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석은 길게 심호흡한 뒤, 보고를 이어갔다.“대표님, 범인은 범행을 하기 전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어요. 하필 그 건설현장에 투자한 기업이 성안그룹이었죠. 저는 성안그룹에서 프로젝트를 포기하기 싫어서 일부러 스파이를 파견했다고 생각합니다.범인은 전과자예요. 가족도 없고 계좌도 조사해 봤는데 깨끗했어요.”그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였다.금전적인 거래가 없으니 성안그룹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증명할 수 없었다.박수혁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잠시 침묵이 흐르고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이한석이 가서 문을 열었다.“남유주 씨, 수고 많으셨어요.”남유주가 웃으며 말했다.“수고는요. 어쨌든 제 임무도 완성했으니까 이제 그만 가볼게요. 가게를 비운지도 오래됐고….”이한석이 그녀를 바래다주려던 순간, 뒤에서 듣고 있던 박수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들어와요.”이한석이 자리를 비키자 남유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갔다.“박 대표님, 말투를 들어보니 화가 많이 나 있으시네요. 이제 제가 할 일도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박수혁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더니 말했다.“할 일이 끝났다고요? 일은 제대로 한 게 없으면서 양심은 있어요?”“뭐라고요?”남유주가 물었다.“제가 뭘 제대로 안 했다는 거죠? 팔다리 멀쩡하고 열이 나서 대뇌가 손상된 것도 아니고.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요?”이한석도 상사가 이번에는 좀 너무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남유주는 팔짱을 끼고 불만을 터뜨렸다.“이럴 줄 알았으면 깨어나지 말라고 저주를 퍼부을 걸 그랬어요. 어차피 당신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요!”이한석은 빨리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유주 씨, 대표님이랑 싸울 때는 내가 없는 장소에서 싸우면 안 될까요? 나도 죽겠다고요!’박수혁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몸에서 똥내가 나는데 이게 환자를 대하는 간병인의 태도예요?”남유주가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흘기며 말했다.“내가 왜 그쪽 간병인이에요? 몸
“내가 침대를 내릴 수 있을 때까지만요.”박수혁은 가소롭다는 듯이 그녀를 힐끗 보고 말을 이었다.“나도 남유주 씨가 내 몸 만지는 거 기분 나쁘거든요?”남유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간병인?20억을 위해서라면 간병인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가슴에서 활활 불타던 분노도 말끔히 사라졌다.박수혁은 생각했다.‘역시 돈으로 해결 못할 일은 없어! 정말 현실적인 여자라니까!’“이제 좀 씻고 싶으니까 목욕물 좀 받아놔요.”남유주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하지만 저는 여자잖아요.”이건 좀 아니지 않나?박수혁이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나 반신불수 아니에요! 휠체어만 가져다주면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요!”“아… 네!”남유주는 갑자기 박수혁의 벗은 몸을 상상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어쨌거나 욕실 청소를 마친 남유주는 목욕물을 받았다.그리고 상처 부위를 방수천으로 꼼꼼히 감아주었다.물론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보면 상처에 물 좀 들어가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다.몸에서 똥 냄새가 나는 박수혁이라니!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초라한 모습에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하지만 바로 싸늘한 시선이 날아와서 꽂혔다.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뭐 더 필요하신 거 있나요?”박수혁이 말했다.“이제 나가요.”“등이라도 좀 밀어드릴까요?”그녀는 진심을 담아 물었다.박수혁은 그렇게 해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힐끗 쏘아보았다. 어쩜 저렇게 변태 같은 말만 골라서 할까?“여자가 좀 얌전히 있을 수는 없어요? 왜 사람이 이렇게 헤퍼요?”남유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열심히 일해주겠다는데 이것도 불만이야?설마 또 오해한 건가?“제가 잘못했네요. 여자로서 체통을 지켜야 했는데. 그럼 깨끗이 씻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시고요!”말을 마친 그녀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물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던졌다.잠시 후
그의 한마디 말은 남유주의 마음을 차갑게 식게 했다.'아, 박수혁이었지.'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냥 해본 말이에요. 내가 설마 그렇게 부도덕한 일을 하겠어요?"박수혁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결국 남유주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오후 내내, 남유주는 박수혁을 도와 컴퓨터, 파일, 화상 회의를 할 준비를 했다.박수혁은 그녀를 다방면으로 활용했다. 심지어 회의할 때조차 박수혁의 곁에 서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고, 언제든지 그에게 마실 물을 건넬 준비를 해야 했다.박수혁의 입맛이 워낙 까다로웠던 탓에, 그녀는 각종 신선한 과일과 간식도 준비했다.남유주는 화가 났지만 애써 참았다. 박수혁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봐서는 휴식 시간을 따로 보내는 것 같지 않았기에 이틀 동안만 꾹 참기로 했다.한편, 박수혁은 굳은 얼굴로 화상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남유주는 그의 곁에 서서 그에게 포도를 건네주었다.하지만 박수혁은 전혀 포도를 건네받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남유주는 어쩔 수 없이 박수혁의 입에 포도를 한 움큼 집어넣었다. 당황한 박수혁이 사레들어 기침하기 시작하자 회의하던 상대편 사람들은 말을 멈추고 상황을 파악했다.기침이 멎은 박수혁은 남유주를 힐끗 째려본 뒤 다시 태연하게 말했다."계속하세요."그들이 회의하는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는 남유주는 조금 지루했다.결국, 남유주는 박수혁에게 간식을 건네는 대신, 자기 입에 간식을 넣기 시작했다.박수혁은 자신을 챙기지 않는 남유주를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회의가 끝나자마자 박수혁은 기침을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유주 씨, 맛있게 잘 먹었어요?""네, 엄청 맛있더라고요!""의사가 분명 내가 체력 회복이 필요하다고 했을 텐데, 그걸 유주 씨가 다 먹었네요?"남유주는 입술을 오므렸다."다시 뱉어줄까요?"박수혁은 말없이 남유주를 바라보았다.남유주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농담이에요! 대표님이 회의 중이셨잖아요. 포도를 씻어서 3
"주희철이요."남유주는 눈썹을 찡그리며 불쾌함을 표시했다.'통화 내용을 엿들은 거야?'"아, 주희철이었군요. 설마 그 사람이 유주 씨를 도왔다고 자기 입으로 말했어요? 그걸 믿어요?"박수혁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주희철이 일부러 그녀를 속이는 행동은 분명 잘못한 행동이지만, 어쨌든 주희철은 그녀를 도왔다.설비 교체 과정에서 주희철의 덕을 본 것은 사실이었고 박수혁이 이렇게까지 비아냥거리며 말하는 행동이 오히려 기분 나빴다."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내가 착각한 거예요. 도와주지 않은 건 대표님이세요, 설마 지금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남유주는 박수혁이 돕지 않겠다고 한 말을 똑똑히 기억했다. 아니꼬운 시선으로 남유주가 자신을 바라보자 박수혁은 냉소적으로 말했다."난 단지 당신이 나중에 창피함에 못 이겨 울면서 날 찾아올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말을 마친 그는 시선을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짙푸른 바깥세상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노을빛은 구름을 뚫고 나와 세상을 비췄다.그는 오랜만에 바깥세상을 이렇게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별장은 풍경을 구경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저녁 무렵, 고용인은 식사 준비를 끝냈다.잠에서 깬 박수혁은 부엌으로 가 자신 앞에 놓인 흰죽과 남유주의 앞에 놓인 해물 죽과 각종 밑반찬을 번갈아 보았다.박수혁은 어안이 벙벙했다.'이렇게 다르다고?'남유주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얼른 식사하세요, 대표님."말을 마친 남유주는 고개를 숙이고 해물 죽을 맛있게 먹었다."역시 공수해 온 킹크랩이라 맛이 다르네요, 대표님, 진짜 대단해요."그녀는 킹크랩의 황홀한 맛을 표현할 마땅한 단어가 없어 아쉬웠다.박수혁은 어이가 없었다."난 이런 걸 먹고, 유주 씨는 그걸 먹어요?"남유주는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네. 대표님은 지금 해산물 같은 거 못 드시잖아요. 눈으로 감상이라도 하면 좋잖아요? 맛은 제가 대신 음미할게요."박수혁은 자신 앞에 놓인 흰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맛이 사라진
어두운 방 안에서 박수혁이 웃음을 피식 터트렸다."800명이나 돼요? 경험이 아주 풍부하네요."남유주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와인바에서 술에 취해 웃통을 벗고 무대에 올라 술주정을 부리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장면이었지만, 그녀는 멸치처럼 마른 남자들이나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남자들에게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다만 박수혁처럼 날씬하면서 탄탄하게 자리 잡은 복근을 가진 사람들은 드물었다.하지만 박수혁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그녀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박수혁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경험이 이렇게 많은 사람은 나도 무섭네요. 필요하면 내가 연락할게요!"침대로 향한 박수혁은 이불을 끌어올리며 말했다.남유주는 잠시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종일 날 부르려는 작정인가? 살면서 누군가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모셔본 적이 없는데!'그녀는 고개를 돌려 네다섯 명은 충분히 누울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사이즈의 침대와 한 명은 가뿐히 누울 수 있는 소파를 번갈아 보았다.한참 동안 망설이던 남유주는 큰 결심을 내리고 이불을 껴안고 박수혁의 반대편으로 돌아갔다.인기척을 느낀 박수혁은 슬며시 눈을 떴다."미쳤어요?"남유주는 이불을 덮으며 차갑게 말했다."전화하지 마요. 생사가 걸린 일 아니면 깨우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을 거니까,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요."말을 마친 남유주는 몸을 뒤척이더니 박수혁과 등진 채 눈을 감았다.박수혁은 물끄러미 남유주를 바라보았다. 남유주는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깊은 잠에 들었지만, 박수혁은 쉽게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그는 작은 인기척에도 잠에 들지 못할 정도로 예민했다. 남유주가 저렇게 굴러다니며 코를 골고 있으니 박수혁은 당연히 잠에 들지 못했다. 그는 괜히 남유주를 화나게 만들어 자신만 고생하는 것 같았다.다음 날 아침, 햇살이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한 남유
성미려의 무례한 태도에 남유주는 기분이 언짢았다. 남유주는 성미려에게 어떤 악의도 품지 않았었다.성미려가 박시준의 생일파티에서 소란을 피운 덕에 박수혁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고, 남유주 때문에 흥이 깨져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하지만 성미려는 남유주를 오히려 임자 있는 사람과 바람이 난 사람 취급을 하고 있었다.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은 남유주의 눈빛이 흥미롭게 변했다."미려 씨가 모르는 일이 한두 개인 줄 알아요?"성미려가 차가운 시선으로 남유주를 힐끗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수혁 씨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여기는 건 아니죠? 수혁 씨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요, 유주 씨도 알잖아요, 그게 누구인지. 근데 유주 씨는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돈 때문이에요?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요? 어쨌든 존경스럽긴 하네요. 이혼한 돌싱녀 주제에 수혁 씨랑 하룻밤을 다 보내고, 그런 거 아무나 못 하는 거잖아요."거실은 고요했고, 고용인들은 진작에 자리를 떠났다. 남유주는 고용인들이 눈치껏 물러간 덕분에 난감한 상황을 지켜보는 꼴을 면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겼다. 남유주가 성미려를 힐끗 쳐다보더니 웃음을 피식 터트렸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아 성미려를 쳐다보았다. 성미려가 한 말이 자신을 비하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지 않는 게 오히려 상대를 더욱 화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남유주가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성미려의 화를 일부러 더 돋웠다."미려 씨 말이 맞아요. 난 정말 수혁 씨랑 같은 침대를 썼어요. 그 사람 침대,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곳은 아니잖아요? 미려 씨와... 미려 씨 가족들이 그렇게 바라던 일을 내가 했네요? 정작 미려 씨는 수혁 씨 침대 머리맡에도 가보지 못했잖아요. 정말 유감이에요."성미려의 얼굴이 경직되어 보기 흉했다. 성미려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소리쳤다."그런다고 수혁 씨가 당신이랑 결혼할 것 같아요? 당신은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장난감에 불과해요
남유주는 당당한 태도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미려 씨, 돌아가세요, 대표님께서 당신과 만나고 싶지 않아 하네요.""당신 말 못 믿겠으니까 내가 직접 수혁 씨랑 만나서 얘기할 거예요."성미려가 거만한 얼굴로 대꾸하자 남유주는 눈썹을 찌푸렸다."미려 씨, 내 말 못 알아 들어요? 미리 연락하지 않고 이렇게 무작정 찾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실례를 범한 거예요. 솔직히 말할게요, 나오기 싫다고 했어요, 어젯밤 욕구를 너무 많이 분출한 탓에 아직도 쉬고 있어요, 옷도 안 입었다고요.""뭐... 뭐 하자는 거야!"성미려는 결국 소리를 지르며 분노했고 남유주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성미려는 남유주의 가녀린 목덜미와 어깨, 그리고 사람을 홀리는 듯한 분위기를 가진 남유주를 노려보았다."당신이야말로 뭐하는 거예요?"남유주가 받아치자 성미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위층으로 향하는 남유주의 뒤를 쫓아가던 성미려의 앞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건 다름 아닌, 침실 안에서 들리는 남자의 나른한 목소리였다."자기야, 안 오고 뭐 하는 거야?"박수혁의 목소리를 들은 성미려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이곳을 찾아온 목적이 불순하다 하더라도 남유주의 말대로 침실 안으로 뛰쳐들어가 박수혁과 남유주가 남긴 흔적들을 마주하게 되면, 가장 수치스러울 사람은 성미렸다. 남유주가 비웃고 있었지만 성미려는 이를 악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박수혁이 한 오글거리는 멘트 때문에 남유주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속이 안 좋아진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성미려가 지켜보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장단에 맞췄다."미려 씨가 가려고 하지 않아서... 조금만 더 기다려요!"남유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성미려는 경고하는 눈빛으로 남유주를 바라보았다.박수혁의 차가운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고용인이랑 경호원은 뭐해? 아무나 이 집에 들이라고 한 적 없는데."박수혁의 한 마디에 순간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성미려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 있자 남유주는 미소
"나한테 불순한 마음을 품은 것은 알았지만, 경고하는데 이딴 수작을 부려가며 내 곁에 머물 생각하지 마요. 당신 같은 여자들한테 관심 없어요!"박수혁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생긴 이질감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고,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랫동안 여자 없이 살아서 이러는 거야... 진정하자, 진정하자.'남유주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네, 제가 잘못했어요, 됐어요? 그냥 내가 귀신에게 홀렸다고 생각해요. 내가 남자를 못 만나본 거도 아니고 당신한테 수작을 왜 부려요!"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박수혁을 흘겨보았다.'키스 한 번 한 거로 이렇게까지 유난을 떨 줄이야... 유부남과 키스한 것도 아닌데, 그게 뭐라도 이렇게 화내? 그냥 정신이 잠깐 나가서 한 짓인데!'박수혁은 눈을 치켜들더니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아, 그렇네요. 이형욱이랑 할 때 심장이 뛰었어요?"그의 말 한마디에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고, 남유주의 기분은 완전히 무너졌다. 얼굴이 굳은 남유주는 천천히 몸을 돌려 박수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담담함과 서운함이 서려 있었으며 마치 얼음 물을 그녀의 머리에 벗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공격을 받았다.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여겼으나 사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시시각각 그녀의 귀에 가장 지우고 싶은 상처를 속삭일 것이다.십여초 동안 말없이 박수혁을 바라보던 남유주는 고개를 돌려버렸고, 허리를 굽혀 슬리퍼를 주운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수혁은 그녀의 이런 태도가 낯설었다. 사실 그도 말을 내뱉은 순간, 이미 후회하기 시작했고 남유주가 길길이 날뛰며 반박할 줄 알았다.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남유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창밖의 햇살이 그녀를 감싸기 시작했다. 햇살이 그녀의 흐트러진 머길에 비쳤다. 공기에는 약간의 따듯함이 남아 있었다.하지만 이런 침묵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자신과 이형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