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한창명에게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한명창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와 함께 어려운 시기를 겪어낸 사람이어야 했다. 곽강민 역시 그중 한 명이었기에, 그는 한창명 말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었다.곽강민은 조금 긴장을 풀었지만, 얼굴빛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한창명이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우린 휴식을 위해 만난 거잖아요. 일 얘기는 그만하시죠. 이렇게 샤인 머스캣이 한가득 있는데, 안 따면 아깝지 않겠어요?”한창명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하연은 알아차렸고, 더 이상 일 이야기는 하지 않고 바구니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맞아요. 저도 이렇게 신선한 샤인 머스캣을 너무 먹고 싶었는데, 이제야 잘 익었네요.”하연은 재빠르게 움직이며 발끝을 세워 가위로 가지를 잘랐다.“먼저 맛보실래요?”한창명은 한 알을 따서 한 입 베어 물었다.“정말 달콤하네요.”하연은 몸에 붙은 잎을 툭툭 털며 물었다.“그래요?”다음 순간, 한창명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또 다른 샤인 머스캣을 하연의 입에 넣어주었다.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졌고, 하연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한명창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최하연 씨, 정말 이번 거래를 성사시키고 싶다면, 차라리 마음 편하게 저를 잘 이용해 보세요.”하연은 그 말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했고, 뒤에 서 있는 곽강민을 힐끔 바라보았다.“두 분, 사이가 굉장히 좋아 보여요.”“저와 강민 선배님은 모두 자선기금의 도움으로 자란 사람들이에요. 대학 시절의 선배님은 투자한 사업이 있었고, 자금이 필요했죠. 전 그동안 모은 돈을 전부 선배님에게 투자했어요. 그 사업은 결국 대성공을 거뒀죠.”한창명은 바구니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그러니까 두 분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거군요.”“사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전 단지 제 안목이 맞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요. 강민 선배님에게 재능이 있다고 봤고,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하연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곽강민이 던지는 질문 하나하나에 그녀는 신속하고 적절한 답변을 내놓았고,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동의의 기운이 감돌았다.“DS그룹은 신생 그룹이긴 하지만, 최 사장님 같은 책임감 있는 리더가 이끄니 금방 성장할 겁니다.”그의 칭찬에 하연의 입가엔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곽 선생님,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며칠 후, 운성시의 오 대표님도 B시에 오실 예정이니, 그때 협력을 공식적으로 확정 짓는 게 좋겠군요.”운성시라는 이름이 나오자, 곽강민은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답했다.“좋습니다. 대신 저는 이번 협력에서 자문 역할만 맡겠습니다. 지분에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 수익이 1% 증가하면 그 1%는 제 몫으로 하고,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 제 책임은 없는 것으로 하죠.”그가 우려하는 바를 하연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이번 DS그룹의 계획은 혜성그룹과 HD그룹의 사업을 넘보는 상황이었고, 만약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곽강민은 자신에게 퇴로를 마련해야 할 터였다.하연은 넓은 아량을 베풀듯 답했다.“곽 선생님께서 이 정도로 양보해 주시니, 그 조건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협상이 마무리되자, 곽강민은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듯 일어나며 말했다.“최 사장님, 이 근처에 괜찮은 농가 맛집 식당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현지 음식을 맛보는 건 어떻습니까?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하연은 가벼운 웃음을 띠며 답했다.“그럼 접대비는 너무 많이 들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한 검사장님이 곤란해지실지도 모르니까요.”그 말에 곽강민과 한창명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샤인 머스캣 농원을 빠져나오며 하연은 문득 이곳이 예전에 손이현과 함께 왔던 교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넓게 펼쳐진 농원이 낯설지 않았고, 곽강민이 말한 농가 맛집 식당은 이 마을의 이장인 왕대천의 집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정말로 기이한 우연이었다.“무슨 생각 중이세요?”자리에서 한창명이 메뉴를 건네며 물었다.“여기 음식
그 시절은 정말 달콤한 추억이었다. 그때 상혁은 목욕 후의 따뜻한 향기를 풍기며 하연을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뜨거웠고, 그 열기가 하연의 온 몸에 전해졌다. “저걸 어떻게 보지?” “저 분야의 앞날이 밝을 것 같아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상혁은 그녀에게 다가와 뜨겁게 키스했다.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리자, 하연의 입가에는 자연스럽게 쓴웃음이 번졌다. 이제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다.하연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방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둬! 여긴 밥 먹는 곳이야, 이러다 가게 문을 닫게 할 작정이냐고!” 익숙한 목소리에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식당 주인과 그의 아내가 다투고 있었고, 아내는 칼을 든 채로 격분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손님들은 겁에 질려 서둘러 도망치고 있었다. “이장님?” 싸움을 말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손이현의 친척인 마을 이장, 왕대천이었다. “하연이?” 왕대천도 하연을 보고는 잠시 놀란 듯했으나,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어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정책에 너희 집이 해당되지 않았다고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야? 큰일도 아니니까, 마을 사람들이 도우면 충분히 돈을 모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꼭 이혼까지 해야겠냐고!” 식당 주인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게 수천만이라고요! 어떻게 모으냐고요!” “머리는 길어도 생각은 짧구나! 나랑 이혼하면 더 나은 사람 만날 줄 아나?” 식당 주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연은 상황이 어이없어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이미 주변엔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고, 한창명은 테이블 위에 있던 담배를 집어 들고 주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무슨 문제인지 말씀해 보세요.” “아이 학교 문제 때문이에요. 학교 근처에 집을 구해야 하는데, 우리 집은 너무 멀어요. 새집
분위기는 점점 더 묘하게 흘러갔다. 하연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왕대천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무심코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대천은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이현아, 누가 왔는지 좀 봐라.”하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왕대천의 핸드폰 화면 속에 비친 얼굴은 분명 손이현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이 느려 목소리마저 끊기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하연 씨가 아저씨를 보러 갔어요?]화면이 계속 끊기자, 왕대천은 답답한 듯 중요한 말만 간추려 말했다. “그래, 그래. 하연이는 정말 착한 아이야. 나는 이 아이가 참 좋아.”한편, 한창명도 손이현의 이름을 듣고 그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 손이현의 얼굴은 그가 정태산에게서 받은 자료 속 사진과 정확히 일치했다. 한창명은 잠시 멈칫하며 하연을 다시 한번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하연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손 선생님, 아직도 B시로 안 돌아가셨어요?” [그때 하연 씨가 떠날 때는 급하게 갔지만, 오히려 모든 일을 철저하게 정리해 두고 떠나셨더라고요. 제가 운성시에 있지 않으면 어디 있겠어요.]이현의 말투에는 미묘한 불만이 묻어 있었고, 그날의 일에 대한 마음속 응어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하연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날의 상황은 너무나도 급박했고, 상혁의 압박은 그날 쏟아진 비보다도 더 강하게 그녀를 휘몰아쳤다. 당시의 하연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상혁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은 분명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를 특별하게 대했으니 말이다. “손 선생님, 비를 맞았다면 생강차라도 마셔서 몸을 따뜻하게 하세요.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고요.”하연은 그날 자신이 갑작스럽게 떠난 것에 대해 예의를 갖추며 우회적으로 답했다. 그러나 이현은 무심한 태도로 화면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전화를 끊어버렸다. 왕대
3일 후, B시에서 신에너지 회의가 열렸다. 각 업계의 거물들이 속속 공항에 도착해 국제호텔에 머물렀다. 하연도 초대장을 받은 사업가 중 하나였다. 그녀는 서둘러 로비로 들어가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무시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BN그룹의 대표 오기용이 하연을 크게 불러세웠다.“최 사장님! 제가 마침 최 사장님을 찾고 있던 참이었어요.”하연은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저도 막 오 대표님을 찾으려던 참이었어요.”오기용은 곧바로 물었다.“방금 들은 소식인데, 곽강민 씨도 우리와 협력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인가요?”하연은 살짝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지었다.“오 대표님도 아셨으니, 이제는 온 세상이 다 알겠네요.”“대단하십니다! 곽강민 씨는 FL그룹이 인수된 이후로 아무도 영입하지 못한 인재였는데, 어떻게 해내셨나요?”하연이 답하려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오 대표님, 여전히 안목이 좁으시군요. 쫓겨난 개 한 마리 데려오는 게 그렇게 자랑할 일인가요?”뒤돌아보니, 여자 정장을 입은 왕아영이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HD그룹의 대표도 함께였다. 오기용의 얼굴은 굳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왕 대표님, 정말 오랜만입니다.”“오랜만이네요. 오 대표님의 사업이 B시까지 진출하다니, 다음에 꼭 가르침을 받아야겠어요.”왕아영은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말 속엔 비꼬는 뉘앙스가 가득했고, 동시에 경고의 뜻도 서려 있었다.“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최 사장님의 덕을 보고 있을 뿐이죠.”왕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최 사장님에게 그런 덕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그녀 앞에 선 하연은 분명 더 젊고 아름다웠으며, 차분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하연은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제가 덕이 있는지 없는지, 오늘 밤 입찰에서 왕 대표님께서 직접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왕아영의 입가에는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곽강민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상혁은 수많은 기자의 환호 속에서 당당하게 입장했다. 그의 옆에는 우아한 미소를 띤 주슬기가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지만, 마치 의도적으로 과시하지 않으려는 듯 절제된 움직임을 보였다. 상혁은 신사적인 제스처로 주슬기의 의자를 빼주며 그녀가 앉도록 배려했다.기자들의 카메라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사람을 포착했고, 그 모습은 곧 대형 스크린에 크게 비쳤다. 하연은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서여은에게서 온 메시지가 도착했다.[주슬기가 호텔 청소 직원으로 변장해 부상혁의 방에 들어갔대. 그 여자, 아무래도 4조를 차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아.]하연은 이미 로비에서 이 소문을 들었고, 참다못해 여은에게 그 진위를 물어본 것이었다. 여은은 언론계에 있으니 누구보다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그 말은 사실이었다.여은은 혹시 자신의 말이 부적절했을까 봐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주씨 가문의 가주가 금융위원회의 일원 중 한 명이잖아. 부상혁이 주슬기의 체면을 세워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아. 하연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혹시 문제가 있다면 직접 부상혁에게 물어봐.]‘직접 물어보라고? 여은이는 모르는 모양이군. 우리 둘의 사이는 이미 많이 변해버렸어. 아마도 상혁 오빠는 더 이상 나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이때 단상 위에 서 있던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크리스티 경매사인 성지나입니다. B시에서 여러분을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오늘 경매할 타이틀은 ‘태양광 홍보대사’이며, 시작가는 60억입니다. 경매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성지나는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경매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는 여유롭고 기품이 넘쳤다. 성지나는 크리스티 부사장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매사로, 언론에서는 그녀를 두고 ‘영원히 우아하고, 영원히 욕망을 자극하는 여성’이라 평했다. 그
“900억.”하연은 곧바로 팻말을 들어 응수했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곽강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다가와 조언을 건넸다.“너무 무리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하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800억은 DS그룹의 예산이고, 그 이상은 제 개인 명의로 내는 겁니다.”하연이 포기하지 않자, 성지나는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DS그룹의 최 사장님께서 900억을 제시하셨습니다. 부상혁 대표님, 참여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이 질문의 의미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부상혁이 이 경매에 뛰어들면, 이는 곧 최하연과 부상혁 사이의 대결이 될 터였다. 더욱이 최근 두 사람의 스캔들이 계속해서 화제가 되는 상황이라, 이 경매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대형 스크린에 비친 상혁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성지나의 질문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연은 그런 상혁을 바라보며, 마음 한편이 아프게 조여왔다.상혁의 결정을 기다리던 그 순간, 주슬기가 상혁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상혁은 몇 마디 답을 하고, 주슬기가 팻말을 들었다.“1400억.”하연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술렁였고, 이번 금액이 상혁의 지시인지, 아니면 주씨 가문이 자금을 추가한 것인지 궁금해했다.성지나는 이번에도 여유로운 미소로 물었다.“최 사장님, 계속하시겠습니까?”하연은 팻말을 꽉 쥐었는데, 곽강민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안 됩니다. 자문가로서 이 이상 가격을 올리는 건 절대 권장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 경매는 실질적인 가치를 넘어섰어요. 저는 최 사장님이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리기를 원치 않습니다.”곽강민은 하연의 손을 강하게 눌렀다. 하연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성지나는 그런 하연을 보며 어딘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1400억, 하나. 1400억, 둘. 더 이상 올릴 분 없으십니까?”세 번째 망치가 떨어지기 직전, 전화 입찰석에서 한 입찰자가 일어섰다.“2000억!”
최하연과 성지나는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다. 두 사람의 집안 배경은 크게 달랐지만, 고집스러운 성격만큼은 서로 닮아 있었다. 그래서 둘은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정도의 사이로 지냈다. 졸업할 때, 지나는 먼저 하연에게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며 하연의 미래 계획을 물었다. 하연은 솔직하게 자신이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 남자를 따라 B시로 갈 것이라고 답했다. 지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정말 부럽네요. 마음껏 선택할 수 있는 자본이 있어서요.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제가 원하는 목표를 위해 노력해야 하니까요.”“그럼 지나 씨의 목표는 뭐예요?”“최고의 경매사가 되는 거예요.”지나는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않았고, 실제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이후 지나는 하연과 찍은 사진을 이용해 고급 경매장에 발을 들였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지나와 하연을 친구라 여겼고, 상류 사회의 아이콘이었던 하연의 체면을 무시할 사람은 없었다.하연은 이 사실을 정예나에게 전해 들었다. 예나는 비꼬듯 말했다.“그 사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 깊이 사귈 만한 사람은 못 돼.”하지만 하연은 지나를 야망 있는 인재로 보았고, 그 사실을 굳이 드러내지 않으며 오히려 지나를 도와주었다.“제 예상대로, 지나 씨는 결국 본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되었네요. 축하해요.”하연은 과거를 떠올리며 담담하게 웃었다. ‘크리스티의 부대표 자리에 오른 것이 단순히 나와의 사진 한 장 덕분만은 아닐 것 같아. 성지나도 분명 그 자리를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겠지.’“그럼 하연 씨는요? 원하는 걸 얻었나요?”지나는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오늘은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 않네요. 2000억으로 타이틀을 따냈는데, 축하 파티를 열 생각은 없어요?”하연은 그 말을 듣고 조용히 세면대 감지대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녀는 얼음물 모드로 전환한 후, 한 줌의 차가운 물을 얼굴에 뿌렸다. 그것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였고, 온갖 복잡한 감정들이 이 순간에 잠시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여자일 뿐인데, 너무 똑똑하면 손해만 볼 뿐이에요.” 남준이 허징인에게 다가가며,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원하는 걸 이제 줘야 하지 않겠어요?” 허징인은 차갑게 비웃으며 얼굴을 굳혔다. “뭐가 그렇게 겁나십니까, 상무님? 제가 약속을 어길까 봐요? 아니면... 그 물건들이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요?” “그건 사모님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죠.” 남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징인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고, 속으로는 분이 차올랐지만, 상황을 감안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 지금은 일단 물러서는 게 최선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상무님. 이미 약속한 이상, 전 제 말을 반드시 지킬 겁니다.” 허징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남준과 눈을 맞췄다. “상무님도 본인의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남준은 가볍게 손을 펼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제가 반은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드릴게요.” “안 돼요!” 남준이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사모님한테는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허징인은 눈을 감고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지금 절 죽이세요. 하지만 제가 죽으면 그 물건들이 공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두세요.” “엄마!” 곁에 있던 민찬이 울먹이며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무서워요!” 허징인은 민찬을 꼭 안으며 남준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물러서면 끝장이야. 적어도 내 아이는 지켜야 해.’ “상무님,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남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묵했다. 남자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어금니를 악물더니 잠시 후 말했다. “죽음도 불사하다니, 사모님의 배짱은 보통이 아니
집에 돌아온 하연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침실 안. 은은한 조명이 켜진 방에서, 하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가정부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문틈 사이로 방 안의 하연을 흘깃 바라보며 손으로 가정부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가정부가 물러난 뒤, 상혁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상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는데, 원신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그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상혁은 짧은 문장을 확인한 뒤, 입가에 가볍게 조소를 띄우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마치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는 이내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하연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며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상혁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할 때 마셔.” 남자의 부드러운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우유를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 회사에 좀 다녀올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상혁은 하연이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이 밤중에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하연은 살짝 의아해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남자는 고개를 숙여 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이 난 참 행복해.” 상혁의 눈에는 하연이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이 행복이 오래가길,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하연은 상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 안기며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요. 정말 행복해
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혁의 얼굴에 잠시 스치는 한 줄기 차가운 빛... 하지만 그것은 곧 부드러운 미소로 가려졌다. “지석 도련님 말씀대로, 형제간에는 서로 도와야 하는 법이죠.” “다만, 부씨 가문의 일을 굳이 외부인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상혁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기운에 압도된 지석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석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 슬기가 먼저 나섰다. “하연 씨, 여기 메뉴 중에서 어떤 게 제일 맛이 괜찮아요? 추천 좀 해주세요.” 슬기의 말에 하연은 조용히 상혁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자, 상혁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너무 날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 별일도 아닌 걸로 걱정하는 하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상혁은 눈빛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이 그제야 안심이 되어 바로 슬기에게 메뉴를 추천했다.“오리지널 맛도 괜찮고, 여러가지가 섞인 맛도 좋을 것 같아요. 둘 다 드셔보세요.” “그럼 두 가지 맛으로 각각 한 그릇씩 주세요!” 슬기는 메뉴를 탁 닫으며 밝게 말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석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그가 나가는 것을 슬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석이 자리를 떠나 자, 슬기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두 분의 오붓한 자리를 불편하게 해서요. 집안에서 주선한 선 자리를 억지로 나온 거라...” 여자의 말투에서 묘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슬기는 문득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지만, 상혁은 그녀를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온전히 하연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슬기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 눈빛을 외면했다. “그나저나, 하연 씨.” 슬기가 화제를 돌렸다. “최근 하연 씨가 뒤로 물러나고 회사를 최하성 씨에게 맡겼다고 들었어요.”
“하연 씨, 우리 같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죠.” 슬기는 예상 밖의 대답에 약간 놀란 듯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연 씨, 이제 저 같은 ‘라이벌’에게 경계심이 풀린 건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제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재도전할지?” 슬기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속엔 은근한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그러나 하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주 대표님, 그런 생각할 여유가 있으시면 옆에 있는 분 눈치부터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슬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뭐, 집에서 주선한 맞선일 뿐이라 별로 신경 안 써요. 첫 만남이기도 하고요.”그 순간 뒤에 있던 지한이 앞으로 나서며 상혁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 대표님,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부 대표님’이라는 말은, 그가 이미 상혁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한은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곧 혼사를 통해 막대한 사업적 결합을 이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최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에 지한은 적잖이 긴장했다.“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지한이 하연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다. ‘주슬기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처음 지한은 그저 형식적인 맞선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꼈다.그때 상혁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SW그룹의 도련님을, 여기서 다 만나고 보기 드문 일이군요.” 단 한마디로 심지한의 배경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지한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부 대표님께서 저를 알고 계셨
최근 몇 년 동안 H시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번화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도시 풍경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도시로 자리 잡았다.상혁은 차를 몰고 하연과 함께 요즘 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유명 먹거리 거리로 향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먹거리 거리로 들어섰다. 거리 양옆으로는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상인들은 열심히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었다.한참을 걷던 중, ‘10년 전통 국밥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깔끔하고 정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 인테리어는 오래된 가게답지 않게 세련되었고, 메뉴는 벽에 붙어 있어 가격이 한눈에 들어왔다.상혁이 가게를 한참 바라보는 사이, 하연은 이미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기다릴 새도 없이 외쳤다. “사장님, 여기 대표 국밥 하나요!” 사장님은 빠르게 주문을 적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못 드시는 재료 있으세요?”“짜지 않게 해주시고, 후추는 빼주세요. 나머지는 다 괜찮아요.” 하연이 주문을 마치자 사장님은 상혁을 향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장님은 뭘로 드릴까요?”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사장님의 깍듯한 존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가게의 음식 나오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 그릇이 놓였다. 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국밥을 바라보며 기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천천히 먹어.” 상혁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 앞에 놓인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상혁은 까다로운 식습관을 가진 어머니인 조진숙의 영향으로 엄격하게 관리된 음식을 먹으며 자라, 이런 길거리 음식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