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이가 직접 샀을 리는 없다. 하지만 빈이는 민설아가 준 게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 나는 김미애에게 알약을 잘 넣어두라고 하면서 전문의를 찾아 무슨 약인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빈이는 켕기는 게 있어서 그런지 불안해했다. 하여 다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김미애와 나를 피했다.“아주머니, 일단 저희도 먼저 쉬어요.”병실에는 간호용 침대가 한 장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사이즈가 커서 나와 김미애가 자기에 넉넉했다. 김미애는 고개를 끄덕였다.밤새 빈이는 잠에 들지 못했다. 내가 눈을 뜰 때마다 그가 몰래 이불속에서 머리를 빼 들어 나와 김미애를 보다가 내가 깬 걸 발견하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는 걸 보았다.나도 빈이가 걱정되어서인지 잘 자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찌뿌둥했다. 김미애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마 나와 같은 상황인 것 같았다.의사가 진찰하러 왔다가 김미애를 보고는 빈이에게 장난쳤다.“빈아, 할머니 오셨네. 전에 할머니 보고 싶다 했었잖아. 오늘 보니까 좋지?”김미애의 표정이 살짝 난감해 보였다. 지금 다른 사람들은 빈이가 배인호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하여 김미애를 아직도 빈이 할머니라고 여겼다.빈이는 김미애를 힐끔 보더니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할머니가 나 보러 와서 너무 좋아요!”맑은 목소리는 거짓 하나 없이 매우 성실했다. 눈동자를 반짝이며 김미애를 쳐다봤고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어제 몰래 약을 먹은 사실을 들키지만 않았으면 아마 김미애의 품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다.의사는 빈이와 몇 마디 더 주고받고 병실에서 나갔다.빈이의 눈동자는 계속 김미애를 향해 있었다. 의사가 가자 그제야 용기를 내서 김미애의 손을 잡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정말 보고 싶었어요. 할아버지는 왜 같이 안 왔어요?”김미애는 나를 힐끔 쳐다봤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배건호는커녕 김미애도 오지 말아야 했다.내가 얼른 해명했다.“빈아, 할아버지는 바빠서 할머니만
“위장이 안 좋으면 꼭 휴식을 잘해야 해.”나는 세희가 문지르는 곳을 보며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근데 너, 생리는 제때 와?”내 말을 들은 세희가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전혀 감추려는 기색이 없었다.“당연하지, 며칠 전에 왔었어.”나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이 상황에 임신이라도 하면 이모건을 끊어내기 더 어렵게 된다.나는 진지한 말투로 당부했다.“지금 이모건 씨랑 어떤 사이인지 몰라도 잠자리를 가질 때 꼭 피임은 해야 해. 성인 남녀 사이는 끝내고 싶으면 언제든지 끝낼 수 있지만, 애가 생기면 엄청 시끄러워져.”“하하, 그래, 그래, 알겠어.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매번 열심히 하고 있어. 나도 나이를 이만큼 먹었는데 이만한 지식은 있지.”세희는 내 어깨를 톡톡 치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맞선 성공해서 약혼하면 알려줄게. 요새 나도 바빠서 너희들이랑 만나지도 못했네. 언제 시간 되면 한번 모이자.”“그래.”나는 이렇게 말하며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했다.이때 세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세희는 누군지 확인하더니 표정이 살짝 변했다. 나는 바로 이모건임을 눈치챘다.아니나 다를까 세희는 핸드폰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난 모건 씨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사실 영국에서 이미 약혼녀도 있거든. 엄마가 찾아준 사람인데 아빠는 국내에서 찾기를 바란대. 남자들이 그렇지 뭐. 내 여자보다 다른 여자가 궁금한 거. 웃기지 않아?”이모건이 약혼녀가 있을 은 몰랐다. 진짜 쓰레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네. 절대 마음 약해지지 마.”나는 세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려 했다.“그래. 모 아니면 도지. 하루라도 빨리 맞선을 봐야겠어. 그래도 안 되면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가 될 거야. 속세를 벗어나는 거지.”장난까지 치는 걸 봐서는 아직 상태가 괜찮다는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몇 마디 더 주고받고는 헤어졌다.빈이가 있는 병실로 돌아오자 김미애는 아직 가지 않고
순간 배인호 아버지 배건호는 많은 사람의 질책과 비웃음을 받았다. 사실 재벌가 수장으로서 애인 몇 명 두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건호는 예전부터 대외로 일편단심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줬기에 일단 무너지면 바로 우스워질 수밖에 없다.병원에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는 김미애가 떠올라 불안해졌다.많은 네티즌이 김미애를 동정했지만 김미애는 배건호를 굳게 믿고 있는 상태기에 지금처럼 동정과 비웃음이 섞인 태도를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나는 핸드폰을 끄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었다. 배인호가 해결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일단 빈이를 돌보는 것이다.——배인호는 제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우지훈 일을 해결하고 있는지 꼬박 이틀을 병원에 오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때 내게도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엄마가 내게 전화를 걸어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아, 너희 아빠 검사 결과 나왔는데 글쎄... 글쎄...”“뭐래요?”순간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몇몇 안 좋은 상황을 제외하고는 쉽게 눈물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전에는 담배를 별로 태우지 않았는데 출소하고 나서부터 담배를 손에 놓지 않더라고. 근데 얼마나 지났다고 갑자기 폐암이야.”이 말을 하는 엄마는 이미 통곡하고 있었다.나는 머리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듯 하얘졌다.폐암이라니, 암이라는 글자는 누구든 매우 무섭게 느껴질 것이다. 아빠는 평소에 작은 질병이 있긴 했지만 종래로 크게 아프신 적은 없었다. 나는 그가 암이라는 글자와 엮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엄마, 검사 결과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아빠 몸 상태 지금까지 괜찮았잖아요. 엄마보다 더 건강했는데 갑자기 암이라니요?”내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 현재 나의 제일 큰 염원은 아빠 엄마가 건강하고 로아와 승현이가 무탈하고 행복하게 자라는 것이었다.하지만 야속한 하늘은 또 나를 골탕 먹이고 있
배인호는 내 말을 자르더니 말했다.“빈이를 토론하려는 게 아니잖아. 난 지금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은 거야.”“우리 집 일은 당신이랑 아무 상관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냥 나 대신 빈이 기분 좀 달래준다고 생각해요.”나는 배인호에게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었다. 서둘러 이렇게 말하고는 배인호 옆으로 지나가려 했다.배인호가 따라오더니 나를 잡았다.“네 일인데 왜 나랑 아무 상관이 없어?”“원래부터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인호 씨 나 진짜 빨리 가봐야 해요. 무슨 일 있으면 다음에 얘기해요.”배인호를 밀쳐내다가 곁눈질로 민설아를 발견했다.그녀 옆에는 우지훈도 함께였고 둘 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우지훈이 한발 먼저 다가오더니 덤덤한 태도로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다.“인호야.”요 며칠 우지훈이 미친 듯이 폭로하는 바람에 배씨 집안 다시 어수선해졌다. 배인호의 표정은 좋을 리가 없었다. 눈빛은 냉정함과 역겨움으로 가득했다.나도 우지훈을 매우 싫어했다. 뒤에 서 있는 민설아를 보자 빈이가 먹던 까만색 알약이 생각났다. 빈이에게 아무 약이나 먹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빈이의 친모는 민설아다. 내가 경고하는 건 타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알약의 성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빈이 몸에 나쁜지도 아직 명확하지 않다.민설아도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배인호에게 고정했다. 배인호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저는 먼저 갈게요.”나는 이 두 사람과 더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 배인호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허지영 씨, 왜 내 아이를 빼앗아 가는 거죠?”민설아의 말에 나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나는 민설아가 한 말이 너무 우스웠다.‘도대체 어쩌자는 거지?’배인호가 호통쳤다.“닥쳐!”“인호 씨, 만약 계속 허지영 씨를 사랑한다면 내가 빈이를 데려가겠다고 할 때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를 빨리 정리하고 허지영 씨를 잡았어야죠.”민설아는 내게
“네, 엄마도 푹 쉬세요. 내일 같이 병원 가서 의사 선생님과 잘 토론해 봐야 할 것 같아요.”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는 어깨에 기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엄마와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도 내 침실로 향했다. 로아와 승현이가 아기용 침대에서 쌔근쌔근 단잠을 자고 있었다.깊게 잠든 아이의 얼굴은 귀여우면서도 단순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아빠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아껴주는 것도 좋지만 이것마저 어떻게 될지 모른다.나는 엄마 아빠가 없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 아이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잃는 것도 싫었다.“아가야, 우리 꼭 좋아질 거야. 그렇지?”나는 로아와 승현이의 볼에 뽀뽀하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승현이의 입꼬리가 갑자기 올라갔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귀엽고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에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상황을 직면할 용기와 동력도 같이 생기는 것 같았다.나는 샤워를 하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걱정이 많아서 그런지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날이 밝자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로아야, 승현아, 너희들도 왜 이렇게 빨리 깨어났어?”아기용 침대에서 뽀얗고 포동포동한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이내 발까지 보였고 발을 계속 버둥대는 모습이 말캉하고 귀여워 보였다.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직접 확인했다. 로아와 승현이는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알아보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둘 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아줌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줌마는 로아를, 나는 승현이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줌마는 로아와 승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타 주고는 정원으로 나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게 했다.날씨가 춥긴 했지만 많이 껴입혔기에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이때 엄마 아빠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심리 작용인지는
엄마 말을 듣고 나니 나는 아빠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나라도 무서울 것이다. 사람이라면 다 느끼는 감정이다.나도 전생에 유방암으로 죽었다. 하여 이번 생에도 그 병을 끔찍하게 두려워한다. 가슴에 조금이라도 통증이 느껴지면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검사했고 작은 문제라도 있으면 시간과 공을 들여 치료하려고 했다.“엄마, 일단 우리 둘이 방법을 생각해서 이런 심리적인 장애를 극복하게 해야 해요. 아빠 같은 상황은 치료를 빨리하면 할수록 좋아요. 더 끌면 리스크가 점점 더 커질 거예요.”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응, 알아, 나도 잘 타이를 거야.”엄마도 표정이 어두웠다. 엄마는 나보다 더 아빠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살을 나눈 정도 있고 이 나이가 되어 누가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면 남은 그 사람은 정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이때 아줌마가 웃으며 로아를 안고 들어와 말했다.“작은 아가씨 엄마가 온 줄 알고 있나 봐요. 오늘은 내가 안아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네요.”나는 핑크색 스웨터를 입은 녀석을 보고는 얼른 손을 뻗어 아줌마의 품에서 건네받았다. 로아는 이미 허리가 조금 발달한 상태라 내 팔에 앉혀도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다른 손으로 로아의 어깨만 살짝 받쳐주면 된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로 내게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분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승현이는요?”나는 로아에게 뽀뽀하고는 아줌마에게 물었다.“작은 도련님은 자고 있어요.”아줌마가 대답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줌마에게 먼저 내려가 보라고 했다. 나와 엄마는 거실에서 로아와 놀아줬다. 한참 후 아빠가 위층에서 내려오더니 예상 밖으로 배인호에 관한 일을 물었다.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배씨 집안 요새 왜 이렇게 어수선해?”핸드폰을 건네받아 내용을 확인해 보니 어제 내가 병원에서 나간 후 배인호와 이우범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배인호가 직접 우지훈에게 손을 댄 게 아니라 보디가드를 시켰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렇다. 현재 민설아보다 내가 더 빈이 엄마 같으니 말이다.“빈이는 좋은 아이예요.”침묵 끝에 나는 겨우 한마디 답했다.“흐흐.”하지만 배인호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그는 나와 달리 빈이가 자기 아들이 아니란 걸 안 뒤로 아예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듯했고, 오히려 내가 빈이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난 것이다.나도 내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설마 엄마가 된 후의 후유증 같은 걸까?“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배인호가 이어서 나에게 또 한마디 되물었다. 그는 이미 민설아가 한 짓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지만 그걸 해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나를 보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는데, 그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한참이 지나서도 전화를 여전히 끊지 않은 채, 배인호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끝내 용기를 내 그에게 부탁하듯이 말했다.“민설아가 더는 빈이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사람 시켜서 잘 감시해 줘요. 그게 나를 돕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허지영, 넌 너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이한테는 그렇게 마음 약하면서, 나한테는 마음 약해질 수 없는 거야?”배인호가 차갑게 나에게 물었다.“이건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이에요. 빈이는 결백하지만, 인호 씨는 아니잖아요.”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답할 수 있었다. 내가 배인호에게 마음 약하게 구는 건 스스로 나 자신을 잔인하게 대하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알겠어. 네가 이렇게나 빈이를 걱정하는데, 나도 잘 돌봐야지.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네가 솔직하게 답해줬으면 해.”배인호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지만, 또 다른 질문을 나한테 건넸다.나는 그가 우리 집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질문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우범이가 입원한 거, 너랑 연관 있는 거야?”배인호의 그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어떻게 알았지?그는 내가 되묻기도 전에 이어서 계속 물었다.“나한테 숨길 필요 없어. 우범이와 내 관계가
내 대답을 들은 엄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와 함께 거실로 돌아가 보니 아빠 혼자서 두 아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이는 울지도 않고 안아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아 아빠 혼자서도 쉽게 돌볼 수 있었다.“뭐야? 모녀 둘이 뭘 그렇게 오래 이야기했어?”아빠가 의심스럽다는 듯 나와 엄마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아마 엄마와 내가 자신을 병원에 보내는 일에 대해 논의한 줄로 알고 걱정하는 듯했다.내가 답했다.“별거 아니에요. 그냥 이야기 좀 나눴어요.”“둘이 나 입원하는 거에 대해 설득할 생각은 하지도 마. 난 분명히 말했어. 수술 필요할 때면 내가 알아서 병원에 갈 거라고!”아빠는 역시나 이 부분에 대해 걱정하고 계셨고, 경각심 가득한 말투로 나와 엄마를 향해 말했다.이 수술은 링거주사를 맞는 것처럼 쉬운 게 아니라, 수술 전에 반드시 다른 치료와 검사도 해야 한다고 아빠한테 설명해 드리려 했지만, 아빠의 태도를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일 병원에 가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마음대로 해요!”엄마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한마디 내뱉고 더는 아빠와 이야기하지 않으셨다.아빠도 엄마가 화난 걸 알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리셨고, 로아와 승현이를 두고 위층으로 올라가셨다. 이튿날 아침, 오늘은 아빠와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나는 미리 비교적 잘 아는 유방외과 의사 선생님께 연락을 했고, 바로 검사받으러 갔다. 아빠는 내 옆에서 어디가 불편한지 묻는 것 외에, 자신이 아는 다른 경력이 많은 의사들에게 연락하여 이것저것 문의하기 시작했다.“아빠, 병원에 가서 재차 검사하고 다시 이야기해요. ”나는 아빠의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마치 내가 당장이라도 죽는다는 통보를 받은 듯이 행동하니 말이다.“일단 먼저 물어보고. 하, 이게 다 그 배인호 때문이야!”아빠는 전화를 끊은 뒤 갑자기 화살을 배인호에게 돌렸다.“네?”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이게 다 화병으로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