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모, 저 놀이동산 가고 싶어요.”부시아는 다른 애들보다 일찍 철들었지만 그래도 아인지라 요즘 유치원만 다녀서 나가서 놀고 싶은 모양이었다.온하랑은 요 며칠 계속 비가 부슬부슬 내렸던 터라 날씨부터 확인했다.오늘 아침에도 비가 내려 햇빛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리기만 했다. 또다시 비가 올 가능성이 컸다.“숙모가 맛있는 거 사줄까? 오전에 놀이동산 가서 놀고 점심에 맛있는 거 먹는 거 어때?”“네!”“그래, 숙모랑 놀이동산에 놀러 가자. 그런데 비가 오면 바로 집으로 오는 거야. 알았지?”“네.”부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가는 길 내내 녀석은 최근에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더니 결국 지치고 말았다.온하랑은 피식 웃더니 음악을 틀었다.놀이동산에 도착한 부시아는 마음껏 즐겼다.회전목마에서 내려오자마자 또 롤러코스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하지만 키 제한으로 탈 수가 없었다.부시아는 주위를 살피더니 미끄럼틀을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미끄럼틀은 그네, 시소 등이 있는 무료 체험 구역에 있었다.그 옆은 바로 음식 코너라 달려가던 중 발걸음을 멈추고 온하랑을 쳐다보았다.“숙모, 저 소떡소떡 먹고 싶어요.”마침 온하랑도 먹고 싶었던 찰나였다.2인분 주문을 마치고 뒤돌아보았을 때, 부시아는 이미 미끄럼틀에서 놀고 있었다.“조심해.”온하랑이 당부했다.“알겠어요.”부시아는 대답하자마자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소떡소떡은 바로 이 자리에서 만드는 거라 오래 기다려야 했다. 온하랑은 기다리는 동안 부시아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객님, 소떡소떡 완성되었습니다.”온하랑은 포장을 건네받으면서 계좌이체 하려고 했다.바로 이때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고 뒤돌아보았을 때 부시아는 바닥에 넘어져 힘겹게 일어서려고 했다.그래서 바로 달려가 부시아를 부축했다.“시아야, 괜찮아? 어디 다친 곳 없어? 안 아파?”부시아는 놀란 표정으로 껍질이 까여 피가 보이는 손바닥을 내밀었다.“다른 곳은?”부시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 부모님이세요? 마침 잘 오셨네요. 방금 이 아이가 우리 아이를 미끄럼틀 위에서 밀었거든요. 당장 사과하세요!”아줌마는 온하랑을 힐끔 보더니 피식 웃었다.“어떻게 제 아이가 밀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거죠? 미끄럼틀 위에 우리 아이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방금 아이가 직접 인정했어요.”아줌마는 남자아이를 쳐다보더니 말했다.“쳇, 어른이 무섭게 따지니까 두려운 마음에 인정한 거겠죠.”“그러면 CCTV 확인해 보시든가요!”“아유, 정말 깐깐하긴. 우리 아이가 밀었으면 뭐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그리고, 당신 따님 멀쩡한 것 같은데 설마 돈 뜯어내려는 수작은 아니죠?”아줌마가 말했다.남자아이의 옷차림이 비싸 보이긴 했지만 온하랑과 부시아도 꿀리지 않았다. 그래서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아무리 돈 많는 집안이라고 해도 사람을 밀쳤으면 사과해야 하는 법이다.말다툼 끝에 온하랑은 계속 말해봤자 말이 안 통하겠다는 느낌에 결국 경찰에 신고했다.온하랑은 그러다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와 시골에서 지냈던 시절이 떠올랐다.두 분 다 순수한 시골분이라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했다. 매번 온하랑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늘 사고를 저지르지 말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그럴 때마다 온하랑은 자신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농촌에서 살다 보면 학문적 시야가 국한되기 마련이라 할머니 할아버지를 탓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부시아에게까지 억울하게 똑같은 경험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온하랑이 전화를 들자 아줌마가 비웃었다.“왜요. 사람을 부르게요?”전화 연결음이 울리고, 온하랑이 말했다.“여보세요, 경찰서죠?”아줌마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어머, 바로 신고하셨어요? 제가 무서워할 줄 알고?”온하랑은 자세한 상황설명 후 전화를 끊었다.“두렵지 않으면 경찰분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시든가요.”“그까짓 거 기다리면 되죠.”두 사람의 다툼 소리에 사람들이 몰
유은정에게 연락했을 때 분명 경찰서에 말해놓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했는데 말이다.나이 많은 형사가 온하랑을 힐끔 보더니 마른기침하면서 말했다.“그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CCTV가 떡하니 있는데 밀었으면 민 거죠. 얼른 사과하세요.”아줌마는 표정이 어두워졌다.‘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유은정 씨가 말해놓는다고 했는데?’남자아이는 충격이 컸는지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호흡이 가빠졌다.“저희가 사과하지 않으면요?”“그러면 같이 경찰서로 갈까요? 어차피 구치소에 빈자리도 많은데.”남자아이는 불안감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온하랑은 이 신분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아줌마가 방금 아는 사람을 통해 경찰서에 전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하지만 신고자가 온하랑이라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온하랑은 아무리 부승민과 멀어지려고 해도 멀어질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옆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이 둘을 엮어놓으려고 했기 때문이다.온하랑은 부승민의 전처이자 동생이었다.아무리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부승민 덕에 순조롭게 넘어갈 수 있었다.만약 그저 일반인이었다면, 오늘 이 일은 이대로 끝나지도 못했다.형사는 CCTV를 통해 부시아가 확실히 남자아이한테 치여 미끄럼틀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남자라면 당당해야 하는 거야. 일부러 그런 거 아니잖아. 동생이 다쳤다는데 사과 정도는 해야지.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방금 형사들이 CCTV를 확인하는 동안, 아줌마는 또 누군가에게 전화했다.“저희는 사과할 수 없어요. 그냥 경찰서로 잡아가시든가요. 정직 처분당하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요.”“정말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네요. 돈 있으면 싹수가 없어도 되나? 사람을 밀쳤으면 사과하는 것이 당연한 거지. 사과도 못 할망정 경찰을 협박해? 정말 겁도 없이.”온하랑이 차갑게 말했다.“누구보고 싹수없다고 하는 거야!”온하랑이 말했다.“바로 당신을 말했어. 어른이라는 것이 소질도 없고, 행패만 부리기만 하고. 어른이 이모양 이 꼴이니
“저한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대요?”온하랑은 미간을 찌푸린 채 주스를 마셨다.“저 지금 시간 없어요.”이때, 혼란을 틈타 전화기 너머에서 한 여자의 분노한 말투가 들려왔다.“온하랑 씨 맞죠? 제 아이가 당신 때문에 천식이 발작해서 죽을 뻔했잖아요! 당장 병원으로 와서 사과하세요!”아까 그 말이 안 통하는 아줌마와는 목소리가 달라 보였다.‘하지만 싹수없는 걸 보니 딱 봐도 한집 식구네.’온하랑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당신 아들 천식 발작한 것이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제... 딸을... 밀치고도 사과 안했잖아요. 제가 병원까지 쫓아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상대방이 피식 웃었다.“그러면 제가 고마워해야 하나요? 그쪽 따님은 그저 살짝 껍질이 까인 거로 알고 있는데. 아이들끼리 장난친 거 가지고 너무 꼬치꼬치 캐묻는 거 아니에요? 경찰을 이용해 우리 아들을 협박하기나 하고!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천식이 발작한 거죠! 이래도 할 말 있어요?”“그러면 제가 뭐 없는 말 했어요? 제 딸을 밀쳤으면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천식이 있으면 뭐, 잘못해도 책임 안 져도 되나?”진작에 사과했으면 경찰에 신고했을 일도 없었다.“다시 한번 물을게요. 사과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다시 잘 생각해 보고 말씀하세요. 나중에 제가 기회를 안 줬다고 하지 마시고.”온하랑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리고 핸드폰을 한쪽에 내팽개쳤다.건방진 말투를 보니 신분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온하랑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부시아는 온하랑의 말만 듣고도 상대방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녀석은 입을 삐쭉 내밀더니 말했다.“숙모, 그 사람들 정말 너무해요. 삼촌한테 이를 거예요!”온하랑이 피식 웃었다.“시아야, 화내지 마. 이런 사람들 때문에 기분 상할 필요 없어.”“숙모도 화내지 말고 얼른 고기나 드세요.”부시아는 포크로 온하랑에게 스테이크 한 조각을 건넸다.“고마워, 시아야.”이제 막 숟가락을 들려던 참에 또 불쾌한 문자
“하랑 씨가 어떤 분을 건드렸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온하랑은 그제야 오전의 일을 떠올리게 되었다.‘행동도 빠르네.’“그래요. 따라갈 테니까 먼저 차에 짐부터 내려놓읍시다.”“그러세요.”온하랑은 먼저 쇼핑백을 차에 넣어두고는 부시아의 손을 잡고 상대방의 봉고차에 올라탔다.“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온하랑이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부시아는 온하랑의 품에서 사나워 보이는 이 남자들을 쳐다보더니 속삭였다.“숙모. 저희 어디로 가요?”부시아는 스마트 워치로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삼촌, 살려주세요. 저랑 숙모가 납치당했어요.]“음... 아마도 병원일 거야.”추측하던 온하랑은 고개 들어 조수석에 앉아있는 남자한테 호기심에 물었다.“말투를 들어보니 현지인이 아닌가 봐요?”그는 못 들은 척 전방만 주시할 뿐이다.따라서 다른 사람들도 침묵을 지켰고, 차 안은 고요하다 못해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온하랑이 또 물었다.“혹시 누가 보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오전에 누군가와 시비가 붙긴 했지만 아직 상대방 신분을 몰라서요.”온하랑은 어렴풋이 경찰한테서 들은 남자아이의 이름을 떠올렸다.“동림이라고 했나...”여전히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아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괜찮아요? 저희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병원 맞아요?”차 안에는 온하량의 목소리만 들렸다.봉고차는 어느새 어느 병원의 병원동 앞에 세워졌다.이 남자들은 여전히 사나운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저희랑 가시죠.”온하랑은 먼저 차에서 내려 부시아를 안아서 내려주었다. 결국 이들의 뒤를 따라 입원동 4층에 있는 한 환자실에 도착하게 되었다.앞장서던 남자가 온하랑더러 밖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사모님, 오셨습니다.”“들어오라고 해.”병실 안에서 통화하면서 들었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부시아와 함께 병실로 들어가자 그 남자아이가 얼굴이 창백한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그 옆에는 정갈한 메이크업, 흰색 정장에 10cm짜리 하이힐까지 신고, 뒤로 머리를 묶은 4
“네가 진심으로 사과하면 쟤는 놓아줄게. 만약 그게 싫다면 저 여자애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고. 내 아들은 병원에 누워있는데 쟤가 저렇게 나대는 꼴을 내가 보고 싶겠어?”“부승민 대표님이 알게 돼도 아무렇지 않은가 봐요?”“복수할 거면 하라 그래!”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코웃음을 치는 여자는 부씨 일가가 강남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전혀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다.여자는 눈썹을 까딱이며 웃었다.“어때, 사과할 거야?”검은 눈동자를 여자에게 한참 동안 고정하고 있던 온하랑은 주먹을 꽉 쥐고 한 자 한 자 말을 내뱉었다.“미안해요, 사과할게요.”그리고는 침대에 누워있는 남자를 보면서 시선을 내리깔고는 말을 이었다.“미안해요, 내가 너무 몰아붙였어요. 사과할게요 이렇게. 몸은... 빨리 회복되길 바라요.”그제야 여자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제라도 말귀를 알아들어서 다행이야. 사람이 가끔은 굽힐 줄도 알고 그래야 하는 거야. 안 그러면 너도 네 아빠 꼴 난다.”갑자기 제 아버지를 언급하는 여자에 온하랑은 따지고 싶었지만 여자 손에 잡혀있는 부시아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온하랑은 남자 곁에 다가가 부시아를 품에 넣고는 말했다.“이제 가도 되죠?”여자가 귀찮다는 듯 손을 젓자 온하랑은 부시아를 안고 병실을 빠져나왔다.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해서야 온하랑은 그 작은 얼굴을 뜯어보며 조심스레 물었다.“시아야, 아까 무서웠지?”부시아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몸은 자꾸만 온하랑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괜찮아요, 이제 숙모 있으니까 안 무서워요.”부시아도 오늘의 일은 전적으로 제 잘못임을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온하랑은 부시아가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게 싫어 억지로 그 남자에게 사과를 시켰기에 이런 수모까지 당하게 된 것이다.“안 무서우면 됐어.”온하랑은 부시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이제 집에 가자.”“네.”온하랑이 부시아의 손을 잡고 병원을 나서는데 맞은 편에서 부승민이 경호원 몇 명을 대동하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
“응.”온하랑을 먼저 차로 보낸 부승민은 부시아를 안고 경호원들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앞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은 부승민의 등장에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병실 문 앞에서 십 미터쯤 떨어진 곳까지 왔을 때 부승민은 갑자기 멈춰서더니 손짓을 하며 부시아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시아야, 잠깐만 고개 돌릴까?”부시아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돌리자 부승민 뒤에 섰던 여덟 명이나 되는 경호원들이 일제히 다가가 병실 앞을 지키던 경호원들을 때려눕혔다.병실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자 의아해 난 임가희의 목소리도 이어서 들려왔다.“최환, 무슨 일이야?”임가희가 부르는 최환이라는 보스처럼 보이는 사람은 부승민의 경호원에 의해 입이 막혀버려 웅얼거리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대답이 없자 이상함을 느낀 임가희가 마침내 병실 문을 열었다.그때 부승민이 부시아를 안아 들고 다가왔다.임가희는 잠시 멈칫하더니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부 대표? 빨리 왔네.”“빨리 와야죠. 제 조카가 미끄럼틀에서 밀쳐졌다는데, 사과받아내려고 했더니 여사님이 우리 하랑이한테 사과를 시키셨더라고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저도 같아서요. 김 여사님도 제 마음을 좀 헤아려주셨으면 해요.”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하는 부승민에 임가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동림이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시아 딱 보니까 다친 데도 없네 뭐. 우리 동림이는 천식 때문에 지금 몸도 안 좋은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부승민은 임가희와 더 말을 섞지 않고 뒤에 있는 경호원들을 바라보았다.그러자 경호원 둘이 병실 옆으로 뛰어갔다.그 모습을 본 임가희가 펄쩍 뛰며 부승민을 향해 소리 질렀다.“부 대표, 이게 뭐 하는 짓이야!”“저도 사과받아내려고 이러는 건데, 왜요?”두 명의 경호원들은 신속하게 한 명은 임가희를 막고 한 명은 최동림을 안아 들었다.“우리 최씨 집안과 정말 해보겠다는 거야?”“네.”최동철이 아무 이유 없이 부씨 일가를 건드릴 때부터 최씨 집안과는 이미
한편 차에 탄 온하랑은 시트에 기대어 두 눈을 감고 있었다.오늘 유독 기분이 나빴던 하루였다. 최동림과 그 엄마뿐 아니라 추서윤까지 온하랑의 신경을 건드렸다.추서윤이 심리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온하랑은 좀처럼 그녀를 동정할 수가 없었다.그냥 그 병들을 빌미로 법적인 책임을 피하려 한다는 사실이 짜증 나기만 했다.그런 짜증이 가슴을 틀어막고 있어 어딘가 계속 찝찝했다.“띠링-”때마침 울린 카톡 알람에 온하랑은 복잡한 생각을 조금 정리하고 핸드폰을 들어 주현이 보내온 문자를 확인했다.풍경 사진 공모전 결과가 오늘 나오는데 확인했냐는 문자였다.그 문자를 보고서야 잊고 있던 공모전이 떠올랐다.그런데 보통 입상하면 이메일로 연락이라도 줄 텐데 잠잠한 제 메일함을 보며 아마도 수상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어차피 온하랑은 아마추어였으니 많은 시간을 들여 사진을 배워왔던 프로들과는 차이가 있는 게 당연했기에 온하랑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참여했다는 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그래서 반쯤 포기한 마음으로 1등 수상자까지 확인했을 때, 온하랑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스크롤을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1등 작품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그리고 그 여러 번의 확인 끝에 온하랑은 마침내 자신의 작품이 1등에 당선되었음을 믿을 수 있었다.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다면 수상자의 이름은 온하랑이 아니었다.누군가 온하랑의 작품만 카피하여 본인 이름을 붙여놓은 것이다.이런 상황은 어떤 분야에서나 종종 있는 일이었고 학술계는 더 심했는데 온하랑은 자신이 사건 당사자가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었다.원래도 좋지 않던 기분인데 이 소식을 접하니 더 다운되고 짜증이 밀려왔다.그때 차 문이 열리더니 부승민이 부시아를 먼저 차에 태우고는 자신도 따라 탔다.“숙모, 나 왔어요.”온하랑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핸드폰을 치우고 그들을 바라봤다.“사과는 받았어?”부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존경 어린 눈길로 부승민을 쳐다봤다.“받았어요. 삼촌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