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에는 제발 똑똑하게 살아.”유진우는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홍진호를 마치 쓰레기 버리듯 옆으로 휙 던져버렸다.“쿵!”굉음과 함께 홍진호의 무거운 몸이 도윤진 일행의 발밑에 떨어졌다.사람들은 충격에 빠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홍진호는 죽어서도 유진우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자신을 죽였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으악...”발밑에 축 늘어진 시체를 보며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얼이 빠져 우두커니 서 있을 뿐 한참이 지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두려움이라곤 모르던 재벌 집 도련님이 그냥 이렇게 죽었다고? 말도 안 돼!’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방 전체가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다.“유진우 씨, 당신 미쳤어요? 감히... 홍진호를 죽여요?”도윤진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진 얼굴로 말했다. 유진우가 홍진호를 죽인 건 거지가 왕을 죽인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미친 짓이었다.“당신 이제 정말 끝났어요! 진호 형님을 죽였으니 앞으로 세상 어디에도 발붙일 자리가 없을 겁니다. 홍씨 가문의 보복을 끊임없이 당할 거라고요.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 가족, 친구 모두 홍씨 가문의 보복 대상이 되어서 남은 인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갈 거예요.”최우영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포효했다.“미쳤어, 미쳤어! 저 자식 미쳤어!”“홍씨 가문은 무사 가문이고 세력은 남성 전체에 퍼져있어. 게다가 제자도 수없이 많은데 그런 홍씨 가문을 건드렸으니 수많은 고수와 적이 된 거나 마찬가지야!”“제 주제도 모르는 놈이 감히 진호 도련님을 죽여? 이젠 그 누가 와도 널 구하지 못해!”현장이 초토화가 돼버렸다. 유진우가 겁도 없이 진짜로 홍진호를 죽일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건가?“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아. 홍진호가 날 죽이려 했는데도 살려두라고?”싸늘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달리 그의 말투는 무척이나 덤덤했다.“미쳤어, 정말 미쳤어. 당신 꼭 후회할 거예요!”도윤진이 노발대발했다. 그
조아영을 집에 바래다준 후 유진우는 평안 의원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대문을 열자마자 눈앞의 광경에 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약품이고 약상자고 전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그때 이청아가 방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조급한 얼굴로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구릿대... 구릿대 어디 있어?”그녀는 손에 약 처방을 들고 여기저기 뒤지다가 결국 약장의 맨 꼭대기에서 구릿대를 보관하고 있는 약상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너무 높아 의자를 딛고 올라서는 수밖에 없었다.“지금 뭐 하는 거야?”유진우가 무뚝뚝하게 물었다.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이청아는 그만 의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머리가 땅에 거의 닿을 무렵, 유진우는 본능적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고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유진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잡아준 후 바로 내려놓았다.“왔어?”이청아의 눈빛이 잠깐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감추었다.“이 늦은 밤에 어디 갔었어? 전화는 왜 또 계속 안 받아?”“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느라 휴대 전화 확인 못 했어. 여긴 무슨 일로 왔어?”유진우가 덤덤하게 물었다. 이청아의 거만하고 도도한 성격에 절대 먼저 그를 찾아올 리가 없는데.“우연히 지나가다가 할아버지가 문 앞에 쓰러진 걸 발견하고 부축해서 안으로 들어왔어.”이청아가 설명했다.“쓰러져? 대체 무슨 일이야?”유진우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도둑들이랑 싸우다가 심하게 다쳤어. 얼른 안으로 들어가 봐.”이청아의 재촉에 유진우는 아무 말 없이 곧장 안으로 뛰쳐들어갔다.아니나 다를까 주정뱅이 영감이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었고 침대 밑의 대야에는 피가 가득했다. 그에게 다가가 맥을 짚어보던 유진우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주정뱅이 영감에게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나타나는 징후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쇠약해지는 속도가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청운 리조트.“아빠, 제발 진우 오빠 좀 도와주세요. 안 그러면 진우 오빠 죽어요!”남궁은설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애걸복걸했다.“흥! 지금 유진우 때문에 아빠한테 이렇게 사정하는 거야? 유진우가 홍진호를 죽인 건 아주 극악무도한 짓이야. 철민이가 강능의 엘리트들을 전부 불러 모았어. 오늘 누구도 유진우를 구하지 못해!”남궁보성이 으름장을 놓았다.“아빠, 진우 오빠가 절 여러 번이나 살려줬잖아요. 제 얼굴을 봐서라도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남궁은설이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리조트로 돌아온 후로 그녀는 계속 무릎을 꿇은 채 아버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왜냐하면 미쳐 날뛰는 홍철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버지밖에 없으니까.“하도 걔가 널 살려준 적이 있어서 그나마 죽이지 않은 거야!”남궁보성의 낯빛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아빠, 진우 오빠 목숨만 살려준다면 앞으로 아빠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들을게요.”남궁은설이 이마를 땅에 조아리며 애걸했다. 잠시 후 이마에 피가 흥건했다.“못난 녀석! 정말 사리 분별도 할 줄 모르는구나!”남궁보성이 책상을 탁 치며 일어났다.“아무런 상관도 없는 녀석 때문에 지금 나더러 홍씨 가문이랑 등을 돌리라고? 정녕 뭐가 더 중요한지 몰라서 이래?”“전 그딴 거 몰라요. 전 단지 진우 오빠가 절 살려줬으니까 보답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어요.”남궁은설이 눈물범벅인 채로 말했다.“너 너... 이렇게나 어리석은 녀석이었어?”남궁보성은 도무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윤진아, 당장 저 녀석을 끌고 가서 방에 가둬. 절대 리조트를 한 발자국도 나가게 해선 안 돼!”“알겠습니다!”도윤진은 하는 수 없이 남궁은설을 강제로 끌고 갔다.“언니, 제발 언니라도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어찌나 심하게 울었는지 눈이 다 빨갛게 충혈되었고 한껏 풀은 죽은 모습이었다.“이 바보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때문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도윤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사랑에 눈뜨기 시작한 남궁은설이 유진우를
“저 자식이 진짜 왔네?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용기는 가상하지만 어리석기 짝이 없는 놈이야!”한바탕 소란이 일면서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네가 바로 유진우야?”홍철민이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분노를 터뜨렸다.“그래, 나다.”유진우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내 아들 홍진호, 네가 죽였어?”홍철민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그를 흉악스럽게 쳐다보았다.“그래.”유진우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무릎 꿇어!”홍철민이 호통쳤다.“나더러 무릎을 꿇으라고? 넌 그럴만한 자격 없어.”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너한테 기회를 한번 줄게. 지금이라도 평안 의원 사람들을 풀어주고 영감님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그의 말에 현장이 발칵 뒤집혔다.“대박! 저 자식 미친 거 아니야? 죽음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저렇게 나대?”“진호 도련님을 죽인 것도 모자라 회장님더러 사과하라니, 정말 미쳐 날뛰는 놈이야!”“무식하면 겁도 없다고 저 자식 아직 자기가 누굴 건드렸는지도 몰라.”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이 자식아,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기나 해?”홍철민의 낯빛이 말이 아니게 어두워졌다.“지금 독 안에 든 쥐는 너야! 너무 처참한 꼴로 죽기 싫으면 당장 현주과를 내놓고 무릎 꿇고 빌어. 안 그러면 뼈도 못 추리게 될 거야!”“현주과는 없고 목숨은 있는데. 어디 재간 있으면 한번 빼앗아보든지.”유진우가 그에게 도발했다.“그래, 아주 좋아! 나한테 함부로 덤벼들었으니 제대로 상대해주지! 여봐라, 당장 저놈의 손발을 잘라버려! 내 원한이라도 풀게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홍철민의 명령에 몇몇 무사들은 앞다투어 공을 세우려고 냅다 유진우에게 달려들었다.“쾅!”유진우가 땅을 힘차게 밟자 바닥이 갈라지면서 돌이 마구 튕겼다. 수많은 돌이 마치 총알처럼 무사들의 몸에 그대로 꽂혔다. 무사들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된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전부 다 같이 덤벼!”홍철민이
10분 후, 무관 전체에 온통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인파 속에 우뚝 서 있는 유진우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처럼 기세가 드높았고 위풍당당했다.몇몇 젊은 남녀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유진우가 이토록 실력이 막강할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홍씨 무관을 무너뜨렸다.이들은 전부 혼자서 열 명 정도는 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엘리트들이다. 그런데 단 몇 분 만에 전부 맥없이 쓰러졌다.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X발! 저 자식 왜 저렇게 강해? 미친 건가?”“세상에나.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놈이야?”최우영 일행도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특히 몇몇 여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입을 움켜쥐었다.혼자서 저 많은 사람들을 전부 쓰러 눕히다니,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홍씨 무관도 뭐 그저 그렇네.”유진우는 꼿꼿하게 서서 홍철민을 빤히 쳐다보았다.“너 이 자식 실력 좀 있구나? 전에는 내가 너무 얕봤네.”홍철민이 외투를 벗자 탄탄한 근육과 허리춤에 찬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여기까지야. 오늘 내가 직접 네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그러더니 장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주변에 차가운 빛이 한순간에 퍼져나갔다.“회장님이 움직이셨어. 저 자식 오늘 죽었다!”그 광경에 최우영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저 아직 회장님의 실력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회장님 실력이 얼마나 강하신가요?”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물었다.“언더 랭킹이라고 들어봤어?”“당연히 들어봤죠. 언더 랭킹은 무술 실력을 평가하는 랭킹이잖아요. 용국에 무사가 수천만 명이 있지만 언더 랭킹에 든 사람은 백 명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 모두 최고의 고수들이고요!”“알면 됐어. 사실 회장님이 바로 언더 랭킹 10위 안에 드신 강자야!”최우영이 우쭐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네? 언더 랭킹 10위요?”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람들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다들 홍철민
“퍽!”마지막 따귀까지 맞았을 때 홍철민의 얼굴은 이미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코와 입이 삐뚤어졌고 이도 거의 다 빠진 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그는 맥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유진우가 이 정도로 강한 실력을 지녔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기본적인 반격조차 하지 못했고 저항할 틈도 없이 계속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했다.이 정도 실력이라면 언더 랭킹 3위 안에 든 실력자가 와도 이길 수 있을지 미지수다.“내...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회장님이 졌어? 그것도 엄청 처참하게?”“저 자식... 대체 정체가 뭐야?”잠시 후, 쥐 죽은 듯이 고요하던 무관이 드디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들의 질문에 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사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까.이 싸움에서 홍철민이 졌다. 그것도 압도적으로.언더 랭킹 10위도, 레인보우 스킬도, 최강 필살기도 이 순간만큼은 그저 우스갯거리에 불과했다.유진우의 실력은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막강했다. 단지 따귀 한방으로 홍철민의 기를 확 꺾어놓았다.“너... 너 대체 누구야!”홍철민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려움에 떨며 물었다.이 작은 강능에 어찌 이런 강자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나이도 엄청 젊다. 이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네가 살 수 있냐는 거야.”그를 내려다보는 유진우의 눈빛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그 소리에 홍철민은 움찔하는가 싶더니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네가 실력이 있다는 건 인정해. 심지어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나다고도 할 수 있어. 하지만 문제는 넌 혼자고 내 뒤에는 홍씨 가문이 있다는 거야. 홍씨 가문의 제자들이 수천만에 달할 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 널리 분포되어있어. 네가 열 명, 백 명은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수천만 명을 상대할 수 있겠어? 오늘 날 죽이면 홍씨 가문 전체 공공의 적이 될 거야. 그때가 되면 넌 수많은
“으악...”사람 머리가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무관 안에 잠깐의 고요함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비명과 소란으로 발칵 뒤집혔다.홍철민이 망설임 없이 과감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칼로 자기 목을 베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 불가능했다.“당신... 대체 회장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최우영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알고 싶어요? 그럼 직접 가서 물어봐요.”유진우는 충격에 빠진 그들을 뒤로한 채 무관을 나섰다. 그런데 그가 나가자마자 중무장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현장을 물샐틈없이 포위했고 연루된 자들 전부 잡아들였다.앞으로 어떻게 처리할지는 유진우가 걱정할 바가 아니다. 조무진의 힘으로 이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그 시각 청운 리조트.“뭐? 유진우가 안 죽었다고?”소식을 들은 남궁보성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말도 안 돼. 철민이 그래도 언더 랭킹 10위 안에 드는 고수이고 홍씨 가문의 엘리트까지 전부 불러서 손쉽게 이기는 게 정상인데.”“무관 쪽에서 다른 소식이 전해진 게 없어서 구체적인 상황은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저 유진우가 무사하게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밖에 없어요.”“이상하네... 철민이 지금 어디 있어? 전화해서 물어봐봐.”남궁보성이 생각이 잠긴 얼굴로 말했다.“그게... 회장님이 사라지셨어요. 연락도 안 되고요. 지금 군대들이 무관을 지키고 있어서 아무도 못 들어가요.”“군대들이 지키고 있다고? 어떻게 된 거야?”“그건 아직 모르겠어요.”“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지 당장 사람을 보내서 알아봐.”남궁보성이 분부했다.“네!”경호원은 대답을 마치고 바로 나갔다.그런데 그때 밖에서 광풍이 불어오더니 군용 헬기 한 대가 드넓은 광장에 서서히 착륙했다. 헬기 문이 열리자 백발이 성성하고 체구가 우람한 노인이 몇몇 부하와 함께 드높은 기세로 걸어왔다.노인의 사각형 얼굴에 구레나룻 수염이 덥수룩했고 온몸에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
유진우가 다시 평안 의원에 도착했을 때 물건이 잔뜩 깨져 아수라장이 됐던 바닥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의원 전체가 환골탈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많이 피곤했는지 이청아는 책상에 엎드려 곤히 자고 있었다.그녀의 수척해진 얼굴을 내려다보는 유진우의 눈빛이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어쨌거나 그녀가 주정뱅이 영감의 목숨을 살려줬으니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그는 외투를 벗어 이청아에게 덮어주었다.“어?”이청아가 움찔하면서 눈을 번쩍 떴다.“왔어? 다친 데는 없고?”“난 괜찮아. 오늘 고생 많았어.”유진우가 고마움에 인사를 전했다.“고생은 무슨. 할아버지가 다치셨는데 돌봐드리는 건 당연한 거지.”이청아가 입술을 씰룩거렸다.“밤새 힘들었겠는데 배 안 고파?”“조금.”“자주 먹던 비빔 국수 한 그릇 말아줄까?”“응, 그래 주면 고맙고.”“잠깐만 기다려.”유진우는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솜씨를 발휘하기 시작했다.결혼 생활 3년 동안 매번 이청아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와 배가 고프다고 할 때면 야식을 만들어줬었다. 특히 그가 만들어준 비빔 국수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고 사이도 점점 서먹서먹해졌다. 그러다가 결국 이혼 도장을 찍고 말았다.“비빔 국수 다 됐어.”15분 후, 유진우는 빛깔 고운 비빔 국수 한 그릇을 내왔다.“너무 맛있게 생겼어.”이청아는 젓가락을 들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게 눈 감추듯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너무 맛있어. 요리 솜씨가 더 는 것 같아.”이청아가 오랜만에 웃어 보였다.“오랜만에 먹어봐서 그럴 거야.”유진우가 무뚝뚝하게 말했다.“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네.”이청아의 두 눈에 그늘이 살짝 드리워졌다.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 지났다. 전에 있었던 많은 일이 이젠 습관이 돼버렸다. 추울 땐 누군가 옷을 챙겨줬고, 배가 고플 땐 밥을 차려줬고, 감기에 걸려 열이 날 땐 옆에서 챙겨줬었다. 몸에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
이 순간 유진우의 눈이 피를 뿜을 듯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살기가 솟구쳤다.비록 예전에 아버지와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그동안 품었던 그 작은 분노마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단지 호룡각의 일을 완전히 해결한 후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에 효도를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둘이 만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암살당해 돌아가셨다. 이 충격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창공!” 유진우가 갑자기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손을 뻗어 창공보검을 불러들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호룡각의 잔당들을 모조리 섬멸해야만 했다!“전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유진우가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손도운이 급히 그를 막아서며 침착하게 조언했다. “호룡각은 준비를 하고 온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렇게 무모하게 뛰쳐나가신다면 복수는커녕 오히려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리실 수 있습니다!”“비키세요!” 유진우의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창공검의 칼날을 손도운의 목에 바로 겨누었다. 예리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며 상처를 내자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전하! 저를 죽이시더라도 전 전하를 막아야만 합니다. 제가 어찌 전하께서 죽으러 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께 더 이상의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손도운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진우 앞을 가로막은 채 죽음도 불사하는 자세를 취했다.유진우는 이를 악물었고 그의 손에 든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초간의 대치 끝에 그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마침내 검을 내렸다.손도운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냉정해져야만 했다. 유만수가 죽었으니 왕부가 분명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이때
다른 처녀들도 모두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진심 어린 간청을 했다.이 광경을 본 유진우는 넋이 나갔다.노란 옷 처녀의 말은 그의 귀를 때리는 듯했다.지옥 같은 일을 겪고도 이 아이들이 자신이 아닌 천하의 모든 약자들을 생각하다니... 상상도 못 했다.이런 원대한 뜻과 깨달음은 그조차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이청성이 말했듯, 이들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을 향하는 처녀들이었다.귀하고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누가 여자가 남자만 못하다 했는가?진정한 대의 앞에서 이 여자들이야말로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었다.이런 의로운 용사들이 있는데 어찌 서경이 부흥하지 않을까? 어찌 천하가 평안하지 않을까?“오빠, 결정해요. 받아주지 않으면 저 애들은 살아갈 희망조차 잃을 거예요.” 이청성이 진지하게 말했다.“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어요?” 유진우가 엄숙하게 물었다.“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모든 소녀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요! 허락하죠!”유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부터 특별 훈련을 시작할 거예요. 견뎌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의 원대한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한다면 편한 곳에서 평안히 살도록 해요.”“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노란 옷의 소녀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소녀들도 따라 외쳤다.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청성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네가 돌봐. 내일 저애들의 거처를 정하도록 해.”“알겠어요.”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소녀들을 데리고 떠났다.일행이 막 나가자 손도운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그의 표정이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고 큰일이라도 난 듯했다.“전하! 큰일 났습니다!”유진우를 보자마자 손도운은 ‘쿵’하고 무릎을 꿇고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왕부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왕께서 자객의 암살로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요?”이 말을 듣자 유진우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유
“오빠, 급한 건 알지만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아가씨들은 지금 오빠만 믿고 있고 목숨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어요. 받아들이면 좋은 점이 많을 거예요. 예를 들어, 오빠가 외로울 때...”“농담하지 말고 요점이나 말해요!” 유진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솔직히 말할게요.”이청성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장혁 씨, 사실 이 처녀들은 보기 드문 인재예요. 제가 이미 선별했는데 모두 영리하고 의지가 강해요. 조금만 가르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예요.”“무슨 뜻이에요?” 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밀사의 중요성은 잘 아실 거예요. 특히 여자 밀사는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장점이 있죠. 이 처녀들을 밀사로 키우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청성이 말했다.“말은 쉽지, 밀사 하나 키우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전 지금 제 몸 하나도 챙기기 힘든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그는 이 처녀들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지, 이용당하거나 장기말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충성심인데 그들은 이미 그걸 가지고 있어요. 장혁 씨가 그들을 구해줬고 장혁 씨의 빛이 그들의 어두운 세상을 비춰줬죠. 저애들은 장혁 씨를 신처럼 여기고 있어요.”“시간과 노력은 걱정하지 마요. 장혁 씨가 직접 가르칠 필요 없이 좋은 스승만 찾아주면 돼요. 장혁 씨 곁의 손도운이라면 아주 적합할 것 같은데요.” 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었다.“그건 청성 씨 생각이고 저 애들한테는 물어봤어요?” 유진우가 물었다.“당연히 물어봤죠. 모두 하겠대요.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이청성이 말했다.“불쌍한 사람들인데 그럴 필요까지야...” 유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장혁 씨, 어둠 속에 있어도 빛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세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발 저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