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Y국에 전쟁이 일어날 때 김혜연은 신무열을 따라다니며 최고 수준의 격투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불량배는 김혜연을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ㄴ오히려 그녀에게 제압당해 발밑에 깔리고 말았다.“돈 안 내놓을래? 지금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갈 거야!”그 말에 불량배는 겁에 질려 서둘러 빌었다.“돈 돌려줄게요! 두 배로 줄 테니까, 제발 경찰서에만은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김혜연은 냉정하게 말했다.“돈부터 돌려주고 얘기해.”불량배는 어쩔 수 없이 소녀에게서 빼앗은 돈을 돌려주었고, 김혜연은 소녀의 몫만 가져와 소녀에게 돌려준 후, 한 손으로 불량배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경찰에 신고했다.‘잡초를 뿌리째 뽑지 않으면 다시 자라듯이... 참 운도 없어. 나를 만나다니.’경찰이 도착해 불량배를 데려가고 나자, 김혜연은 소녀에게 돈을 더 건네며 말했다.“언니가 도울 수 있는 게 이것뿐이야. 이 돈으로 잘 지내길 바랄게.”어린 나이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거리로 나온 소녀를 보니 김혜연은 전쟁 속에서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전쟁이 없었더라면, 나라가 평화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랬다면 신무열도 법로도 가정을 희생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감사합니다, 언니.”소녀는 김혜연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소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혜연은 소녀가 전화하며 Y국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같은 나라 사람이었구나!’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김혜연은 더 정이 갔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다.이때 신무열이 다가와 말했다.“이곳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다음에는 이런 일에 휘말려 들지 마.”김혜연은 격투 실력이 뛰어났지만 이곳은 타지이고 그녀는 혼자였다. 만약 불량배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김혜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때는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무열 씨도 제 옆에 있었잖아요.”그녀는 그저 소녀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신무열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
이런저런 생각만으로도 김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런 그녀를 보며 신무열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혼자서 그렇게 웃으면서.”신무열의 목소리에 김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런 일들을 신무열에게 들키면 안 된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김혜연은 얼버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한편, 온지유는 김혜연과 신무열이 길을 잃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각자의 시간을 주고 싶어 여이현과 천천히 산책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그러다 멀리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걸 본 온지유는 문득 지선율이 떠올랐다.지선율은 나중에 유명 감독이 되었고, 장다희는 인기 여배우가 되었다. 한때는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이지만 지금은 각자 바빠 거의 연락하지 못했다.신혼여행이 끝나면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이때 여이현이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예계에 관심 있으면 내가...”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무슨 연예계야. 괜히 시간 낭비지.”“꼭 배우가 될 필요는 없잖아. 기획자나 감독, 아니면 작가도 될 수 있지. 하고 싶은 거 있어?”여이현의 말은 온지유에 대한 아낌없는 배려였다.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러자 온지유는 말했다.“이제 다시 생각해 볼게.”여이현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이 가리킨 쪽을 보니 신무열과 김혜연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두 사람 이제 잘 돼 가는 것 같네. 신무열은 자꾸 아닌 척하지만.”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좋은 일이 곧 생길 것 같아.”여이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일이지.”신무열은 온지유보다 몇 살 더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신무열 나이쯤 되면 이미 아이도 몇 명씩 있었지만 그는 이제야 겨우 여자 친구가 생긴 셈이었다.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런데 우리 정말 같이 다닐 거야?”여이현은 신무열과 김혜연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김혜연과 신무열은 순식간에 불량배들을 쓰러뜨리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주변에 사람들이 많자 김혜연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이 사람, 얼마 전 제가 경찰에 넘긴 사람인데 한 시간도 안 돼 풀려나서 이렇게 사람들까지 모아 우리를 협박하네요. 혹시 조직폭력배 세력인가요?”이 말이 나오자마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이 상황에 경찰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이 사람을 잡아 비난과 교육을 했고 심지어 반성문까지 받았는데도 다시 나와 이런 소란을 일으키네요.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불법 세력은 반드시 뿌리 뽑아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겠습니다!”신무열은 이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책임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확실히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그러자 김혜연은 살짝 미안해하며 말했다.“저는 그저 그 소녀가 안쓰러워 보여서 도왔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번져버렸네요. 무열 씨가 한 말 기억할게요.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안 나섰어도 내가 나섰을 거야.”신무열은 김혜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사실 그들은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상황이 닥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성격이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할게요.”김혜연은 다시 한번 약속했다.신무열은 김혜연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알았으니까 그만하고 더 볼 거 없으면 지유를 찾으러 가자.”“볼 게 있죠. 당연히 있죠!”김혜연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이 반짝였다.그러다 김혜연은 근처에 유명한 사진작가가 있다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신무열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말했다.“너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김혜연은 순간 당황하며 말했다.“다 들켰네요. 게다가 이미 커플 반지도 샀는데 이것도 괜찮지 않아요?”그녀는 신무열의 팔을 흔들며 부탁했다.신무열은 이런 부탁을 받아본 게 온지유가 어릴 때 투정 부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 당황했다. 김혜연이 워낙 그보다 어리다 보니 신무열은 차마 거절하기
그러나 신무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지금 말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아. 막상 그때가 되면 네가 후회할지도 몰라.”“나라가 없으면 가정도 없는 법이잖아요. 당신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당신의 책임감과 모든 걸 잘 알고 있어요. 무열 씨의 모든 걸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만약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벌을 받을 거예요!”김혜연은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손을 들며 맹세하려고 했다.신무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멈추게 하며 말했다.“그런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네 마음 믿어. 넌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야. 하지만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내 인생은 Y족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그렇다고 해서 평생 Y족만 위해 살 순 없잖아요. 법로도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당신도 혼자 외롭게 지낼 필요는 없어요. 정말이에요, 저...”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껴안으며 주변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뿐이었다.“알겠어. 조금 더 생각해 볼게.”“네.”신무열은 주저하고 있었다. 평소엔 중요한 일에 망설임 없이 나서지만, 감정 문제에선 오히려 더 망설였다. 그가 걱정하는 건 김혜연이 상처받는 것이었다.김혜연은 기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저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신무열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고 싶었다. 그가 그녀 곁을 떠나더라도 언제든 그를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김혜연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과의 평온한 삶뿐이었다.세 시간 후 두 사람은 돌아왔다. 오늘 일은 이미 뉴스에 보도된 상태였다.온지유는 두 사람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빠, 새언니! 오늘 두 분이 같이 싸우는 모습 정말 멋졌어요!”김혜연은 그 호칭에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Y족에서 그런 상황을 많이 겪다 보니, 우리도 기본적인 자기방어는 할 수 있어야죠. 그리고... 저와 무열 씨는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니까
조사를 하다 보니 결국 강서현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강서현은 결혼식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짓이 밝혀진 이상, 여이현은 강서현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강서현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여이현과 온지유 앞에 끌려왔다. 강서현은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온지유를 보며 이를 갈듯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직 포기하지 못했구나. 그래도 네가 여이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알겠어. 아니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강서현은 여이현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혼식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져도 마음을 접지 않았다. 이 정도면 진심이 아니면 뭐겠는가. 온지유는 여이현을 째려보며 말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강서현과 단둘이 있는 걸 불안해했다. 이때 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이미 온몸이 묶여 있는 상태고 당신과 부하들도 있는데, 쟤가 감히 날 어떻게 하겠어?”온지유는 여이현이 걱정했던 부분을 그대로 짚어서 말했다. 둘은 미리 얘기한 것도 아닌데, 단지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이는 강서현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온지유를 보며 강서현은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깊은 원망을 느꼈다.만약 온지유와 여이현이 재회하지 않았더라면, 여이현은 S국에 남아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자신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아이 문제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여이현과 함께라면 자신의 아이도 생길 것이고 대통령이 된 후엔 별이도 그녀의 곁에서 자랄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모든 계획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온지유였다!온지유가 여이현을 이렇게까지 사로잡은 힘이 무엇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그녀만 바라보고, 주변 사람들도 온지유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이 강서현에게는 더욱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었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넌 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내가 죽으면 네게 무
강서현의 눈빛은 마치 “네가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우쭐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전혀 우쭐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강서현, 네가 모를 수도 있지만, 나보다 먼저 여이현 곁에 있었던 여자가 한 명 더 있어. 노승아라고, 나보다 먼저 나타났어.”노승아는 여이현에게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여이현의 곁에 남은 사람은 온지유였다. 때로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강서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강서현은 노승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온지유의 말을 듣고 자신과 여이현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처음 여이현을 봤을 때 그의 매력적인 외모에 이끌렸고, 그의 일 처리 능력과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도 반했다.항상 원하는 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그녀에게 여이현 앞에서의 좌절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승부욕이 그녀를 계속 부추겼다.잠시 침묵하던 강서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온지유, 미안해.”마침내 그녀도 자신의 집착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온지유는 강서현이 더 이상 집착하지 않도록 일부러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강서현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게 되어 온지유로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사과는 받아줄게. 그렇지만 네가 내 아이섀도에 약을 넣은 일은 넘어갈 수 없어. 치료비는 네가 부담해. 그래야 두 번 다시 우리를 방해하지 않겠지.”강서현이 결혼식을 망친 데 이어 온지유에게 알레르기까지 일으켰으니,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강서현이 여이현과 자신의 삶에 더는 개입하지 않는다면 온지유도 더 이상 벌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알았어.”강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그녀를 풀어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여이현은 온지유의 말을 바로 따르지 않았다. 온지유를 해친 사람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강서현에게 온지유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었다.눈이 부어오르는 알레르기 반응으로 괴로워하는 강서현
브람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여이현은 이 모든 것이 음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강서현이 다시 나타나다니.이때 강서현은 급히 여이현에게 말했다.“이현 씨, 지금 S국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아요. 대통령님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이현 씨가 아내와 함께 있고 싶다는 건 알지만, 그때 대통령님 덕분에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무사히 있는 거예요.”강서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이현은 의식을 회복한 뒤 줄곧 S국의 일을 돕고 있었다.그는 스스로 올해까지만 자신에게 시간을 주기로 결심했지만 온지유가 자신을 알아보게 되면서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다.“잠시만 기다려줘.”여이현은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고, 강서현은 조용히 기다렸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누구보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가 S국으로 돌아가려면 온지유와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대통령이 여이현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지만 강제적으로 데려오라는 지시는 아니었기에 그는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다가갔다.그들의 대화를 들은 온지유는 단호하게 말했다.“S국으로 가야 한다면 나도 같이 갈래. 난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아.”그녀는 이미 5년을 고통 속에 혼자 버텨왔고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그녀의 마음을 알았지만 S국의 상황이 심각해 온지유를 데려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지유야. 나에게도 우리 아들이 소중하지만 너와 함께 사랑스러운 딸도 낳고 싶어. 이번에 다녀오더라도 안전하게 돌아올 테니, 여기서 나를 기다려줘.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들을 잘 키워줘.”만약 브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Y국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빚을 갚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온지유에게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는 건 너무 가혹했다.그는 한때 무슨 일이 있어도 온지유와 함께할 것을 맹세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에게
그 속에는 나라를 향한 것도, 브람을 향한 것도 있었다.브람이 그의 친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갚아야 했다.온지유는 이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세상의 불공평함에 화가 났다. 거기다 여이현의 말을 들으니 더더욱 속이 무너져 내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이현 씨가 짊어진 책임이 크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당신 곁에 있고 싶어. 제발 나도 데려가 줘.”“절대 발목 잡는 일이 없도록 노력할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기자로서 보도를 낼게. 우리는 부부고 아이도 있잖아.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함께 해결해 나가자.”여이현은 온지유의 각오를 느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앞의 온지유의 얼굴도.여이현은 결국 마음이 녹아내렸다.그는 온지유를 끌어안고 가볍게 키스했다.“그래, 데려갈게. 내 곁에 있어 줘. 무슨 일이 일어나든 꼭 지켜줄 테니까.”자신의 목숨을 내주더라도 온지유만은 지키고 말 테다.S국으로 향하기로 결정했으니 신무열에게도 한마디 보고할 필요가 있었다.신무열은 온지유가 S국으로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이현 씨는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너는 따라갈 필요 없잖아.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별이는 어쩌려고.”여이현은 휴가를 즐기러 외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다. 지금의 S국은 바뀌기 전의 Y국과 같은 상황이었다. Y국에는 신무열이 온지유 손목의 푸른 구슬을 알아봐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S국에는 도와줄 사람은 누구도 없다.여이현의 친아버지인 브람조차 온지유를 좋게 보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만일 돌아가서 그들이 쳐둔 덫에 걸리기라도 하면?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여이현 혼자서라면 탈출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온지유를 데려가는 이상 그에게는 짐이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별이는 아버지가 봐주고 계시잖아요. 난... 이기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난 무슨 일이 있든 이현
하민의 설명을 듣고서야 양시은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됐다.“널 데려간 이모 어떻게 생겼어?”“제 이모랑 닮았어요.”양시은은 손을 멈췄다.‘양채은?’그 이름이 떠오르자 묘하게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제 겨우 가라앉았던 감정이 다시 요동치는 기분이었다.그때 나도현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됐어, 하민아 이리 와.”양시은의 표정이 안 좋아 보이자 하민은 잠깐 주춤했지만 결국 나도현 쪽으로 갔다.그는 하민을 달랜 뒤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우선 침착해. 하민이도 보고 있잖아.”마치 물속에 잠겨 있던 사람이 한순간에 공기를 마신 듯, 양시은은 큰 숨을 몇 번 들이쉬고는 괴로운 표정으로 돌아섰다.“나 먼저 방에 들어가서 좀 쉴게. 저녁은 이따가 먹어.”“엄마...”하민이 뒤따라가려고 했지만 나도현이 붙잡았다.양시은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밀폐된 공간 안에서 그녀는 문을 등지고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찬 기운이 옷을 뚫고 피부에 스며들어 저릿저릿했지만, 오히려 그런 감각이 지금은 감정적 혼란을 조금씩 잠재웠다.사실 그녀도 양채은이 살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심지어 사람을 보내 수소문도 해 봤다.하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그녀를 일부러 피하는 것처럼, 이번에도 하민을 보러 와 놓고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대체 왜 이럴까?’양시은은 속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렴풋이 이유도 알고 있었다.나도현 때문이었다. 양채은은 아직도 그를 마음에 두고 있기에 세상을 등진 것처럼 그녀를 피하는 것이었다.양시은은 방 안에서 한동안 진정하고 저녁 무렵 식사하러 나왔다.표정은 다시 전처럼 돌아갔다. 하지만 하민은 뭔가 묻고 싶은 게 있어도 나도현이 조금 내버려두라고 한 말이 떠올라 잠자코 있었다.나도현 또한 별말 없었다. 그는 하민을 재우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양채은은 이제 완전히 풀려난 건가?”전에는 어딘가에 붙잡혀 있어서 나타나지 못한다고
하민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나도현은 회의를 하다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뻔했다. 그가 전화를 받으며 자리를 뜨려 하자 주주들은 잔뜩 긴장해 일제히 그를 만류했다.“대표님, 어디 가시려는 겁니까?”“지금 가시면 안 됩니다. 이 프로젝트 아직 결론도 안 났고 방향성도 잡히지 않았는데 후에는 어떻게 합니까?”주주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쏟아 내자 나도현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그는 날 선 시선으로 그들을 훑으며 말했다.“더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나머지는 돌아와서 얘기하죠.”주주들이 입을 떼려고 했지만 나도현은 이미 나가 버렸고 그들은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나도현이 충동적으로 구는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말이다.한편, 적잖은 시간을 들여 양시은은 간신히 유치원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공 선생님이 안절부절못하며 달려왔고 양시은도 급히 물었다.“선생님, 하민이 아직 못 찾았나요?”공 선생님은 반가우면서도 초조한 기색이었다.“네,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하민이 어디로 간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이 말을 듣고 양시은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유치원 하교 시간은 원래도 유괴 위험이 큰 때다.‘사람들이 북적이는 틈을 타 인신매매범이라도 끼어 있다면...’그녀는 상상만 해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곧 이를 악물고 정신을 다잡았다.“CCTV 볼 수 있죠?”“참, CCTV를 안 봤네요! 지금 바로 가요.”공 선생님도 머리를 탁 치며 서둘러 모니터실로 향하려 했다. 이렇게 중요한 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말이다.마침 CCTV를 확인하러 가려던 찰나, 양시은이 갑자기 하민을 발견하고는 후다닥 달려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하민아, 어디 갔었어? 엄마가 놀랐잖아.”양시은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무서웠던 순간이었다. 만약 하민을 못 찾았다면 어쩔 뻔했는지 상상하기도 싫었다.하민도 깜짝 놀랐다. 그도 이제는 자신이 갑자기 사라진 탓에 양시은에게 커다란 불안을 안겨 줬음을 깨달았다.“미안해요, 엄마. 걱정
“엄마는 왜 아직 안 오지...”바로 그때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긴 머리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너 하민이니?”하민은 낯선 여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이모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확신이 서지는 않았다.“이모 낯이 익어요.”양채은은 자신의 허리에도 닿지 않는 꼬마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양시은이랑 그 사람 아이겠지.’“나는 네 엄마... 친구 정도 되는 사람이야.”“그럼 엄마가 왜 안 오는지 아세요?”“아마 오는 길일 거야. 나랑 잠깐 저쪽에 가서 놀면서 기다릴래?”하민은 잠시 망설였다.양시은이 늘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했지만, 상대는 아예 낯설다고만 하기에는 좀 묘했다.한참 고민하다가 그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근데 엄마가 오면 바로 갈 거예요.”하민이 어린애 같지 않은 말투를 쓰자 양채은은 은근히 웃음을 지었다.“알았어, 걱정하지 마.”그녀가 하민을 데려간 곳은 그리 멀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유치원 근처의 한 카페에 잠시 앉았다.하민은 커피라는 음료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양채은은 단호히 말렸다.“안 돼. 애들은 커피 마시면 뇌에 안 좋아. 대신 달콤한 걸로 먹어.”뇌에 안 좋다는 말에 하민은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곧장 커피에 대한 관심을 거둬들였다.‘난 바보 안 될 거야.’양채은은 자신에게는 라떼를, 하민에게는 따뜻한 우유와 티라미수를 주문해 줬다.하민은 디저트를 먹으며 퍽 즐거워 보였다.양채은은 창밖을 바라보며 눈가에 묘한 쓸쓸함이 깃들었다.사실 그녀도 이곳에 오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단지 충동적으로 조카를 한 번 보고 싶어져서 들른 것이었다.“이모.”“응, 왜?”하민이 그녀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양채은은 고개를 떨군 채 커다란 눈동자와 마주쳤다.솔직히 말해 하민은 나도현을 닮았다. 특히 저 맑은 눈동자가 똑같게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걸 보자 그녀는 잠시 넋이 나간
양시은은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예전처럼 단호하게 거부하지는 못했다.나도현이 말한 것처럼, 설령 두 사람의 마음이 멀어졌다고 해도 하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민을 아버지 없이 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마음이 멀어진 것이 아니라면...“일단 하민이 의견부터 물어볼래.”양시은은 나도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드디어 도망치지 않기로 한 듯했다.“이건 우리 둘만의 일이 아니고 하민이랑도 직결된 문제니까. 하민은 네가 누군지 모르잖아. 먼저 알려 주고 생각도 들어볼래.”나도현은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을 살짝 풀었다. 비록 그가 기대했던 최상의 답변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진전이었다. 최소한 양시은이 마음을 열 기색을 보였으니 말이다.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그래, 하민이한테 잘 얘기해 줘. 기다릴게.”지금 당장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 나도현 덕분에 양시은도 안도했다.나도현은 조용히 비서를 불러서 웨딩드레스 준비를 지시했다. 전에 양시은이 입어 봤던 드레스를 우선 사 두고 다른 것들도 마련하라고 했다.뜻밖의 업무를 받은 비서는 잠시 멍해졌다.‘우리 대표님 정말 결혼하시는 건가? 누가 우리 대표님 마음을 사로잡은 거지?’비서는 그런 상상을 하며 알 수 없는 경외심을 품었다.물론 양시은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나도현이 뒤에서 이런 식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자신의 말이 화근이 된 걸 후회했을지도 모른다.나도현은 양시은이 마음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다고 판단해 그녀가 조용히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양시은은 하루 종일 집 침대에만 파묻혀 지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그러다 문득 하민을 유치원에서 데려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큰일 났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그녀는 급히 차 키를 챙겨 나섰다. 하지만 도로가 꽉 막힌 탓에 차는 거북이 속도로 이동했다.속이 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공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했다.다행히 공 선생님은 그
[최주하: 왜 너라고는 안 하냐? 이 녀석이 맞을 짓을 하네.][지석훈: 나? 농담하지 마, 나 요즘 얼마나 바쁜지 안 보여? 여유가 있어야 여자도 만나고 하지.][배진호: 그만 싸워요. 둘이 동시에 연애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여이현: 나도 그렇게 생각해.]지석훈과 최주하는 말이 없어졌지만 여이현은 휴대폰을 쥐고 미소를 지었다.마침 온지유가 방에 들어오자, 여이현은 아이를 침대에 눕혀 두고 혼자 휴대폰을 보며 웃고 있었다.온지유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뭐가 그렇게 재밌어?”여이현은 온지유의 목소리를 듣자 무심코 휴대폰을 접으며 대답했다.“단톡방에서 석훈이랑 주하가 옥신각신하길래, 진호가 그 둘이 동시에 연애할 거라고 했어.”“틀린 말은 아니네요. 근데... 도현 씨는 아직도 결혼 발표 안 했어요?”온지유는 무심결에 물었다.그들은 원래 홍혜주의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홍혜주와 용경호는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을 건너뛰었다.지금은 누구의 결혼식이라도 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결혼 소식은 못 들었어. 근데 요즘 둘 다 실시간 검색어에 계속 오르는 거 보면 결혼 발표도 머지않은 것 같아.”온지유는 아이 돌보기에 전념하느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신경을 못 쓰고 있었다.사실 그녀도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지만 법로가 아직 항암 치료 중이라 몸이 성치 않아서 아이를 봐 줄 수 없었다.게다가 별이의 어린 시절을 놓친 것도 아쉬운데, 둘째 딸이 너무 어려서 조금 더 챙겨주고 싶었다.“그렇구나. 그럼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그래.”여이현은 온지유를 살포시 끌어안으며 물었다.“조만간 어디 놀러 가고 싶진 않아? 내가 데려가 줄게.”“됐어!”딸도 어리고 별이도 어렸다. 여행을 가겠다고 아이 둘을 데리고 왔다 갔다 하는 건 너무 불편했다.온지유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여이현은 그녀의 걱정을 읽고는 웃으며 말했다.“그거 뭐가 무서워. 사람을 좀 더 데려가면 되지
이렇게 되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나도현을 대단하게 생각했다.“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애인을 보호하다니 남자다워.”“진짜 좋은 남자네.”“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 아니야?”“거기 아가씨, 억지로 버텨 봐야 소용없어요. 안 될 사람은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아요. 계속 우기면 결국 본인만 다쳐요.”...이런 말 하나하나가 임다혜의 심장에 날카로운 비수처럼 꽂혔다.‘하, 우습네.’나도현은 양시은을 대변한 뒤 또 한 번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시은이한테 잘못이 있든 없든 여러분이 함부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에요. 가자.”나도현은 짧게 말하며 양시은을 데리고 인파에서 빠져나왔다.그렇다고 이곳에 양시은을 데려온 이유를 잊은 건 아니었다. 그는 그녀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 주고 직접 사 주고 싶었다.그러나 양시은도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무수히 생길 것이다. 나도현이 워낙 주목받는 위치에 있고 사실관계도 복잡하니 말이다.그녀는 얼른 드레스를 벗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현은 부드럽게 밀크티를 건네며 말했다.“이거 좀 마셔. 그리고 다른 드레스도 더 입어 봐. 여러 벌 입어 보는 게 좋잖아.”“하지만...”“시은아, 너도 나랑 함께하는 미래가 기대되면서 망설이는 거잖아. 내가 너라도 그럴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하겠지. 하지만 인생은 정말 짧아.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나중에 병원에 누워서 차라리 같이 살 걸 하면서 후회하고 싶어? 하민이를 생각해 봐. 어머니도 이제 우리를 반대하지 않아. 내가 너한테 진 빚을 갚게 해 줘. 그리고... 나중에 아이 하나만 더 낳아 주면 안 돼?”여이현이 온지유와 헤어졌다가 다시 합쳤을 때, 이미 꽤 큰 아이가 있는데도 결국 딸을 하나 더 낳았다.여이현은 완전히 딸바보가 돼서 SNS마다 딸 사진을 잔뜩 올리며 사는 중이다. 그걸 볼 때마다 나도현은 부럽다고 느꼈다.사실 양시은이라고 해서 나도현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게 늘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그래도 오늘은 그와
참으로 그럴듯한 말이었다.임다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양시은의 성격을 몰랐다면 정말 믿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내가 모든 걸 남자한테 걸었다고 하는데, 정작 양시은 씨는 어떤데요?”임다혜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양시은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여러분, 이 여자가 말이에요, 여동생 약혼자랑 몰래 사귀더니, 이젠 제 약혼자까지 빼앗으려 하고 있어요. 이런 여자는 다들 조심해야 해요!”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말에 이끌려 사방에서 몰려들었다.나도현은 키가 크고 한눈에 띄는 외모라 이내 누군가가 그를 알아봤다.“어? 저 사람 예전에 유명하던 변호사 아니야?”한마디가 떨어지자 삽시간에 웅성거림이 번졌다.“지금은 아니에요. 얼마 전부터 사업한다잖아요.”“분명히 약혼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새 갈아탄 모양이네.”“남자 하나를 두고 두 여자가 난리법석이라니, 이해가 안 되네. 그렇게까지 매달릴 일인가?”“나 변호사님, 둘 다 데리고 살면 어떤 범죄에 해당하나요?”“근데 이제는 변호사도 아니니 그냥 둘 다 데리고 살지 그래요?”...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말을 뱉었다.그러나 나도현으로서 직업이 어떻게 변하든 진심으로 신경 쓰는 건 오직 양시은뿐이었다.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양시은을 앞으로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임다혜를 포함한 구경꾼들을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다들 똑똑히 기억하세요. 저는 다른 사람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고 눈길도 안 가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까지나 양시은 하나뿐입니다.”그 말에 양시은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동시에 옛 기억이 떠올라 쓰린 기분도 들었다.예전에 나도현이 그녀와 만나려고 할 때도 비슷한 방식으로 공언했었다. 그때는 감동으로 순순히 넘어갔지만 이후 여러 일들이 벌어졌다.지금까지의 일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복잡했다. 나도현이 복수심을 품은 적도 있으나, 결국 잘해 준 적도 많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녀 역시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그를 잊지 못하지 않았을
임다혜는 매서운 눈빛으로 양시은을 노려봤다. 그러고는 바로 손을 뻗어 양시은의 웨딩드레스를 벗기려 했다.하지만 양시은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임다혜의 손목을 잡아 힘껏 밀쳐 내자, 임다혜는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며 자칫 넘어질 뻔했다.“양시은 씨, 지금 나한테 손을 댔어요?”임다혜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평소 나도현의 앞에서 조심스러워 보이던 양시은이, 이제는 나도현이 보호해 준다는 이유만으로 오만하게 군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양시은은 나도현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최정숙의 마음마저 돌려놓아 그녀가 설 자리가 없게 만들었다.임다혜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는 바로 다시 달려들었지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양시은이 몸을 살짝 비키자 그녀는 바닥에 세차게 넘어졌다.임다혜는 서경 그룹의 금지옥엽 같은 존재다.집안 배경도 양시은보다 훨씬 우위였고, 한때는 최정숙의 총애까지 받았으나 이제는 모든 걸 빼앗긴 느낌이었다. 게다가 양시은에게는 아들까지 있으니 그녀는 점점 더 멀어지는 꼴이었다.지금처럼 추한 모습으로 넘어져 있는 걸 다른 사람에게까지 들키자, 임다혜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양시은 씨,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죽여 버릴 거라고요!”대낮부터 이런 소리를 내뱉는 데도 양시은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임다혜와 치고받을 생각까지 했는데, 그 전에 나도현이 밀크티를 들고 나타났다.나도현은 성큼성큼 달려와 양시은의 앞을 막아서며 임다혜의 손목을 재빨리 붙잡았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임다혜는 뿌리치듯 내던져져 버렸다.나도현은 급히 돌아서서 양시은을 확인했다.“괜찮아? 다친 데 없어?”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이 광경을 지켜본 임다혜는 슬픔이 극에 달했다.“도현 씨, 저 기억 안 나요?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겉으로 나도현은 아버지의 계략에 넘어간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 모든 게 양시은 때문이었다.더구나 그는 원래부터 임다혜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지금은 더더
이런 분위기에서 양시은은 계속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직원의 도움으로 그녀는 금세 머메이드라인의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직원이 커튼을 열어 주는 순간 나도현의 눈이 반짝였다.원래도 양시은이 예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그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었다.“너 진짜 예쁘다.”“두 분은 정말 천생연분 같아요. 드레스가 맞춤 제작한 것처럼 잘 어울리시네요.”직원 역시 연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양시은 자신도 드레스가 괜찮아 보였다.‘정말로 도현 씨랑 결혼하게 된다면...’그렇게 생각하다가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손님, 다른 디자인 드레스도 한 번 입어 보실래요? 여러 벌 입어 보고 결정하는 게 좋거든요.”직원은 다른 스타일들을 권했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한 벌 입으나 여러 벌 입으나 마찬가지일 테고, 여러 스타일을 입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다음에는 무거운 장식이 많은 긴 트레인 드레스를 골랐는데, 갈아입기가 까다로워서 직원이 도와줘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그 틈에 나도현은 양시은에게 주려고 밀크티를 사러 잠깐 자리를 비웠다. 주말이라 사람이 많아서 예상보다 훨씬 더 길게 줄을 서야 했다.양시은이 어렵게 드레스를 다 입고 나왔을 때, 나도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마침 그때, 임다혜가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다. 그리고 정말로 양시은이라는 걸 확인했다.“이 드레스에는 세트 베일이 있어요. 스톤이 많이 박혀 있는데, 전부 손바느질로 하나하나 고정해 둔 거라 아주 튼튼해요. 그것도 한 번 착용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직원은 그들이 실제 구매력이 있다고 봐서 더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나도현이 아까부터 양시은을 바라보던 애정 어린 눈빛도 한몫했다.임다혜는 냉소적인 표정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