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유진우가 피식 웃었다.“홍청하 씨, 왜 이렇게 이중잣대를 들이밀어요? 당신 사부가 앞뒤 다른 말 할 때, 은혜를 원수로 갚을 때, 내 술에 약을 타라고 당신을 사주할 때, 방금 날 죽이려 들었을 때는 막무가내란 생각 안 했어요? 힘으로 안 될 것 같으니 어떻게든 설득하려 하고, 웃긴다는 생각 안 해요?”유진우가 위험에 처했을 때 홍청하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백수정이 위험에 처하니 갖은 방법을 다 쓰고 있었다. 정말 눈 뜨고 봐줄 수 없었다.“난...”유진우의 질문 공격에 홍청하는 말문이 턱 막혔다. 핑곗거리를 찾지 못한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했다.“다 당신을 위한 거예요! 무림인들의 세계에서 사부님 인맥이 얼마나 넓은데, 잘못했다간 고수들에게 미움받을 거예요. 그럼, 유진우 씨에게 좋을 것 하나도 없어요.”“다들 절 눈엣가시로 보는데, 인여궁 하나 정도는 일도 아니죠.”유진우가 차갑게 말했다. 그는 이미 공공의 적이었는데, 인여궁 하나가 더 들어온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말이 안 통하네요!”홍청하는 화가 나 어쩔 줄 몰랐다. 백수정이 다치지 않았다면 유진우에게 질 수 있었을까? 좋은 마음으로 알려줬더니 유진우는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홍청하 씨, 더 이상 그쪽이랑 얘기하고 싶지 않네요. 당신 오빠를 봐서 한 번은 놓아줄게요. 이게 마지막이에요. 다시 절 건드린다면 그땐 정말 놔주지 않을 거예요. 지금 당장 풍우 산장에서 꺼져요!”유진우가 소리쳤다. 강한 위압이 풍겨 나왔다. 인여궁 제자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물러났다. 홍청하도 깜짝 놀라 입을 반쯤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빨리! 빨리 궁주님을 모셔가!”풍자 할멈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백수정을 데려가라 명령하고 도망쳤다. 오늘은 이대로 망한 것이다. 하지만 백수정이 무사하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유진우! 나와서 죽어!”이때 위엄 있는 고함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풍우 산장을 들
지난번 유진우에게 지고 단전이 망가진 뒤 도규현은 암암리에 힘을 모으며 복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됐다.“지금 넌 전보다 더 약한데, 어떻게 하려고?”유진우는 도규현을 훑어보다 그의 단전은 고치긴 했지만 이미 크게 상했다는 걸 알아보았다. 일반적인 후천 무사에게도 아무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흥! 내가 싸운다는 게 아니야. 도전장을 던진 사람은 내 사부님이야!”“사부님이 누군데?”“잘 들어. 내 사부님은 바로 자양지존 님이야!”순간 장내가 술렁거렸다.“뭐? 자양지존? 무도 마스터의 강자 아니야?”“맞아! 무림인들의 세계에서 정말 유명하신 분이야. 강남 5대 마스터로 불리기도 했어.”“대박, 저 사람 누군데? 어떻게 자양지존 님의 제자가 된 거야?”인여궁 제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도 마스터는 그녀들에게 신과도 다름없는 존재였다. 무림인들의 세계에서는 ‘무도 마스터 아래는 모두 똑같다’ 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무도 마스터에게는 실력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유명하든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모두 똑같은 존재였다. 마스터란 모든 무사의 최종 목표였다.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이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자양지존이었네. 그런데, 그게 뭐 어때서?”유진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말했다.“어때서? 유진우! 내 사부님 이름도 못 들어본 건 아니겠지?”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양지존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공포에 떨었다. 그런데 유진우는 아무 반응도 없이 태연했다.“그게 중요해? 도전장을 냈으면 받아야지.”“받는다고?”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미친 거 아니야? 자양지존 님과 붙는다고?”“그분은 진짜 무도 마스터야. 신이라고. 이런 사람과 싸운다니, 죽고 싶은 거 아니야?”“죽을 때가 돼서도 모르나 보지.”사람들은 놀람과 동시에 유진우를 무시했다. 무도 마스터 앞에서는 아무리 강해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하하하... 역시 저돌적이네. 그래! 그럼 그렇게 해야지. 이건 도전장이니, 잘 가지
다음날.놀라운 소식이 이리저리 퍼지기 시작했다. 천재 무사 유진우가 공개적으로 마스터 자양지존에게 도전한다. 장소는 청양호 경기장.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술렁댔다. 무도 대회 우승자인 유진우는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었다. 특히 황보용명이 죽은 뒤 용의자로 특정된 후, 그를 향한 관심은 더 커졌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암암리에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와 자양지존의 결투 소식이 퍼지자, 강남, 강북 무도 연맹이 모두 놀랐다.해가 뜰 무렵.청양호 근처에는 이미 구경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은 자양지존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강한 무도 마스터로서 자양지존의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강남 무도 연맹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비록 최근의 활동은 잦아들었지만, 그 위엄은 여전했다.강한 무도 마스터 한 사람은 하늘의 용처럼 쳐다볼 수만 있을 뿐 가닿을 수는 없었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무사들의 영광이었다.이때, 호수의 넓은 정자 안.각종 유명인이 모두 이 자리에 모였다. 맹주 송만규, 무도 연맹의 원로들, 천재 제자들, 황보 가문의 사람들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맹주님, 오늘 결투한다는 게 사실입니까? 유진우 그 자식 정말 자양지존에게 도전하는 겁니까?”황보춘이 물었다.“진짜일 거야. 도씨 가문에서 도전장을 보내 오늘 점심 여기서 싸운다고 했어.”송만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연맹은 유진우를 조사하고 있었다. 풍우 산장의 그 어떤 일도 그들의 감시를 피하지 못했다.“그 자식 죽고 싶은 겁니까? 감히 자양지존 님과 붙다니?”황보춘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흥! 무도 대회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무도 마스터에게 도전할 수 있는 줄 아는 거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옆의 황보추가 콧방귀를 뀌었다. 젊은 무사들 가운데서는 눈에 띌 수 있다지만 자양지존 같은 사람들과는 같은 차원이 아니었다.“아빠, 유진우 그 자식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에요?”황보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황보추가 눈썹을 까딱하며 대답했다.
황보용명이 죽은 뒤 그는 계속해 주시하고 있었다. 강남 무도 연맹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했다.“어서 앉으시죠.”송만규는 담담하게 웃으며 그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소홍도는 스스럼없이 자리에 앉아 질문했다.“송 맹주님, 오늘 결투 어떻게 보십니까?”“당연히 눈으로 보죠.”“하하... 정말 재미있으시네요. 자양지존은 제자 도규현의 복수를 위해 왔다던데, 그 천재 오늘은 좀 위험하겠네요.”“그건 운명에 맡겨야죠.”“강남 무도 연맹에서 어렵게 나온 천재인데, 죽어도 괜찮다는 말씀입니까?”“천재긴 하지만 성품이 좋지 못하면 안 되죠.”“맞아요! 아버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범인으로서 죽어 마땅합니다.”황보추가 끼어들었다.“죽을지 말지는 곧 알게 되겠지.”소홍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오늘 구경하러 온 거였다. 강남 무도 연맹의 내부 싸움도 격렬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와! 예쁜 여자들이 왜 이렇게 많아?”이때 탄성이 들려왔다. 수려한 외모의 여자들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 손에 장검을 든 것이 보통 여자들은 아니었다. 바로 인여궁 사람들이었다!“어머! 어디서 여자 무사들이 이렇게나 많이 온 거야? 너무 예쁜 거 아니야?”“옷을 보니 연경 인여궁 사람들 같아.”“인여궁? 모두 재능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여자 제자들이라 들었는데, 역시 그러네!”“눈 호강이네. 저들 중 한 명과 결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사람들이 웅성댔다. 특히 남자 무사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여자 무사는 원래도 적은데, 한꺼번에 이렇게나 많이 등장하니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선배, 여기 무사들은 다 왜 이래요? 너무 역겨워요.”“강남과 연경을 어떻게 비교해. 이런 곳은 볼 가치도 없어.”“우리가 너무 예뻐서 그런가 봐요. 가끔은 예쁜 게 죄네요.”인여궁 제자들의 콧대가 한껏 올라갔다. 그녀들은 주목받는 걸 은근히 즐겼다. 그녀들의 특권 같은 거였다. 남자들은 그들에게 굽신거리며 한껏 떠받들어야 했다.“사부님, 유진우
유진우가 나오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분노, 원한, 놀라움, 비웃음, 무시. 각종 감정을 담은 시선들이 한데 얽혀 유진우의 몸에 내리꽂혔다.황보용명의 죽음으로 유진우는 거의 모든 무사의 눈엣가시가 되었다. 오늘도 자양지존이 어떻게 그를 죽일까 보러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이렇게 많이 올 줄은 몰랐네요.”장 어르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양호 주위에 사람들이 빼곡히 서 있었다. 대부분 사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절 깎아내리려고 왔을 거예요.”유진우는 태연하게 그들을 마주했다. 도전장을 받는 순간부터 오늘 싸움은 일반 싸움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지금이라도 돌아가죠? 무도 마스터는 일반 상대가 아니에요. 체면보단 목숨이 중요하지 않아요?”장 어르신이 낮게 말했다. 그는 유진우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자양지존은 강남에 이름을 알린 무도 마스터였다. 두 사람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마스터 아래는 모두 똑같다. 그건 누구도 깰 수 없는 철칙이었다.“이제 와서 도망가는 게 어디 있어요?”“무도 마스터는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신 같은 존재입니다. 다시 한번만 생각해 보세요!”“걱정 마요. 전 다 계획이 있어요.”유진우가 작게 웃었다. 자양지존은 강한 상대였지만 유진우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유진우 씨...”이때 홍청하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걸어왔다.“무슨 일입니까?”유진우는 금세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어젯밤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섰다.“진우 씨, 결투를 포기하세요.”“이유는요?”“진우 씨 생각해서요. 자양지존은 무도 마스터예요. 유진우 씨보다 훨씬 강하다고요.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예요!”“제 일에 신경 쓰지 마시고, 사부님한테 가세요.”“이러지 마요. 진우 씨가 살아있었으면 해서 하는 말인데 왜 계속 죽으려 들어요?”“싸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죽는다고 확신합니까?”“꼭 싸워봐야 알아요? 자양지존은 무도 마스터라고요. 당신은 뭔데요? 사부님이 다치지 않으셨다면 어제 같은 일은 없었을
“인여경요?”유진우는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결국에는 다 그것 때문이었네요?”상대가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유진우의 안전을 걱정하여 설득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다 거짓이었다. 그녀의 최종 목적은 그저 인여경이었다.“진우 씨, 인여경은 나에게 정말 중요해요. 그러니 돌려줬으면 좋겠어요.”홍청하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확고했다.“인여경을 이미 청하 씨에게 주었는데 다시 달라고 하는 건 무슨 경우인가요?”유진우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시치미 떼지 말아요. 당신이 인여경을 훔쳐 갔다는 거 다 알아요. 지금이라도 내놓으면 앞으로 그래도 친구는 할 수 있어요.”홍청하가 진지하게 말했다.“일단 이것부터 바로 잡을게요. 인여경은 내가 훔친 게 아니라 당신들이 잃어버린 거예요. 당신들 문제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과는 친구 못해요.”유진우는 대놓고 비아냥거렸다.“진우 씨,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인여경은 당신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잖아요. 인심 쓰는 셈 치고 나에게 돌려주면 얼마나 좋아요.”홍청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까지만 해도 유진우가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그냥 위선자였다.‘인여경을 일부러 훔쳐 가서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게 만들어? 정말 비겁한 놈이야!’“귀먹었어요? 한 번 더 얘기하는데 인여경 나에게 없다고요. 그리고 내가 가져갔다면 또 어쩔 건데요? 인여경을 싹 다 태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절대 못 줘요.”유진우가 냉랭하게 쏘아붙였다.“당신!”홍청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말문이 막혀버렸다.‘역시 간사하고 속 좁은 놈이었어.’“유진우 씨, 인여경은 원래 우리 인여궁의 물건인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못 준다는 건데요?”홍청하가 참다못해 발끈했다.“계속 이렇게 억지를 부렸다간 당신이 저지른 추악한 짓을 싹 다 까발릴 거예요. 나중에 지위도 명예도 잃게 되면 후회해도 늦어요.”“허허...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그녀의 욕설에도 유진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갈 길을 갔다. 이미 모든 성의를 다 보여줬는데도 홍청하는 고집불통이었고 인여궁의 백수정 등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 한통속이었다.그가 아무리 도와주고 설득해도 고마운 줄을 모르고 되레 배신까지 했다. 이런 여자는 정말 치료할 약도 없다. 더는 그녀의 일에 끼어들어봤자 득이 될 게 없으니 아예 남 취급하는 게 더 편했다.“어떻게 됐어? 인여경 가져왔어?”그때 백수정이 한 무리 제자들과 함께 다가왔다.어젯밤 인여경을 잃어버린 후 백수정은 줄곧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하여 유진우를 보자마자 홍청하에게 인여궁의 보물을 다시 찾아오라고 한 것이었다.“사부님, 그 자식이 주기는커녕 되레 제 뺨을 때렸어요.”홍청하는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움켜쥐었다.“뭐? 안 준다고?”백수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일단 그 자식의 마음부터 잡고 살살 꼬셔서 가져오라고 했잖아. 어떻게 했는데?”“당연히 그렇게 했죠. 그런데 유진우는 끄떡도 하지 않았어요. 어찌나 절 경계하는지 아예 줄 생각이 없더라고요.”홍청하가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쓸모없는 것 같으니라고. 이런 작은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백수정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주변에 사람이 적었더라면 아마 홍청하의 뺨을 날려서라도 화풀이했을 것이다.“사부님, 유진우가 인여경을 훔친 게 맞다면 풍우 산장에 있는 게 틀림없어요.”홍청하가 갑자기 말했다.“그래서 어쩔 건데?”백수정이 그녀를 째려보며 말했다.“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죠.”홍청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사부님, 오늘 결투에서 유진우는 반드시 질 거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요. 유진우만 죽는다면 우린 무서울 사람이 없잖아요? 그때 다시 풍우 산장에 가면 인여경을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음... 일리가 있어.”백수정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하지만 풍우 산장에 보는 눈이 많아서 몰래 찾는 건 쉽지 않을 텐데.”“사부님, 굳이 그
예전에 유진우에게 폭행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도민향은 눈앞의 유진우가 뼈에 사무치도록 미웠다. 오늘 드디어 유진우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겼다.“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자양지존더러 나오라고 해.”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흥! 우리 사부와 겨루기 전에 우리부터 넘어서야 해.”그때 엄청난 기운이 갑자기 인파 속에서 터져 나왔다. 곧이어 남녀 한 쌍이 펄쩍 뛰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십여 미터를 넘어 도씨 가문의 진영 앞에 살포시 착지했다.남자는 훤칠한 키에 눈빛이 날카로웠고 기운이 불같아 당장이라도 폭발할 정도로 뜨거웠다. 그와 반대로 여자는 자태가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표정이 무덤덤했다. 또 기운이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날카로웠다. 얼음과 불인 두 남녀는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선배님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두 사람을 보자마자 도규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누가 널 괴롭혔다는데 당연히 와봐야지.”남자는 호탕하게 웃었고 여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규현아, 이 두 분은...”도장수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아버지, 제가 소개해드릴게요. 이분은 저의 큰 선배님 진화이고 이분은 둘째 선배님 김설인데 두 사람 부부예요. 게다가 이분들이 바로 스카이 랭킹에서 이름을 떨친 빙화쌍살입니다.”도규현이 두 사람을 소개했다.“빙화쌍살?”그 말에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빙화쌍살은 스카이 랭킹 5위와 6위인 최고의 강자들이다. 한 사람만 나서도 가는 곳마다 적을 무너뜨릴 정도로 대적할 자가 없는데 그런 두 사람이 손을 잡는다면 그 실력은 그야말로 극에 달한다. 마스터급 이하라면 그들을 당해낼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빙화쌍살까지 왔어? 오늘 고수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구나!”“빙화쌍살은 도규현의 선배님들이셔. 기세를 보아하니 후배를 위해 나설 모양이야.”“흥, 유진우 저 녀석 오늘 혼 좀 제대로 나겠구나.”사람들은 저마다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며 지적했다. 놀란 것도 사실이지만 고소해하는 사
“아직 절 기억해주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저 아직 살아있습니다.”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성종의 과거사를 몰랐던 터라 갑자기 흥분한 모습을 보니 조금 의아했다.“살아있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은성종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벌써 10년이나 지났어요. 그사이 세자 전하께서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그러네요. 10년 동안 많은 게 변했습니다.”유진우는 감탄하며 말했다.10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10년 후에는 아버지가 암살당했다. 10년 사이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제후님, 아까 제 형을 보면 서경왕부를 전폭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형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약속을 어기진 않으실 거죠?”유천우가 떠보듯 물었다.“만약 세자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시겠다고 한다면 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자 전하가 왕의 자리에 앉도록 도와줄 거야.”은성종이 진지하게 말했다.조금 전까지 냉정하고 덤덤했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투지가 넘쳤고 온몸에서 전에는 본 적 없는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좋습니다. 제후님은 역시 약속을 잘 지키시네요.”유천우는 웃어 보이고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역시 형이 나서야 했어.’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은성종을 설득하지 못했는데 유진우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든 게 쉽게 해결되었다.비록 10년이 흘렀지만 유씨 가문 천재라는 명성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고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제후님, 제가 서경에 돌아온 사실을 아직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때까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유진우가 당부했다.“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겠습니다.”은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은 그는 당연히 유장혁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위왕이 호룡각의 잔당들에게 살해당했고 유태범은 왕위를 빼앗으려 혈안이 되어있었다. 정말 여러 가지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왕위를 이을 생각이 없다면서 왜 싸우려는 건데?”은성종이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전 서경왕이 될 자격이 부족하지만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유태범보다 더 어울려요.”유천우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그게 누군데?”은성종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제 형님 유장혁입니다.”유천우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유장혁?”은성종은 실눈을 뜨더니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세자 전하께서 서경왕이 되는 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실종된 지 10년이 넘었고 감감무소식이라는 거야.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왕위를 이을 수 있겠어?”“제 형님은 죽지 않았고 이미 서경에 돌아왔습니다. 서경왕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형님밖에 없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말로만 해서는 안 돼. 증거가 있어?”은성종이 물었다.만약 유장혁이 정말로 서경에 돌아왔다면 벌써 서경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하여 유천우가 단지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핑계를 대는 것이라 생각했다.“제후님, 증거를 드릴 수는 있는데 그 전에 물을 게 있어요. 만약 제 형님이 왕위를 물려받는다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실 겁니까?”유천우가 되물었다.“그건...”은성종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유천우가 하도 자신감이 넘쳐서 오히려 확신이 없어졌다.“제후님, 서경에는 좋은 왕이 필요합니다. 제 형님보다 더 서경왕에 적합한 사람은 없어요. 제후님도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유천우가 말했다.“그래. 만약 내가 직접 세자 전하를 만난다면 널 도와줄게. 만나지 못하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야 할 거야.”은성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약속하는 겁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유진우를 돌아보았다.“형, 이젠 형이 나설 때가 됐어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본모습을 드러냈다.“당신은...”은성종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은성종은 유천우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자신과 유천우에게 술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술을 단숨에 마셨다.“좋은 술이군.”은성종은 혀를 차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유천우도 다그치진 않고 술을 다 마신 다음 은성종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기다렸다.“유태범이 나한테 손을 잡자고 하더라고. 엄청난 이익을 약속했지만 모두 거절했어.”이 말을 들은 유천우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어진 은성종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아직 너무 기뻐하진 마. 유태범의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너도 도울 생각은 없어.난 전쟁을 싫어해서 중립을 선택할 거야.”은성종이 솔직하게 말했다.“중립이라고요?”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바로 설득했다.“제후님, 서경의 일원으로서 서경이 무너지는 걸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난 능력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은성종이 고개를 내저었다.“그리고 난 야심이 없어서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어. 이런 권력 다툼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아. 내가 가진 작은 땅만 잘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은성종이 잠깐 멈칫하다가 또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너랑 표기 대장군 모두 유씨 가문의 핏줄이라 누가 서경왕이 되든 나한테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말이 반란이지, 그저 왕위 다툼일 뿐이야.”“그건...”유천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천우야, 난 성격이 솔직한 편이라 혹시 불쾌한 점이 있다면 부디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은성종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제후님이 평화를 바라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제후님도 무사하지 못해요.”유천우가 다시 설득했다.“태평은 변경의 작은 도시이고 가난하고 가진 게 없어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여기까지 쳐들어올 일은 없어.”은성종이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미 유태범과도 합의했어. 내가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태평에는 절대 쳐들어오지 않겠다고.”“제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