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조군수가 고개를 들어 옆에 있던 진서현을 바라보았다.“아까 당신이 위급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어요.”진서현이 말했다.“알았어. 당신도 급했겠지.”조군수는 따지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만나는 건 좋지만, 허튼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감시하는 사람도 같이 보낼 거예요.”“알겠습니다!”유진우는 동의했다.“아영아, 모시고 가서 언니랑 만나게 해.”조군수가 명령했다.“네!”조아영의 얼굴이 기쁨으로 밝아졌다.언니가 너무나 유진우를 만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참, 아저씨, 무독은 작은 일이 아니예요. 아저씨한테 무독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닐 거예요. 주변 사람을 조심해야 해요.”방을 나가려던 순간 유진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조군수를 보며 말했다.“알았어요.”조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늘 은둔 생활을 해오던 그가 갑자기 무독에 걸렸으니,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내일이 조씨 가문의 연회라는 점이었다.족장으로서 그가 빠지면 그 영향은 엄청날 것이다.조씨 가문에 내란이 발생하기에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여보, 나한테 무독을 쓴 사람이 누굴까?”조군수가 갑자기 물었다.“주술에 능하고 우리 조씨 가문과 원수지간인 블랙지존 말고 누가 또 있겠어요.”진서현의 표정이 신중했다.블랙지존은 조씨 가문의 눈에 든 가시 같은 존재였다.그는 신비롭고 강력했다.조씨 가문에서 블랙지존을 없애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수년 동안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게다가 매년 조씨 가문의 핵심 인력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는데 그들 뒤에는 늘 블랙지존의 그림자가 있었다.블랙지존 하나만으로 조씨 가문 전체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그렇지, 그 사람밖에 없지.”조군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어. 이게 바로 내가 굳이 선미를 선우 가문에 시집보내려
그 시각 조씨 저택 후원.인품과 재능이 제일인 한 여자가 연못 위의 아치형 다리에 걸터앉은 채 물속에서 펄쩍펄쩍 뛰노는 잉어들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하얗고 앙증맞은 두 발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는데 두 발이 가끔 수면에 닿으면서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찬란한 햇빛 아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고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정원에 갖가지 꽃들이 환하게 피어있었지만 여자의 먹구름이 드리워서인지 빛을 잃어가는 것만 같았다.“스르륵...”여자는 먹이를 한 움큼 쥐고 연못에 뿌렸다. 그 순간 수만 마리에 달하는 잉어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물보라를 일으켰다.가지각색의 잉어들이 서로 먹이를 빼앗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난 아무 걱정 없는 너희들이 참 부러워. 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좋아하지 않는지조차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데.”여자는 시름에 잠긴 얼굴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누가 그래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고?”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 뒤에서 갑자기 들려왔다. 여자는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자신을 비웃었다.“대낮에도 환청이 들리네.”“환청?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지 않나요?”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여자는 그제야 진짜인 걸 깨닫고 숨을 죽인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한 잘생긴 남자가 햇살을 맞으며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는데... 유진우가 아니면 누구겠는가?“진... 진우 씨가 여긴 어떻게 왔어요?”늘 그리워하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조선미는 놀라면서도 기뻤고 심지어 잘못 본 건 아닌지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그동안 그녀는 집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나머지 거의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다.“내가 얘기했잖아요. 당신이 강능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서울로 찾아올 거라고. 난 약속 지켰어요.”유진우는 씩 웃어 보였다.“역시 여보가 제일 좋아요!”조선미는 행복한 웃음을 짓고는 물고기 먹이를 그대로 내팽개치고 유진우의 품에 와락 안겼다.
조선미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도망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조씨 가문 송년회가 곧 코앞이라 그 어떤 실수가 있어서도 안 되었다.“됐어요, 됐어요. 그냥 여기 있어요, 그럼.”그녀와 따지고 싶지 않았던 조선미는 유진우와 함께 연못 가운데 있는 정자로 향했다.오씨 아주머니가 따라나서려 하자 조아영이 그녀를 말렸다.“이봐요, 아주머니. 아빠가 아주머니한테 그냥 지켜보라고만 했지, 가깝게 따라다니라고는 하지 않았잖아요. 커플이 사적인 얘기를 하겠다는데 아주머니가 끼어들어서 뭐 하게요?”오씨 아주머니는 잠깐 생각하더니 결국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차피 눈에 보이는 범위 내에 있어 두 사람이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인다고 해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여보,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우리 아빠 성격에 절대 물러서지 않을 텐데.”정자 안에서 조선미가 먼저 질문을 던지면서 차를 두 잔 따랐다.“선미 씨 아버님 목숨을 살려드리고 그 조건으로 선미 씨랑 만나게 해달라고 했죠.”유진우는 숨김없이 일의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말했다. 그의 얘기를 듣고 난 조선미는 살짝 화난 눈치였다.“아빠는 정말 고집이 세네요.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니.”“그래서 이 일 어찌하면 좋을지 얘기하려고 찾아온 거예요.”유진우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요 며칠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요. 이 결혼을 막으려면 두 가지 선택밖에 없어요. 아빠를 설득해서 생각이 바뀌든지, 아니면 선우 가문에서 먼저 파혼하자고 하든지.”조선미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우리 아빠는 고집불통이라 가족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분이거든요. 그런 아빠를 설득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가 아빠의 근심거리를 없애준다면 모를까.”“근심거리요? 그게 뭔데요?”유진우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조선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천천히 말했다.“아주 오래전에 조씨 가문이 블랙지존이라는 사람을 건드렸거든요. 그 사람은 악랄하고 잔인한 데다가 수단까지 괴이해서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어요. 그동안
유진우는 조선미와 만난 후 바로 떠나지 않고 조군수의 병을 치료한다는 이유로 조씨 저택에 머물렀다.오씨 아주머니는 혹시라도 유진우와 조선미가 도망이라도 칠까 봐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두 사람이 조금이라도 친밀한 행동을 보인다 싶으면 바로 말리곤 했다.특히 해가 지고 난 후에는 두 사람을 절대 만나지 못 하게 했다. 유진우는 이런 상황이 어이없기만 했다.밤새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이튿날 오전, 조씨 가문 송년회가 막을 열었다.조씨 가문의 직계 가족과 방계 가족들이 잇달아 현장에 도착했다. 수억 원대의 고급 자동차들이 광장에 즐비해 있었다.5대 재벌 중 하나인 조씨 가문은 대가문답게 자손들이 아주 많았다. 직계와 방계 모두 합하면 적어도 백여 명은 될 것이다.사실 조씨 가문 자제 외에도 회사의 중요 인사나 귀빈도 송년회에 초대받았다. 하여 송년회 당일 조씨 저택은 그야말로 시끌벅적했다.족장인 조군수는 유진우가 놓은 침을 맞고 나서 안색이 눈에 띄게 많이 좋아졌다. 아직 몸이 쇠약하긴 했지만 앉고 서서 걷는 건 별문제 없었다.“조씨 가문 송년회에 매년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오나요?”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손님들을 보며 유진우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그럼요!”옆에 앉아있던 조아영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우리 조씨 가문이 사업을 크게 하다 보니까 인맥이 넓거든요. 그래서 매년 송년회에 아주 많은 손님들이 축하해주러 와요.”“우리가 선우 가문이랑 사돈을 맺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잘 보이려고 찾아왔을 뿐이에요.”조선미가 코웃음을 쳤다.과거의 송년회는 절대 오늘처럼 이렇게 시끌벅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어떤 이들은 선우 가문 때문에 온 것이다.“어이, 유진우! 너 왜 아직도 여기 있어?”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고개를 돌아보니 어제 만났던 젊은 여자와 조준서가 마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젊은 여자는 섹시한 몸매가 돋보이는 레드 드레스를 입었고 정교하고 요염한 얼굴이 아주 유혹적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누구 짓이야!”우르르 쓰러진 사람들을 보고 있는 조선미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만약 한둘이 중독되었더라면 그나마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테지만 백여 명의 사람이 동시에 중독됐으니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었다.독을 탄 사람의 목적은 조씨 가문을 완전히 멸하려는 게 분명했다!“아빠, 엄마, 큰아버지! 둘째 큰아버지!”하나둘 연이어 쓰러지는 가족들을 보고 당황한 조아영이 황급히 달려갔다. 그런데 그녀가 그들에게 달려가기 전에 푸 하고 피를 토하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아영아!”조선미가 굳어진 얼굴로 다가가려던 그때 유진우가 그녀를 말렸다.“가지 마요! 술에 독을 탄 게 아니라 공기예요!”“그럼 어떡해요? 무슨 방법이라도 써서 저들을 구해야죠.”조선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족들이 전부 중독되어 피까지 토하니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일단 이 약부터 먹어요.”유진우는 하얀 단약을 꺼내 조선미의 입에 쏙 넣었다. 해독단이라 불리는 이 약은 이름 그대로 독을 해독하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었다.“해독하려면 독이 어디서 퍼져나갔는지부터 찾아내야 해요. 나한테 시간을 좀 줘요.”조선미의 안전을 확보한 후 유진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한 독이라면 색깔도 냄새도 없거나 주변 환경과 하나가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블랙지존이야! 블랙지존의 짓이 틀림없어!”바닥에 누워있던 조군해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흥분한 탓에 또 피를 토했다.“저 알았어요! 블랙지존이 이번 송년회에서 우리 조씨 가문을 몰살하려나 봐요!”둘째 조군표가 이를 꽉 깨물고 분노를 터트렸다.다행히 조군표는 실력이 꽤 있는 무사라 몸이 아주 튼튼했다. 하여 중독되었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증상이 가벼웠다. 하지만 그래도 독 때문에 목숨을 잃는 건 시간문제였다.“또 블랙지존이야? 벌써 수년이나 지났어. 언제까지 우리 가문을 못살게 굴 작정인데!”조군수는 숨이 멎을 정도로 기침이 심했다. 안
정신없는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백여 명의 사람들이 전부 해독약을 마셨다. 비록 사지에 힘이 쭉 빠지고 안색이 창백했지만 적어도 생명에는 위험이 없었다.바삐 돌아친 후 조선미는 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고 유진우도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그가 몸에 지닌 약물의 종류가 많았기에 다행이지, 안 그러면 이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다 챙기지 못했을 것이다.“진우 씨 덕분에 살아났어요. 안 그러면 우리 가문이 이번에 다 몰살당했을 거예요.”조군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말 하마터면 조씨 가문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을 뻔했다.“별말씀을요. 당연히 제가 해야죠.”유진우가 손을 내저었다.“작은아버지,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그때 조준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우리가 중독됐는데 왜 저 자식한테 해독약이 있어요?”“그게 무슨 말이야?”조군수가 눈살을 찌푸렸다.“작은아버지, 송년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부 조씨 가문의 자제들이거나 귀한 손님들이에요. 다들 서로 잘 알고 있지만 저 자식만 정체를 알 수 없다고요!”조준서는 유진우에게 손가락질했다.“지금 내가 독을 탔다고 의심하는 거예요?”유진우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흥, 이번 중독 사건의 범인은 내부에 있는 게 틀림없어. 넌 독의 근원지를 정확하게 찾아냈고 또 해독까지 해줬어. 의심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조준서의 얼굴에는 그에 대한 의심이 가득했다.“경고하는데 함부로 허튼소리 지껄이지 마! 만약 진우 씨가 범인이라면 당신들을 왜 구했겠어?”조선미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그걸 꼭 물어봐야 알아? 당연히 우리 믿음을 얻으려고 그러는 거지!”조준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저 자식의 자작극일지도 몰라. 먼저 우리를 중독되게 한 다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해독해주는 거지. 이런 악랄한 수단을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어.”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유진우에게 쏠렸다.경계와 의심, 분노,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 뒤섞
적대심 가득한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유진우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와주지 않는 건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날 범인으로 몰아간다고? 정말 재수 없어!’“유진우, 왜 말이 없어? 도둑이 제 발 저려서 찍소리도 못하는 거야?”조준서는 끝까지 캐묻겠다는 기세로 무섭게 몰아붙였다.“당신이 이렇게까지 얘기한 마당에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어요?”유진우가 피식 웃었다.“당신들 목숨을 구한 나한테 독을 쓴 범인이라고 몰아붙이지 않나... 당신들처럼 은혜도 모르는 사람들은 처음이에요.”“흥, 아직도 변명이야?”조준서의 눈빛이 서늘해졌다.“만약 네가 독을 쓴 게 아니라면 설명해 봐. 너한테 어떻게 해독약이 있을 수 있어?”“그래! 어떻게 해독약을 갖고 있어?”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물었다. 일이 하도 딱딱 맞아떨어져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난 의사라서 약물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당신들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진우 씨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건 내가 증명할 수 있어요!”조선미가 나서서 유진우에게 힘을 보탰다.“저도 증명할 수 있어요!”조아영도 맞장구를 쳤다.두 사람은 유진우의 의술과 인품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래. 네가 의사라서 마침 해독약이 있었다고 쳐. 그럼 넌 왜 중독되지 않은 건데? 네 몸이 튼튼해서 그 어떤 독에도 중독되지 않는다는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마.”조준서가 계속하여 캐물었다.“당신 추측이 맞아요. 난 그 어떤 독에도 중독되지 않아요.”유진우가 진지하게 대답했다.그의 실력 앞에 일반 독은 아예 맥도 추지 못한다. 전에 10대 기이한 독 중의 하나인 블랙 스네이크 독에 중독됐을 때도 한잠 자고 일어나니 말끔히 해독되었다.“다들 들었죠? 이 얼마나 가소로운 핑계인지 좀 보세요.”조준서는 코웃음을 치고는 이내 싸늘한 얼굴로 바뀌었다.“유진우, 너 정말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럼 미안한 짓을 하지 말아야죠. 아무튼 오늘 누구도 진우 씨를 건드릴 수 없어요!”조선미는 그 누구의 체면도 봐주지 않았다. 그녀 눈에 자기 남자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누명이 아니라 진짜로 죄를 지었더라도 끝까지 감쌀 생각이었다.“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른 조군표가 호통쳤다.“가족의 생사가 달린 큰일에 어린 것이 감히 끼어들어? 여봐라, 당장 큰아가씨를 방으로 돌려보내!”“알겠습니다.”오씨 아주머니 등 몇몇은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조선미를 연회장 밖으로 끌어냈다.그 모습에 유진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몇 번이고 나서서 말리고 싶었지만 결국 참았다. 조씨 가문의 행동은 이미 그의 화를 충분히 돋우었다.“유진우, 이젠 널 도와줄 사람이 없어.”조준서가 앞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내리깔고 웃었다.“내가 너한테 빨리 떠나라고 진작 얘기했었지? 내 말 듣지 않고 기어코 있더니 꼴좋다. 인제 어때? 후회되지?”“난 독을 쓴 범인이 아니에요.”유진우는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범인이 옳든 아니든 그게 중요해? 내가 너라고 하면 너인 거야!”조준서가 싸늘하게 웃었다.“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날 모함하고 있다는 거죠?”유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의심을 당하는 건 당하는 거고 모함은 또 다른 일이었다.“그렇다면 뭐?”조준서가 조롱 섞인 얼굴로 말을 이었다.“아무튼 사람들은 해명이 필요할 뿐이야. 다들 네가 범인이길 기대하는 눈치던데? 어때? 화나고 답답하지? 그렇다고 해도 뭘 어쩔 수 있을 것 같아?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권력이 있어야 해. 너 같은 천민은 희생양이 되기 참 쉬워. 그러니까 그냥 인정해!”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소리를 질렀다.“이 자식을 잡아들여서 모질게 고문해. 감히 반항한다면 죽여도 좋다!”“네!”그의 명령에 조씨 가문 경호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꺼져!”유진우가 몸을 파르르 떨며 무서운 기운을 내뿜자 사람들이 순식간에 튕겨 나갔다.“감히 반항해? 역시 도둑이 제 발 저린 거 맞네! 경
“아니에요?”유장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용호산은 여태껏 무림인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무관심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서태양이 말했다.인재를 선발해 위상을 높이려고 진무사가 나섰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하지만 용호산은 전혀 관계가 없지 않은가?“그럼 무슨 의도인데요?”유장미가 되물었다.“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궁금하거든?”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서태양은 어깨를 으쓱했다.“보혁 씨는 내막에 훤하니까 화두를 꺼낸 거겠죠?”유이슬이 시선을 돌렸다.“내막까지는 아니지만 주워들은 소식이 몇 가지 있긴 해요.”염보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로는 용호산 뒷산의 금지구역에 최근 신비로운 보물이 나타났는데 향후 100년 동안 무림인들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요.”“무슨 보물이 그렇게 대단해요?”유장미가 깜짝 놀랐다.유이슬과 서태양도 예상치 못한 듯 충격을 금치 못했다.무림인들의 흥망성쇠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만약 제 추측이 맞는다면 용원의 기와 관련된 보물일 거예요.”염보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순간, 유진우는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이내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용원의 기? 그게 뭔데요?”유장미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용맥의 정수이기도 하죠.”유이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며칠 전 호룡각이 와해하면서 지하 용맥이 다섯 개의 용원의 기로 변해 세상에 뿔뿔이 흩어졌어. 소문에 의하면 용원의 기를 얻는 자는 천하무적이 되어 승승장구한다고 해.”호룡각이 무너지고 용맥이 파괴된 일이 워낙 큰 이슈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진짜요?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있어요?”유장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서에서 관련된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용원의 기를 얻은 자들은 세상을 주름잡는 수장이거나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었어.”유이슬이 한마디 보탰다.“맞아요.”염보혁이 대
유진우는 옆에 있는 염보혁을 흘깃 쳐다보았고, 속으로 상대방이 아무리 예뻐도 남자를 좋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쿨럭!”염보혁은 사레가 들린 나머지 연신 기침하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슬 씨, 지금 절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네요.”“당연히 칭찬하는 거죠. 그런 얼굴을 보고도 어떤 남자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어요?”유이슬이 정색하며 말했다.“네?”염보혁은 말문이 막혔다.설령 사실일지언정 어찌 면전에서 대놓고 말할 수 있지?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정 믿기 어려우면 태양한테 물어봐요.”유이슬이 문득 말했다.한편, 서태양은 염보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시선을 돌렸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싶었다.“제가요?”서태양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선배, 장난하지 마세요. 저랑 무슨 상관이죠?”“뭔가 냄새가 나는데요?”유장미가 눈썹을 까딱하더니 눈알을 굴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설마 보혁 씨한테 진짜 반한 건 아니죠?”“이... 계집애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서태양이 펄쩍 뛰면서 얼굴이 벌게진 채 고래고래 외쳤다.“남자끼리 엮일 리가 없잖아.”“침착해요. 단지 농담했을 뿐이에요.”유장미가 키득거리며 말했다.“게다가 남남 커플이 진짜 사랑이죠. 어차피 안 될 건 없잖아요. 만약 사귈 생각이 있다면 진심으로 축복해줄게요. 하하하!”“입만 열면 헛소리 하네.”서태양은 짐짓 화가 난 듯 혼내려는 액션을 취했다.유장미는 잽싸게 유이슬의 등 뒤로 숨어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산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당사자인 염보혁은 말문을 잃었다.더욱이 유장미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그를 흘끔거리는 서태양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몰래 훔쳐보는 탓에 괜히 기분이 세했다.“진우 씨, 이슬 씨, 다들 용호산은 처음이죠? 제가 구경 좀 시켜드릴까요? 주변에 뭐 있는지 소개해줄게요.”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염
술이 몇 잔 오가자 서서히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이슬 씨, 방금 검종의 제자라고 하시던데 무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용호산에 오른 건가요?”염보혁이 넌지시 물었다.“그런 셈이죠.”유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성격이 무심한 편이라 말주변이 딱히 없었다.“사실 저희는 스승님의 명을 받고 찾아왔어요.”상대적으로 외향적인 유장미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노천사가 용호산에서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거든요. 검종 뿐만 아니라 천하회, 주술교를 포함한 파벌에서 최정예 제자들을 파견해 출전할 예정이에요.”“그럼 검종에서는 세 분이 참석하는 건가요?”염보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요.”유장미가 고개를 저었다.“저희는 단지 구경하러 왔을 뿐,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는 따로 있어요.”그녀와 서태양은 선천 후기에 속했고, 유이슬은 실력이 뛰어나긴 했으나 반보 마스터에 불과했다.어찌 됐든 천교에 비하면 열세에 처하는지라 검종을 대표해서 출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따로 있다니? 설마 홍군림이에요?”염보혁의 눈썹이 까닥했다.“그건 저도 잘 몰라요.”유장미가 생긋 웃었다.“워낙 제멋대로에 신출귀몰하는 사람이라 이번 무림대회에 참가할지 아무도 몰라요. 만약 홍 선배가 진짜 출전한다면 우승은 우리 검종이 차지할 거예요.”홍군림은 천교 랭킹의 1위에 올랐을뿐더러 어린 나이에 경천 랭킹에 진입한 검종의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만 성격이 까칠하고 독불장군이라 종주를 제외하고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장미야, 그건 네 생각이고.”이때 유이슬이 입을 열었다.“홍 선배가 실력이 뛰어나고 검종의 천재로서 일반 무사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능력자가 한 명 더 있잖아.”“누구요?”유장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장혁.”유이슬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홍 선배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요?”유장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막상막하야. 천교
“네?”염보혁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특히 잘 보이기 급급했던 서태양은 굳은 얼굴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허공에 손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럴 수가?방금 목숨 걸고 구하려던 사람이 남자였다니?“남자...? 농담이죠?”붉은 옷 소녀가 염보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경국지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인이 대체 어디를 봐서 남자란 말인가?푸른 옷 여인은 입만 벙긋했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흡혈파 망나니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한테 집적거렸다니?취향 한번 독특했다.“아니요. 진짜 남자예요.”염보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밖에 나가면 여자로 오해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붉은 옷 소녀가 말을 아꼈다.“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염보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해탈한 듯 말했다.“아쉽네요.”붉은 옷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본인이 이렇게 예쁜 얼굴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선배? 왜 그래요? 괜찮아요?”그녀는 아직도 넋을 잃은 서태양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어깨를 툭 쳤다.“응? 아, 괜찮아. 단지 조금 놀랐을 뿐이야.”서태양은 꿈에서 깨어난 듯 금세 정신을 차렸다.다만 눈빛만큼은 남자한테서 떠나지 않았다.이렇게 요염한 얼굴이 사내란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그야말로 재능 낭비이지 않은가?“저는 염보혁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염보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유이슬이에요.”푸른 옷 여인이 대답했다.“저는 유장미라고 해요.”붉은 옷 소녀가 활짝 웃었다.비록 남자이지만 미모에 저절로 눈이 갔다.“서태양입니다.”서태양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시죠?”염보혁은 손을 내밀더니 소개를 이어갔다.“이쪽은 유진우 씨, 그리고 두 분은 호위무사인...”“춘화와 추월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수염 난 사내의 몸에 피투성이 상처가 생겼다.눈 깜짝할 사이에 연신 검에 찔린 탓에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비록 수염 난 사내가 힘은 더 셌지만 기교에서는 한참 못 미쳤다.여자의 화려한 검술은 감탄을 자아냈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악!”수염 난 사내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사지가 부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은 마치 좀비를 연상케 했다.온몸은 피가 흥건했고 상처로 가득했다. 비록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형님!”패배한 우두머리를 보자 흡혈파 제자들이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항상 위풍당당하고 기세등등했던 수장이 이런 몰골을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젠장! 감히 우리 형님을 다치게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저년을 없애버려!”흡혈파 제자들이 고래고래 외치며 검을 빼 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여자를 덮쳤다.“무용지물이야.”푸른 옷 여인은 콧방귀를 뀌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었다.얼마 안 되어 흡혈파 제자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채 선혈이 낭자했다.“역시 대단하세요!”눈앞의 광경에 붉은 옷 소녀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망나니 따위가 감히 검종에게 대들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서태양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뭐... 뭐라고? 너희들이 검종 제자였어?”흡혈파 제자들은 안색이 돌변하더니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검종은 무림인들의 세계에서 3대 문파 중 하나로 천하회와 주술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비록 제자들이 많지 않았지만 뛰어난 인재들밖에 없다.특히 검종의 홍군림은 어린 나이에 천교 랭킹 1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경천 랭킹에 진입하여 세계 10위의 강자가 되었다.경천 랭킹 10위권에 검종 제자가 무려 2명이나 있는데 압도적인 실력으로 3대 파벌의 수장 자리를 거머쥐었다.여기서 검종의 제자들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이제야
“윽!”서태양은 이를 악물고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온 채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이내 양손으로 검을 쥐고 온 힘을 다해 어깨를 짓누른 흡혈검을 떼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힘이 점점 더 가해졌고 무릎이 닿은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작 이런 실력으로 감히 우리 흡혈파한테 덤비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수염 난 사내가 냉소를 지었다.“형님! 멋져요.”“역시 대단하세요.”부하들이 질세라 감탄했다.북쪽에서 흡혈파라고 하면 꽤 이름 있는 큰 파벌인지라 애송이 같은 놈이 도발할 만한 게 아니었다.“감히 내 앞에서 영웅 행세해? 넌 오늘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야. 교훈 삼아 사지를 부러뜨려줄게!”수염 난 사내가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흡혈검을 들어 올려 서태양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챙!검이 닿기 직전 청색 보검이 불쑥 나타나 허공에서 공격을 막아냈다.“응?”수염 난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푸른 옷 여인이 보검을 들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선배?”서태양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제야 한숨 돌렸다.조금만 늦었더라도 오른손을 잃어버렸을 텐데 그나마 선배가 제때 도움을 줘서 천만다행이었다.“괜히 참견하지 마.”수염 난 사내가 음흉하게 웃었다.“우리 후배한테 손을 대는 순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여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맞아! 너희들 같은 망나니는 벌을 받아 마땅하지.”이때, 붉은 옷 소녀가 검을 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언니, 제가 도와줄게요.”“아니야. 넌 태양이랑 지켜보고 있어. 이런 놈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푸른 옷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수염 난 사내가 히죽 웃었다.“그런 왜소한 몸으로 오빠의 검을 어찌 막으려고? 차라리 무기는 내려놓고 침대에서 겨뤄보는 건 어때?”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부하들이 폭소를 터뜨렸다.곧이어 음흉한 시선으로 여자를 훑으며 멋대로 평가하
서태양이 움직이자 수염 난 사내의 뒤에서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두 명이 튀어나왔다.두 사람은 무기로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몸체는 강한 피비린내와 함께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는 칼날이 오랫동안 선혈에 노출된 결과였다.무림인들의 세계에서는 흡혈검이라고 불렀다.다만 아쉽게도 그들이 지닌 검은 아직 미성숙 단계였고 기세가 한창 부족했다.챙! 챙!서태양이 먼저 검을 빼 들고 혼자서 두 명의 사내와 대결을 벌였다.그들은 기세등등하게 맞서 싸웠지만 힘만 강했을 뿐 행동이 굼뜬 편이었다.공격할 때마다 동작이 다소 어설펐다.반면, 서태양은 누가 봐도 고수의 가르침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스피드, 힘,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느 하나 뒤처진 데 없었다.세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는 순간 실력 차이가 현저했고, 서태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내를 쓰러뜨렸다.그리고 응징할 겸 각자의 다리에 검을 관통했다.“흥! 고작 이런 실력으로 우쭐거려? 제 주제도 모르고.”서태양은 장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좋아! 잘했어!”승리를 거머쥔 서태양을 보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비록 나서서 싸울 용기는 없었지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그래도 실력은 꽤 있나 보네? 어쩐지 참견하더라니.”수염 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고 음침한 목소리로 협박했다.“하지만 오늘 임자를 만났지. 흡혈파를 마주친 이상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흡혈파는 무슨, 들어보지도 못했구먼.”서태양의 표정은 기고만장했다.“하! 괜찮아. 네 피를 전부 흡수하고 나면 우리가 왜 흡혈파라고 불리는지 알 거야.”수염 난 사내가 이죽거리더니 두말없이 공격을 개시했다.그가 발을 내딛자마자 맹렬한 기세가 솟구쳤고, 손에 든 흡혈검은 핏빛을 뿜어내며 곧장 서태양을 덮쳤다.앞서 상대했던 부하들과 달리 수염 난 사내의 흡혈검은 살기로 가득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쉽게 화를 부르는 법이다.염보혁은 남자였지만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요염한 얼굴을 지녔다.길을 나서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지금처럼 깡패 무리와 마주할 때면 번번이 시비에 휘말리기 일쑤였다.유진우는 모른 척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어이, 이쁜이. 저런 나약한 놈이랑 술 마셔서 뭐 하겠어? 차라리 우리랑 한잔하지, 아주 즐겁게 해줄 테니 말이야!”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염보혁의 턱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이 손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염보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어여쁜 외모 탓에 남녀를 불문하고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처럼 대놓고 희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오, 이쁜이가 화를 내네?”수염 난 사내는 턱을 문지르며 비웃었다.“솔직히 말해서 화난 얼굴이 더 매력적인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감탄스럽군.”그의 말에 뒤따르던 무리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유진우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눈앞의 이 사내는 제법 능숙하게 수작을 부렸다.염보혁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셋을 센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봐주지.”염보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본다고? 하하하!”수염 난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이거 제법 앙칼진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위층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우리를 손 봐줘, 어때?”“맞아, 맞아! 방도 넉넉하니 차례대로 너랑 놀아줄 수 있다고!”그의 동료들도 시시덕거리며 말을 보탰다.“셋.”염보혁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이쁜이, 괜히 버티지 말고 그냥 올라가자. 내가 아주 다정하게 대해줄 테니 말이야.”수염 난 사내는 입을 커다랗게 벌려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댔다.“둘.”염보혁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유지했다.“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안아 올라가는 수밖에.”그가 손을
유진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혁 씨가 이렇게까지 많은 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제 생각엔 장일청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것 같은데요.”용호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염보혁이 이렇게나 많이 알고 있다니, 이건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었다.“진우 씨께서 과찬해 주시는군요. 저는 그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듣는 걸 좋아해서 호기심에 이런저런 소문을 알아본 것뿐입니다. 사실 별다른 능력은 없어요.”염보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덧붙였다.“하지만 만약 진우 씨께서 무림대회에 참가하신다면 전 온 힘을 다해 진우 씨가 우승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보혁 씨,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전 그저 세상 구경이나 해볼 겸 참가하는 것뿐입니다. 우승 같은 건 감히 꿈도 꾸지 않아요. 애초에 제 실력으로 어떻게 그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진우 씨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염보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우 씨는 외모도 준수하고 기품 또한 비범하시죠. 멀리서 봐도 강렬한 기세가 느껴졌습니다. 비록 진우 씨의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진우 씨는 절대 범상한 인물이 아닙니다!”“보혁 씨께서 저를 이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평범한 출신에 보잘것없는 실력을 갖췄을 뿐입니다. 아마 실망할 겁니다.”“하하, 괜찮습니다. 커다란 황금 잉어가 어찌 작은 연못에서만 머물겠습니까? 바람과 구름을 만나면 반드시 용이 되어 날아오를 것입니다. 지금 진우 씨의 명성이 미미할지라도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하늘 높이 날아오를 날이 올 거라고!”염보혁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눈빛은 절대적인 믿음을 담고 있는 듯했다.유진우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뭐지? 분명 오늘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