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여경요?”유진우는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결국에는 다 그것 때문이었네요?”상대가 그래도 양심이 있어서 유진우의 안전을 걱정하여 설득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다 거짓이었다. 그녀의 최종 목적은 그저 인여경이었다.“진우 씨, 인여경은 나에게 정말 중요해요. 그러니 돌려줬으면 좋겠어요.”홍청하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확고했다.“인여경을 이미 청하 씨에게 주었는데 다시 달라고 하는 건 무슨 경우인가요?”유진우의 표정이 점점 차가워졌다.“시치미 떼지 말아요. 당신이 인여경을 훔쳐 갔다는 거 다 알아요. 지금이라도 내놓으면 앞으로 그래도 친구는 할 수 있어요.”홍청하가 진지하게 말했다.“일단 이것부터 바로 잡을게요. 인여경은 내가 훔친 게 아니라 당신들이 잃어버린 거예요. 당신들 문제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과는 친구 못해요.”유진우는 대놓고 비아냥거렸다.“진우 씨,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인여경은 당신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잖아요. 인심 쓰는 셈 치고 나에게 돌려주면 얼마나 좋아요.”홍청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전까지만 해도 유진우가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그냥 위선자였다.‘인여경을 일부러 훔쳐 가서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게 만들어? 정말 비겁한 놈이야!’“귀먹었어요? 한 번 더 얘기하는데 인여경 나에게 없다고요. 그리고 내가 가져갔다면 또 어쩔 건데요? 인여경을 싹 다 태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절대 못 줘요.”유진우가 냉랭하게 쏘아붙였다.“당신!”홍청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말문이 막혀버렸다.‘역시 간사하고 속 좁은 놈이었어.’“유진우 씨, 인여경은 원래 우리 인여궁의 물건인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못 준다는 건데요?”홍청하가 참다못해 발끈했다.“계속 이렇게 억지를 부렸다간 당신이 저지른 추악한 짓을 싹 다 까발릴 거예요. 나중에 지위도 명예도 잃게 되면 후회해도 늦어요.”“허허... 지금 날 협박하는 겁니까?”
그녀의 욕설에도 유진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갈 길을 갔다. 이미 모든 성의를 다 보여줬는데도 홍청하는 고집불통이었고 인여궁의 백수정 등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다 한통속이었다.그가 아무리 도와주고 설득해도 고마운 줄을 모르고 되레 배신까지 했다. 이런 여자는 정말 치료할 약도 없다. 더는 그녀의 일에 끼어들어봤자 득이 될 게 없으니 아예 남 취급하는 게 더 편했다.“어떻게 됐어? 인여경 가져왔어?”그때 백수정이 한 무리 제자들과 함께 다가왔다.어젯밤 인여경을 잃어버린 후 백수정은 줄곧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하여 유진우를 보자마자 홍청하에게 인여궁의 보물을 다시 찾아오라고 한 것이었다.“사부님, 그 자식이 주기는커녕 되레 제 뺨을 때렸어요.”홍청하는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움켜쥐었다.“뭐? 안 준다고?”백수정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일단 그 자식의 마음부터 잡고 살살 꼬셔서 가져오라고 했잖아. 어떻게 했는데?”“당연히 그렇게 했죠. 그런데 유진우는 끄떡도 하지 않았어요. 어찌나 절 경계하는지 아예 줄 생각이 없더라고요.”홍청하가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쓸모없는 것 같으니라고. 이런 작은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백수정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주변에 사람이 적었더라면 아마 홍청하의 뺨을 날려서라도 화풀이했을 것이다.“사부님, 유진우가 인여경을 훔친 게 맞다면 풍우 산장에 있는 게 틀림없어요.”홍청하가 갑자기 말했다.“그래서 어쩔 건데?”백수정이 그녀를 째려보며 말했다.“우리에게는 절호의 기회죠.”홍청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사부님, 오늘 결투에서 유진우는 반드시 질 거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요. 유진우만 죽는다면 우린 무서울 사람이 없잖아요? 그때 다시 풍우 산장에 가면 인여경을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음... 일리가 있어.”백수정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하지만 풍우 산장에 보는 눈이 많아서 몰래 찾는 건 쉽지 않을 텐데.”“사부님, 굳이 그
예전에 유진우에게 폭행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도민향은 눈앞의 유진우가 뼈에 사무치도록 미웠다. 오늘 드디어 유진우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겼다.“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자양지존더러 나오라고 해.”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흥! 우리 사부와 겨루기 전에 우리부터 넘어서야 해.”그때 엄청난 기운이 갑자기 인파 속에서 터져 나왔다. 곧이어 남녀 한 쌍이 펄쩍 뛰어오르더니 순식간에 십여 미터를 넘어 도씨 가문의 진영 앞에 살포시 착지했다.남자는 훤칠한 키에 눈빛이 날카로웠고 기운이 불같아 당장이라도 폭발할 정도로 뜨거웠다. 그와 반대로 여자는 자태가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표정이 무덤덤했다. 또 기운이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날카로웠다. 얼음과 불인 두 남녀는 완전히 극과 극이었다.“선배님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두 사람을 보자마자 도규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누가 널 괴롭혔다는데 당연히 와봐야지.”남자는 호탕하게 웃었고 여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걸로 인사를 대신했다.“규현아, 이 두 분은...”도장수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아버지, 제가 소개해드릴게요. 이분은 저의 큰 선배님 진화이고 이분은 둘째 선배님 김설인데 두 사람 부부예요. 게다가 이분들이 바로 스카이 랭킹에서 이름을 떨친 빙화쌍살입니다.”도규현이 두 사람을 소개했다.“빙화쌍살?”그 말에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빙화쌍살은 스카이 랭킹 5위와 6위인 최고의 강자들이다. 한 사람만 나서도 가는 곳마다 적을 무너뜨릴 정도로 대적할 자가 없는데 그런 두 사람이 손을 잡는다면 그 실력은 그야말로 극에 달한다. 마스터급 이하라면 그들을 당해낼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빙화쌍살까지 왔어? 오늘 고수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구나!”“빙화쌍살은 도규현의 선배님들이셔. 기세를 보아하니 후배를 위해 나설 모양이야.”“흥, 유진우 저 녀석 오늘 혼 좀 제대로 나겠구나.”사람들은 저마다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며 지적했다. 놀란 것도 사실이지만 고소해하는 사
진화가 주먹을 뻗었을 때 장 어르신도 갑자기 움직이더니 재빨리 펄쩍 뛰어올라 주먹을 뻗었다. 엄청난 진기가 덮어져 있는 장 어르신의 주먹과 진화의 불 주먹이 서로 부딪혔다.쾅!폭발음과 함께 기운이 폭발하면서 불꽃이 사방에 튀었다.장 어르신은 몸을 잠깐 비틀거리다가 바로 중심을 잡았다. 그런데 그런 그와 달리 진화는 열몇 걸음 연신 뒤로 물러났고 걸음마다 바닥에 깊은 발자국이 생겼다.누가 실력이 강하고 약한지 순식간에 판가름 났다.“X발, 저 영감은 누구야? 스카이 랭킹 5위인 고수를 단번에 제압했어.”“진화보다도 실력이 더 강하다니, 보통 사람이 아니야!”“역시 강남에는 강자들이 숨어있다니까. 갑자기 나타난 영감도 이렇게나 강해.”장 어르신이 선보인 실력에 적지 않은 사람이 충격에 빠졌다.삐쩍 마른 영감이 단지 주먹만으로 진화를 이겼다는 건 그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뜻한다.“너 누구야? 누군데 감히 날 막아?”체면이 구겨진 진화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멀고도 먼 연경에서 온 그들은 이곳에서 한껏 위세를 펼칠 줄 알았다. 그런데 주먹을 뻗자마자 체면을 구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한낱 무명인일 뿐이야.”장 어르신이 덤덤하게 말했다.“말 안 하겠다 이거야? 그래, 그럼 오늘 입을 열 때까지 제대로 때려줄게.”더는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었던 진화는 다시 한번 몸을 날렸다. 이번에는 타깃을 장 어르신으로 잡았다.“지열권!”장 어르신에게 가까이 가는 동시에 진화는 번개처럼 빠른 두 주먹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먹을 열여덟 번이나 뻗었다. 주먹의 잔영이 하늘을 뒤덮었고 마치 거미줄처럼 장 어르신을 덮치려 했다. 게다가 불꽃까지 띄고 있었는데 살짝만 닿아도 몸에 불이 달릴 수 있었다.“그냥 보잘것없는 재주일 뿐이야.”장 어르신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주먹을 뻗었다. 좌우로 가볍게 밀면서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태극권을 이용하여 진화의 열여덟 번의 주먹을 단숨에 제압해버렸다.진화의 맹렬한 주먹은 장 어르신의
송만규도 어리둥절하긴 마찬가지였다.‘반보 마스터급 고수라면 무도 연맹의 장로 자리에 앉을 자격이 충분할 텐데 왜 유진우의 곁에 있는 거지? 혹시 거금을 들여서 도와달라고 모셔온 분인가?’“하룻밤 사이에 저 영감탱이의 실력이 또 는 것 같아.”그 시각 백수정은 어두운 안색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원한이 더욱 짙어졌다.그녀는 반보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 지 수년이나 지났지만 지금까지 다음 단계로 돌파하지 못했다. 그런데 저 비쩍 마른 영감은 아직도 실력이 늘고 있다. 이러니 어찌 질투가 안 나겠는가?“X발, 저 영감탱이 대체 정체가 뭐예요? 빙화쌍살까지 막지 못하다니.”도민향이 조급해하기 시작했다.“진정해. 지금 상황을 보면 빙화쌍살이 아직 우세를 차지하고 있어.”도장수가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스카이 랭킹 5위와 6위는 절대 허울뿐이 아니다. 손을 잡으면 실력이 배가 되기에 언젠가는 상대를 무너뜨릴 것이다.“걱정하지 마. 저 영감은 우리 선배님들을 이기지 못해.”도규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내가 장담하는데 아마 3분 내로 지게 될 거야.”“으악!”그런데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다.힘이 빠진 진화가 갑자기 장 어르신의 주먹에 가슴을 맞고 수 미터 날아가더니 나무에 세게 부딪혀 피를 콸콸 토했다.“선배!”화들짝 놀란 김설이 공격을 잠시 멈추었다. 그녀가 방심한 순간 장 어르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김설의 등을 힘껏 내리쳤다. 김설도 수 미터 날아가 진화 옆에 떨어졌고 시뻘건 피를 토해냈다.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되고 말았다.“뭐야? 빙화쌍살이 졌어?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세상에나. 저 영감 대박인데? 일대 이로 싸웠는데도 이겼어.”“역시 실력을 숨긴 고수였구나.”장 어르신의 승리로 현장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 이름도 모르는 강자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깊어졌다.“말도 안 돼!”도규현의 얼굴에 지어졌던 미소가 굳어졌고 그 대신 충격이 가득했다. 두 선배가 영감에게 질 거라
“뭐야?”휙 날아간 장 어르신을 보며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입을 쩍 벌렸다.조금 전 그들은 장 어르신의 실력을 똑똑히 목격했었다. 혼자서 빙화쌍살을 손쉽게 해결하는 모습이 참으로 위풍당당했다.그런데 그런 강자가 나뭇잎에 피를 흘리고 쓰러지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건 나뭇잎이 1㎞ 밖에서 날아왔다는 것이다.대체 누구이기에 1㎞ 밖에서 얼굴도 드러내지 않고 반보 마스터급 강자에게 중상을 입혔단 말인가?“왔어요!”많은 사람의 주목 속에 하얀 옷차림에 얼굴은 동안이지만 백발인 한 노인이 청양호의 끝자락에 불쑥 나타났다.노인은 뒷짐을 진 채 마치 땅을 걷듯 호수면 위에서 성큼성큼 걸어왔다. 발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수면에 물결이 일렁거렸고 놀란 물고기들이 펄쩍펄쩍 뛰어올랐다.얼핏 보면 하늘에서 신이 구름을 타고 유유히 내려온 것만 같았다. 노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남다른 분위기가 흘러넘쳤다.“수면 위에서 저렇게도 가볍게 걸어 다니다니, 무도 마스터가 틀림없어!”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소리 높이 말했다. 그 순간 현장이 발칵 뒤집혔다.마스터를 직접 본 사람이 매우 적었고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스터의 위엄을 느낄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무도 마스터는 신과도 같아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그렇게 되는 어려웠다. 그런 마스터를 직접 보았으니 당연히 놀랄 만도 했다.“사부님.”백발의 노인을 보자마자 도규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조마조마했던 마음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두 선배가 패배하면서 사실 도규현은 속으로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그런데 이젠 사부가 왔으니 당연히 당해낼 자가 없다고 생각했다.“저분이 바로 자양지존이셔? 역시 명불허전이구나.”도장수는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1㎞ 밖에서 고작 나뭇잎 하나로 반보 마스터급 강자를 이겼다. 정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실력이었다.“하하... 우리의 구세주가 드디어 왔어!”넋을 잃은 것도 잠시 도민향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퍽!수구가 터졌고 안에서 헤엄치던 물고기마저도 터져버리고 말았다.“뭐야?”예상 밖의 상황에 자양지존이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대충 날린 공격이긴 하지만 일반인이 막아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자양지존, 당신의 상대는 나야.”유진우는 성큼성큼 다가가 장 어르신의 앞을 막아섰다.“네가 유진우야?”자양지존은 유진우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눈빛이 싸늘하고 날카로웠으며 기세도 살벌했다. 마치 높은 곳에 있는 신이 한낱 개미 같은 비천한 인간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그래.”유진우가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동안의 수련을 전부 망가뜨리고 두 손을 자른 후 내 제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한다면 목숨은 살려줄게.”자양지존이 싸늘하게 말했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풍겼다.“유진우, 들었어? 당장 수련을 망가뜨리고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도규현이 거들먹거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유진우에게 모욕을 줄 기회가 생겼는데 당연히 놓칠 리가 없었다. 유진우가 무술 실력을 잃는다면 앞으로 마음껏 가지고 놀아도 되었다.“흥! 개보다도 못한 목숨을 건질 기회가 있다니, 정말 운도 좋아.”도민향은 팔짱을 낀 채 유진우를 경멸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양지존이 너무 자비를 베푼다고 생각했다. 그녀였더라면 그냥 죽였을 텐데.“싸우기도 전에 큰소리부터 쳐?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거 아니야?”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뭐야? 그럼 나에게 도전이라도 하겠다는 거야?”자양지존이 옆을 슬쩍 흘겼을 뿐인데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물결이 연신 일렁거렸다.“아니,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유진우의 눈빛도 점점 날카로워졌다.“당신에게 도전하는 게 아니라 다시는 일어나지도 못하게 만들 거거든.”쿵!그의 말에 현장이 떠들썩해졌다.“세상에나. 저 자식 미쳤어? 감히 자양지존 님에게 저런 막말을 해?”“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저 녀석은 무도 마스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예 몰라.”“어린 나이에 저렇게 나대? 정말 죽
정말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갑자기 조용해졌다.사람들은 하나같이 넋을 잃은 표정이었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강하기로 명성을 떨친 자양지존이 단 일격에 물에 빠질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자양지존은 무도 마스터이다. 일반 무사에게 있어서는 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손가락만 까딱해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고 대충 가한 공격으로도 본투비 레벨 고수를 죽일 수 있었다.그런 최고 고수라면 아주 압도적으로 이겨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지? 단 일격에 신이라 불리는 자양지존이 패배하고 말았다.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잠깐의 침묵 후 청양호 주변이 들끓기 시작했다.“세상에나!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자양지존이 물에 빠졌어?”“아니야, 말도 안 돼. 마스터는 신이나 다름없어. 일반인이 어떻게 신을 이길 수 있어?”“...”“마스터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마스터밖에 없어. 그렇다면 저 사람 설마 마스터야?”“소년 마스터! 소년 마스터야!”“우리 강남 무도 연맹에 엄청난 괴물이 나타났다!”호수 면에 우뚝 서 있는 유진우를 보며 사람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저마다 입을 쩍 벌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말... 말도 안 돼. 저... 저놈이 무도 마스터였어?”도규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유진우의 실력이 단지 자신보다 조금 더 강한 줄 알았는데 이미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무도 마스터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그렇다면 도규현을 죽이는 건 개미 새끼를 밟아 죽이는 것처럼 쉬웠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도규현은 거의 절망에 빠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도씨 가문의 다른 가족들도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대체 왜? 저놈 왜 저렇게 강한 거야?”차연주는 도무지 믿을 수 없어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쩔쩔맨다고 생각했던 유진우가 이렇게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망했어요, 망했어요... 우리 소년 마스터를 건드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