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 다시 말을 하려던 때 온지유가 다가왔다.“아빠, 이현 씨한테 약혼녀가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이현 씨 친아버지가 정해준 약혼녀예요. 이현 씨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절했었어요.”온경준은 미간을 찌푸렸다.“정말로 이놈 편을 들어주려고?”온지유는 처음부터 여이현을 감쌌다. 예전에는 여이현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결혼식도 올린 적 없었다.하지만 여이현은 조금 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여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히면서 온지유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설령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게 되어도 그는 온지유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았다.이번 결혼식은 성대하고도 화려해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었다.“아빠, 저랑 이현 씨는 그간 많은 일을 겪었어요. 지금 아이도 있고 다시 재혼했으니 우린 한 몸이 된 거나 마찬가지죠.”부부는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지 않겠는가?“여이현, 경고하는 데 전처럼 우리 지유한테 상처를 준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온경준은 미간을 확 구기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여이현을 보았다.여이현은 바로 온지유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끌어당겼다.“장인어른, 걱정하지 마세요. 지유한테 백 배, 천 배로 잘할 거예요!”여이현은 그의 앞에서 맹세했다.그 말에 법로는 가슴이 저릿했다.분명 평범한 맹세였고 마음마저 따스해지는 장면이었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저릿했다.여이현이 온경준을 ‘장인어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그는 알고 있었다. 온경준 덕에 온지유가 건강하게 잘 클 수 있었다고. 그리고 그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고.하지만 여전히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그는 칼이라도 삼킨 것처럼 아프고 괴로웠다.여이현이 온지유의 허리를 감싸며 떠나자 그제야 법로는 온경준 앞으로 다가갔다.그는 온경준에게 은행 카드를 내밀었다.“이 안에 200억이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 지유를 정성스럽게 잘 키워줘서 고맙습니다.”법로는
게다가 별이가 나타나기 전, 그러니까 별이가 친아들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도 온지유는 별이를 데려다가 키우려고 했었다.심지어!인명진이 그녀의 심성이 착함에 제일 좋은 증인이었다.“이왕 경성에 온 김에 경성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가세요.”온경준은 법로가 진심으로 온지유를 위한다는 것을 보아내고 있었다.그들은 전부 온지유가 잘 살기를 바랐으니 당연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더구나 법로는 온지유의 친부가 아니던가.법로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도 그럴 생각이었다. 별이의 곁에 남아서, 딸의 곁에 남아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오늘 결혼식엔 필요한 과정은 전부 순차적으로 진행했다.결혼식 피로연에서의 게임도 말이다...지석훈과 최주하는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여이현은 원래 이런 이벤트를 취소하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벤트가 없다면 완벽한 결혼식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그들은 게임으로 여이현과 온지유에게 장난을 쳤다.하지만 대부분 여이현을 툭 밀면서 온지유와 붙어있게 해주었고 게임 벌칙도 두 사람이 이마 맞대기, 서로의 볼에 뽀뽀하기 등 시키면서 놀려대기 바빴다.피로연에서 빠질 수 없는 건 술이었던지라 두 사람은 러브샷도 했다.게임은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그 후엔 다들 알아서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최주하는 여이현을 향해 눈썹을 튕겼다.“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아주 귀하니까 있을 때 잘해.”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도 돌아왔다. 방 안에 두 사람뿐이었던지라 여이현은 자연스럽게 온지유의 손을 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늘 결혼식에서 벌어진 일은 다 내 잘못이야. 미안해. 원래는...”“그래도 날 사랑하는 건 여전하잖아. 안 그래?”온지유는 실소를 터뜨렸다.강서현의 등장으로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의 결혼식을 잊지 못할 것이고 온지유의 얼굴과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다는 것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그거랑은 달라. 나는 원래 우리가 알콩달콩한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고.
김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저랑 보내는 시간 동안 즐겁지 않으셨어요?”그녀는 이내 신무열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신무열보다 키가 크지 않았기에 신무열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젖혀야 했다.신무열의 선명한 이목구비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신이 조각한 것처럼 완벽한 이목구비였고 그녀가 푹 빠진 얼굴이었다.그는 입술을 짓이겼다. 머릿속에 김혜연과 같이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다.확실히 즐거웠다.김혜연은 고집을 부린 적 없었고 오히려 그를 배려해 주었다.다만 그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는 Y 국 국민을 위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Y 국에 써야 했다.그렇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김혜연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김혜연, 한 달이라고 했으니까 약속 꼭 지켜.”신무열은 느긋하게 입을 열며 김혜연에게 약속을 지키라면서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했다.김혜연은 순간 목구멍이 막힌 기분이었고 가슴이 미어졌다.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이 생기기 마련이라고 했으나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차갑고 확고했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도련님, 저도 알아요. 도련님이 Y 국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요. Y 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건 알겠지만 도련님도 도련님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그렇다고 해서 Y 국을 위한답시고 평생 결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요.”맞는 말이었다.하지만 법로가 그의 어머니에게 진 빚을 전부 똑똑히 보고 자랐기에 신무열은 법로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Y 국은 이미 그가 책임지고 있었기에 자신이 희생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그래. 하지만 난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어. 김혜연, 한 달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네 요구야. 그러니까 그만 포기하고...”“싫어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든 도련님 마음을 얻을 거예요! 도련님이 하신 말씀들은 전 신경 안 써요. 전 도련님을 이해하거든요. 미
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경성은 아주 좋은 곳이잖아요. 게다가 아가씨도 여기에 있으니까 저도 여기 남고 싶네요. 하지만 저랑 도련님은 다시 돌아가서 나라를 살펴보아야 해서 이곳에 정착하긴 어려워요.”“그렇군요. 그럼 편히 놀다가 가요. 별이를 혜연 씨한테 맡긴다면 자유 시간이 없잖아요. 오빠한테 이곳저곳 구경하러 가자고 해요. 화국은 아주 아름다운 나라라서 구경할 곳이 많거든요.”김혜연은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온지유는 그녀를 배려해 주고 있었다. 이 시간은 김혜연이 힘들게 노력해 얻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아깝게 낭비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온지유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별이는 아버지한테 맡길 생각이에요. 게다가 배 비서님도 있으니까 혜연 씨는 오빠랑 시간을 보내세요.”곧이어 온지유는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여이현과 온지유는 차에 올라탔다. 순간 여이현은 뭔가 중요한 일을 깜빡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내가 왜 그걸 잊고 있었지?”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문 채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온지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뭘 잊고 있었는데?”여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그걸 왜 깜빡했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결혼 준비를 했는데 웨딩사진 찍는 걸 깜빡해버렸어.”온지유는 실소를 터뜨렸다.“난 또 뭐라고. 그 중요한 일이 웨딩사진 찍는 것일 줄은 몰랐네. 그래도 우린 이미 부부가 되었잖아. 안 그래?”그녀는 여이현의 어깨에 기대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어차피 앞으로 우리에겐 시간이 많아. 천천히 찍으면 되지.”온지유는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참, 우리 신혼여행 가서 찍으면 되겠다!”“그래, 그거 좋네. 배 비서, 들었죠?”여이현은 바로 운전 중인 배진호에게 지시했다. 배진호에게 이런 일은 그저 전화만 돌리면 되는 일이었기에 빠르게 촬영을 예약했다.한편 김혜연은... 온지유의 말을 명심하고 있었다.그녀는 신무열에게 다가갔다.신무열은 업무를 처리하
온지유의 말을 들으니 김혜연은 더 부끄러워졌다.신무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기왕 만난 김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마침 식사 시간대인데.”“저희 민박을 예약했어요. 거기로 가요.”말을 마친 온지유는 길을 안내했다.빠르게 그들은 한 민박집으로 왔다.여이현은 민박집 직원을 불렀다. 그러자 직원은 메뉴판을 들고 왔다. 이미 이곳에 먼저 와서 지내고 있었던지라 온지유는 김혜연과 신무열에게 맛있었던 음식을 추천했다.두 사람에게도 맛있는 음식을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열 가지가 넘는 음식을 주문했으나 다행히 양은 많지 않았다. 김혜연이 새우를 까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신무열이 매너 있게 대신 가져와 껍질을 까주었다.여이현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바로 아내를 위해 새우를 까주었다.온지유는 김혜연의 잔에 음료수를 따라주었다.“여기엔 구경할 곳이 아주 많아요. 이왕 마주친 김에 같이 둘러볼래요?”“네, 좋아요!”김혜연은 바로 대답했다.그녀와 신무열의 사이는 원래부터 어색했다. 신무열이 무뚝뚝했기에 그녀가 자꾸만 말을 건다면 짜증이 솟을 게 분명했다.행여나 신무열이 언짢아하면서 이 관계를 얼른 끝내버리려고 할까 봐 걱정되었다.한 달이라는 체험 기간은 그녀가 겨우 얻은 기회였으니 말이다.“그럼 전 사장님한테 가서 두 사람 방 예약하고 올게요. 여긴 민박집이긴 하지만 엄청 커서 매일 신선한 채소도 많고 주변 환경도 아주 좋거든요.”온지유는 주동적으로 도와주었다.신무열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김혜연은 당연히 미소를 지었다.“정말 고마워요.”온지유는 두 사람에게 방을 잡아 주었다.방 키를 두 사람에게 건넸을 때야 온지유가 방 두 개가 아닌 하나만 잡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너비가 1.5m밖에 되지 않는 사이즈의 침대만 하나 있었다. 다만 여이현은 온지유의 눈빛에서 계획을 눈치챘다.김혜연과 신무열이 방으로 올라가 짐을 내려놓으려고 할 때 여이현은 온지유를 구석으로 끌어당겼다.“지유, 일부러 그런 거지?”그녀가
온지유가 방을 잡을 때 신무열이 온지유한테 제대로 설명을 안 해서 온지유는 신무열과 김혜연이 같은 침대에서 자는 사이인 줄로 착각했다.신무열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참고 낮게 말했다.“네가 침대 써. 난 바닥에서 잘게.”Y국 북부에서 그 험난한 환경도 다 버텼는데,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신무열을 깊이 사랑하는 김혜연이 그를 바닥에서 자게 할 수 있을까?김혜연이 조용히 말했다.“제가 바닥에서 잘 테니까 무열 씨는 침대에서 주무세요. 아니면 저...”“지금 관광 성수기라 방 잡기도 어려워. 게다가 너 혼자 나가면 뭐가 되겠어?”김혜연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신무열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김혜연은 고개를 숙였다. 신무열 앞에서는 언제나 말 한마디 크게 못 하는 그녀였다.자신의 가장 부드럽고 좋은 면만 보여주고 싶었지만 신무열은 이렇게까지 조심스러운 그녀의 태도가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신무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하고 가서 씻고 옷 갈아입어.”“네.”김혜연은 신무열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그런데 민박에서 갑자기 물이 끊길 줄이야.김혜연은 거품투성이인 채로 욕실 안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무열 씨, 프런트에 전화해서 물이 왜 안 나오는지 물어봐 줄래요?”온몸에 거품이 잔뜩 묻은 채로 나갈 수도 없으니 말이다.신무열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살짝 당황했지만, 곧바로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다.프런트 직원이 계속 사과하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손님. 예비 물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해결해 드릴게요.”“최대한 빨리 부탁해요.”신무열은 물이 나온다는 말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전화를 끊었다. 욕실 쪽으로 말한다.“곧 물 나온대. 조금만 기다려.”“네, 알겠어요.”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고, 몇 분 후 김혜연은 머리가 흥건한 채로 나왔다.“머리 안 말려?”“이제 말릴 거예요.”김혜연은 이런 일상적인 대화가 좋았
법로가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우린 다 먹었어. 별아, 엄마 아빠도 밥 먹었는지 물어봐 줄래?”“네.”별이는 천천히 말했지만,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별이는 법로가 한 말을 온지유에게 그대로 전했다.온지유는 무척 기뻤다. 최근 별이가 이렇게 완전한 문장으로 말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엄마랑 아빠도 밥 먹었어. 그리고 여기서 네 외삼촌도 만났어. 별아, 너도 여기 와서 같이 놀고 싶지 않아?”온지유는 별이의 대답을 기다리며 옆에 있는 여이현을 슬쩍 당겼다. 별이가 오고 싶다고만 하면 바로 데려올 수 있었으니까.여이현도 부드럽게 웃으며 별이에게 물었다.“별아, 여기 오고 싶어?”별이는 고개를 저으며 법로를 한 번 쳐다보고 말했다.“별이는… 외할아버지랑 있을 거예요… 외할아버지가 별이 병 고쳐 주신대요…”“그래, 그럼 외할아버지랑 잘 지내고, 말씀도 잘 들어. 엄마랑 아빠가 돌아갈 때 선물도 사 올게. 네가 나아지면 같이 놀러 가자.”사실 여이현도 별이를 데려올까 했지만, 온지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온지유에게 미안했던 부분도 많았고, 이번에는 별이 곁에 법로가 있으니 온지유와 함께 둘만의 여행을 즐기고 싶었다.“네.”별이는 짧게 대답했지만, 그 한마디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별이가 법로와 함께 지내면서 많이 좋아진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법로가 경성에 계속 머문다면, 별이의 건강도 회복되고 온지유와의 유대도 깊어질 것이다.온경준과 정미리는 온지유를 친딸처럼 여겼고, 친구들, 오빠와 새언니까지, 가족들이 모두 함께 있었으니 온지유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온지유는 별이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뒤, 법로에게 몇 가지 당부를 전하고서야 전화를 끊었다.여이현이 온지유를 안으며 말했다.“별이는 외할아버지랑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별이 건강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그래서 지금 외할아버지랑 같이 있는 거잖아.”온지유는 별이가 점점 나아질 모습을 그리며 미소를 지
잠깐 사이에 신무열과 김혜연은 온지유 일행과 떨어지고 말았다.김혜연은 다시 그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이때 신무열이 말했다.“이제 어른이잖아. 핸드폰에 내비게이션도 있으니까 길 잃을 일 없어. 저쪽으로 가서 구경하자.”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무열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얼마 가지 않아 그들 앞에 꽃을 파는 어린 소녀가 나타났다. 일곱, 여덟 살쯤 되어 보였고, 야윈 몸에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언니!”소녀는 김혜연 앞으로 다가와 손에 든 꽃을 내밀며 말했다.“언니처럼 예쁜 사람은 꽃 한 다발 가져가야죠. 안 그래요?”김혜연이 대답하려는 찰나, 소녀가 말을 덧붙였다.“이 꽃들은 제가 아침에 직접 꺾은 거예요. 싸게 팔고 있어요. 하나 사시면 하나 더 드릴게요.”소녀는 정말 배가 고팠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꽃 한 다발도 팔지 못한 데다, 집에는 아픈 엄마와 어린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들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김혜연은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여기 있는 꽃 전부 얼마야? 내가 다 살게.”같은 나라 사람끼리 서로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 꽃을 사는 돈이 김혜연에게는 큰돈이 아니었지만, 소녀에게는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언니, 정말 다 사 주실 거예요?”소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얼른 가격 계산해 줘.”소녀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이제 돈이 생겼으니 음식을 살 수도 있고, 엄마 약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마음씨 좋은 언니를 만났으니 말이다.소녀는 서둘러 계산을 시작했고, 김혜연이 많이 사는 만큼 가격도 할인해 주었다.“이 돈 받아. 잘 챙겨서 남들 안 보이는 곳에 넣어 두렴.”김혜연은 원래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소녀에게 건넸다.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언니, 너무 많이 주셨어요. 제 꽃들이 그렇게 값어치 있는 것도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나 음치는 아니었다.별이는 기쁜 얼굴로 손뼉을 쳤다.“너무 좋아요. 아빠, 엄마, 내일 어린이집에서 가족 이벤트를 한다고 했어요. 노래 대회라고 했는데 별이랑 같이 참가해줄 거죠?”내일은 주말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주말에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것도 평일 출근할 학부모를 고려해서였다.만약 여이현에게 다른 일정이 없다면 당연히 아내와 함께 별이의 어린이집으로 갈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마음을 되돌리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가 해야 했다.“여보, 여보가 별이랑 같이 가줘. 난 그날 거래처 만나봐야 하거든.”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일에 부모 모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던지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여이현이 바쁘게 일하는 것도 더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별이는 더욱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온지유의 팔을 꼬옥 잡아 기대며 말했다.“그럼 아빠는 일하러 가세요. 별이는 엄마만 있어도 괜찮아요. 선생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두 분이 같이 가면 더 환영한댔어요.”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자고 있던 온하윤도 눈을 떴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옆에 있던 김명자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분유를 탄 뒤 온하윤의 입에 물려주었다. 향긋한 분유 냄새를 맡은 온하윤은 꿀꺽꿀꺽 젖병을 빨아 먹었다.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행복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별이가 먹고 싶다는 햄버거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아이들이랑 놀아줘.”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뽀뽀한 뒤 앞치마를 두르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
권다솔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게다가 남태건과 평생 묶여 살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어젯밤 이상한 약물 탓에 그와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배진호뿐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온몸이 남태건의 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령 그저 손을 잡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남태건은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 일단 생각은 해봐. 다솔아, 급하게 답을 주지 않아도 돼.”그녀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면 그만이었다.권다솔의 부모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주려고 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권다솔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오랫동안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남태건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한편 온지유 쪽.권다솔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동안 여이현은 배진호를 찾아간 적 있었다. 기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진호는 집안일로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혼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으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기력은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그가 솔직하게 말하니 여이현도 강요하지 않았다.“일단 집안일부터 처리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요.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한테 다시 찾아와도 돼요. 그때 또 새로운 일을 줄 테니까요.”여하간에 여진 그룹은 대기업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언제든지 있었다.한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배진호는 그런 여이현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었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본인만 아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면 때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그는 권다솔과 다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전제가
“참.”권다솔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체크아웃 해야겠어요.”“그럴 필요 없어. 어젯밤 방은 내가 예약한 거거든. 우린 그냥 바로 병원으로 가면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거야.”남태건은 급하게 그녀를 말렸다.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배진호가 돌아왔다.그의 손에는 금방 만든 샌드위치가 있었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였던지라 그는 족히 반 시간은 기다려서야 살 수 있었다.하지만 괜찮았다. 권다솔이 좋아하기만 한다면 반 시간이든 한 시간이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손님.”이때 로비 직원이 그를 불렀다.그녀는 배진호를 측은한 눈길로 보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사러 나갔다가 그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직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주었다.“여자친구분이 이미 떠나셨어요. 체크아웃하시겠어요?”“네, 체크아웃할게요.”배진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잠에서 깨어난 권다솔이 그에게 말도 없이 가버린 것을 보면 아직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가 나간 사이에 생각을 정리할 겸 먼저 가버린 것으로 생각했다.체크 아웃을 한 뒤 배진호도 호텔에서 나왔다.그는 누군가 자신을 사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남태건은 권다솔을 데리고 병원으로 온 뒤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권다솔은 아주 건강했다.하지만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다솔아, 나랑 함께 밤을 보낸 게 그렇게 슬픈 일이야? 너한테 나는 그런 존재였어?”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남태건은 눈가가 붉어졌다.권다솔은 오직 배진호만 원했다. 그 사실에 그는 가슴이 쓰라리면서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이미 권다솔을 자신의 아내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의 아내와 밤을 보내지 않았는가.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에요. 전 태건 씨를 여전히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거든요.
권다솔은 눈을 떴다.옆에 누워있는 남태건을 본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도 하얘졌다.그녀는 힘겹게 입을 뗐다.“어젯밤에... 그럴 리가 없잖아요?”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이 알려주고 있었다. 어젯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배진호라고. 하지만 왜 남태건이 눈앞에 있는 것일까?그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다솔아, 내가 어제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싫다면서 나더러 먼저 가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너만 혼자 남겨두고 집에 가? 주위에 남자들이 득실거리는데. 정말로 내가 먼저 갔다면 이상한 파리들이 너한테 꼬였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경계하고 있었는데도 너한테 파리가 꼬였을 줄은 몰랐네.”남태건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댔다.얼굴도 붉지 않고 가슴도 요동치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지만 두 눈엔 안타까움만 남아 있었다.“누가 네 술잔에 뭔가를 탔어. 그걸 눈치 못 챈 네가 주스를 가지러 갈 때 결국 정신을 잃게 되었었지. 하마터면 처음 보는 놈들에게 끌려갈 뻔한 걸 내가 막은 거야.”권다솔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확실히 자신에게 치근대던 남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했으나 배진호가 나타나 남자를 때려주며 무사하게 되었다.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배진호라는 것을. 애초에 남태건이 아니었다.“정말로 절 구해준 사람이 태건 씨예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건 아니죠?”권다솔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남태건은 손을 번쩍 들며 맹세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야. 어젯밤 널 구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너랑 같은 방에 있겠어? 다솔아, 그 약은 아주 위험한 약이야. 사람 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들 수 있는 약이지. 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안 되잖아.”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든다는 말에 권다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진호 씨랑 보낸 시간이 전부 꿈인 거야? 약 때문에 환각이 생긴 거야?'그녀는 어제 꿈속에서 배
만약 권다솔이 모른다고 한다면 그는 이곳을 떠나 그녀가 푹 쉴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권다솔이 취했다는 것을. 술에 취한 사람과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았다.“진호 씨, 내가 어떻게 진호 씨 얼굴을 잊겠어요. 설마 내가 진호 씨를 못 알아볼 거로 생각한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그녀는 지금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호텔 불빛 아래 보이는 배진호의 얼굴도 흐릿했다.이 모든 게 꿈일 거로 생각했다.현실에서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었으니 꿈에서만큼은 전부 표현하리라 생각했다.그녀는 한번 또 한 번 배진호의 이름을 불렀다.그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배진호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그는 옷을 하나씩 벗으며 방 안의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권다솔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전부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권다솔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기에 샤워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그래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자버렸다.그날 밤, 그녀와 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푹 자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열린 커튼 틈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배진호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옆에 누워있는 권다솔을 본 그는 전례 없던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그는 권다솔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옷을 입었다. 아침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어젯밤 두 사람은 아주 격렬하게 서로를 원했기에 권다솔이 깨어나면 분명 배고플 것이었다.아침을 먹은 후에 두 사람을 편히 잠 못 이루게 했던 문제들을 해결해볼 생각이었고 이혼도 취소할 생각이었다.그는 그렇게 호텔을 나섰다.그 모습을 마침 남태건이 목격했다. 그는 어젯밤 내내 권다솔을 찾아다니느라 잠도 자지 못했지만 찾지 못했다.조급해진 그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려던 때 배진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배진호는 호텔에서 나왔다.그렇다는 건...남태건은 이를 빠득 갈며 호텔
남자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잔뜩 화가 난 배진호의 얼굴에 그는 꼬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내 배진호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깼어요, 깼어요. 이 여자는 형님한테 넘길게요. 두 사람 방해하지 않고 바로 여기서 꺼져드릴 테니까 형님은 천천히 즐기십시오!”“여자도 사람이야.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고. 물건처럼 넘기느니 마느니 할 자격 없어, 너한테.”배진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멱살을 잡으며 엄숙하게 경고했다.그는 방금 이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나서서 도와준 이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여자가 괴롭힘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한 몫 챙겨보려고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그의 마음속에 권다솔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네, 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남자는 바닥을 기어 다니더니 빠르게 몸을 일으켜 도망쳤고 중얼거리며 배진호를 욕했다.‘어디서 허세를 부려!'‘세상에 욕망이 없는 남자가 어디에 있다고! 다들 여자를 원한다고!'배진호는 쫓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방금 남자에게 당하고 있었던 여자에게 밤늦게 술집에 왔을 땐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런데 그는 권다솔을 발견하게 되었다.“진호 씨?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죠? 진호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권다솔은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자신이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남자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자 땜이 무너져버린 저수지처럼 감정이 흘러나왔다.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권다솔은 속으로 자신에 말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손을 뻗게 되었다. 배진호를 직접 만지며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나예요. 우리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 같네요.”배진호는 씁쓸하게 웃었다.방금 그는 차를 몰고 이곳으로 오면서 안에서 빛나는 불빛 보며 생각했었다. 만약 이곳에 권다솔이 있다면 분명 안으로 들어가 한잔 마셨을 것이라고.그 생각으로 이 안까지 들어온 것이다.그러나 그는 정말로 이곳에서 권다솔을 만나게
“태건 씨,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요. 빨리 돌아가세요.”권다솔의 목소리엔 이미 지친 듯한 짜증이 묻어났다.그녀가 밤늦게 클럽에 온 이유는 마음을 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이지 남태건이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라고 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자신도 맥주 한 병을 땄다.“네가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내가 같이 마셔줄게. 네가 집에 가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려다줄게.”권다솔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갑자기 술 마실 기분이 뚝 떨어진 그녀는 술병을 옆으로 밀어두고 춤추는 남녀들로 가득한 스테이지를 멍하니 바라봤다.‘이 순간에 배진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다솔아, 우리도 같이 춤출래?”남태건이 먼저 제안했다.아까 이쪽으로 오면서 그는 배진호를 봤다.그 남자는 정말로 끈질기게 권다솔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면 둘 사이엔 정말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이렇게 힘들고 지칠 때 찾는 곳이 똑같다는 것 자체가.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인연도 자신이 있는 한 반드시 끊어낼 거라 다짐했다.그는 배진호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권다솔과 자신이 춤을 추며 두 사람의 몸이 밀착해 있는 모습을 말이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혼자 가세요. 난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요.”“네가 안 간다면 나도 안 가. 나는 너하고만 있고 싶어. 다른 여자는 보지도 않을 거야.”남태건은 천천히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둘 사이의 거리가 한층 더 좁혀졌다.남태건이 손을 내밀어 권다솔의 손끝에 닿으려는 순간, 권다솔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솔아, 어디 가려고?”남태건은 그녀가 화난 줄 알고 얼른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주스 좀 받아어려고요. 금방 올 테니까 여기 있으세요.”그제야 남태건은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액세서리를 가방에서 꺼냈다. 권다솔이 돌아오면 그녀에게 선물할 생각에 미소를 지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