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딩동——휴대폰에서 문자메시지 알림이 울린다. “어서 병원으로 가서 헌혈부터 해.”문자를 확인한 소은정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누군가 세게 때리기라도 한 듯 가슴이 얼얼했다. 문자 메시지의 발신인 목록에 찍힌 이름은 바로 “남편”이었다.——딩동——곧이어 휴대폰에 또다시 문자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체크카드에 1억이 입금되었다는 은행 측의 메시지였다.소은정은 덤덤한 눈빛으로 문자 기록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병원 가는 거 잊지 마.”1억이 입금되었습니다.“오늘 병원에 가서 헌혈해.”1억이 입금되었습니다.“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1억이 입금되었습니다. ......3년 동안의 결혼 생활 중 박수혁이 소은정에게 먼저 연락을 하는 경우 단 한 가지, 바로 그녀가 병원에 가서 헌혈, 아니 피를 팔아야 할 때뿐이었다. 그녀의 피를 받는 사람은 바로... 서민영이었다.하지만 정작 그녀의 남편 박수혁은 그녀를 항상 소 닭 보듯 무시했었다.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째 헌혈 요구, 그녀의 몸도 이젠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소파에 앉아있던 소은정의 코 끝이 시큰해지더니 눈가에 차오른 눈물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어제 그녀는 박수혁이 퇴근하길 기다리다 집 앞에서 한 시간 동안 비를 맞았었다. 그 때문인지 머리도 천근만근이고 컨디션이 별로라 출근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박수혁은... 아마 그녀의 몸이 안 좋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겠지.“콜록콜록...”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떻게 답장을 해야 할까 망설이던 그때, 낯선 전화번호로 전송된 문자 메시지 한 통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과 고집을 완전히 짓뭉개버렸다.“네가 수혁 씨 아내인 건 맞지만 그것도 허울뿐인 거 알아. 뻔뻔하게 3년 동안이나 그 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수혁 씨가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널 봐준 적 있어? 어젯밤 수혁 씨 우리 집에서 잤어. 내가 너였다면 진작 죽었을 거야. 넌 결국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상간녀일 뿐이라고!”상간녀?상간녀란 단어에 충격을 받은 소은정의 마
실망과 고통에 잠식되어 몸도 마음도 무거웠지만 소은정은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법원으로 향했다.시간이 1분, 1초 흐르고, 그 사이 박수혁은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지만 전부 무시해 버렸다. 소은정은 창백한 얼굴로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1시간쯤 지났을까? 박수혁은 잔뜩 굳은 얼굴로 법원 앞에 나타났다. 소은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그래, 이번 달에 유난히 많이 부탁했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나도 충분히 보상은 해줬잖아.”“이혼하자...”소은정은 고개를 들어 그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 솔직히 지금 그녀의 기분으로는 더 이상 박수혁과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이 왜 갑자기 이혼을 요구하는지 이유조차 제대로 모르는 눈치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입씨름을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겠지.소은정은 잘생긴 박수혁의 이목구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만한 얼굴, 하지만 이 얼굴로 한 번도 그에게 웃어주지 않았다.지금까지 소은정은 행여나 박수혁의 심기를 건드릴까 조심조심,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그런데 이혼을 결정하고 나니 굳이 왜 그렇게 비굴하게 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더 이상 박수혁이 두렵지 않았다.소은정의 담담한 표정을 보며 박수혁은 짜증이 치밀었다. 차라리 돈을 더 요구했다면 얼마든지 들어줬을 것이다. 그런데 이 건방진 태도는 뭐지? 이 정도 돈이라면 굳이 소은정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자신의 피를 내놓을 사람이 수두룩할 텐데 말이다.“소은정, 후회하지 마!”“후회?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바로 당신이랑 결혼한 거야.”소은정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왜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게 된 걸까?박수혁과 사는 동안 그녀의 몸도 마음도 전부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결국 박수혁도 소은정의 의견을 받아들였는지 별말 없이 법원으로 향했다. 형식적인 접수 절차가 끝
이때 어느새 달려온 박수혁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소리쳤다.“소은정!”“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남자의 목소리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빨리도 달려오셨네. 내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까 봐 무서웠나 보지?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짓던 서민영은 박수혁이 나타나자 바로 눈물을 글썽이더니 변명을 시작했다.“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 은정 씨, 뭔가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소은정, 이 여자가 드디어 미쳤나.감히 박수혁 앞에서 나를 때려?하지만 소은정에게 그런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모르는 척, 순진한 척 연기하지 마. 네가 보냈다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소은정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매서운 표정으로 반박했다. 그리고 가방에서 미리 프린트해 놓은 문제의 사진을 서민영의 얼굴에 던져버렸다.사진을 발견한 박수혁의 얼굴에도 보기 드문 당혹스러움이 서렸고 서민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어제는 박수혁에게도 유난히 버거운 날이었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서민영의 곁을 지키기 위해 병원에 왔었고 잠깐 눈을 붙였었는데. 언제 이런 사진이 찍힌 거지?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병실에는 서민영뿐이었으니까. 서민영이 일부러 사진을 찍어 소은정에게 보낸 것이겠지.순진한 척, 착한 척하던 서민영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예전이라면 박수혁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했겠지만 이혼도장까지 찍은 마당에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소은정은 차갑게 웃었다.“내가 말했잖아? 따로 볼일이 있어서 온 거라고. 서민영, 정신 차려. 다른 사람의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을 상간녀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 세 사람 사이에서 그 상간녀는 바로 너고. 어쨌든 축하해. 원하는 대로 됐으니까. 앞으로 두 사람 잘해 봐.”박수혁도 바보가 아니니 그 사진이 누가 찍은 건지, 어떻게 소은정에게까지 전달된 건지 단번에 눈치챘고 가슴에 뭐가 박힌 듯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박수혁은 고개를 들어 서민영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차갑고 매정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