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질문에 이우범은 살짝 놀랐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난 지영 씨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줄 알았어요.”“난 모르겠는데.”나는 고개를 저으며 눈앞에 있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내가 원하는 건 간단해요. 난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이우범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그러나 나는 웃음이 나왔다.“그래요? 지금 배인호와 이런 상황이 된 게 단지 나 때문이에요? 오래전부터 배인호한테 불만이 많았던 건 아니고요?”이우범의 어두워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어서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그가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그에게 고마웠던 마음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그 당시 민설아가 강에 뛰어든 이후에 가짜 사망 신고서를 우범 씨가 만들어 준 거죠? 외국에 갈 있도록 도와준 것도 우범 씨잖아요?”나의 말이 끝나자 이우범의 표정이 갑자기 바뀌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병실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무거웠다.그렇게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서로의 눈빛에서 뭔가를 읽으려는 듯했다.배인호가 이미 조사를 마친 일이었고 이우범과도 사이가 틀어진 마당에 딱히 숨길 필요도 없었다. 내가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 일이다.“누가 말하던가요?”이우범은 내게 물었다. 말투에 불쾌함이 가득했다.“누가 말했든지 우범 씨가 저지른 일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요. 아니에요?”말할수록 마음속으로 화가 났다. 그러고 보니 전생에서 이우범이 나와 손을 잡은 것도 서란 때문만이 아니라 그때도 이미 배인호와 사이가 안 좋았을 것이다. 단지 아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었다.이우범은 배인호가 말했다고 짐작했는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인호가 조사한 거예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이어서 말했다.“그 일은 내가 한 게 맞아요. 하지만 인호를 해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그때 민설아는 이미 임신한 상태로 내게 애원했어요. 나도 마음이 약해져서 어쩔 수 없이 민설아의
“그게, 아까 출발했어요.”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어젯밤 일어난 일을 배인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그는 지금 해결해야 할 일들이 가득했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일로 그를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래,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배인호가 대답했다. 굳이 나를 병원에서 왜 기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서 돌아가서 빈이를 보고 싶었다.이때 간호사가 다가와서 나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이우범은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간호사는 내게 그의 가족이냐고 물었다. 여기서 직접 이우범을 보살필지 아니면 간병인을 쓸 것인지도 물었다.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이우범을 보고 고민했다. 그가 나를 구해줬으니 내가 여기에 남아 그를 보살펴 주는 것이 당연했지만 빈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그를 보살피면 우리는 아마도 매일 같이 다툴 것 같았다.“간병인 쓸게요.”나는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이우범은 나의 말을 듣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죄책감이 느껴져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간호사는 이우범에게 상처를 소독해주었다. 나는 간병인에게 연락했다. 10분 뒤 간병인 아주머니가 오셨다. 나는 몇 마디 당부한 뒤 이우범에게 말하지 않고 바로 떠났다.차를 몰고 시 중심까지 왔는데 엄마에게서 어디냐고 전화가 왔다.새벽에 엄마는 내게 전화를 두 번이나 했었는데 내가 진술하느라 받지 못했다. 그 뒤로는 악몽을 꾸며 잠들어 전화를 다시 하는 것을 까먹었으니 분명 나를 걱정할 것이다.동시에 나도 엄마에게 위험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면 걱정하실 것 같아 말하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뒤 나는 빈이의 병원에 도착했다. 나는 익숙하게 빈이의 병실로 향했고 배인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침 책상에서 장난감을 조립하고 있었다. 아마도 빈이에게 사준 장난감일 것이다.“지영 아줌마.”내가 돌아온 것을 보고 빈이는 깜짝 놀라며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비록 목소리는 크고 신나 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가기 전보다 더 허약해진 것 같았다. 짧은
“그래. 일이 있어서 떠나야 한다면 언제든 나한테 말해. 내가 사람 보낼게.”배인호는 몇 마디 더 당부하고 떠나려고 하는 듯했다.나는 바로 그의 앞을 막았다.“배인호 씨 나한테 명확하게 말해줘요.”배인호는 나를 살짝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 각도에서 그를 올려다보니 여전히 그는 우월한 느낌이 들었고 잘생긴 외모가 흠잡을 데가 없었다.“뭘 알고 싶은데?”그의 얇은 입술이 살짝 열렸다.“빈이의 태도가 왜 이렇게 변한 건지 알고 싶어요. 인호 씨 부모님이 이렇게 빈이를 혼자 두고 떠나실 리가 없잖아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려줘요. 빈이는 어린아이일 뿐이에요. 민설아가 빈이를 어떻게 대했는지 인호 씨도 지금 잘 알잖아요. 난 빈이가 당신까지 잃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요.”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다. 아마도 내가 진심으로 빈이를 가엽게 역이고 있어서 빈이를 위해 생각하게 되었다.배인호는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이미 익숙한 무관심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런 무관심이 빈이에게 향하는 것이었다.나는 가슴이 바닥까지 가라앉는 것 같았다.“그 문제는 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지금 다른 일들을 처리해야 해. 이쪽은 너한테 부탁할게.”배인호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나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나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나는 혼자서 병실 밖에 한참을 서 있었다. 병실 안에서 빈이는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주삿바늘을 꼽지 않은 손으로 배인호가 조립해 준 장난감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장난감은 한 손으로 가지고 잡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빈이의 작은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내가 도와줄게.”나는 바로 달려가서 그 장난감을 빈이의 옆에 놓아주었다.빈이는 한 손으로 그 장난감을 안고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아줌마. 아빠는요? 일하러 갔어요?”“맞아. 회사 가셨어. 왜? 방금 갔는데 아빠 보고 싶어?”나는 웃으며 물었
빈이의 연이은 질문에 나는 살짝 놀랐다. 바로 반응할 수가 없었다.모두 민설아가 빈이에게 한 말일까?하지만 빈이는 악의가 없었다. 나에게 배인호와 다시 결혼할 건지 물을 때 눈빛에는 걱정과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뿐이었다.“빈이야, 어른들의 일까지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아줌마가 네 아빠와 다시 결혼할 가능성은 없어.”나는 정신을 차린 뒤 미소를 지으며 빈이를 다독였다.“다시 결혼 안 하는 거예요?”빈이의 작은 얼굴에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빈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근데 아빠는 아줌마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나는 멈칫했다. 배인호가 나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 알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나와 그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었다. 빈이의 말투를 들어니 뭔가 나와 배인호가 다시 결혼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갑자기 나는 빈이가 화제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빈이에게 끌려갈 뻔했다.“잠깐만 우리 방금 마미가 너한테 무슨 말 했는지 얘기하고 있었지. 넌 왜 갑자기 나하고 네 아빠 얘기를 하는 거야?”나는 정신을 차리며 빈이 때문에 바뀐 주제를 바로 잡았다.빈이는 입술을 삐쭉이며 말했다.“정말로 마미는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내가 보고 싶었대요. 얌전히 치료 잘 받고 있으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어요. 진짜예요.”내가 어떻게 묻든지 빈이는 민설아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나도 묻다가 인내심을 잃었고 한동안 기분이 조금 다운되었다. 어쨌든 그녀는 빈이의 친엄마였다. 나는 그저 임시로 보살펴 주는 사람일 뿐이었다. 빈이가 지금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나 때문에 자기를 낳아준 친엄마를 ‘배신’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빈이가 말하기 싫다면 나도 강요하지 않았다.배인호는 여전히 빈이에게 적합한 기증자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찾기가 어려웠다. 배인호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그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혹은 빈이와 매칭이 되는 기증자를 찾는 것이 특별히 힘
정아는 유유히 한숨을 쉬더니 더 이상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노성민 하나라도 골머리를 앓는 정아가 내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정아는 내게 한 가지를 더 말해주었다.“세희 전 남친 이모건 말야. 그 사람 엄마 영국에서 어떤 신분인지 알아? 아니다. 이모건 외가 쪽 사람들이 무슨 일 하는지를 물어보는 게 더 정확하겠네.”정아가 비밀스럽게 말했다.“뭐 하는데?”나도 조금 궁금했다. 나는 이모건도 잘 모르는데 외국에 있는 이모건의 모친에 대해서는 더 아는 게 적었다.하지만 소문은 들은 적 있다. 이모건과 그의 형님은 배다른 형제지 친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즉 이모건의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이모건의 엄마를 만난 것이다.“보이는 사업과 안 보이는 어두운 사업도 있대…”정아는 톡 까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속에서 대략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이모건의 외가 쪽이 영국에서 지하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나는 전에 세희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고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모건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만약 진짜 그런 집안이라면 이모건이 좌우지할 수 있는 일이 적을 것이다.영국은 국내도 아니고 사는 환경도 완전히 다르다. 세희는 그동안 법치 사회에서 지내면서 별걱정 없이 화분에서만 자라던 꽃과도 같았다. 목숨을 걸고 한 일이라 해도 열심히 일하는 워커홀릭 정도인데 이모건의 생활에 스며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건 나라도 받아들이기 힘들다.“이제 둘은 완전히 끝난 거겠지? 너는 어떻게 알았어?”나는 정아에게 물었다.“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이모건을 끊어내고 싶은데 업무가 있어서 다시 영국으로 갔어. 가서 폭주족에게 당했대. 사람은 안 다쳤는데 가방을 잊어버렸다 그러더라고. 안에 중요한 서류도 많은데. 그래서… 이모건이 찾아다 줬대.”정아가 어이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나는 가끔 하늘의 월하노인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정신이 흐릿해진 게 아닌가 싶었
나는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빈이의 얼굴을 보니 아무것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아까 한 말 들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니야, 아빠가 일이 있어서 병원에 못 올 것 같대. 그래서 나한테 전화한 거야.”나는 아무 이유나 찾아서 대충 둘러댔다. 이렇게 잔인한 사실을 빈이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빈이는 못 믿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너무 신경 쓰지는 않았다. 다행히 나와 배인호의 대화를 못 들은 것 같았다. 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하게 대답했다.“알았어요. 아빠 바쁘니까 보러 안 와도 괜찮아요.”나는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왜 하늘은 항상 사람을 이렇게 골탕 먹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배인호는 빈이가 친자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왜 바로 민설아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빈이의 치료를 계속 책임지겠다고 했는지 모르겠다.“빈아, 먼저 방에 들어가 좀 쉬고 있어. 아줌마 나가서 뭐 좀 사고 들어올게. 응?”나는 풀리지 않은 의문이 몇 개 더 남아 있었다. 그래서 먼저 빈이를 챙겼다.빈이는 “네”하고 대답하더니 아무것도 더 묻지 않고 얌전하게 병실로 돌아갔다. 나는 빠른 속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며 다시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었다.배인호는 여전히 빨리 받았다. 내가 다시 물었다.“아까 한 말 무슨 뜻이에요? 전에 의사가 잘못 본 거라 하지 않았어요? 근데 왜 빈이가 친자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거예요?”“친자 감정 세 곳에 맡겼는데 병원에서만 결과가 잘못됐다 그러고 다른 두 곳은 일치한 결과가 나왔어? 이게 무슨 뜻일 거 같아?”배인호는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누구든 이런 일이 벌어지면 분노하면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할 것이다. 하지만 배인호의 반응이 의외였다.까발리지도 않고 화도 내지 않았다. 그저 티 나지 않게 빈이를 멀리했을 뿐이다. 태도가 완전히 차갑게 식어버렸다.배인호의 성격과는 상반되는 행동이라 수상함을 조금 느꼈다.“그럼 이제는 빈이한테서 손 떼겠다는 건가요?”내가 진지하게 물었다.“그럴 거라면 민설아
빈이는 울다가 지쳤는지 잠이 들었다.나는 빈이가 자는 틈을 타서 깔끔하게 떠나려고 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우범이 전화를 걸어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어디예요?”“왜요?”내 기억이 맞는다면 나는 그에게 간호인을 불러주고 병원비도 넉넉하게 선불했을 텐데 말이다.“지금 이런 상황인데 와서 돌봐주거나 얼굴이라도 보러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이우범이 되물었다.나를 구하려다 다쳤고 병원에 누워 고생하는데 보러 가서 챙겨줘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우범이라 단둘이 있고 싶지 않았다.‘우범 씨가 다친 거 민설아는 모르는 건가? 왜 가서 도와주지 않는 거지? 우씨 집안 사람들도 모르고 있는 건가?’나는 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러고는 대충 핑계를 찾아 둘러댔다.“지금은 시간 없어요. 시간 나면 보러 갈게요.”“지영 씨가 불러준 간호인 여자분이에요. 샤워하고 싶은데 불편하지 않을까요?”이우범이 다시 말을 이었다.나는 자기도 모르게 쏘아붙였다.“그래서요? 내가 씻어주기라도 해야 하는 건가요?”이우범이 몇 초간 침묵하더니 담담하게 한 글자로 대답했다.“네.”나는 어이가 없었다. 나는 여자가 아닌가?“그 부분은 나도 도울 수 없네요. 남자 간호인으로 바꿔줄까요?”나는 이렇게 대답했다.“좋죠. 근데 이 일은 지영 씨가 직접 와서 처리해 줘야 해요. 나는 지금 부상자라.”이우범은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지만 나더러 직접 병원으로 가서 처리하라고 했다.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건너가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았다.“내일 갈게요. 오늘은 일단 참아요.”“오늘 꼭 샤워해야겠어요. 몸에 핏자국이 있어서요. 일단 건너와요.”이우범은 원래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샤워도 못 하게 하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나는 시간을 계산했다. 지금 건너가서 일 처리를 하고 돌아오면 적어도 세 시간이 걸린다. 그러면 이미 밤이 늦은 시간이다.나는 아까 빈이를 울린 게 후회되었다. 어찌 됐든 나는 일단 그를 더
나는 이우범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의 상처에 약을 발랐다. 이런 부분에서 솜씨가 없는지라 그냥 봐줄 만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왜 아무 말도 안 해요?”내가 조용해지자 이우범이 오히려 캐물었다. 이 부분에 대해 나와 명확히 하고 싶은 것 같았다.“무슨 말을 하겠어요? 애초에 그런 선택을 할 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어야죠. 인호 씨는 우범 씨에게 제일 좋은 친구였잖아요. 먼저 그 관계를 깬 건 우범 씨에요.”나는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차키를 집어 들었다.“용건 끝났으면 갈게요. 입원해 있는 동안 모든 비용은 내가 책임질게요. 뒤에 비용 청구해요. 모자라면 보태고 남으면 돌려줘요.”나는 이 말을 뒤로 몸을 돌렸다.하지만 이우범은 나를 다시 불러세웠다.“지금 나 되게 밉죠?”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마음이 복잡했다.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우범을 싫어하는 건 아니고 그냥 깊은 실망과 함께 그를 경계하고 있을 뿐이다.아마도 내 눈빛이 너무 슬펐는지 이우범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살짝 떨어트렸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고 그저 까만 머리카락으로 꽉 찬 정수리만 보였다. 전보다 머리가 좀 긴 것 같았고 이마와 귓가에 드리워져 있었다. 조금씩 드러난 피부는 까만 머리에 더 뽀얗게 보였다.‘이렇게 잘생긴 외모에 어떻게 그렇게 어두운 마음이 숨겨져 있을까?’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처음부터 그냥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어요. 그러다 좋은 남자라는 걸 알게 됐고요. 당신을 좋아하지 못한 건 내 손해에요. 우범 씨를 미워한 적은 없어요. 이것만은 믿어줘요. 그냥 내 기대가 너무 높아서 그런지 실망도 크더라고요.”나는 이 말을 남겨놓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병실에서 나왔다.밖은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금 내 마음처럼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잔잔한 차가움이 서려 있다.나는 병원 입구에서 몇 분 더 서 있었다. 늦은 밤, 보슬비가 바람을 타고 불어와 내 몸에 내렸다.작은 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