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열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김혜연을 보았다.김혜연은 확고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김혜연에게 이런 음모를 꾸밀 담은 없었다.더구나 그는 이미 요한을 시켜 문제를 만든 사람들을 조사해 보았다. 그저 불만이 많아 생긴 문제였다.그는 입술을 틀어 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믿어주지. 하지만 난 너한테 아무 마음도 없어.”“여전히 같은 말을 하시네요. 도련님, 방금 요구를 말하라고 하셨잖아요. 전 이미 요구를 말했어요.”김혜연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지금 진심이고 진지했다.한 달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다만 신무열이 말을 하기도 전에 김혜연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련님, 전 도련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어요. 그런데 고작 이런 요구도 들어주지 못하시는 거예요?”“나한테 그딴 말을 하면서 자극할 것 없어. 어차피 이 일은... 안 돼.”한 달 동안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Y 국의 모든 사람들이 두 사람 사이를 알게 된다면? 나중에 기간이 끝나고 헤어질 때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설명해야겠는가.그러니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김혜연은 가슴이 미어졌다.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도련님, 정말로 매정하게 거절하실 거예요?”그녀는 목숨까지 내던졌으나 신무열은 여전히 그녀에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신무열이 말했다.“한 달 뒤에 그 연극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이 너랑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김혜연은 순간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신무열의 생각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김혜연은 입술을 틀어 물더니 결정을 내렸다.“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 것이라면 한 달 뒤에 제가 나서서 설명할게요. 제가 바람을 피웠다고요. 그러면 되는 건가요?”김혜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여전히 기대하는 눈빛이었다.다만 그녀의 눈빛은 조금 전보다 더 확고했다.신무열은 변치 않는 그녀의 마음에 조금 흔들리기도 했다.다소 의아했다.“김혜연, 미쳤어?”그녀가
유능한 도우미... 김혜연에게 감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김혜연은 정말이지 진심으로 신무열을 사랑했다. 그러니 신무열을 위해 이런 말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신무열은 이런 이유로 그동안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만약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면,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녀를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그러니 더욱 장난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김혜연, 정신 좀 차려. 네 인생은 네 거야. 다른 사람을 위해 살면 안 된다고. 설령 내가 없다고 해도 넌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아직은 김혜연의 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았다. 김혜연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김혜연은 목구멍에 무언가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지금 이 순간에도 신무열은 여전히 그녀를 설득하면서 정신 차리라고 했다.“전 그렇게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 정도까지 말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도련님이 절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요. 한 달만, 딱 한 달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남자친구 역할을 해달라고요. 아니면 제가 도련님 앞에서 죽기를 바라시는 거예요?”이성을 잃은 김혜연은 히스테리를 부렸다.신무열은 그녀에게 정신 차리라고 했지만 그녀는 신무열을 사랑했다. 신무열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설령 그가 그녀를 미친 사람 취급해도 그를 사랑했다.신무열이 동의만 한다면 나중에 죽어줄 수도 있다.그런데 신무열이 어떻게 그녀에게 죽으라고 하겠는가. 그녀가 신무열을 위해 대신 총에 맞을 때부터 그녀는 신무열의 결심을 눈치채게 되었다.“죽지 마. 그 한 달이... 네 유일한 요구라면 그럼 한 달만 해주지.”“정말요?”김혜연은 눈을 반짝였다. 믿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있는 힘껏 신무열의 손을 잡았다. 마치 유일한 동아줄을 잡는 것처럼.신무열이 동의만 한다면 그녀에게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할 희망이 있다면 다시 진심
“그렇긴 하지만 나는 김혜연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고. 김혜연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난 먼저 가볼게.”신무열은 느릿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그는 더는 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애초에 김혜연에게 다른 마음을 느껴본 적 없었으나 자꾸 주변에서 말하니 점점 피곤해졌다.“봐요, 지금도 혜연 씨가 기다린다고 가겠다고 했잖아요. 이래도 아무 감정도 없어요? 오빠, 여자는 말과 속마음이 다르다고 하지만 남자도 똑같아요.”온지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장난스럽게 말했다.“별이는 괜찮아? 별이를 내버려 두고 한가하게 나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거야?”신무열은 일부러 정색하며 말했다.온지유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아직 안 나았어요. 별이도 신경 쓰고 오빠한테도 신경 쓸 수 있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난 됐고, 별이한테나 신경 써.”말을 마친 신무열은 죽그릇을 들고 걸음을 옮겼다.온지유는 그런 신무열의 뒷모습을 빤히 보며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이런 농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미 김혜연에게 마음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다만 고집이 센 신무열이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신무열은 죽그릇을 들고 김혜연에게 다가갔다.김혜연은 신무열이 들고 있는 죽그릇을 보았다. 아무리 평범한 흰 쌀죽이라고 해도 김혜연에겐 마음마저 녹일 수 있는 따듯한 죽이었다.“절 위해 만드신 거예요?”김혜연은 고개를 들어 신무열을 보았다. 반짝거리는 두 눈은 마치 밤하늘에 뜬 별 같았다.“그래. 난 이런 흰 쌀죽밖에 할 줄 몰라. 다른 건 못해.”신무열은 침대 테이블을 당기며 죽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김혜연을 일으켜 주었다.겉보기엔 평범한 쌀죽이었지만 김혜연은 이상하게도 달고 맛있게 느껴졌다.왜냐면... 이것은 신무열이 그녀를 위해 직접 만든 것이었으니까 신무열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김혜연은 입술을 틀어 물며 나직하게 말했다.“도련님이 못하는 건 제가 할 줄 알아요. 앞으로도 제가 도련님께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릴게요. 도련님은 바
신무열은 그녀에게 시간을 주었다. 굳이 곁에 남아 감시하지 않았다.법로는 김혜연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김혜연은 입술을 달싹이며 나직하게 말했다.“전 얼른 건강해지고 싶어요. 법로님, 효과 아주 빠른 약은 없을까요?”근육이나 뼈를 다치면 백일은 지나야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백일 내내 침대에만 누워있다면 어렵게 얻은 한 달의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그녀는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생각 없었다.“그렇게 효과 좋은 약은 없단다. 총알이 네 가슴을 뚫었어. 여자의 몸은 남자와 달리 원래부터 약해. 그러니까 넌 더 푹 쉬어야 해. 어차피 지금 반드시 해야 할 임무도 없잖아.”법로는 뒷짐을 진 채로 담담하게 말해주었다.김혜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에게 지금 당장 해야 할 임무가 왜 없겠는가.신무열이 바로 그녀의 임무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신무열의 곁에 남게 되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단 말인가.그녀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조금 전 신무열의 표정을 떠올리니 분명 자신을 오해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더는 법로에게 신무열을 설득해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을 것이다.“전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해요.”설령 이 일을 마치고 바로 죽게 된다고 해도 그녀는 상관없었다.그래야만 죽을 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법로는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보았다.“네가 말한 중요한 일이 무열이랑 감정을 만들어가는 일이냐?”김혜연은 아주 크게 다쳤고 신무열이 그녀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도 김혜연이 특효약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그 중요한 일이 신무열일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굳이 숨기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네가 무열이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마. 율이도 널 도와줄 거야.”법로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들은 김혜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너무도 현실적이지 않아 몰래 손톱으로 손바닥을 꽉 찔렀다. 너무도 아팠
온지유가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법로는 더 이상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법로는 전과 같은 말을 했다.“내가 주는 물건은 사양하지 말고 다 받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 다른 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곁에 있어 주고 싶어도, 사랑을 듬뿍 쏟아주고 싶어도 떨어져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 설령 온지유가 받아들인다고 해도 평범한 부녀처럼 지내기는 어려웠다.그러니 가진 재산이라도 온지유에게 주는 것이 나았다. 온지유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전부 사다 줄 생각이다.“알겠어요. 전 아버지를 탓하지 않아요.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가끔 아버지 뵈러 올게요. 물론 아버지도 경성으로 오셔도 돼요.”온지유는 법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그저 그녀가 처음 법로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이 컸을 뿐이다. 그때의 법로는 그녀에게 살인자와 같은 이미지였으니까.하지만 이 일은 전부 지나간 일이다.법로는 순간 기대하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정말이냐?”그의 유일한 소망은 온지유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다. 일반적인 아버지와 딸처럼.온지유가 그가 경성으로 오는 것을 허락만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그는 온지유의 곁에 머물면서 별이를 대신 봐줄 수 있다.심지어 틀어진 온지유와의 부녀 사이를 회복할 수 있다.“정말이에요. 시간이 되신다면 언제든 경성으로 놀러 오셔도 돼요. 아버지는 제 아버지일 뿐 아니라 별이 외할아버지니까요.”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법로의 변화를 그녀도 보았다.“그래, 바쁜 일만 다 하고 갈게. 비행기 떠나기 전에 나한테 연락해.”“네.”법로는 온지유를 안아주었다.뒤이어 그는 직접 온지유와 여이현, 그리고 별이를 직접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한편 김혜연은 특효약이 없다는 소식을 들은 후 침대에만 누워있었다. 몸이 다 뻐근할 정도로 말이다.막 침대에서 내려오던 순간 신무열이 그녀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걸어와 내려오려는 그녀를 말렸다.“김혜연, 미쳤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