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이랬어. 너무 자주 하는 검진 때문에 나도 지쳤어.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아빠는 내려오셔서 물 한 컵을 따라 목을 축이셨다.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한 모습에 나는 더 걱정되었다. 부모님 나이가 되면 쉽게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전에 엄마가 쓰러진 적도 있었기에 나는 아빠 건강에도 문제가 생길까 봐 겁이 났다.나는 아빠에게 건강검진을 꼭 받으러 가자고 강력하게 말했다.“날이 밝으면 검사받으러 병원에 같이 가요.”나는 확고한 의지로 아빠가 반대할 틈을 주지 않았다.두 분은 시선을 주고받으시더니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지영이 말 들어요. 수십 년 동안 담배를 피웠으니 폐가 일반인보다 많이 안 좋을 거예요. 하루라도 빨리 검사받는 게 좋죠.”아빠는 힘없이 한숨을 쉬셨다.“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술이나 담배는 사회생활 하면서 피할 수가 없으니 천천히 습관이 된 거야. 알겠어. 지영이하고 병원에 다녀올게. 그러면 당신이 회사에 출근해야겠네.”“내가 출근하면 되죠. 당신 건강이 더 중요해요.”엄마가 대답했다.이렇게 한 가족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지난번에 돌아왔을 때는 아빠도 집에 계시지 않았었고 나도 하룻밤만 자고 떠났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나는 어느새 소파에서 잠들어 있었다.원래 아빠와 함께 병원에 가기로 했었는데 깨어보니 점심시간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가보니 승현이와 로아는 아빠와 함께 워터 볼 풀장에서 놀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이는 나를 보자마자 알아보고서는 안아 달라는 듯이 신나게 작은 손을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고 했는데 정말 빨리 자리고 빨리 배우는 것 같았다. 내가 보러 오지 못한 동안 둘 다 더 통통해지고 활발해진 것 같았다. 사람을 알아보고 안아달라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리고 둘 다 이젠 안정
배인호는 잠시 침묵하며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망설임은 매우 이례적이었다.예전에는 배인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도 나는 그의 말과 행동에서 빈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이 미묘하게 사라진 것 같았다.“왜 갑자기 이걸 묻는 거야?”배인호는 드디어 내게 대답했다. 하지만 명쾌한 대답이 아니라 오히려 애매모호하게 내가 되물었다.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그날 병원에서 빈이가 인호 씨의 친 아들이 아니라고 한 뒤로 인호 씨가 조금 변한 것 같아서요. 그런데 그건 후에 실수하고 하지 않았어요?”“나도 알아. 이런 일로 네가 걱정할 필요 없어. 돌아올 때 연락해 줘.”배인호는 이 일에 대해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빈이는 이 전화로 인해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빨리 병이 진행되는 것 같았다. 정말 시간이 별로 없었다. 만약 일치한 기증자를 찾지 못한다면 빈이는 어린 나이에 결국...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계속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말하게 서울시로 돌아가려고 했다.엄마는 놀라며 물었다.“이번에는 좀 더 오래 있을 거라며? 왜 이렇게 빨리 돌아가는 거야? 그쪽에 금한 일이 있니?”“빈이의 상황이 좋지 않아요. 돌아가서 같이 있어 주려고요.”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나의 대답에 엄마의 얼굴이 조금 이상해졌다.전에 나는 말썽꾸러기 빈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나는 빈이의 전화 한 통 때문에 빈이에게 서둘러 돌아가려고 했다. 빈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 변화가 커도 너무 컸다.민설아가 빈이를 학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유뿐만이 아니라 빈이를 보살펴주는 시간 동안 빈이는 내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빈이는 얌전했고 말도 잘 들었다. 또 자기를 혼내는 것을 정말 두려워하며 조심스러워하는 느낌을 받았다. 전에 말썽꾸러기 이미지와는 완전히 달랐다.나는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민설아가 교육을 잘 못한 것이었다. 배인호 부모님의 판단이 맞았다.“
총소리가 울렸다. 검은 그림자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달빛을 통해 얼굴을 확인하니 이우범이었다.방금 전화 통화에서 이우범이 기다리라고 했을 때 나는 그가 그제야 나를 찾으러 출발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도착한 것일까? 나는 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그 남자는 이우범이 누구인지 아는 듯 총을 쏘지 않고 재빨리 뒤 돌아 도망쳤다.“우범 씨 괜찮아요?”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우범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아 생명이 위험하진 않았다. 하지만 피가 그의 흰옷을 붉게 물들여 아주 위험하고 무섭게 보였다.이우범은 의식을 잃진 않았지만 총을 맞은 고통 때문에 안색이 말도 안 되게 처참해 보였다.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다시 돌아오진 않을 거예요. 빨리 구급차 좀 불러줘요.”나는 이우범을 부축할 수가 없었다. 바로 구급차를 불렀다. 마침내 경찰차와 구급차가 동시에 도착했다. 나는 진술을 할 새도 없이 이우범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으로 호송되던 중 이우범은 의식을 잃었다. 그 모습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저 의사가 하는 구급 조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우범 씨 정친 차려 봐요.”입을 열자마자 나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이 상태로는 깨어날 수가 없습니다. 병원에 가서 총알을 빼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부상 정도가 심하긴 하지만 대동맥이 파열된 것은 아니니 생명에 위험은 없을 겁니다.”의사는 걱정하는 나의 모습을 보더니 위로해 주었다.그제야 나는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피로 붉게 물든 흰 셔츠를 보니 여전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병원에 도착한 뒤 이우범은 바로 수술실로 들어가 총알 제거 수술을 받았다. 나는 수술실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이곳은 서울시 외곽이었기에 시 중심까지 가려면 한 시간 정도 더 걸렸다. 결국 오늘 밤 나는 빈이에게 돌아갈 수가 없었다.나는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릿속의 어지러운 생각들이
나의 질문에 이우범은 살짝 놀랐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난 지영 씨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줄 알았어요.”“난 모르겠는데.”나는 고개를 저으며 눈앞에 있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난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이우범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러나 나는 웃음이 나왔다.“그래요? 지금 배인호와 이런 상황이 된 게 단지 나 때문이에요? 오래전부터 배인호한테 불만이 많았던 건 아니고요?”이우범의 어두워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어서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그가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그에게 고마웠던 마음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그 당시 민설아가 강에 뛰어든 이후에 가짜 사망 신고서를 우범 씨가 만들어 준 거죠? 외국에 갈 있도록 도와준 것도 우범 씨잖아요?”나의 말이 끝나자 이우범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병실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무거웠다.그렇게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서로의 눈빛에서 뭔가를 읽으려는 듯했다.배인호가 이미 조사를 마친 일이었고 이우범과도 사이가 틀어진 마당에 딱히 숨길 필요도 없었다. 내가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 일이다.“누가 말하던가요?”이우범은 내게 물었다. 말투에 불쾌함이 가득했다.“누가 말했든지 우범 씨가 저지른 일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요. 아니에요?”말할수록 마음속으로 화가 났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 이우범이 나와 손을 잡은 것도 서란 때문만이 아니라 그때도 이미 배인호와 사이가 안 좋았을 것이다. 단지 아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었다.이우범은 배인호가 말했다고 짐작했는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인호가 조사한 거예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이어서 말했다.“그 일은 내가 한 게 맞아요. 하지만 인호를 해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때 민설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로 내게 애원했어요. 나도 마음이 약해져서 어쩔 수 없이 민설아의
“그게, 아까 출발했어요.”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어젯밤 일어난 일을 배인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그는 지금 해결해야 할 일들이 가득했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일로 그를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배인호가 대답했다. 굳이 나를 병원에서 왜 기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돌아가서 빈이를 보고 싶었다.이때 간호사가 다가와서 나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이우범은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간호사는 내게 그의 가족이냐고 물었다. 여기서 직접 이우범을 보살필지 아니면 간병인을 쓸 것인지도 물었다.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이우범을 보고 고민했다. 그가 나를 구해줬으니 내가 여기에 남아 그를 보살펴 주는 것이 당연했지만 빈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그를 보살피면 우리는 아마도 매일 같이 다툴 것 같았다.“간병인 쓸게요.”나는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이우범은 나의 말을 듣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죄책감이 느껴져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간호사는 이우범에게 상처를 소독해주었다. 나는 간병인에게 연락했다. 10분 뒤 간병인 아주머니가 오셨다. 나는 몇 마디 당부한 뒤 이우범에게 말하지 않고 바로 떠났다.차를 몰고 시 중심까지 왔는데 엄마에게서 어디냐고 전화가 왔다.새벽에 엄마는 내게 전화를 두 번이나 했었는데 내가 진술하느라 받지 못했다. 그 뒤로는 악몽을 꾸며 잠들어 전화를 다시 하는 것을 까먹었으니 분명 나를 걱정할 것이다.동시에 나도 엄마에게 위험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면 걱정하실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뒤 나는 빈이의 병원에 도착했다. 나는 익숙하게 빈이의 병실로 향했고 배인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침 책상에서 장난감을 조립하고 있었다. 아마도 빈이에게 사준 장난감일 것이다.“지영 아줌마.”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 빈이는 깜짝 놀라며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비록 목소리는 크고 신나 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가기 전보다 더 허약해진 것 같았다. 짧은
“그래. 일이 있어서 떠나야 한다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내가 사람 보낼게.”배인호는 몇 마디 더 당부하고 떠나려고 하는 듯했다.나는 바로 그의 앞을 막았다.“배인호 씨 나한테 명확하게 말해줘요.”배인호는 나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 각도에서 그를 올려다보니 여전히 그는 우월한 느낌이 들었고 잘생긴 외모가 흠잡을 데가 없었다.“뭘 알고 싶은데?”그의 얇은 입술이 살짝 열렸다.“빈이의 태도가 왜 이렇게 변한 건지 알고 싶어요. 인호 씨 부모님이 이렇게 빈이를 혼자 두고 떠나실 리가 없잖아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려줘요. 빈이는 어린아이일 뿐이에요. 민설아가 빈이를 어떻게 대했는지 인호 씨도 지금 잘 알잖아요. 난 빈이가 당신까지 잃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요.”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다. 아마도 내가 진심으로 빈이를 가엽게 역이고 있어서 빈이를 위해 생각하게 되었다.배인호는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이미 익숙한 무관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런 무관심이 빈이에게 향하는 것이었다.나는 가슴이 바닥까지 가라앉는 것 같았다.“그 문제는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지금 다른 일들을 처리해야 해. 이쪽은 너한테 부탁할게.”배인호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나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나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나는 혼자서 병실 밖에 한참을 서 있었다. 병실 안에서 빈이는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주삿바늘을 꼽지 않은 손으로 배인호가 조립해 준 장난감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장난감은 한 손으로 가지고 잡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빈이의 작은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내가 도와줄게.”나는 바로 달려가서 그 장난감을 빈이의 옆에 놓아주었다.빈이는 한 손으로 그 장난감을 안고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아줌마. 아빠는요? 일하러 갔어요?”“맞아. 회사 가셨어. 왜? 방금 갔는데 아빠 보고 싶어?”나는 웃으며 물었
빈이의 연이은 질문에 나는 살짝 놀랐다. 바로 반응할 수가 없었다.모두 민설아가 빈이에게 한 말일까?하지만 빈이는 악의가 없었다. 나에게 배인호와 다시 결혼할 건지 물을 때 눈빛에는 걱정과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뿐이었다.“빈이야, 어른들의 일까지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아줌마가 네 아빠와 다시 결혼할 가능성은 없어.”나는 정신을 차린 뒤 미소를 지으며 빈이를 다독였다.“다시 결혼 안 하는 거예요?”빈이의 작은 얼굴에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빈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근데 아빠는 아줌마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나는 멈칫했다. 배인호가 나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나와 그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었다. 빈이의 말투를 들어니 뭔가 나와 배인호가 다시 결혼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갑자기 나는 빈이가 화제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빈이에게 끌려갈 뻔했다.“잠깐만 우리 방금 마미가 너한테 무슨 말 했는지 얘기하고 있었지. 넌 왜 갑자기 나하고 네 아빠 얘기를 하는 거야?”나는 정신을 차리며 빈이 때문에 바뀐 주제를 바로 잡았다.빈이는 입술을 삐쭉이며 말했다.“정말로 마미는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내가 보고 싶었대요. 얌전히 치료 잘 받고 있으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어요. 진짜예요.”내가 어떻게 묻든지 빈이는 민설아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나도 묻다가 인내심을 잃었고 한동안 기분이 조금 다운되었다. 어쨌든 그녀는 빈이의 친엄마였다. 나는 그저 임시로 보살펴 주는 사람일 뿐이었다. 빈이가 지금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나 때문에 자기를 낳아준 친엄마를 ‘배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빈이가 말하기 싫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았다.배인호는 여전히 빈이에게 적합한 기증자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찾기가 어려웠다. 배인호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그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혹은 빈이와 매칭이 되는 기증자를 찾는 것이 특별히 힘
정아는 유유히 한숨을 쉬더니 더 이상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노성민 하나라도 골머리를 앓는 정아가 내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정아는 내게 한 가지를 더 말해주었다.“세희 전 남친 이모건 말야. 그 사람 엄마 영국에서 어떤 신분인지 알아? 아니다. 이모건 외가 쪽 사람들이 무슨 일 하는지를 물어보는 게 더 정확하겠네.”정아가 비밀스럽게 말했다.“뭐 하는데?”나도 조금 궁금했다. 나는 이모건도 잘 모르는데 외국에 있는 이모건의 모친에 대해서는 더 아는 게 적었다.하지만 소문은 들은 적 있다. 이모건과 그의 형님은 배다른 형제지 친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즉 이모건의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이모건의 엄마를 만난 것이다.“보이는 사업과 안 보이는 어두운 사업도 있대…”정아는 톡 까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속에서 대략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이모건의 외가 쪽이 영국에서 지하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나는 전에 세희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고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모건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진짜 그런 집안이라면 이모건이 좌우지할 수 있는 일이 적을 것이다.영국은 국내도 아니고 사는 환경도 완전히 다르다. 세희는 그동안 법치 사회에서 지내면서 별걱정 없이 화분에서만 자라던 꽃과도 같았다. 목숨을 걸고 한 일이라 해도 열심히 일하는 워커홀릭 정도인데 이모건의 생활에 스며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건 나라도 받아들이기 힘들다.“이제 둘은 완전히 끝난 거겠지? 너는 어떻게 알았어?”나는 정아에게 물었다.“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이모건을 끊어내고 싶은데 업무가 있어서 다시 영국으로 갔어. 가서 폭주족에게 당했대. 사람은 안 다쳤는데 가방을 잊어버렸다 그러더라고. 안에 중요한 서류도 많은데. 그래서… 이모건이 찾아다 줬대.”정아가 어이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나는 가끔 하늘의 월하노인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흐릿해진 게 아닌가 싶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