구해서 온지유에게 줄 것이다.“그래, 그래. 나한테 그런 말 할 필요 없어. 너희들만 좋으면 되니까.”여희영은 얼른 손을 저었다. 더는 닭살이 돋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별이를 아주 좋아했기에 본가에 남아 있었다.두 사람의 결혼식에 관해 여이현은 정성을 쏟아부었고 자그마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결혼식 당일, 최주하와 지석훈, 그리고 나도현과 백지희도 참석했다. 물론 강윤희도 왔다.강태규는 고령에도 직접 결혼식에 참석에 여이현을 축하해주었다. 강태규뿐 아니라 법로롸 신무열, 김혜연도 왔다.홍혜주와 용경호도 참석했다.두 사람은 원래 올해에 결혼할 계획을 세웠으나 용경호에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던지라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온지유와 여이현이 두 사람보다 먼저 결혼할 줄은 몰랐다.물론 그들은 온지유와 여이현의 곁에 오래 있은 사람들이었던지라 두 사람이 그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축복하고 기뻐하였다.두 사람의 결혼식에 당연히 인명진도 빠질 수 없었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돈도 어떠한 물건도 부족하지 않았다.인명진은 온지유에게 핑크빛 다이아몬드가 걸린 목걸이를 결혼 축하의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직접 만든 약을 건넸다.그는 온지유에게 직접 건네며 꼼꼼하게 당부했다.“이 약은 내가 고서를 읽으면서 만든 거야. 그러니까 가지고 있어. 언젠가 만약 목숨이 위험한 때가 온다면 이게 도움이 되어줄 거야.”약의 수량은 온지유와 여이현, 별이를 고려해 만들었다. 심지어... 그는 만약에 태어날 둘째의 것도 준비해 주었다.온지유는 마음이 무
마침 온지유와 여이현이 반지를 서로에게 끼워주던 상황이었다.찾아온 불청객은 강서현이었다.강서현은 찾아와 소리를 질렀다.“잠깐만요! 제가 준비한 선물도 드리지 못했는데 벌써 결혼식 시작한 거예요?”그녀가 등장하자 하객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표정을 구겼다.법로는 신무열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신무열은 성큼성큼 걸어 나와 강서현의 앞으로 왔다.“그런 건 결혼식이 끝난 후에 다시 줘도 되지 않나요?”실무열 뿐 아니라 김혜연도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들의 추종자이자 수호자였다.그러자 강서현이 픽 웃었다.“전 분명히 말했어요. 전 축하하러 온 거라고요. 그런데 왜들 이렇게 긴장하고 있는 거죠? 게다가 전 혼자인데 말이죠. 설마... 제가 이 결혼식을 엎기라도 하겠어요?”강서현은 확실히 혼자였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해서는 안 된다. 브람이 여이현에게 맺어주려고 한 약혼자였으니까. 게다가 제일 중요한 것은 강서현은 아직도 여이현을 포기하지 못했다.행여나 무슨 일을 저지를까 봐 걱정되었다.신무열은 강서현의 손목을 확 잡았다.“결혼식을 엎을 수나 있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대하지 않았는데 굳이 왜 온 거죠?”김혜연은 강서현의 허리를 잡았다.강서현은 눈치채고 있었으나 그녀의 행동은 김혜연보다 빠르지 못했다. 김혜연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혜연은 신무열과 온지유를 지켜줘야 했다.김혜연은 온지유의 결혼식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되었다. 거기에다 신무열과 함께 경성으로 오면서 그녀는 특별히 무기도 챙겨왔다.그랬기에 총이 강서현의 허리에 닿을 때 강서현은 순간 당황하게 된 것이다. 강서현은 이내 입꼬리를 씩 올리며 비꼬았다.“그래도 한때 약혼까지 하려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절 버린 것에 관해서도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반겨줄 줄은 몰랐네요.”강서현은 높은 소리로 말하면서 여이현을 보았다. 일부러 모든 책임을 여이현에게 돌렸다.그러자 현
“전에 노승아를 감싸주었던 건 노승아가 제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죠. 생명의 은인을 모른 척할 수가 없잖아요. 설명을 하지 않은 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굳이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전 진심으로 온지유를 사랑하고 평생을 같이하고 싶기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지유를 헐뜯고 상처를 주는 꼴 구경하고 싶지 않네요.”“저 여자는 저를 낳아주신 아버지가 멋대로 정해준 약혼자이에요. 전 처음부터 분명하게 말했었죠. 좋아하지도 않으니 절대 결혼할 리도 없다고요.”“강서현, 네가 나와 지유의 결혼식에 와줘서 참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쫓아낼 생각도 없고. 하지만 만약 다른 마음을 품고 온 거라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전 설명할 건 다 설명했습니다. 다른 일은 저와 상관없는 일이니 더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배진호가 보안 요원을 데리고 강서현에게 다가갔다.강서현이 준비했다던 선물도 뜯겼다.그녀가 준비해온 것은 시한폭탄이었다.다만 용경호와 성재민에겐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군부대 생활을 했었고 강서현이 준비한 폭탄보다 더 큰 폭탄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폭탄을 해체할 줄 아는 건 만약의 상황을 위해 필수로 배웠기 때문이다.강서현이 준비한 폭탄은 아주 손쉽게 해체되었다.다만 하객들은 진정하지 못했다.이 문제는 배진호가 해결했다.어차피 돈에 환장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이런 소란에 여이현은 더욱 온지유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온지유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한 결혼식을 해주고 싶었다. 이런 일이 생겼으니 확실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온경준과 정미리도 어두워진 안색으로 그를 불러냈다.온경준의 표정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아주 싸늘한 눈빛으로 여이현을 보았다.“전에 자네가 우리 지유한테 어떤 짓을 했는데. 결혼식으로 그 잘못을 만회해보겠다고 떵떵 소리치더니 또 상처를 줘?! 여이현, 지유를 달라고 한 이유가
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 다시 말을 하려던 때 온지유가 다가왔다.“아빠, 이현 씨한테 약혼녀가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이현 씨 친아버지가 정해준 약혼녀예요. 이현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절했었어요.”온경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정말로 이놈 편을 들어주려고?”온지유는 처음부터 여이현을 감쌌다. 예전에는 여이현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결혼식도 올린 적 없었다.하지만 여이현은 조금 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여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히면서 온지유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설령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어도 그는 온지유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았다.이번 결혼식은 성대하고도 화려해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었다.“아빠, 저랑 이현 씨는 그간 많은 일을 겪었어요. 지금 아이도 있고 다시 재혼했으니 우린 한 몸이 된 거나 마찬가지죠.”부부는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않겠는가?“여이현, 경고하는 데 전처럼 우리 지유한테 상처를 준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온경준은 미간을 확 구기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여이현을 보았다.여이현은 바로 온지유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끌어당겼다.“장인어른, 걱정하지 마세요. 지유한테 백 배, 천 배로 잘할 거예요!”여이현은 그의 앞에서 맹세했다.그 말에 법로는 가슴이 저릿했다.분명 평범한 맹세였고 마음마저 따스해지는 장면이었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저릿했다.여이현이 온경준을 ‘장인어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그는 알고 있었다. 온경준 덕에 온지유가 건강하게 잘 클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하지만 여전히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그는 칼이라도 삼킨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여이현이 온지유의 허리를 감싸며 떠나자 그제야 법로는 온경준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온경준에게 은행 카드를 내밀었다.“이 안에 200억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지유를 정성스럽게 잘 키워줘서 고맙습니다.”법로는
게다가 별이가 나타나기 전, 그러니까 별이가 친아들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도 온지유는 별이를 데려다가 키우려고 했었다.심지어!인명진이 그녀의 심성이 착함에 제일 좋은 증인이었다.“이왕 경성에 온 김에 경성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가세요.”온경준은 법로가 진심으로 온지유를 위한다는 것을 보아내고 있었다.그들은 전부 온지유가 잘 살기를 바랐으니 당연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더구나 법로는 온지유의 친부가 아니던가.법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도 그럴 생각이었다. 별이의 곁에 남아서, 딸의 곁에 남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오늘 결혼식엔 필요한 과정은 전부 순차적으로 진행했다.결혼식 피로연에서의 게임도 말이다...지석훈과 최주하는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여이현은 원래 이런 이벤트를 취소하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벤트가 없다면 완벽한 결혼식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그들은 게임으로 여이현과 온지유에게 장난을 쳤다.하지만 대부분 여이현을 툭 밀면서 온지유와 붙어있게 해주었고 게임 벌칙도 두 사람이 이마 맞대기, 서로의 볼에 뽀뽀하기 등 시키면서 놀려대기 바빴다.피로연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술이었던지라 두 사람은 러브샷도 했다.게임은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그 후엔 다들 알아서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최주하는 여이현을 향해 눈썹을 튕겼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주 귀하니까 있을 때 잘해.”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도 돌아왔다. 방 안에 두 사람뿐이었던지라 여이현은 자연스럽게 온지유의 손을 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늘 결혼식에서 벌어진 일은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원래는...”“그래도 날 사랑하는 건 여전하잖아. 안 그래?”온지유는 실소를 터뜨렸다.강서현의 등장으로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의 결혼식을 잊지 못할 것이고 온지유의 얼굴과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는 것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그거랑은 달라. 나는 원래 우리가 알콩달콩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고.
김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저랑 보내는 시간 동안 즐겁지 않으셨어요?”그녀는 이내 신무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신무열보다 키가 크지 않았기에 신무열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젖혀야 했다.신무열의 선명한 이목구비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신이 조각한 것처럼 완벽한 이목구비였고 그녀가 푹 빠진 얼굴이었다.그는 입술을 짓이겼다. 머릿속에 김혜연과 같이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다.확실히 즐거웠다.김혜연은 고집을 부린 적 없었고 오히려 그를 배려해 주었다.다만 그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는 Y 국 국민을 위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Y 국에 써야 했다.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김혜연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김혜연, 한 달이라고 했으니까 약속 꼭 지켜.”신무열은 느긋하게 입을 열며 김혜연에게 약속을 지키라면서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했다.김혜연은 순간 목구멍이 막힌 기분이었고 가슴이 미어졌다.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했으나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차갑고 확고했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도련님, 저도 알아요. 도련님이 Y 국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요. Y 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건 알겠지만 도련님도 도련님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렇다고 해서 Y 국을 위한답시고 평생 결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요.”맞는 말이었다.하지만 법로가 그의 어머니에게 진 빚을 전부 똑똑히 보고 자랐기에 신무열은 법로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Y 국은 이미 그가 책임지고 있었기에 자신이 희생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그래. 하지만 난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어. 김혜연, 한 달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네 요구야. 그러니까 그만 포기하고...”“싫어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든 도련님 마음을 얻을 거예요! 도련님이 하신 말씀들은 전 신경 안 써요. 전 도련님을 이해하거든요. 미
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경성은 아주 좋은 곳이잖아요. 게다가 아가씨도 여기에 있으니까 저도 여기 남고 싶네요. 하지만 저랑 도련님은 다시 돌아가서 나라를 살펴보아야 해서 이곳에 정착하긴 어려워요.”“그렇군요. 그럼 편히 놀다가 가요. 별이를 혜연 씨한테 맡긴다면 자유 시간이 없잖아요. 오빠한테 이곳저곳 구경하러 가자고 해요. 화국은 아주 아름다운 나라라서 구경할 곳이 많거든요.”김혜연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온지유는 그녀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이 시간은 김혜연이 힘들게 노력해 얻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아깝게 낭비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온지유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별이는 아버지한테 맡길 생각이에요. 게다가 배 비서님도 있으니까 혜연 씨는 오빠랑 시간을 보내세요.”곧이어 온지유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여이현과 온지유는 차에 올라탔다. 순간 여이현은 뭔가 중요한 일을 깜빡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지?”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문 채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온지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뭘 잊고 있었는데?”여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그걸 왜 깜빡했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결혼 준비를 했는데 웨딩사진 찍는 걸 깜빡해버렸어.”온지유는 실소를 터뜨렸다.“난 또 뭐라고. 그 중요한 일이 웨딩사진 찍는 것일 줄은 몰랐네. 그래도 우린 이미 부부가 되었잖아. 안 그래?”그녀는 여이현의 어깨에 기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어차피 앞으로 우리에겐 시간이 많아. 천천히 찍으면 되지.”온지유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참, 우리 신혼여행 가서 찍으면 되겠다!”“그래, 그거 좋네. 배 비서, 들었죠?”여이현은 바로 운전 중인 배진호에게 지시했다. 배진호에게 이런 일은 그저 전화만 돌리면 되는 일이었기에 빠르게 촬영을 예약했다.한편 김혜연은... 온지유의 말을 명심하고 있었다.그녀는 신무열에게 다가갔다.신무열은 업무를 처리하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