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사이에 신무열과 김혜연은 온지유 일행과 떨어지고 말았다.김혜연은 다시 그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이때 신무열이 말했다.“이제 어른이잖아. 핸드폰에 내비게이션도 있으니까 길 잃을 일 없어. 저쪽으로 가서 구경하자.”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무열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얼마 가지 않아 그들 앞에 꽃을 파는 어린 소녀가 나타났다. 일곱, 여덟 살쯤 되어 보였고, 야윈 몸에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언니!”소녀는 김혜연 앞으로 다가와 손에 든 꽃을 내밀며 말했다.“언니처럼 예쁜 사람은 꽃 한 다발 가져가야죠. 안 그래요?”김혜연이 대답하려는 찰나, 소녀가 말을 덧붙였다.“이 꽃들은 제가 아침에 직접 꺾은 거예요. 싸게 팔고 있어요. 하나 사시면 하나 더 드릴게요.”소녀는 정말 배가 고팠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꽃 한 다발도 팔지 못한 데다, 집에는 아픈 엄마와 어린 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돈을 벌지 못하면 가족들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김혜연은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여기 있는 꽃 전부 얼마야? 내가 다 살게.”같은 나라 사람끼리 서로 돕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 꽃을 사는 돈이 김혜연에게는 큰돈이 아니었지만, 소녀에게는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언니, 정말 다 사 주실 거예요?”소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김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얼른 가격 계산해 줘.”소녀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이제 돈이 생겼으니 음식을 살 수도 있고, 엄마 약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마음씨 좋은 언니를 만났으니 말이다.소녀는 서둘러 계산을 시작했고, 김혜연이 많이 사는 만큼 가격도 할인해 주었다.“이 돈 받아. 잘 챙겨서 남들 안 보이는 곳에 넣어 두렴.”김혜연은 원래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소녀에게 건넸다.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언니, 너무 많이 주셨어요. 제 꽃들이 그렇게 값어치 있는 것도
과거 Y국에 전쟁이 일어날 때 김혜연은 신무열을 따라다니며 최고 수준의 격투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불량배는 김혜연을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ㄴ오히려 그녀에게 제압당해 발밑에 깔리고 말았다.“돈 안 내놓을래? 지금 당장 경찰서로 끌고 갈 거야!”그 말에 불량배는 겁에 질려 서둘러 빌었다.“돈 돌려줄게요! 두 배로 줄 테니까, 제발 경찰서에만은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김혜연은 냉정하게 말했다.“돈부터 돌려주고 얘기해.”불량배는 어쩔 수 없이 소녀에게서 빼앗은 돈을 돌려주었고, 김혜연은 소녀의 몫만 가져와 소녀에게 돌려준 후, 한 손으로 불량배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경찰에 신고했다.‘잡초를 뿌리째 뽑지 않으면 다시 자라듯이... 참 운도 없어. 나를 만나다니.’경찰이 도착해 불량배를 데려가고 나자, 김혜연은 소녀에게 돈을 더 건네며 말했다.“언니가 도울 수 있는 게 이것뿐이야. 이 돈으로 잘 지내길 바랄게.”어린 나이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거리로 나온 소녀를 보니 김혜연은 전쟁 속에서 힘들어하던 아이들이 떠올랐다.‘전쟁이 없었더라면, 나라가 평화로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랬다면 신무열도 법로도 가정을 희생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감사합니다, 언니.”소녀는 김혜연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소녀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혜연은 소녀가 전화하며 Y국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같은 나라 사람이었구나!’같은 동포라는 생각에 김혜연은 더 정이 갔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저 멀리 가버렸다.이때 신무열이 다가와 말했다.“이곳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다음에는 이런 일에 휘말려 들지 마.”김혜연은 격투 실력이 뛰어났지만 이곳은 타지이고 그녀는 혼자였다. 만약 불량배들이 무리를 지어 있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김혜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그때는 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무열 씨도 제 옆에 있었잖아요.”그녀는 그저 소녀를 돕고 싶었을 뿐이었다. 신무열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
이런저런 생각만으로도 김혜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런 그녀를 보며 신무열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혼자서 그렇게 웃으면서.”신무열의 목소리에 김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이런 일들을 신무열에게 들키면 안 된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가요.”김혜연은 얼버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한편, 온지유는 김혜연과 신무열이 길을 잃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도 각자의 시간을 주고 싶어 여이현과 천천히 산책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그러다 멀리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걸 본 온지유는 문득 지선율이 떠올랐다.지선율은 나중에 유명 감독이 되었고, 장다희는 인기 여배우가 되었다. 한때는 자주 연락하던 친구들이지만 지금은 각자 바빠 거의 연락하지 못했다.신혼여행이 끝나면 해야 할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이때 여이현이 조용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연예계에 관심 있으면 내가...”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나이도 서른이 넘었는데 무슨 연예계야. 괜히 시간 낭비지.”“꼭 배우가 될 필요는 없잖아. 기획자나 감독, 아니면 작가도 될 수 있지. 하고 싶은 거 있어?”여이현의 말은 온지유에 대한 아낌없는 배려였다. 그녀가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러자 온지유는 말했다.“이제 다시 생각해 볼게.”여이현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이 가리킨 쪽을 보니 신무열과 김혜연이 나란히 팔짱을 끼고 얘기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두 사람 이제 잘 돼 가는 것 같네. 신무열은 자꾸 아닌 척하지만.”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좋은 일이 곧 생길 것 같아.”여이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좋은 일이지.”신무열은 온지유보다 몇 살 더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신무열 나이쯤 되면 이미 아이도 몇 명씩 있었지만 그는 이제야 겨우 여자 친구가 생긴 셈이었다.온지유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그런데 우리 정말 같이 다닐 거야?”여이현은 신무열과 김혜연에게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김혜연과 신무열은 순식간에 불량배들을 쓰러뜨리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주변에 사람들이 많자 김혜연은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이 사람, 얼마 전 제가 경찰에 넘긴 사람인데 한 시간도 안 돼 풀려나서 이렇게 사람들까지 모아 우리를 협박하네요. 혹시 조직폭력배 세력인가요?”이 말이 나오자마자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이 상황에 경찰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이 사람을 잡아 비난과 교육을 했고 심지어 반성문까지 받았는데도 다시 나와 이런 소란을 일으키네요.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불법 세력은 반드시 뿌리 뽑아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겠습니다!”신무열은 이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책임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확실히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그러자 김혜연은 살짝 미안해하며 말했다.“저는 그저 그 소녀가 안쓰러워 보여서 도왔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번져버렸네요. 무열 씨가 한 말 기억할게요.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그런 말 하지 마. 네가 안 나섰어도 내가 나섰을 거야.”신무열은 김혜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사실 그들은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었고 상황이 닥치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성격이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할게요.”김혜연은 다시 한번 약속했다.신무열은 김혜연의 이마를 톡 치며 말했다.“알았으니까 그만하고 더 볼 거 없으면 지유를 찾으러 가자.”“볼 게 있죠. 당연히 있죠!”김혜연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눈이 반짝였다.그러다 김혜연은 근처에 유명한 사진작가가 있다는 말에 가슴이 설렜다.신무열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말했다.“너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김혜연은 순간 당황하며 말했다.“다 들켰네요. 게다가 이미 커플 반지도 샀는데 이것도 괜찮지 않아요?”그녀는 신무열의 팔을 흔들며 부탁했다.신무열은 이런 부탁을 받아본 게 온지유가 어릴 때 투정 부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 당황했다. 김혜연이 워낙 그보다 어리다 보니 신무열은 차마 거절하기
그러나 신무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지금 말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아. 막상 그때가 되면 네가 후회할지도 몰라.”“나라가 없으면 가정도 없는 법이잖아요. 당신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당신의 책임감과 모든 걸 잘 알고 있어요. 무열 씨의 모든 걸 조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만약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벌을 받을 거예요!”김혜연은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손을 들며 맹세하려고 했다.신무열은 그녀의 손을 잡고 멈추게 하며 말했다.“그런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네 마음 믿어. 넌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야. 하지만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내 인생은 Y족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그렇다고 해서 평생 Y족만 위해 살 순 없잖아요. 법로도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당신도 혼자 외롭게 지낼 필요는 없어요. 정말이에요, 저...”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껴안으며 주변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뿐이었다.“알겠어. 조금 더 생각해 볼게.”“네.”신무열은 주저하고 있었다. 평소엔 중요한 일에 망설임 없이 나서지만, 감정 문제에선 오히려 더 망설였다. 그가 걱정하는 건 김혜연이 상처받는 것이었다.김혜연은 기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당신이 어떤 결정을 하든, 저는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신무열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고 싶었다. 그가 그녀 곁을 떠나더라도 언제든 그를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김혜연의 마음속엔 오직 신무열과의 평온한 삶뿐이었다.세 시간 후 두 사람은 돌아왔다. 오늘 일은 이미 뉴스에 보도된 상태였다.온지유는 두 사람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빠, 새언니! 오늘 두 분이 같이 싸우는 모습 정말 멋졌어요!”김혜연은 그 호칭에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Y족에서 그런 상황을 많이 겪다 보니, 우리도 기본적인 자기방어는 할 수 있어야죠. 그리고... 저와 무열 씨는 아직 결혼한 사이가 아니니까
조사를 하다 보니 결국 강서현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강서현은 결혼식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짓이 밝혀진 이상, 여이현은 강서현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강서현은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여이현과 온지유 앞에 끌려왔다. 강서현은 병상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는 온지유를 보며 이를 갈듯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쏘아보았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아직 포기하지 못했구나. 그래도 네가 여이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알겠어. 아니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지.”강서현은 여이현에게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결혼식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져도 마음을 접지 않았다. 이 정도면 진심이 아니면 뭐겠는가. 온지유는 여이현을 째려보며 말했다.여이현은 온지유가 강서현과 단둘이 있는 걸 불안해했다. 이때 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이미 온몸이 묶여 있는 상태고 당신과 부하들도 있는데, 쟤가 감히 날 어떻게 하겠어?”온지유는 여이현이 걱정했던 부분을 그대로 짚어서 말했다. 둘은 미리 얘기한 것도 아닌데, 단지 눈빛만으로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이는 강서현이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온지유를 보며 강서현은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깊은 원망을 느꼈다.만약 온지유와 여이현이 재회하지 않았더라면, 여이현은 S국에 남아 대통령 자리에 오르고 자신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아이 문제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여이현과 함께라면 자신의 아이도 생길 것이고 대통령이 된 후엔 별이도 그녀의 곁에서 자랄 수 있을 테니까.하지만 모든 계획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온지유였다!온지유가 여이현을 이렇게까지 사로잡은 힘이 무엇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그녀만 바라보고, 주변 사람들도 온지유를 사랑하고 보호해 주었다는 사실이 강서현에게는 더욱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었다.“나와 여이현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넌 왜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내가 죽으면 네게 무
강서현의 눈빛은 마치 “네가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우쭐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전혀 우쭐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저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강서현, 네가 모를 수도 있지만, 나보다 먼저 여이현 곁에 있었던 여자가 한 명 더 있어. 노승아라고, 나보다 먼저 나타났어.”노승아는 여이현에게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결국 여이현의 곁에 남은 사람은 온지유였다. 때로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강서현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강서현은 노승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온지유의 말을 듣고 자신과 여이현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처음 여이현을 봤을 때 그의 매력적인 외모에 이끌렸고, 그의 일 처리 능력과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도 반했다.항상 원하는 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그녀에게 여이현 앞에서의 좌절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을 얻고 싶다는 승부욕이 그녀를 계속 부추겼다.잠시 침묵하던 강서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온지유, 미안해.”마침내 그녀도 자신의 집착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온지유는 강서현이 더 이상 집착하지 않도록 일부러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강서현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게 되어 온지유로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사과는 받아줄게. 그렇지만 네가 내 아이섀도에 약을 넣은 일은 넘어갈 수 없어. 치료비는 네가 부담해. 그래야 두 번 다시 우리를 방해하지 않겠지.”강서현이 결혼식을 망친 데 이어 온지유에게 알레르기까지 일으켰으니,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앞으로 강서현이 여이현과 자신의 삶에 더는 개입하지 않는다면 온지유도 더 이상 벌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알았어.”강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그녀를 풀어주라고 말했다.하지만 여이현은 온지유의 말을 바로 따르지 않았다. 온지유를 해친 사람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강서현에게 온지유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었다.눈이 부어오르는 알레르기 반응으로 괴로워하는 강서현
브람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을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여이현은 이 모든 것이 음모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하게 강서현이 다시 나타나다니.이때 강서현은 급히 여이현에게 말했다.“이현 씨, 지금 S국 상황이 정말 좋지 않아요. 대통령님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이현 씨가 아내와 함께 있고 싶다는 건 알지만, 그때 대통령님 덕분에 당신이 지금 이곳에서 무사히 있는 거예요.”강서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여이현은 의식을 회복한 뒤 줄곧 S국의 일을 돕고 있었다.그는 스스로 올해까지만 자신에게 시간을 주기로 결심했지만 온지유가 자신을 알아보게 되면서 일들이 꼬이기 시작했다.“잠시만 기다려줘.”여이현은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고, 강서현은 조용히 기다렸다.온지유와 여이현은 누구보다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가 S국으로 돌아가려면 온지유와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대통령이 여이현을 데려오라고 명령했지만 강제적으로 데려오라는 지시는 아니었기에 그는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다가갔다.그들의 대화를 들은 온지유는 단호하게 말했다.“S국으로 가야 한다면 나도 같이 갈래. 난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아.”그녀는 이미 5년을 고통 속에 혼자 버텨왔고 다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그녀의 마음을 알았지만 S국의 상황이 심각해 온지유를 데려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지유야. 나에게도 우리 아들이 소중하지만 너와 함께 사랑스러운 딸도 낳고 싶어. 이번에 다녀오더라도 안전하게 돌아올 테니, 여기서 나를 기다려줘. 만약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아들을 잘 키워줘.”만약 브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Y국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빚을 갚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온지유에게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하는 건 너무 가혹했다.그는 한때 무슨 일이 있어도 온지유와 함께할 것을 맹세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에게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