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이 컷을 외치자 온하랑은 패딩을 추서윤에게 가져다주었다. 오후에도 여전히 추서윤의 신이 있었다. 그들은 촬영장에서 점심을 먹었다.온하랑은 추서윤에게 점심을 가져다줄 때 추서윤이 차 안에서 전화를 받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작업실에서 걸려 온 전화 같았는데 투자자가 대본을 몇 개 보냈는데 추서윤에게 하나 고르라고 했다.그 대본 중 두 편에 대해 온하랑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둘 다 자본가들에게 선택받은 작품이라 많은 연예인이 앞다투어 참여하려고 했다.그중 한 작품은 시나리오 작가와 촬영 감독이 여러 번 파트너로 일하며 수많은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업계에서 대성공을 이룬 사람들로 대규모 제작 작품이었다. 나머지 몇 편도 인기 소설을 각색한 작품들로,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다.온하랑은 의아하게 여겼다. 지난 이틀 동안 그녀는 쉬는 시간마다 제작진과 보조 연기자들의 대화를 통해 이 업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주도적으로 대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유명해진 후 얼마간의 트래픽과 팬층을 확보한 연예인이거나 뒤에서 밀어주는 스폰서가 있는 연예인이었다.추서윤은 원래 어느 정도 팬층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귀국 후 반년 동안 작품이 없었고, 제삼자 스캔들에 휩싸여 많은 팬을 잃었다. 게다가 이제 뒤에서 밀어주는 부승민도 없었기에 현재 추서윤의 처지에서는 단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명의상의 특별 연출이었다.그런데 어떻게 다시 대본을 고를 수 있게 됐을까?설마 추장훈 때문인가?몇 년간 추장훈은 추씨 가문을 번영으로 이끌며 강남에서 자리를 잡았다. 부승민과 추서윤이 헤어진 후 추장훈도 발을 뺐다. 절대 추서윤을 다시 도와줄 리 없었다. 아마도 추서윤은 다른 스폰서를 찾은 것 같았다.추서윤은 이미 예상했던 일인 것처럼 매우 침착했다. 매니저에게 밤에 대본을 집으로 가져오라 하고 천천히 고를 생각이었다.오후 촬영이 끝난 후 온하랑은 추서윤에게 패딩을 걸쳐 주고 같이 분장실로 갔다.“스케줄표를 보니까 내일부터 며칠 동
몇 분 뒤에 추서윤도 도착했다. 온하랑을 불러 같이 위층에 예약한 룸으로 갔다. 룸에는 이미 몇 사람이 와있었는데 전부 온하랑이 들어본 적이 있는 배우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은 아주 유명한 중년의 연기파 배우였다. 그들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틀림없었다.추서윤이 들어오는 것을 본 몇 사람은 다가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추서윤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룸 안은 다시 조용해지고 분위기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중년 배우는 주도적으로 입을 열어 대화를 시작했다. 다소 피상적인 대화이긴 해도 처음 만난 그들이 어색하고 이상한 분위기를 깨기에는 충분했다.온하랑은 ‘이런 게 연예계인가?’라고 생각했다.아무리 동료라고 해도 일반인처럼 지내기 어렵고 언젠가는 이해관계가 얽혀서 적이 될 수도 있었다.9시 10분쯤 다른 사람들이 오자 모두 일어나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번에 온 사람들은 프로그램 감독과 조감독 두 명, 시나리오 작가였다.그들이 들어올 때 온하랑은 흠칫 놀랐다. 두 조감독 중 한 사람은 서우현이 보내온 영상 속 추서윤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남자 주인공으로 성이 최 씨다.바로 그 순간 그 조감독도 마치 상품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 감독은 추서윤을 보고는 놀란 듯 옆에 있던 최민식을 힐끗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마무리 단계에 있는 드라마가 있었고 편집과 녹음을 계속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새 프로그램의 사전 준비 작업과 캐스팅을 모두 두 조감독이 맡았다.현재 그의 제작팀은 송 감독의 제작팀과 인접해 있어 가끔 방문할 때마다 추서윤의 연기를 본 적이 있는데, 송재열은 너무 온화했다. 만약 그였다면 절대 추서윤을 통과시키지 않았다.그렇다. 이 감독은 바로 정진석이다. 서로를 소개한 후 정 감독은 모두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 그는 그제서야 온하랑을 알아보고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이 사람은 추서윤의 대역이 아니던가? 왜 또 매니저가 되어 있지?모든 배우가 테이블 앞에 앉아 손에 대본을 들고 읽
“네?”갑자기 호명 당한 온하랑은 흠칫 놀라더니 당황한 듯 눈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쏠렸다. 매니저로서 그녀는 이미 자신의 존재감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감독이 왜 그녀의 의견을 묻는 걸까?잠깐, 감독이 나를 알고 있나?“당신은 여기서 연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한다고 생각하죠?”정진석이 다시 물었다. 온하랑은 감독의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고 신중하게 생각했다.“저는 대본을 보지 못했지만 시청자의 입장에서 볼 때 만약 연서가 처음부터 물질적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캐릭터 설정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돋보이는 악역도 될 수 없고요. 제 생각에는 시청자들은 선한 사람이 삶의 억압으로 점점 흑화하는 장면을 더 선호할 것 같아요. 그러면 연서의 캐릭터가 더 잘 살고 몰입감도 높아지지 않을까요?”어쩔 수 없이 악인이 된 악역 캐릭터는 처음부터 노골적인 악역보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마음이 아프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배우의 연기력도 반영된다. 과거 영화와 드라마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악역 캐릭터들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모두 삶에 떠밀려 악인이 되었고, 배우와 캐릭터 간의 상호적인 성과이기도 했다.온하랑은 한마디를 보충했다.“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에요. 구체적인 건 감독님과 작가님에게 달렸죠.”정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겸손할 필요 없어요. 아주 좋은 지적이에요. 연서 캐릭터 설정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녀와 여자 주인공이 좋은 친구에서 갈라서는 것, 이것이 큰 포인트예요.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여자 주인공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그도 조금 전에 이 문제를 발견했지만 이준섭이 먼저 그 문제를 제기했다. 정 감독은 이준섭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추서윤을 바라보았다. 만약 정말 추서윤의 생각대로 연기한다면 연서 캐릭터는 설정과 몹시 동떨어지고 심지어 캐릭터가 붕괴하여 도식화된 악역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다.추서윤은 얼굴빛이 살짝 어두워지더니
그녀는 말을 마치며 컵을 뒤집어 남아있는 술이 없음을 증명했다.다른 신인도 역시 비교당할 것이 두려웠는지 바로 술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온하랑이 추서윤을 대신해 모두 마셔주었다.신인 배우가 따라준 술을 비우자 다른 배우도 술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인사말은 추서윤에게 하면서 술은 온하랑의 앞에 놓인 잔에 따랐다.여자 세 명과 남자 두 명의 인사가 끝나자 추서윤과 온하랑이 자리에 앉아있는 모두에게 술을 한 잔씩 돌리기 시작했다.정진석 감독에게까지 술을 올리자 추서윤은 온하랑의 잔에도 술을 가득 따르며 최민식 감독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조감독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추서윤 씨 대신해서 제가 먼저 한 잔 들겠습니다.”온하랑이 술잔을 들어 최민식 조감독과 술잔을 부딪치며 간단히 건배를 했다.최민식이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당연하죠, 저희가 호흡만 잘 맞춘다면 분명 대박 날 겁니다.”온하랑의 착각일지 몰라도 그녀는 아까부터 최민식의 눈빛이 어딘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계속해서 술을 받아 마시자 온하랑은 뱃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취기가 올라 얼굴은 벌써 빨개졌고 눈가도 촉촉해지며 점점 정신이 흐릿해져 갔다.마지막 순서의 배우와 술잔을 주고받자 온하랑은 그저 어지러움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자리로 돌아간 온하랑은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딱 봐도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예전부터 회사에 다니며 많은 술자리에 참석해왔던 온하랑으로서 결코 주량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왜인지 별로 많이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머리가 점점 어지러워지더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하랑 씨, 괜찮아요?”추서윤이 걱정스러운 척 물었다.그 순간, 온하랑의 뇌리를 스치는 말이 하나 있었다.이유 없이 잘 해주는 사람은 사기꾼이나 도둑놈뿐이다.온하랑의 마음속에
취해서 정신줄 놓아버린 거 아니었나?그 생각이 최민식의 머릿속을 스쳐 가는 동안 그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온하랑의 한 손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치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아악—”최민식은 두 눈을 손으로 감싸며 고통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호신용 스프레이가 주는 화끈하고 뜨거운 감각에 최민식의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흘러나왔다. 눈앞이 깜깜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더러운 년!”최민식은 두 눈을 감은 채 미친 사람처럼 기억을 더듬으며 두 손을 뻗어 온하랑의 목을 조이려 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온하랑의 목이 아닌 어깨였다.온하랑이 크게 저항하며 최민식의 손을 뿌리치고는 술병을 들어 최민식의 머리를 내리쳤다.“퍼억—”술병이 깨지며 안에 담겨있던 술이 사방으로 흩어졌다.최민식의 머리에서는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더니 그는 이내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쓰러졌다.온하랑은 최민식이 침대 위에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발로 그를 두어 번 툭툭 쳐보았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자 온하랑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추서윤이 온하랑을 비서로 고용한 이유가 이렇게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면 뭐겠는가?추서윤이 온하랑을 식사 자리에 초대할 때부터 온하랑은 눈치챌 수 있었다. 추서윤은 본인 대신 술을 마셔줄 흑장미 역할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을.온하랑은 눈치껏 숙취해소제를 챙겨 먹고 호주머니에 호신용 스프레이와 작은 칼을 챙겨 그 자리에 참석했다.룸에서 최민식 조감독의 눈빛을 보자 온하랑의 경계심은 더 커졌고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을 때를 틈타 몰래 패딩 옷소매에 술병 하나를 챙겨왔다. 원체 오버사이즈 패딩이었던지라 그 아무도 온하랑이 따로 챙긴 술병을 발견하지 못했다.모든 준비를 마친 온하랑은 취한 척 연기를 하며 추서윤의 계략에서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다행히도 추서윤은 온하랑에게서 이상한 점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사실 온하랑은 정진석 감독을 포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추서윤이 호텔 방 밖에 대기하게 시켰던 그 사람이었다.발신인을 확인한 추서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바로 전화를 받아 질문을 던졌다.“왜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흐르더니 이내 대답이 들려왔다.“방금 구급차가 와서 조감독님을 싣고 갔습니다.”추서윤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띄워졌다.설마 음주 후 성관계로도 정신을 잃을 수가 있나?흥, 40대 늙다리가 운동도 안 하고 살만 뒤룩뒤룩 쪄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매번 최민식과 함께 관계를 할 때마다 추서윤은 능지처참을 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껴왔다.온하랑도 자신과 같은 일을 겪었다 생각하니 추서윤의 마음은 후련하기 그지없었다.“제가 방금 가까이 가서 봤는데요, 조감독님 옷매무새는 단정했는데 머리에 상처가 심하게 나 있었습니다…”추서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뭐라고요? 확실해요? 잘못 본 건 아니고요?”“네, 정말입니다.”“…”추서윤은 지금 심정을 무어라 형용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추서윤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급하게 수화기 너머로 질문을 던졌다.“방 안에는 들어가 봤어요? 카메라…” “방금 혼란스러울 때 들어가 봤는데요. 메모리 카드는 이미 누군가가 가져간 것 같습니다.”추서윤은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쿵 내려앉는 듯했다.그녀는 조용히 전화를 끊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채 자동차 핸들을 힘껏 내리쳤다.쓸모없는 것들!정말 하나 같이 쓸모라고는 없는 것들!최민식 이 돼지 새끼가!아니, 돼지보다 못한 놈!입 앞까지 고기를 가져다줘도 못 먹어!추서윤은 극에 달한 분노에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메모리 카드는 분명 온하랑이 가져갔을 것이다.추서윤이 기억하기로는 자신이 카메라를 작동시킨 후로도 최민식과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만약 온하랑이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따로 공개라도 해버린다면 그 결과는 감히
남자와의 통화가 끝나자 추서윤은 또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어떻게 됐어? 그쪽 애들은 국경 근처는 갔대? 장국호가 온하랑한테 넘어가면 우리는…”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답했다.“갔어. 지금 장국호의 행방은 아무도 몰라.”추서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원망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온하랑이 10년 전 사건 조사하기 시작할 때부터 진작…”온하랑도 같이 처리해버렸어야 했다.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침묵을 지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추서윤이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부씨 집안도 온하랑 거둬줄 땐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지?”부민재가 말했다.“내가 할아버지한테 온하랑 입양하자고 얘기한 거야.”사실 할아버지는 그저 온하랑이 계속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후원만 해줄 생각이었다.온하랑을 부씨 가문으로 입양해 양딸로 키우자는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바로 부민재였다.할아버지는 평소에도 항상 온강호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인지 온강호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고 진심으로 애도했다. 갓 사회에 진출해 일을 시작한 큰 손자를 온강호의 장례식에까지 참석시킬 정도였다.그때까지만 해도 부민재는 그저 할아버지의 친구가 세상을 뜬 줄로만 알고 할아버지와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장례식장에 도착해 크게 걸려있는 흑백의 영정사진을 확인한 후에야 부민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평범한 영정사진이었지만 부민재는 사진 속의 남자가 살벌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괴이한 느낌을 받았다.할아버지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진심으로 애도 하는 표정을 보는 부민재의 마음은 괴롭기 그지없었다.부민재는 그곳에서 온하랑을 처음 마주쳤다. 16-17살 정도밖에 안 된 어리고 어렸던 온하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온강호가 온하랑의 유일한 가족이었다는 ㅅ사실을 접한 후에는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연민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먼저 온하랑의 입양을 제안했다.할아버지도 부민재의 의
“알겠어요, 같이 가요.”저녁 일곱 시 반, 온하랑은 김시연과 함께 파티 장소로 도착했다.말로는 파티라고 하지만 간단한 연회에 가까웠다. 화려한 양복을 갖춰 입은 성공 인사들이 두세 명씩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온하랑과 김시연 두 사람은 디저트만 조금 챙겨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온하랑이 물었다.“그 소개팅 상대라는 사람은 왔어요?”김시연은 휴대폰을 보며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대답했다.“아직이요.”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 다가와 두 사람에게 간단한 대화를 시도했지만 냉담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이내 흥미를 잃고 자리를 떴다.조금 지나자 김시연은 휴대폰을 들고 어딘가로 답장을 보내는 듯하더니 이내 온하랑에게 말했다.“왔대요, 두세 마디 정도만 얘기하다가 금방 올게요.”“네.”김시연이 몸을 일으켜 테라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온하랑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그 순간, 청장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이 납치 사건은 다른 사건들에 비해 정말 이상한 사건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납치범은 체포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온하랑의 아버지까지 연관되어버린 사건이었다.민성주는 그저 납치 사건과 온강호 사망 사건을 이어주는 인물일 뿐, 온하랑이 정말 잡고 싶었던 범인은 바로 왕대운이었다.괜히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둘 다 놓칠 것을 우려해 경찰은 민성주를 굳이 서까지 불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감시반을 붙여 민성주와 왕대운의 집 주위에서 잠복근무하며 두 사람을 계속 감시하기만 했다. 또 다른 인력을 동원해 민성주 생부가 살던 집을 집중적으로 수색하고 동시에 왕대운과 민성주의 관계를 조사하도록 했다.추서윤이 나서서 민성주의 죄를 입증해야만 조사라는 명목으로 왕대운을 체포할 수 있었다.하지만 청장이 전화로 전해준 소식은 다름 아닌 민성주가 도주했다는 사실이었다.정확하게 말하면 실종되었다.민성주의 집 주위에서 잠복근무하던 경찰들은 오전까지만 해도 민성주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오후가 다 지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자 어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