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이가 직접 샀을 리는 없다. 하지만 빈이는 민설아가 준 게 아니라고 딱 잡아뗐다. 나는 김미애에게 알약을 잘 넣어두라고 하면서 전문의를 찾아 무슨 약인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빈이는 켕기는 게 있어서 그런지 불안해했다. 하여 다시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김미애와 나를 피했다.“아주머니, 일단 저희도 먼저 쉬어요.”병실에는 간호용 침대가 한 장밖에 없었지만 다행히 사이즈가 커서 나와 김미애가 자기에 넉넉했다. 김미애는 고개를 끄덕였다.밤새 빈이는 잠에 들지 못했다. 내가 눈을 뜰 때마다 그가 몰래 이불속에서 머리를 빼 들어 나와 김미애를 보다가 내가 깬 걸 발견하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는 걸 보았다.나도 빈이가 걱정되어서인지 잘 자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찌뿌둥했다. 김미애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마 나와 같은 상황인 것 같았다.의사가 진찰하러 왔다가 김미애를 보고는 빈이에게 장난쳤다.“빈아, 할머니 오셨네. 전에 할머니 보고 싶다 했었잖아. 오늘 보니까 좋지?”김미애의 표정이 살짝 난감해 보였다. 지금 다른 사람들은 빈이가 배인호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하여 김미애를 아직도 빈이 할머니라고 여겼다.빈이는 김미애를 힐끔 보더니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할머니가 나 보러 와서 너무 좋아요!”맑은 목소리는 거짓 하나 없이 매우 성실했다. 눈동자를 반짝이며 김미애를 쳐다봤고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어제 몰래 약을 먹은 사실을 들키지만 않았으면 아마 김미애의 품으로 파고들었을 것이다.의사는 빈이와 몇 마디 더 주고받고 병실에서 나갔다.빈이의 눈동자는 계속 김미애를 향해 있었다. 의사가 가자 그제야 용기를 내서 김미애의 손을 잡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할머니, 정말 보고 싶었어요. 할아버지는 왜 같이 안 왔어요?”김미애는 나를 힐끔 쳐다봤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사실 배건호는커녕 김미애도 오지 말아야 했다.내가 얼른 해명했다.“빈아, 할아버지는 바빠서 할머니만
“위장이 안 좋으면 꼭 휴식을 잘해야 해.”나는 세희가 문지르는 곳을 보며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근데 너, 생리는 제때 와?”내 말을 들은 세희가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전혀 감추려는 기색이 없었다.“당연하지, 며칠 전에 왔었어.”나는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이 상황에 임신이라도 하면 이모건을 끊어내기 더 어렵게 된다.나는 진지한 말투로 당부했다.“지금 이모건 씨랑 어떤 사이인지 몰라도 잠자리를 가질 때 꼭 피임은 해야 해. 성인 남녀 사이는 끝내고 싶으면 언제든지 끝낼 수 있지만, 애가 생기면 엄청 시끄러워져.”“하하, 그래, 그래, 알겠어.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매번 열심히 하고 있어. 나도 나이를 이만큼 먹었는데 이만한 지식은 있지.”세희는 내 어깨를 톡톡 치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내가 맞선 성공해서 약혼하면 알려줄게. 요새 나도 바빠서 너희들이랑 만나지도 못했네. 언제 시간 되면 한번 모이자.”“그래.”나는 이렇게 말하며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했다.이때 세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세희는 누군지 확인하더니 표정이 살짝 변했다. 나는 바로 이모건임을 눈치챘다.아니나 다를까 세희는 핸드폰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난 모건 씨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사실 영국에서 이미 약혼녀도 있거든. 엄마가 찾아준 사람인데 아빠는 국내에서 찾기를 바란대. 남자들이 그렇지 뭐. 내 여자보다 다른 여자가 궁금한 거. 웃기지 않아?”이모건이 약혼녀가 있을 은 몰랐다. 진짜 쓰레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네. 절대 마음 약해지지 마.”나는 세희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려 했다.“그래. 모 아니면 도지. 하루라도 빨리 맞선을 봐야겠어. 그래도 안 되면 절에 들어가서 비구니가 될 거야. 속세를 벗어나는 거지.”장난까지 치는 걸 봐서는 아직 상태가 괜찮다는 것이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와 몇 마디 더 주고받고는 헤어졌다.빈이가 있는 병실로 돌아오자 김미애는 아직 가지 않고
순간 배인호 아버지 배건호는 많은 사람의 질책과 비웃음을 받았다. 사실 재벌가 수장으로서 애인 몇 명 두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건호는 예전부터 대외로 일편단심이라는 이미지를 보여줬기에 일단 무너지면 바로 우스워질 수밖에 없다.병원에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는 김미애가 떠올라 불안해졌다.많은 네티즌이 김미애를 동정했지만 김미애는 배건호를 굳게 믿고 있는 상태기에 지금처럼 동정과 비웃음이 섞인 태도를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나는 핸드폰을 끄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었다. 배인호가 해결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일단 빈이를 돌보는 것이다.——배인호는 제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우지훈 일을 해결하고 있는지 꼬박 이틀을 병원에 오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때 내게도 나쁜 소식이 들려왔다.엄마가 내게 전화를 걸어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아, 너희 아빠 검사 결과 나왔는데 글쎄... 글쎄...”“뭐래요?”순간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몇몇 안 좋은 상황을 제외하고는 쉽게 눈물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전에는 담배를 별로 태우지 않았는데 출소하고 나서부터 담배를 손에 놓지 않더라고. 근데 얼마나 지났다고 갑자기 폐암이야.”이 말을 하는 엄마는 이미 통곡하고 있었다.나는 머리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듯 하얘졌다.폐암이라니, 암이라는 글자는 누구든 매우 무섭게 느껴질 것이다. 아빠는 평소에 작은 질병이 있긴 했지만 종래로 크게 아프신 적은 없었다. 나는 그가 암이라는 글자와 엮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엄마, 검사 결과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아빠 몸 상태 지금까지 괜찮았잖아요. 엄마보다 더 건강했는데 갑자기 암이라니요?”내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 현재 나의 제일 큰 염원은 아빠 엄마가 건강하고 로아와 승현이가 무탈하고 행복하게 자라는 것이었다.하지만 야속한 하늘은 또 나를 골탕 먹이고 있
배인호는 내 말을 자르더니 말했다.“빈이를 토론하려는 게 아니잖아. 난 지금 너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물은 거야.”“우리 집 일은 당신이랑 아무 상관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냥 나 대신 빈이 기분 좀 달래준다고 생각해요.”나는 배인호에게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아예 없었다. 서둘러 이렇게 말하고는 배인호 옆으로 지나가려 했다.배인호가 따라오더니 나를 잡았다.“네 일인데 왜 나랑 아무 상관이 없어?”“원래부터 아무 상관이 없었어요. 인호 씨 나 진짜 빨리 가봐야 해요. 무슨 일 있으면 다음에 얘기해요.”배인호를 밀쳐내다가 곁눈질로 민설아를 발견했다.그녀 옆에는 우지훈도 함께였고 둘 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우지훈이 한발 먼저 다가오더니 덤덤한 태도로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다.“인호야.”요 며칠 우지훈이 미친 듯이 폭로하는 바람에 배씨 집안 다시 어수선해졌다. 배인호의 표정은 좋을 리가 없었다. 눈빛은 냉정함과 역겨움으로 가득했다.나도 우지훈을 매우 싫어했다. 뒤에 서 있는 민설아를 보자 빈이가 먹던 까만색 알약이 생각났다. 빈이에게 아무 약이나 먹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빈이의 친모는 민설아다. 내가 경고하는 건 타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알약의 성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빈이 몸에 나쁜지도 아직 명확하지 않다.민설아도 이쪽으로 걸어오더니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이내 시선을 배인호에게 고정했다. 배인호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저는 먼저 갈게요.”나는 이 두 사람과 더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 배인호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허지영 씨, 왜 내 아이를 빼앗아 가는 거죠?”민설아의 말에 나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나는 민설아가 한 말이 너무 우스웠다.‘도대체 어쩌자는 거지?’배인호가 호통쳤다.“닥쳐!”“인호 씨, 만약 계속 허지영 씨를 사랑한다면 내가 빈이를 데려가겠다고 할 때 보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를 빨리 정리하고 허지영 씨를 잡았어야죠.”민설아는 내게
“네, 엄마도 푹 쉬세요. 내일 같이 병원 가서 의사 선생님과 잘 토론해 봐야 할 것 같아요.”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는 어깨에 기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엄마와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도 내 침실로 향했다. 로아와 승현이가 아기용 침대에서 쌔근쌔근 단잠을 자고 있었다.깊게 잠든 아이의 얼굴은 귀여우면서도 단순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아빠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아껴주는 것도 좋지만 이것마저 어떻게 될지 모른다.나는 엄마 아빠가 없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 아이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잃는 것도 싫었다.“아가야, 우리 꼭 좋아질 거야. 그렇지?”나는 로아와 승현이의 볼에 뽀뽀하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승현이의 입꼬리가 갑자기 올라갔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귀엽고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에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상황을 직면할 용기와 동력도 같이 생기는 것 같았다.나는 샤워를 하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걱정이 많아서 그런지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날이 밝자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로아야, 승현아, 너희들도 왜 이렇게 빨리 깨어났어?”아기용 침대에서 뽀얗고 포동포동한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이내 발까지 보였고 발을 계속 버둥대는 모습이 말캉하고 귀여워 보였다.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직접 확인했다. 로아와 승현이는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알아보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둘 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아줌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줌마는 로아를, 나는 승현이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줌마는 로아와 승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타 주고는 정원으로 나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게 했다.날씨가 춥긴 했지만 많이 껴입혔기에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이때 엄마 아빠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심리 작용인지는
엄마 말을 듣고 나니 나는 아빠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나라도 무서울 것이다. 사람이라면 다 느끼는 감정이다.나도 전생에 유방암으로 죽었다. 하여 이번 생에도 그 병을 끔찍하게 두려워한다. 가슴에 조금이라도 통증이 느껴지면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검사했고 작은 문제라도 있으면 시간과 공을 들여 치료하려고 했다.“엄마, 일단 우리 둘이 방법을 생각해서 이런 심리적인 장애를 극복하게 해야 해요. 아빠 같은 상황은 치료를 빨리하면 할수록 좋아요. 더 끌면 리스크가 점점 더 커질 거예요.”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응, 알아, 나도 잘 타이를 거야.”엄마도 표정이 어두웠다. 엄마는 나보다 더 아빠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살을 나눈 정도 있고 이 나이가 되어 누가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면 남은 그 사람은 정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이때 아줌마가 웃으며 로아를 안고 들어와 말했다.“작은 아가씨 엄마가 온 줄 알고 있나 봐요. 오늘은 내가 안아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네요.”나는 핑크색 스웨터를 입은 녀석을 보고는 얼른 손을 뻗어 아줌마의 품에서 건네받았다. 로아는 이미 허리가 조금 발달한 상태라 내 팔에 앉혀도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다른 손으로 로아의 어깨만 살짝 받쳐주면 된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로 내게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분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승현이는요?”나는 로아에게 뽀뽀하고는 아줌마에게 물었다.“작은 도련님은 자고 있어요.”아줌마가 대답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줌마에게 먼저 내려가 보라고 했다. 나와 엄마는 거실에서 로아와 놀아줬다. 한참 후 아빠가 위층에서 내려오더니 예상 밖으로 배인호에 관한 일을 물었다.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배씨 집안 요새 왜 이렇게 어수선해?”핸드폰을 건네받아 내용을 확인해 보니 어제 내가 병원에서 나간 후 배인호와 이우범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배인호가 직접 우지훈에게 손을 댄 게 아니라 보디가드를 시켰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렇다. 현재 민설아보다 내가 더 빈이 엄마 같으니 말이다.“빈이는 좋은 아이예요.”침묵 끝에 나는 겨우 한마디 답했다.“흐흐.”하지만 배인호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그는 나와 달리 빈이가 자기 아들이 아니란 걸 안 뒤로 아예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듯했고, 오히려 내가 빈이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난 것이다.나도 내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설마 엄마가 된 후의 후유증 같은 걸까?“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배인호가 이어서 나에게 또 한마디 되물었다. 그는 이미 민설아가 한 짓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지만 그걸 해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나를 보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는데, 그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한참이 지나서도 전화를 여전히 끊지 않은 채, 배인호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끝내 용기를 내 그에게 부탁하듯이 말했다.“민설아가 더는 빈이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사람 시켜서 잘 감시해 줘요. 그게 나를 돕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허지영, 넌 너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이한테는 그렇게 마음 약하면서, 나한테는 마음 약해질 수 없는 거야?”배인호가 차갑게 나에게 물었다.“이건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이에요. 빈이는 결백하지만, 인호 씨는 아니잖아요.”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답할 수 있었다. 내가 배인호에게 마음 약하게 구는 건 스스로 나 자신을 잔인하게 대하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알겠어. 네가 이렇게나 빈이를 걱정하는데, 나도 잘 돌봐야지.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네가 솔직하게 답해줬으면 해.”배인호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지만, 또 다른 질문을 나한테 건넸다.나는 그가 우리 집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질문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우범이가 입원한 거, 너랑 연관 있는 거야?”배인호의 그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어떻게 알았지?그는 내가 되묻기도 전에 이어서 계속 물었다.“나한테 숨길 필요 없어. 우범이와 내 관계가
내 대답을 들은 엄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와 함께 거실로 돌아가 보니 아빠 혼자서 두 아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이는 울지도 않고 안아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아 아빠 혼자서도 쉽게 돌볼 수 있었다.“뭐야? 모녀 둘이 뭘 그렇게 오래 이야기했어?”아빠가 의심스럽다는 듯 나와 엄마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아마 엄마와 내가 자신을 병원에 보내는 일에 대해 논의한 줄로 알고 걱정하는 듯했다.내가 답했다.“별거 아니에요. 그냥 이야기 좀 나눴어요.”“둘이 나 입원하는 거에 대해 설득할 생각은 하지도 마. 난 분명히 말했어. 수술 필요할 때면 내가 알아서 병원에 갈 거라고!”아빠는 역시나 이 부분에 대해 걱정하고 계셨고, 경각심 가득한 말투로 나와 엄마를 향해 말했다.이 수술은 링거주사를 맞는 것처럼 쉬운 게 아니라, 수술 전에 반드시 다른 치료와 검사도 해야 한다고 아빠한테 설명해 드리려 했지만, 아빠의 태도를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일 병원에 가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마음대로 해요!”엄마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한마디 내뱉고 더는 아빠와 이야기하지 않으셨다.아빠도 엄마가 화난 걸 알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리셨고, 로아와 승현이를 두고 위층으로 올라가셨다. 이튿날 아침, 오늘은 아빠와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나는 미리 비교적 잘 아는 유방외과 의사 선생님께 연락을 했고, 바로 검사받으러 갔다. 아빠는 내 옆에서 어디가 불편한지 묻는 것 외에, 자신이 아는 다른 경력이 많은 의사들에게 연락하여 이것저것 문의하기 시작했다.“아빠, 병원에 가서 재차 검사하고 다시 이야기해요. ”나는 아빠의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마치 내가 당장이라도 죽는다는 통보를 받은 듯이 행동하니 말이다.“일단 먼저 물어보고. 하, 이게 다 그 배인호 때문이야!”아빠는 전화를 끊은 뒤 갑자기 화살을 배인호에게 돌렸다.“네?”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이게 다 화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