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침을 꿀꺽 삼키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어라, 정말이네. 그럼 대체 아까는 왜 꺼진 거지? 설마 망가진 건가?”그녀는 고개를 들고 부승민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배터리가 다 되어서 자동으로 꺼진 줄 알았어.”부승민은 담담하게 그녀를 보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너무도 태연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지금 당장 여우주연상을 받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온하랑은 가슴이 여전히 쿵쾅쿵쾅 뛰었다.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말했다.“뭘 그렇게 자꾸만 빤히 봐?”부승민은 앞으로 다가가며 미소를 지었다.“하랑아, 네 연기가 이렇게 좋을 줄은 난 오늘 처음 알았어. 송 감독이 어쩐지 너를 강력하게 캐스팅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것 같아.”온하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몇 초간 멍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입가가 바르르 떨려왔고 어떻게든 얼버무리며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어보기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아직도 모르겠어?”부승민은 다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입꼬리는 점점 더 올라갔다.“내가 너한테 전화했을 때, 분명 혼자 저녁을 먹고 있는 거라고 했지. 그런데 아니었어. 넌 최동철과 함께 있었어. 날 속이고 일부러 핸드폰 배터리가 없는 것처럼 전원을 끄고 말이야. 심지어 호텔도 최동철이 데려다준 거잖아. 내가 다 봤어.”차에서 내린 후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눈에는 많이 아쉬운 듯한 모습이었다.거짓말을 한 것이 전부 들켜버렸다. 온하랑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원래부터 피부가 하얗던 그녀는 실내조명 아래 더 뽀얗게 보였다.온하랑은 시선을 내리깔고 입술을 짓이겼다. 힐끔힐끔 부승민의 표정을 살피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어... 어떻게 안 거야?”“나도 헬튼에 거래처랑 접대 약속이 있었거든.”그는 간단히 설명했다.그러니까 그녀가 헬튼에 있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고 처음부터 그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다 알
‘감히 내 앞에서 최동철을 언급해?'부승민은 가지 않았다.반드시 온하랑과 같은 방을 쓸 생각이었다. 자기 전에도 그는 온하랑을 황홀하게 해주었다. 정말이지 그녀는 너무도 매혹적이었다.한결 나른해진 온하랑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부승민은 깊이 잠이 든 온하랑의 얼굴을 다정하게 보고 있었다.아침이 되자 온하랑은 최동철에게 문자를 보냈다.[동철 오빠, 오전에 일이 생겨서 해결하고 바로 공항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점심에 저 데리러 오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반 시간 후에야 최동철은 답장을 보냈다.[그래, 알았어. 조심히 가.][네, 고마워요.]핸드폰을 보던 최동철은 그대로 손에 힘을 주었다.부승민은 경주로 온 것도 모자라 온하랑과 같은 호텔을 예약했다.온하랑이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는 것은 지금 부승민과 함께 있다는 소리였다.‘설마 재결합한 건가?'최동철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오전에 온하랑은 부승민과 함께 경주를 구경하곤 점심에 공항으로 가 강남으로 돌아왔다.온하랑은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앉았다.순간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경찰서에서 온 연락이었다.전화를 받은 온하랑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그녀의 아버지 사건이 검찰에 넘겨졌다는 소식이었다.경찰은 부민재가 주범이라고, 부승민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여 사람을 사주하여 부승민의 여자친구였던 추서윤을 납치하고 온강호에게 들키자 살해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이제 남은 것은 부민재의 판결 결과였다.온하랑은 일이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다. 형사 사건이라 반년은 걸릴 줄 알았다.비록 이미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증거까지 있으니 온하랑은 마음이 다소 괴로웠다.왜 괴로운 것일까?아마도 부민재 때문일 것이다. 예전부터 그녀에게 잘해주었던 부민재는 그녀의 마음속에 좋은 오빠로 남아 있었다. 그녀가 처음 부씨 일가에 왔을 때도 부민재는 친절하고도 다정하게 그녀를 대해 주었고 고등
온하랑이 심란해하고 있을 때 해외에서 걸려온 부선월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순간 그날 경찰서 청장실에서 우연히 엿듣게 된 대화가 떠올라 마음이 더 복잡해졌고 기분도 가라앉았다.“여보세요, 무슨...일이시죠?”온하랑이 담담하게 물었다.부선월은 가소롭게 웃더니 다소 거만한 어투로 말했다.“이젠 고모라고도 안 부르는 거니?”“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세요.”온하랑은 여전히 담담했다.예전에는 부선월을 어른으로서 공경했지만, 지금은 그러지도 않았다. 김정숙의 딸만 아니었어도 온하랑은 그녀의 연락도 받을 생각 없었다.부선월은 코웃음을 쳤다.“그럼 바로 할게. 앞으로 우리 승민이한테서 멀리 떨어져! 네가 여전히 승민이한테 질척이고 있다는 거 내가 모를 거란 생각하지 마! 그 어미에 그 딸이라더니, 넌 여우 같은 네 엄마랑 아주 똑 닮았어! 남자를 홀리는 데 아주 선수야!”온하랑은 바로 이를 빠득 갈았다.“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부선월은 아주 오래전부터 임가희를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녀가 임가희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싫어했다.“무슨 말이냐고? 임가희는 최동철의 계모인 건 알고 있지? 이혼 전적이 있는 주제에 아무런 집안 배경도 없으면서 감히 국환 씨를 넘봐? 그런 여자가 어떻게 국환 씨랑 결혼할 수 있었겠어. 당연히 그 몸뚱어리로 국환 씨를 유혹한 거잖아. 아니야?”온하랑은 점점 화가 치밀었다.임가희가 최동철의 계모로 된 건 확실히 의아한 일이었다.부선월이 임가희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와 임가희를 같은 취급 하자 온하랑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비꼬면서 말했다.“제가 정말 사람을 홀리는 데 선수라고 해도 상대가 어느 정도 저한테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손바닥 하나로 손뼉을 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꼭 제 어머니한테 원망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설마 여사님도 최국환 아저씨를 사랑했던 건 아니시죠? 혹시 좋아하면서도 마음을 숨겨 혼자 끙끙 앓다가 빼앗겼나요?
아이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추서윤을 보곤 흔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추서윤은 아이의 앞에 멈춰 섰다. 허리를 굽혀 모자를 살짝 들면서 말했다.“부윤민이니?”부윤민은 그녀를 훑어보곤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저 아세요?”추서윤은 대답하지 않았다.“네 아빠 곧 감방에 가겠네?”그 말을 들은 부윤민의 얼굴이 변했다.“이상한 말 하지 마세요.”“난 이상한 말 한 적 없단다. 그리고 나보다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네 아빠 살인범이라는 거.”아이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가도 붉어졌다. 입을 삐죽이면서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반박했다.“그런 거 아니에요...”“아빠 구하고 싶지 않니?”“어떻게 구하는데요?”“아주 간단해. 네가 이 사실을 네 증조할머니께 알리면 된단다. 증조할머니한테 온하랑 고모를 설득해달라고 해. 그러면 네 증조할머니는 온하랑 고모를 키워준 은혜가 있으니까 어떻게든 네 아빠를 용서해줄 거야. 네 아빠도 감방 갈 필요도 없어.”부윤민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하지만... 하지만 엄마가 증조할머니께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그건 네 엄마가 이 기회에 네 아빠랑 이혼하고 싶어서 그런 거란다. 그래서 감방 가게 내버려 두는 거야. 생각해 봐, 네 아빠가 평소에 너한테 얼마나 잘해주었는지. 설마 이대로 아빠를 평생 감방에 가둘 생각이니?”부윤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머릿속 저장 공간에 빨간불이 켜졌다.아이는 부모님이 이혼하길 원치 않았고 아빠가 감방에 가는 것을 더욱 원치 않았다.“사실 네 아빠는 바람을 피우지 않았어. 그냥 네 엄마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 아빠가 나오시면 직접 엄마한테 설명하라고 해. 그러면 네 엄마랑 아빠도 이혼하지 않을 거야.”부윤민의 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정말이에요?”정말로 아이가 이 사실을 김정숙에게 알리면 부민재는 감방에 가지 않아도 되고 부모님은 이혼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당연히 정말이란다.”추서윤은 웃으면서 아이를 홀렸다.“다만 일단 네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야 해.
촬영장에 있었던 온하랑은 온 하루 집중하지 못했다.출근하기 전에 부승민이 검찰 인맥을 찾고 있고 사건이 법원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으니 어쩌면 증거 부족으로 다시 경찰들이 조사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말이다. 동시에 부승민은 강남 최고의 엘리트 변호사 계성진을 부민재의 변호사로 고용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령 형벌을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부승민은 그래도 부민재가 최대한 가벼운 형벌을 받게 할 생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만약 그저 변호사만 대신 찾아준 것이라면 그건 부민재가 응당 누려야 할 권리이니 온하랑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승민은 검찰까지 손을 뻗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고 했다.부승민은 부민재가 한 말을 믿고 있었다. 추서윤이 바로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주범이라고. 부민재에게 유리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듣게 된 온하랑은 머릿속에 바로 부선월의 말이 떠올랐다.“승민이는 민재를 따르니 분명 어떻게든 민재를 도와주려고 할 거다.”‘사건을 다시 수사하면 얻은 그 수사 결과가 진실인 걸까?'온하랑은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그녀는 대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촬영이 끝나자 스태프가 온하랑의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배우님, 아까부터 누가 자꾸 배우님 핸드폰으로 연락하던데요.”“네, 알겠습니다. 가져다주어서 고마워요.”온하랑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전부 부승민에게서 온 연락이었다.그녀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부승민은 바로 전화를 받았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할머니가 아셨어.”온하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머리가 새하얘지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뛰었다.“어떤 반응이셔?”“내가 알게 되었을 땐 이미 진정하신 상태였어.”“어떻게 아신 건데?”부승민은 한숨을 내쉬었다.“윤민이가 말했대.”온하랑은 침묵했다.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지금 시간 있어?”“나 옷만 갈아입고 바로 갈게.”“
하지만 아이는 정말로 아빠를 구하고 싶었다.시선이 마주치고 입술을 틀어 물던 온하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형님.”소청하는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왔어요...?”“할머니는 위층에 계세요?”부승민이 들어오며 물었다.소청하는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과 부승민은 시선을 주고받으며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안방에는 김정숙이 침대에 기대앉아 있었다. 안색이 잿빛이 된 채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었다.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그녀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향했다.방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온하랑의 걸음도 점점 느려졌다.문 앞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추길 바랐고 김정숙을 차마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하지만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온하랑은 짙은 한숨을 내쉬고 문고리를 잡았다.문이 천천히 열렸다.김정숙과 눈이 마주친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할머니.”그녀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그대로 김정숙에서 돌진해 김정숙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할머니...”“그래, 하랑아.”김정숙은 자애로운 모습으로 손을 그녀의 손 위로 포갰다.“할머니는 너를 탓하지 않는단다.”온하랑의 사슴 같은 눈망울에 김정숙은 바로 그녀가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눈치챘다.그녀의 손녀는 평소엔 아무렇지 않은 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이 가장 여린 사람이었다.온하랑은 눈앞이 흐려졌다. 눈에서 진주알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할머니, 제가 오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실 거예요...”그간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마음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져버렸다.김정숙은 온하랑의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었다.그녀는 온하랑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괜찮단다. 네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단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버지를 위해 진범을 찾겠다는 네 마음은 나도 알고 있었단다. 이런 마음과 끈기는 흔치 않은 것이니 할머니는 너를 탓하지 않는단다.”다른 사람이었다면 어쩌면 10년이 지났다고 귀찮은 일을 피
“넌 영훈이의 혼외자식이 아니란다. 영훈이는 네 아버지가 아니고 삼촌이란다.”김정숙이 말했다.부승민은 순간 숨 쉬는 법을 잊게 되었다.이 소식은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내가 아버지의 혼외자식이 아니라고?'‘아니 부영훈이 내 아버지가 아니라 삼촌이었다고?'‘그럼 내 어머니는...'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믿기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그가 어릴 때 그렇게 원했던 어머니가 부선월이었으니 말이다.예전에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 그제야 풀렸다.그제야 부선월이 왜 자신에게 그렇게 잘해주었는지, 왜 부민재가 아닌 ‘혼외자식'이었던 자신을 더 아꼈는지, 왜 자꾸만 자기 일에 간섭하는지 알게 되었다. 사실은 그의 어머니 신분으로 그의 결혼 생활에 간섭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김정숙은 넋이 나간 부승민을 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선월이는 네 아버지랑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였단다. 하지만 네 아버지는 집안의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지. 선월이는 네 아버지를 사랑해서 너를 지우지 않았단다. 그때 나랑 네 할아버지가 너를 낳겠다는 걸 엄청 반대했었지. 하지만 선월이는 고집이 아주 센 아이라 나와 네 할아버지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었어.”“그러다 나중에 네 아버지랑 결혼한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었었지. 그 여자가 선월이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높은 곳에 올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 그 여자 가족들이 나랑 네 할아버지를 찾아와 욕을 퍼부었지. 그제야 선월이도 고집을 조금 내려놓게 된 거야. 너를 네 삼촌의 호적에 올리는 대신 이곳을 떠나기로 타협을 봤어.”이 일은 최국환에게도 잘못이 있었다.최씨 일가 사람들은 부승민을 데려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의 할아버지였던 부승호가 나서서 말렸고 최국환 아내의 집안사람들은 배다른 자식이 나타나 자신의 자식과 경쟁하는 것을 싫어했기에 결국 부승민을 부씨 일가에 남길 수 있었다.“사실 네 숙모는 네가 영호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 선월이가 너를 가졌
이런 원망과 증오는 비록 부승호가 억누르고 있었지만, 여전히 부민재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고 결국 그런 사태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할머니께서 숨기셨다는 건 전부 절 위해서 그런 것이잖아요.”그에겐 형제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것 외엔 중요한 것이 없었다. 누가 이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선월이는, 그러니까 네 어머니는... 그간 해외에 오랫동안 힘들게 적응하며 살았으니 너무 탓하지 말렴.”부승민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아마도 부선월이 떠나기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리는 것 같았다.“제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고 더는 저랑 하랑이 사이를 가로막지만 않는다면 저도 어머니로 대할 겁니다.”“그래.”김정숙은 고개를 끄덕였다.“되었다. 너도 얼른 나가 보아라. 난 피곤해서 조금 쉬어야 할 것 같구나.”“네, 할머니. 그럼 쉬세요.”부승민은 그대로 일어나 방을 나갔다.나오자마자 2층 창문에 기대어 서 있는 온하랑을 발견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과 옷자락은 마치 선녀의 모습 같았고 당장이라도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온하랑은 고개를 돌렸다. 입을 열기도 전에 부승민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를 꽈악 끌어안았다.그는 머리를 그녀의 목덜미에 파묻은 채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온하랑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왜 그래?”그의 행동이 너무도 수상했다. 김정숙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궁금해졌다.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들려오지 않자 다시 그를 불렀다.“부승민?”몇 분 뒤, 부승민은 그녀를 놓아주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금방 알게 된 자신의 정체는 다른 누구라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밝히고 싶지 않을 것이다.온하랑은 의구심이 가득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형에 대해 할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그냥 할머니가 형 교육을 잘못했다고 자책하셨어. 그리고 예전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냥 추억 회상 좀 했을 뿐이야.”온하랑은 그를 빤히 보다가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곧 유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