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신무열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런데 김혜연이 그를 덩그러니 뒤에 두고 무례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할 줄은 몰랐다.휠체어에 앉아 무례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김혜연을 보니 신무열은 순간 마음이 저도 모르게 흔들려 성큼성큼 김혜연 앞으로 걸어갔다.방금까지 기고만장하게 헛소리를 해대던 사람들은 바로 표정을 바꾸며 입을 꾹 다물었다.신무열은 차갑게 픽 웃었다.“왜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지? 혹시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잊어버린 거라면 내가 다시 말해줘야 하나?”“도련님, 죄송합니다. 저, 저희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에요. 절대 그런 이상한 소문을 낼 생각은 없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도련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신무열은 현재 Y 국을 이끄는 사람이긴 했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도련님이라고 불렀다.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신무열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잘못을 알고 있다고 하니 그럼 꿇고 있어. 그리고 알아서 자기 뺨을 두 대씩 때려. 절대 오늘 일을 잊지 않게!”“네...”그들은 동시에 대답했다. 무릎을 꿇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신무열은 더는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김혜연을 태운 휠체어를 밀며 가버렸다.김혜연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믿어지지 않았다. 신무열이 자신을 위해 나서줄 거라는 것을. 꿈만 같았다.“다음부터 억지로 강한 척하지 마.”신무열은 그녀를 밀어주며 낮게 말했다.잠깐 한 눈판 사이에 김혜연이 사라져 그는 한참 찾았다. 그런데 그녀는 방금 그들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김혜연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 다소 불안감이 덮쳐왔기 때문이다. 원래 신무열 몰래 그들을 처리하려고 했었다.그런데 처리하기도 전에 신무열에게 들켰을 뿐 아니라 신무열이 대신 처리해 주었다.그녀는 자책했다.“억지로 강한 척 한 게 아니에요. 전 그냥 도련님을 도와드리고 싶었을
남성용은 여성용처럼 커다란 다이아몬가 없었지만 크기는 더 컸다.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작았지만 그마저도 예뻤다.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반지에 이니셜을 새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을 보았다.“제 이름을 새겨도 돼요? 한 달 후에 반지를 다시 저한테 주시면 돼요. 돈은... 돈은 제가 낼게요.”김혜연은 신무열이 거절할까 봐 두려웠다. 온갖 상상을 했지만 신무열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신무열은 비록 난처하지 않았지만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지갑을 연다면 그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새기고 싶으면 새겨. 돈은 내가 낼 테니까.”신무열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말을 마친 후 그는 몸을 돌려 직원에게 눈빛을 보냈다.“카드로 계산할 거고 포...”포장이라는 말을 전부 꺼내기 전에 김혜연이 급하게 말허리를 잘랐다.“포장은 해주지 않아도 돼요. 지금 바로 낄 거거든요.”김혜연은 기대하는 눈길로 반지를 보았다. 기쁘면서도 흥분되기도 했다.그녀가 손을 뻗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신무열은 거절하지 않았다. 반지를 낀 김혜연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쁜 건 둘째치고 이건... 커플 반지였으니까.비록 한 달뿐인 여자친구지만 신무열은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반씩 더치페이라도 할까요?”김혜연은 신무열의 돈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신무열이 담담하게 말했다.“난 절대 여자한테 결제하라고 하지 않아.”김혜연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떤 감정이든 일단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돈도 써 보아야 시작될 수 있다.“뭘 먹을래?”신무열은 휠체어를 밀면서 밖으로 나간 후 말했다. 그리곤 침묵했다. 김혜연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있다.김혜연은 곰곰이 생각했다.“그냥 집밥 같은 걸 먹고 싶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몸 상태가 좀 나아지면 아가씨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요.”“...그래, 나아지면 가.”온지유와 김혜연은 처음에는 싸웠지만 나중엔 화목하게 잘 지냈다.
여재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여이현을 보았다.여이현에게 여재호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잘해준 사람이었다.여씨 가문을 전부 그가 맡고 관리해도 여재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진숙이 그런 짓을 했을 때도 여재호는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하지만 지금은...“할아버지께서 드리신 건 저도 돌려받을 생각은 없습니다.”여이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으나 표정은 싸늘했다.그 말인즉슨 여호산이 여재호에게 준 물건은 하나도 가질 생각이 없으니 자신에게 준 것도 빼앗지 말라는 의미였다.여재호는 여이현이 이렇게 뻔뻔한 사람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지 바로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여이현, 벌써 잊은 건 아니지? 넌 우리 가문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게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었을 것 같아? 난 원래 네 체면을 생각해서 말을 아끼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그래서 제가 여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다니시려고요?”여이현은 차갑게 픽 웃으며 여재호의 말허리를 잘랐다.여재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당황한 기색은 역력했다. 여이현도 이젠 나이가 꽤나 있었다. 게다가 해외에서 죽을 뻔하지도 않았는가.이런 상황을 여이현은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너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분명하게 말하지. 네가 그동안 우리 가문에서 지내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행복을 누렸느냐. 여이현, 애초에 네 것이 아니었던 걸 뭐하러 굳이 들고 있는 거지?”여재호가 이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이미 여이현과 담판을 짓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었다.여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굳이 빼앗아 가시려는 거면 그럼 법적으로 하죠. 저도 흔쾌히 상대해 드릴 테니까요. 배 비서, 손님 나가신다고 하니 배웅하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가 성큼성큼 들어왔다.그러면서 여재호의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문 쪽을 가리켰다.“나가주시죠.”그는 먼저 예의를 갖추고 여재호를 쫓아냈다.여재호는 여이현의 수단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네 말은 나더러 손을 떼라는 거니? 여씨 가문 재산이 남한테 들어가는 꼴을 그냥 지켜만 보라고? 희영아, 그동안 많이 변했구나!”여재호는 바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여희영은 독신주의로 살아갈 뿐 아니라 지금은 생각마저 달라져 있었다.그 순간 여재호는 여희영의 생각을 바로 알아채게 되었다.여희영은 이미 여이현의 손에 들어갔으니 여이현이 혼자 알아서 회사를 잘 관리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이미 줘버린 것을 다시 돌려받을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하지만 여이현은 여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그래, 맞아. 난 변했어. 내가 지금 남을 도와주는 거로 보인다면 그럼 오늘 대화는 여기서 끝내는 거로 해.”여희영은 싸우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의미 없는 대화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지금 온지유와 여이현의 아들을 보러 가고 싶었다.두 사람의 아이가 두 사람의 훌륭한 유전자를 얼마나 물려받았는지 보고 싶었다.여재호는 여희영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원래부터 씩씩대면서 찾아왔지만 여희영의 태도를 보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여희영, 다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데 넌 밖으로 굽는구나! 여이현이 어떤 사람인지 나보다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넌 우리 집안 재산이 피도 이어지지 않은 남의 손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거냐? 그렇게도 이 오빠를 도와주기 싫다는 거냐?”여재호는 말을 하면 할수록 더 화가 치밀었다.심지어 성큼성큼 여희영에게 다가가기도 했다.여희영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까만 그녀의 두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내는 여재호와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확고했다.그녀는 여재호가 정말로 자신에게 손찌검할지 궁금했다.여재호는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여희영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오빠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여진 그룹이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전부 이현이가 혼자 관리해서 그런 거야. 그리고 여진을 이현이에게 넘긴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어. 오빠가 다시 돌려받으려고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오빠, 전에 여진을
만약 결혼식과 아이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온지유는 당연히 아이를 선택할 것이다.“지금 별이는...”“그동안 우리가 함께 해보지 못한 거 나랑 해보고 싶지 않은 거야?”여이현이 말허리를 자르며 물었다.못해 본 것을 한다니... 온지유는 여이현을 오랫동안 사랑했다. 그녀는 여이현보다 더 못해본 것을 그와 함께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과 달리 나이를 먹었다.별이도 학교 갈 나이가 되었다. 만약 못했던 결혼식을 한다면 사람들이 유난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다.“오늘 일단 혼인 신고하러 가자.”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다가가 손을 잡은 뒤 꽃다발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맛있는 것은 별이에게 건넸다.지금까지 별이도 여이현과 온지유의 사이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눈치 백단인 별이는 바로 음식을 들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거실엔 여이현과 온지유만 남았다.“혼인 신고하러 가는 거라면 오늘 가도 돼요. 하지만 결혼식은...”“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거야.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결혼식을 해. 그런데 우린 고작 마흔일 뿐인데 왜 결혼식을 다시 올리면 안 된다는 거야?”여이현은 말허리를 자르며 확고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는 법로 앞에서 약속했었고 브람의 앞에서도 확고한 모습을 보였다. 5년이나 떨어져 지내서야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다.온지유에게 그간 못 해준 것을 해주지 못한다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나는 두려워...”“대체 뭐가 두려운 거야? 결혼식은 우리 둘이서 하는 거야. 돈도 우리 돈을 쓰고 앞으로도 너랑 나랑 별이 셋이서 같이 살 건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뭐가 중요해. 지유야, 두려워할 거 없어.”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꼬옥 잡으며 확고하게 말했다.결혼식에 대해서 그는 이미 계획을 세워두었다.모든 사람에게 알릴 생각이다. 그와 온지유가 결혼한다고. 그리고 결혼식장에 온지유의 손을 꼭 잡고 등장한 후 둘이서 행복한 여생을 보낼 것이다.아니, 이젠 세 명이었다. 그는 온지유와 별이와 함께
아이가 먹고 있는 것은 베리나인의 디저트였다.여이현이 얼마나 아이를 아끼는지 알 수 있다.별이는 여희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비록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별이는 여희영을 빤히 보고 있었다.여희영은 젊어 보였을 뿐 아니라 이쁘기도 했다.특히 여희영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온화했다.“누... 구... 세... 요...”별이는 천천히 말했다.비록 그동안 별이의 곁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더는 혼자가 아니었지만 별이는 여전히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설령 말을 한다고 해도 아주 느리게 말했다.여희영은 바로 눈앞에 있는 아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눈치챘다. 말을 이상하리만큼 천천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나는 네 아빠의 고모야. 그러니까 별이는 나를 고모할머니라고 부르면 돼.”“고모할머니랑 같이 놀러갈까?”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보석 같은 두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리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전... 엄마... 를... 기... 다... 릴... 거... 예... 요...”현재 별이는 ‘엄마'라는 단어만 완벽하게 말할 수 있었다. 별이가 원치 않자 여희영도 강요하지 않았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여이현과 온지유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여이현과 온지유는 구청에 도착하자마자 강윤희와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강윤희는 두 사람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벙긋거렸다.“두, 두 사람...”심지어 강윤희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남몰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너무 아팠다.그녀는 환각이 아니라 정말로 두 눈으로 여이현과 온지유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이현 씨는 죽지 않았어. 그리고 나도 종군 기자는 그만뒀고.”온지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꼬리는 눈에 띄게 올라가 있었다.“정말 잘 됐어요! 그런데 여기는 왜...”여이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강태규와 강윤희는 아주 슬퍼했다. 하지만 더 안타까웠던 것은 온지유에게 아무 도움도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아이가 먹고 있는 것은 베리나인의 디저트였다.여이현이 얼마나 아이를 아끼는지 알 수 있다.별이는 여희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비록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별이는 여희영을 빤히 보고 있었다.여희영은 젊어 보였을 뿐 아니라 이쁘기도 했다.특히 여희영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온화했다.“누... 구... 세... 요...”별이는 천천히 말했다.비록 그동안 별이의 곁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더는 혼자가 아니었지만 별이는 여전히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설령 말을 한다고 해도 아주 느리게 말했다.여희영은 바로 눈앞에 있는 아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눈치챘다. 말을 이상하리만큼 천천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별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나는 네 아빠의 고모야. 그러니까 별이는 나를 고모할머니라고 부르면 돼.”“고모할머니랑 같이 놀러갈까?”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보석 같은 두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리더니 바로 고개를 저었다.“전... 엄마... 를... 기... 다... 릴... 거... 예... 요...”현재 별이는 ‘엄마'라는 단어만 완벽하게 말할 수 있었다. 별이가 원치 않자 여희영도 강요하지 않았다.그녀는 별이와 함께 여이현과 온지유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그러나 여이현과 온지유는 구청에 도착하자마자 강윤희와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강윤희는 두 사람을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벙긋거렸다.“두, 두 사람...”심지어 강윤희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남몰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너무 아팠다.그녀는 환각이 아니라 정말로 두 눈으로 여이현과 온지유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이현 씨는 죽지 않았어. 그리고 나도 종군 기자는 그만뒀고.”온지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꼬리는 눈에 띄게 올라가 있었다.“정말 잘 됐어요! 그런데 여기는 왜...”여이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강태규와 강윤희는 아주 슬퍼했다. 하지만 더 안타까웠던 것은 온지유에게 아무 도움도
만약 결혼식과 아이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온지유는 당연히 아이를 선택할 것이다.“지금 별이는...”“그동안 우리가 함께 해보지 못한 거 나랑 해보고 싶지 않은 거야?”여이현이 말허리를 자르며 물었다.못해 본 것을 한다니... 온지유는 여이현을 오랫동안 사랑했다. 그녀는 여이현보다 더 못해본 것을 그와 함께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과 달리 나이를 먹었다.별이도 학교 갈 나이가 되었다. 만약 못했던 결혼식을 한다면 사람들이 유난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다.“오늘 일단 혼인 신고하러 가자.”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다가가 손을 잡은 뒤 꽃다발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맛있는 것은 별이에게 건넸다.지금까지 별이도 여이현과 온지유의 사이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눈치 백단인 별이는 바로 음식을 들고 자리를 피해주었다. 거실엔 여이현과 온지유만 남았다.“혼인 신고하러 가는 거라면 오늘 가도 돼요. 하지만 결혼식은...”“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거야.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결혼식을 해. 그런데 우린 고작 마흔일 뿐인데 왜 결혼식을 다시 올리면 안 된다는 거야?”여이현은 말허리를 자르며 확고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그는 법로 앞에서 약속했었고 브람의 앞에서도 확고한 모습을 보였다. 5년이나 떨어져 지내서야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다.온지유에게 그간 못 해준 것을 해주지 못한다면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았다.“나는 두려워...”“대체 뭐가 두려운 거야? 결혼식은 우리 둘이서 하는 거야. 돈도 우리 돈을 쓰고 앞으로도 너랑 나랑 별이 셋이서 같이 살 건데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뭐가 중요해. 지유야, 두려워할 거 없어.”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꼬옥 잡으며 확고하게 말했다.결혼식에 대해서 그는 이미 계획을 세워두었다.모든 사람에게 알릴 생각이다. 그와 온지유가 결혼한다고. 그리고 결혼식장에 온지유의 손을 꼭 잡고 등장한 후 둘이서 행복한 여생을 보낼 것이다.아니, 이젠 세 명이었다. 그는 온지유와 별이와 함께
“그러니까 네 말은 나더러 손을 떼라는 거니? 여씨 가문 재산이 남한테 들어가는 꼴을 그냥 지켜만 보라고? 희영아, 그동안 많이 변했구나!”여재호는 바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여희영은 독신주의로 살아갈 뿐 아니라 지금은 생각마저 달라져 있었다.그 순간 여재호는 여희영의 생각을 바로 알아채게 되었다.여희영은 이미 여이현의 손에 들어갔으니 여이현이 혼자 알아서 회사를 잘 관리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이미 줘버린 것을 다시 돌려받을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하지만 여이현은 여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그래, 맞아. 난 변했어. 내가 지금 남을 도와주는 거로 보인다면 그럼 오늘 대화는 여기서 끝내는 거로 해.”여희영은 싸우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의미 없는 대화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지금 온지유와 여이현의 아들을 보러 가고 싶었다.두 사람의 아이가 두 사람의 훌륭한 유전자를 얼마나 물려받았는지 보고 싶었다.여재호는 여희영의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원래부터 씩씩대면서 찾아왔지만 여희영의 태도를 보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여희영, 다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데 넌 밖으로 굽는구나! 여이현이 어떤 사람인지 나보다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넌 우리 집안 재산이 피도 이어지지 않은 남의 손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거냐? 그렇게도 이 오빠를 도와주기 싫다는 거냐?”여재호는 말을 하면 할수록 더 화가 치밀었다.심지어 성큼성큼 여희영에게 다가가기도 했다.여희영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까만 그녀의 두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내는 여재호와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은 확고했다.그녀는 여재호가 정말로 자신에게 손찌검할지 궁금했다.여재호는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여희영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오빠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여진 그룹이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전부 이현이가 혼자 관리해서 그런 거야. 그리고 여진을 이현이에게 넘긴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어. 오빠가 다시 돌려받으려고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오빠, 전에 여진을
여재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눈앞에 있는 여이현을 보았다.여이현에게 여재호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잘해준 사람이었다.여씨 가문을 전부 그가 맡고 관리해도 여재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진숙이 그런 짓을 했을 때도 여재호는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하지만 지금은...“할아버지께서 드리신 건 저도 돌려받을 생각은 없습니다.”여이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으나 표정은 싸늘했다.그 말인즉슨 여호산이 여재호에게 준 물건은 하나도 가질 생각이 없으니 자신에게 준 것도 빼앗지 말라는 의미였다.여재호는 여이현이 이렇게 뻔뻔한 사람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지 바로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여이현, 벌써 잊은 건 아니지? 넌 우리 가문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렇게 멀쩡히 서 있을 수 있었을 것 같아? 난 원래 네 체면을 생각해서 말을 아끼려고 했어. 그런데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그래서 제가 여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다니시려고요?”여이현은 차갑게 픽 웃으며 여재호의 말허리를 잘랐다.여재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당황한 기색은 역력했다. 여이현도 이젠 나이가 꽤나 있었다. 게다가 해외에서 죽을 뻔하지도 않았는가.이런 상황을 여이현은 상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너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분명하게 말하지. 네가 그동안 우리 가문에서 지내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행복을 누렸느냐. 여이현, 애초에 네 것이 아니었던 걸 뭐하러 굳이 들고 있는 거지?”여재호가 이렇게까지 말했다는 건 이미 여이현과 담판을 짓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었다.여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굳이 빼앗아 가시려는 거면 그럼 법적으로 하죠. 저도 흔쾌히 상대해 드릴 테니까요. 배 비서, 손님 나가신다고 하니 배웅하세요!”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가 성큼성큼 들어왔다.그러면서 여재호의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문 쪽을 가리켰다.“나가주시죠.”그는 먼저 예의를 갖추고 여재호를 쫓아냈다.여재호는 여이현의 수단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성용은 여성용처럼 커다란 다이아몬가 없었지만 크기는 더 컸다.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작았지만 그마저도 예뻤다.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반지에 이니셜을 새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을 보았다.“제 이름을 새겨도 돼요? 한 달 후에 반지를 다시 저한테 주시면 돼요. 돈은... 돈은 제가 낼게요.”김혜연은 신무열이 거절할까 봐 두려웠다. 온갖 상상을 했지만 신무열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신무열은 비록 난처하지 않았지만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지갑을 연다면 그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새기고 싶으면 새겨. 돈은 내가 낼 테니까.”신무열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말을 마친 후 그는 몸을 돌려 직원에게 눈빛을 보냈다.“카드로 계산할 거고 포...”포장이라는 말을 전부 꺼내기 전에 김혜연이 급하게 말허리를 잘랐다.“포장은 해주지 않아도 돼요. 지금 바로 낄 거거든요.”김혜연은 기대하는 눈길로 반지를 보았다. 기쁘면서도 흥분되기도 했다.그녀가 손을 뻗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모른다.신무열은 거절하지 않았다. 반지를 낀 김혜연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쁜 건 둘째치고 이건... 커플 반지였으니까.비록 한 달뿐인 여자친구지만 신무열은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반씩 더치페이라도 할까요?”김혜연은 신무열의 돈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신무열이 담담하게 말했다.“난 절대 여자한테 결제하라고 하지 않아.”김혜연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떤 감정이든 일단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돈도 써 보아야 시작될 수 있다.“뭘 먹을래?”신무열은 휠체어를 밀면서 밖으로 나간 후 말했다. 그리곤 침묵했다. 김혜연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있다.김혜연은 곰곰이 생각했다.“그냥 집밥 같은 걸 먹고 싶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몸 상태가 좀 나아지면 아가씨한테 가봐야 할 것 같아요.”“...그래, 나아지면 가.”온지유와 김혜연은 처음에는 싸웠지만 나중엔 화목하게 잘 지냈다.
다만 신무열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런데 김혜연이 그를 덩그러니 뒤에 두고 무례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할 줄은 몰랐다.휠체어에 앉아 무례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김혜연을 보니 신무열은 순간 마음이 저도 모르게 흔들려 성큼성큼 김혜연 앞으로 걸어갔다.방금까지 기고만장하게 헛소리를 해대던 사람들은 바로 표정을 바꾸며 입을 꾹 다물었다.신무열은 차갑게 픽 웃었다.“왜 지금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지? 혹시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잊어버린 거라면 내가 다시 말해줘야 하나?”“도련님, 죄송합니다. 저, 저희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에요. 절대 그런 이상한 소문을 낼 생각은 없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도련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눈앞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신무열은 현재 Y 국을 이끄는 사람이긴 했으나 사람들은 여전히 도련님이라고 불렀다.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신무열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잘못을 알고 있다고 하니 그럼 꿇고 있어. 그리고 알아서 자기 뺨을 두 대씩 때려. 절대 오늘 일을 잊지 않게!”“네...”그들은 동시에 대답했다. 무릎을 꿇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신무열은 더는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김혜연을 태운 휠체어를 밀며 가버렸다.김혜연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믿어지지 않았다. 신무열이 자신을 위해 나서줄 거라는 것을. 꿈만 같았다.“다음부터 억지로 강한 척하지 마.”신무열은 그녀를 밀어주며 낮게 말했다.잠깐 한 눈판 사이에 김혜연이 사라져 그는 한참 찾았다. 그런데 그녀는 방금 그들과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김혜연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 다소 불안감이 덮쳐왔기 때문이다. 원래 신무열 몰래 그들을 처리하려고 했었다.그런데 처리하기도 전에 신무열에게 들켰을 뿐 아니라 신무열이 대신 처리해 주었다.그녀는 자책했다.“억지로 강한 척 한 게 아니에요. 전 그냥 도련님을 도와드리고 싶었을
그녀의 몸 상태를 걱정하고 있다는 건 신무열의 마음속에 그녀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였다.“그냥 생각만 해본 거예요. 도련님이 허락해주지 않으시니 당연히 가지 않을 거예요. 전 도련님의 곁에 꼭 붙어 있을 거거든요.”김혜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웃고 있었다.신무열은 입술을 짓이겼다. 말을 하려던 순간 김혜연이 고개를 들며 기대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그럼 나가서 뭘 좀 사도 돼요? 반지 같은 거 말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제 돈으로 살 거예요.”신무열이 허락만 해준다면 그녀는 얼마가 되든지 전부 살 수 있었다.신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상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어느 남자가 여자의 돈을 쓰고 다녀?”“하지만 저와 도련님은 다르잖아요. 도련님만 허락해주신다면... 어쨌든 전 기념으로 뭔가를 사고 싶어요. 누가 돈을 쓰든 똑같다고 생각해요.”김혜연은 사실 알고 있었다. 신무열이 절대 그녀를 위해 돈을 쓰지 않을 것을. 신무열이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그녀도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그런 건 생각하지 마.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데려다줄 거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다 줄게. 그러니 그 생각은 접어.”신무열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어차피 넌 지금 음식도 마음대로 먹지 못해.”“네.”신무열이 휠체어를 밀고 밖으로 나가자 바로 시선이 쏠렸다.그의 곁에는 다른 이성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김혜연이 있었다. 신무열을 향한 김혜연을 마음은 너무 뻔히 보였기에 모두가 알고 있었다.그들은 부러움의 눈길로 보았다.간혹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다.부러워하는 사람들은 김혜연이 끈질기게 신무열의 곁에 남아 드디어 신무열의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해 부러워했다.질투하는 사람들은 김혜연이 신무열에게 한참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김혜연 같은 사람이 대체 어떻게 도련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어? 다들 잊지 마. 도련님의
온지유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법로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법로는 전과 같은 말을 했다.“내가 주는 물건은 사양하지 말고 다 받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 다른 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곁에 있어 주고 싶어도, 사랑을 듬뿍 쏟아주고 싶어도 떨어져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 설령 온지유가 받아들인다고 해도 평범한 부녀처럼 지내기는 어려웠다.그러니 가진 재산이라도 온지유에게 주는 것이 나았다. 온지유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전부 사다 줄 생각이다.“알겠어요. 전 아버지를 탓하지 않아요.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가끔 아버지 뵈러 올게요. 물론 아버지도 경성으로 오셔도 돼요.”온지유는 법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그저 그녀가 처음 법로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이 컸을 뿐이다. 그때의 법로는 그녀에게 살인자와 같은 이미지였으니까.하지만 이 일은 전부 지나간 일이다.법로는 순간 기대하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정말이냐?”그의 유일한 소망은 온지유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다. 일반적인 아버지와 딸처럼.온지유가 그가 경성으로 오는 것을 허락만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그는 온지유의 곁에 머물면서 별이를 대신 봐줄 수 있다.심지어 틀어진 온지유와의 부녀 사이를 회복할 수 있다.“정말이에요. 시간이 되신다면 언제든 경성으로 놀러 오셔도 돼요. 아버지는 제 아버지일 뿐 아니라 별이 외할아버지니까요.”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법로의 변화를 그녀도 보았다.“그래, 바쁜 일만 다 하고 갈게. 비행기 떠나기 전에 나한테 연락해.”“네.”법로는 온지유를 안아주었다.뒤이어 그는 직접 온지유와 여이현, 그리고 별이를 직접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한편 김혜연은 특효약이 없다는 소식을 들은 후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몸이 다 뻐근할 정도로 말이다.막 침대에서 내려오던 순간 신무열이 그녀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와 내려오려는 그녀를 말렸다.“김혜연, 미쳤
신무열은 그녀에게 시간을 주었다. 굳이 곁에 남아 감시하지 않았다.법로는 김혜연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김혜연은 입술을 달싹이며 나직하게 말했다.“전 얼른 건강해지고 싶어요. 법로님, 효과 아주 빠른 약은 없을까요?”근육이나 뼈를 다치면 백일은 지나야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백일 내내 침대에만 누워있다면 어렵게 얻은 한 달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그녀는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생각 없었다.“그렇게 효과 좋은 약은 없단다. 총알이 네 가슴을 뚫었어. 여자의 몸은 남자와 달리 원래부터 약해. 그러니까 넌 더 푹 쉬어야 해. 어차피 지금 반드시 해야 할 임무도 없잖아.”법로는 뒷짐을 진 채로 담담하게 말해주었다.김혜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에게 지금 당장 해야 할 임무가 왜 없겠는가.신무열이 바로 그녀의 임무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신무열의 곁에 남게 되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단 말인가.그녀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조금 전 신무열의 표정을 떠올리니 분명 자신을 오해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더는 법로에게 신무열을 설득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을 것이다.“전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해요.”설령 이 일을 마치고 바로 죽게 된다고 해도 그녀는 상관없었다.그래야만 죽을 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법로는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네가 말한 중요한 일이 무열이랑 감정을 만들어가는 일이냐?”김혜연은 아주 크게 다쳤고 신무열이 그녀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도 김혜연이 특효약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 중요한 일이 신무열일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굳이 숨기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네가 무열이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마. 율이도 널 도와줄 거야.”법로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들은 김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너무도 현실적이지 않아 몰래 손톱으로 손바닥을 꽉 찔렀다. 너무도 아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