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엄마도 푹 쉬세요. 내일 같이 병원 가서 의사 선생님과 잘 토론해 봐야 할 것 같아요.”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는 어깨에 기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엄마와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엄마가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도 내 침실로 향했다. 로아와 승현이가 아기용 침대에서 쌔근쌔근 단잠을 자고 있었다.깊게 잠든 아이의 얼굴은 귀여우면서도 단순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아빠도,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아껴주는 것도 좋지만 이것마저 어떻게 될지 모른다.나는 엄마 아빠가 없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내 아이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잃는 것도 싫었다.“아가야, 우리 꼭 좋아질 거야. 그렇지?”나는 로아와 승현이의 볼에 뽀뽀하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승현이의 입꼬리가 갑자기 올라갔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귀엽고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이 미소에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상황을 직면할 용기와 동력도 같이 생기는 것 같았다.나는 샤워를 하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걱정이 많아서 그런지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날이 밝자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로아야, 승현아, 너희들도 왜 이렇게 빨리 깨어났어?”아기용 침대에서 뽀얗고 포동포동한 손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이내 발까지 보였고 발을 계속 버둥대는 모습이 말캉하고 귀여워 보였다.나는 그쪽으로 다가가 직접 확인했다. 로아와 승현이는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알아보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둘 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아줌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줌마는 로아를, 나는 승현이를 안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줌마는 로아와 승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타 주고는 정원으로 나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게 했다.날씨가 춥긴 했지만 많이 껴입혔기에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이때 엄마 아빠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심리 작용인지는
엄마 말을 듣고 나니 나는 아빠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이해가 갔다. 나라도 무서울 것이다. 사람이라면 다 느끼는 감정이다.나도 전생에 유방암으로 죽었다. 하여 이번 생에도 그 병을 끔찍하게 두려워한다. 가슴에 조금이라도 통증이 느껴지면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검사했고 작은 문제라도 있으면 시간과 공을 들여 치료하려고 했다.“엄마, 일단 우리 둘이 방법을 생각해서 이런 심리적인 장애를 극복하게 해야 해요. 아빠 같은 상황은 치료를 빨리하면 할수록 좋아요. 더 끌면 리스크가 점점 더 커질 거예요.”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응, 알아, 나도 잘 타이를 거야.”엄마도 표정이 어두웠다. 엄마는 나보다 더 아빠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살을 나눈 정도 있고 이 나이가 되어 누가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나기라도 하면 남은 그 사람은 정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이때 아줌마가 웃으며 로아를 안고 들어와 말했다.“작은 아가씨 엄마가 온 줄 알고 있나 봐요. 오늘은 내가 안아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네요.”나는 핑크색 스웨터를 입은 녀석을 보고는 얼른 손을 뻗어 아줌마의 품에서 건네받았다. 로아는 이미 허리가 조금 발달한 상태라 내 팔에 앉혀도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다른 손으로 로아의 어깨만 살짝 받쳐주면 된다. 인형처럼 예쁜 얼굴로 내게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분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승현이는요?”나는 로아에게 뽀뽀하고는 아줌마에게 물었다.“작은 도련님은 자고 있어요.”아줌마가 대답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줌마에게 먼저 내려가 보라고 했다. 나와 엄마는 거실에서 로아와 놀아줬다. 한참 후 아빠가 위층에서 내려오더니 예상 밖으로 배인호에 관한 일을 물었다.그는 핸드폰을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배씨 집안 요새 왜 이렇게 어수선해?”핸드폰을 건네받아 내용을 확인해 보니 어제 내가 병원에서 나간 후 배인호와 이우범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배인호가 직접 우지훈에게 손을 댄 게 아니라 보디가드를 시켰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렇다. 현재 민설아보다 내가 더 빈이 엄마 같으니 말이다.“빈이는 좋은 아이예요.”침묵 끝에 나는 겨우 한마디 답했다.“흐흐.”하지만 배인호는 차갑게 웃어 보였다. 그는 나와 달리 빈이가 자기 아들이 아니란 걸 안 뒤로 아예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듯했고, 오히려 내가 빈이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이 생겨난 것이다.나도 내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설마 엄마가 된 후의 후유증 같은 걸까?“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배인호가 이어서 나에게 또 한마디 되물었다. 그는 이미 민설아가 한 짓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지만 그걸 해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나를 보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묻는데, 그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한참이 지나서도 전화를 여전히 끊지 않은 채, 배인호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끝내 용기를 내 그에게 부탁하듯이 말했다.“민설아가 더는 빈이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사람 시켜서 잘 감시해 줘요. 그게 나를 돕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허지영, 넌 너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이한테는 그렇게 마음 약하면서, 나한테는 마음 약해질 수 없는 거야?”배인호가 차갑게 나에게 물었다.“이건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이에요. 빈이는 결백하지만, 인호 씨는 아니잖아요.”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답할 수 있었다. 내가 배인호에게 마음 약하게 구는 건 스스로 나 자신을 잔인하게 대하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알겠어. 네가 이렇게나 빈이를 걱정하는데, 나도 잘 돌봐야지. 근데 문제가 하나 있어. 네가 솔직하게 답해줬으면 해.”배인호는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지만, 또 다른 질문을 나한테 건넸다.나는 그가 우리 집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 질문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우범이가 입원한 거, 너랑 연관 있는 거야?”배인호의 그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어떻게 알았지?그는 내가 되묻기도 전에 이어서 계속 물었다.“나한테 숨길 필요 없어. 우범이와 내 관계가
내 대답을 들은 엄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와 함께 거실로 돌아가 보니 아빠 혼자서 두 아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이는 울지도 않고 안아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아 아빠 혼자서도 쉽게 돌볼 수 있었다.“뭐야? 모녀 둘이 뭘 그렇게 오래 이야기했어?”아빠가 의심스럽다는 듯 나와 엄마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아마 엄마와 내가 자신을 병원에 보내는 일에 대해 논의한 줄로 알고 걱정하는 듯했다.내가 답했다.“별거 아니에요. 그냥 이야기 좀 나눴어요.”“둘이 나 입원하는 거에 대해 설득할 생각은 하지도 마. 난 분명히 말했어. 수술 필요할 때면 내가 알아서 병원에 갈 거라고!”아빠는 역시나 이 부분에 대해 걱정하고 계셨고, 경각심 가득한 말투로 나와 엄마를 향해 말했다.이 수술은 링거주사를 맞는 것처럼 쉬운 게 아니라, 수술 전에 반드시 다른 치료와 검사도 해야 한다고 아빠한테 설명해 드리려 했지만, 아빠의 태도를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쓸모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내일 병원에 가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마음대로 해요!”엄마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한마디 내뱉고 더는 아빠와 이야기하지 않으셨다.아빠도 엄마가 화난 걸 알지만 끝까지 고집을 부리셨고, 로아와 승현이를 두고 위층으로 올라가셨다. 이튿날 아침, 오늘은 아빠와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나는 미리 비교적 잘 아는 유방외과 의사 선생님께 연락을 했고, 바로 검사받으러 갔다. 아빠는 내 옆에서 어디가 불편한지 묻는 것 외에, 자신이 아는 다른 경력이 많은 의사들에게 연락하여 이것저것 문의하기 시작했다.“아빠, 병원에 가서 재차 검사하고 다시 이야기해요. ”나는 아빠의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마치 내가 당장이라도 죽는다는 통보를 받은 듯이 행동하니 말이다.“일단 먼저 물어보고. 하, 이게 다 그 배인호 때문이야!”아빠는 전화를 끊은 뒤 갑자기 화살을 배인호에게 돌렸다.“네?”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이게 다 화병으로
저녁, 엄마가 회사에서 돌아왔다.아빠는 엄마가 돌아온 걸 보고 바라 다가가 내 병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병원에 입원할 수 있게끔 강력히 설득하라고 엄마에게 요구했다.나는 그들의 외동딸이다. 이 때문에 아빠는 그 말을 듣고 엄마가 다급히 나더러 치료하라고 설득할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엄마는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저으며, 아주 독보적인 연기로 답했다. “됐어요, 부녀 사이에 일을 제가 간섭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당신도 입원해서 수술받기 싫고, 지영이도 입원해서 수술받기 싫은 거잖아요? 둘 다 죽으면 나 혼자 쓸쓸하게 여기서 로아와 승현이를 키워야죠, 어쩌겠어요.”엄마는 테이블 위의 휴지 한 장을 들며 눈을 닦아 보였다.아빠는 멍해진 채 엄마의 훌쩍이는 모습을 보더니 이어서 나를 바라봤다.나도 얼른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을 쳐다보지 않고 아빠가 혼자 심리전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아빠가 계속 뭐라고 하시기 전에 엄마는 이미 “의기소침한” 상태로 위층으로 올라갔고, 더 이상 우리와 얘기하고 싶지 않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나도 아빠가 계속 뭐라 하시기 전에 바로 로아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갔고, 도우미 아줌마더러 승현이를 안고 위층으로 올라와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침실문을 잠근 채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나는 그날 밤 아빠의 마음이 매우 복잡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와 아빠의 동병상련 상황에서, 엄마는 이미 우리를 포기했으니, 아빠는 그의 결정을 바꿀 가능성이 아주 크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냥 기다리는 것뿐이다.그렇게 나는 잠자리에 들었고, 핸드폰 진동 소리에 잠이 깼다.눈을 떠보니 16개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고, 9통의 메시지와 8개의 부재중 영상통화도 와있었다…이 모든 게 전부 배인호에게서 온 것이었다.이때 또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왔다.「너 계속 안 나오면, 나 사람 불러서 문 부순다.」그 문자에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무슨 뜻이지?나는 빈 이에게 무
“내가 병에 걸린 건 내 일인데, 대체 뭐가 미안한데요?”나는 배인호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도 바로 해명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이건 내 마음속에 매듭으로 남아있다. 전생에도 나는 배인호에게 물은 적 있었다. 내가 유방암 말기였던 가장 큰 이유는 결혼 5년 동안 기분이 억압된 채 산 것도 있는데 설마 그때는 양심의 가책도 못 느꼈단 말인가?그때 당시 배인호가 나에 대한 대답은 자업자득이었다.그 간단한 네 글자의 대답은 내 상처에 소금을 치는 격이었다.“노성민이 나한테 말했는데, 여자가 유방에 문제가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정서적 문제래. 전에 네가 나랑 5년 동안 살았을 때 상처 많이 받았겠네. 모든 게 내 잘못이야.”배인호는 내 병의 원인을 모두 자신의 문제로 돌리며 반성하고 있었다.그의 말이 모두 맞는 말이긴 하지만 현생에 나는 그 정도로 비참한 건 아니다. 조금 전의 그 사과는 배인호가 전생의 나에게 한 사과라고 쳐야겠다.“네, 알겠어요. 그 사과 받을게요. 밖에 추운데 얼른 돌아가요.”나는 끝까지 내 상황에 대해 해명하지 않고 그냥 배인호더러 얼른 가보라고 재촉했다.“네가 나랑 서울로 돌아가거나 해외로 가지 않는 한 여기서 널 보살펴줄 거야. 내가 전 세계 최고급 의사 선생님을 찾아 네 병을 치료할 거니까 꼭 방법이 있을 거야!”배인호는 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다급히 그의 생각에 대해 알려주었다.“만약 시중에 새로운 약이 출시되면 그거 시도해도 되고. 내가 돈을 투자해 약물을 개발해도 돼. 비용이 얼마든지 기꺼이 투자할 마음이 있어! ”나는 배인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나 때문에 국내에 모든 일을 포기하겠다는 건가?“지영아, 너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야?”이때 엄마의 목소리가 정원에서 들려왔고,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나는 얼른 배인호에게 먼저 가라는 눈치를 주었다. 어쨌든, 엄마에게 있어 배인호의 인상은 여전히 좋지 않다. 나와 배인호가 친구가 된다 해도 엄마는 동의하
역시나 아빠의 마음속에서는 내 목숨이 그의 목숨보다 더 소중했다.그는 마음속으로 극복하기 힘들어 치료를 거부했지만, 나의 건강까지 더해지니 마음이 움직이신 것이다.이 방법은 역시나 효과가 있었고, 나는 마음속으로 감동 받았다.“하지만 전 가고 싶지 않아요…”나는 계속하여 일부러 아빠를 자극했고, 더욱 안달 나게 만들었다.“안돼, 반드시 가야 해! 이미 사람 시켜서 네 물건 정리하라고 했어. 그러니 곧 출발할 거야.”아빠는 강경한 태도로 단칼에 내 말을 거절했다.나는 달갑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나 대신 옷과 일상용품들을 정리해 줄 때까지 가만히 있었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정리를 끝낸 후에야 아빠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자, 이제 병원으로 가자.”나는 터덜터덜 아빠를 따라 문을 나섰고 차에 탔다. 로아와 승현이는 병원까지 데리고 갈 수 없으므로 도우미 아줌마더러 집에서 돌보게 하였다.오늘은 엄마도 우리와 함께 문을 나섰다. 나와 엄마는 뒷자리에 앉았고, 아빠는 조수석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엄마가 물었다.“오늘 웬일이에요? 저 혼자 과부로 남기게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그래, 당신 99살까지 살아야 하는데 인생 아직 길잖아? 내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 늙은 과부로 남게 할 수 있겠어?”아빠는 장난스럽게 엄마를 향해 답했다.그 말에 엄마의 얼굴색은 순식간에 변하면서 아빠에게 뭐라고 욕설을 퍼부으려는 듯했으나, 기사님이 있는지라 결국은 자신의 이미지를 지켜야 했다. 어쨌든 더는 여기에 대해 따지지 않고, 아빠가 병원에 입원하는 건 좋은 일인 것이다. 병원에 도착 후 나와 아빠는 입원 수술 절차를 밟을 준비를 하였다. 이때 내가 전에 찾았던 의사 선생님이 다시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그녀는 우리 아빠 앞에서 나에게 다른 병원을 추천해 주었다. 그 병원이 유방암 치료를 더 잘하고 최고의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이다.그 말을 들은 아빠는 바로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답했다.
“네, 이제는 혼자 앉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로아는 아직 제대로 기어다닐 수는 없고 승현이는 그래도 조금 기어다닐 수 있어요.”나는 마음속으로 이게 어떤 감정인지 형용할 수 없었다. 흑과 백 사이에는 항상 회색지대가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좋고 나쁨이 없는 것 같았다.“아마 남자아이라 더 움직이기 좋아할 거예요. 그래서 운동적인 부분에서도 더 좋을 거고요. 로아도 기어다니는 거 많이 가르쳐줘요. 발육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이우범은 나를 당부하며 말했다.이 모든 건 나 한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도우미 아주머니한테도 특별히 말씀드린 적 있고, 로아를 최대한 기어다닐 수 있게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라고도 말했었다.“알겠어요.”나는 한마디 답한 후 더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마지막에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우범도 더는 전화를 다시 걸어오지 않았고, 나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아빠가 입원한 뒤 엄마는 회사 쪽 일까지 더해지면서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가 고생하는 모습을 손 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어 적극적으로 회사 일을 돕겠다고 엄마에게 말했다.전에 비록 나 혼자서 겨우겨우 집에 회사를 운영한 적 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경험을 쌓았었다. 하여 잠깐 엄마를 도와 일을 하는 건 나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은 엄마도 곁에 있으니 언제든지 나를 지휘하고 가르쳐줄 수도 있는 것이다. “지영아, 너 할 수 있겠어?”하지만 엄마는 아주 걱정스러워 보였다. 엄마한테 있어서 나는 사업적인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업과 관련된 일이라면 나는 언제나 골치 아파하곤 했었으니 말이다.“엄마, 나 믿어요.”나는 더는 설명하지 않고 바로 엄마에게 답했다. 앞으로 부모님이 계속하여 회사를 관리할 수 없다면 결국은 내가 이어받아 관리도 해야 하기에 이건 지금부터라도 미리 적응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엄마도 여기까지 생각을 한 듯 흔쾌히 승낙해 주셨다. 나도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바로 엄마에게 물을 수도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