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의 통화가 끝나자 추서윤은 또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어떻게 됐어? 그쪽 애들은 국경 근처는 갔대? 장국호가 온하랑한테 넘어가면 우리는…”수화기 너머의 남자가 답했다.“갔어. 지금 장국호의 행방은 아무도 몰라.”추서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원망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온하랑이 10년 전 사건 조사하기 시작할 때부터 진작…”온하랑도 같이 처리해버렸어야 했다.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침묵을 지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추서윤이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부씨 집안도 온하랑 거둬줄 땐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지?”부민재가 말했다.“내가 할아버지한테 온하랑 입양하자고 얘기한 거야.”사실 할아버지는 그저 온하랑이 계속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후원만 해줄 생각이었다.온하랑을 부씨 가문으로 입양해 양딸로 키우자는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은 바로 부민재였다.할아버지는 평소에도 항상 온강호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인지 온강호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도 누구보다 안타까워하고 진심으로 애도했다. 갓 사회에 진출해 일을 시작한 큰 손자를 온강호의 장례식에까지 참석시킬 정도였다.그때까지만 해도 부민재는 그저 할아버지의 친구가 세상을 뜬 줄로만 알고 할아버지와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장례식장에 도착해 크게 걸려있는 흑백의 영정사진을 확인한 후에야 부민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평범한 영정사진이었지만 부민재는 사진 속의 남자가 살벌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괴이한 느낌을 받았다.할아버지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진심으로 애도 하는 표정을 보는 부민재의 마음은 괴롭기 그지없었다.부민재는 그곳에서 온하랑을 처음 마주쳤다. 16-17살 정도밖에 안 된 어리고 어렸던 온하랑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온강호가 온하랑의 유일한 가족이었다는 ㅅ사실을 접한 후에는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연민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먼저 온하랑의 입양을 제안했다.할아버지도 부민재의 의
“알겠어요, 같이 가요.”저녁 일곱 시 반, 온하랑은 김시연과 함께 파티 장소로 도착했다.말로는 파티라고 하지만 간단한 연회에 가까웠다. 화려한 양복을 갖춰 입은 성공 인사들이 두세 명씩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온하랑과 김시연 두 사람은 디저트만 조금 챙겨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온하랑이 물었다.“그 소개팅 상대라는 사람은 왔어요?”김시연은 휴대폰을 보며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고는 대답했다.“아직이요.”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 다가와 두 사람에게 간단한 대화를 시도했지만 냉담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이내 흥미를 잃고 자리를 떴다.조금 지나자 김시연은 휴대폰을 들고 어딘가로 답장을 보내는 듯하더니 이내 온하랑에게 말했다.“왔대요, 두세 마디 정도만 얘기하다가 금방 올게요.”“네.”김시연이 몸을 일으켜 테라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온하랑은 계속해서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그 순간, 청장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이 납치 사건은 다른 사건들에 비해 정말 이상한 사건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납치범은 체포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온하랑의 아버지까지 연관되어버린 사건이었다.민성주는 그저 납치 사건과 온강호 사망 사건을 이어주는 인물일 뿐, 온하랑이 정말 잡고 싶었던 범인은 바로 왕대운이었다.괜히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둘 다 놓칠 것을 우려해 경찰은 민성주를 굳이 서까지 불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감시반을 붙여 민성주와 왕대운의 집 주위에서 잠복근무하며 두 사람을 계속 감시하기만 했다. 또 다른 인력을 동원해 민성주 생부가 살던 집을 집중적으로 수색하고 동시에 왕대운과 민성주의 관계를 조사하도록 했다.추서윤이 나서서 민성주의 죄를 입증해야만 조사라는 명목으로 왕대운을 체포할 수 있었다.하지만 청장이 전화로 전해준 소식은 다름 아닌 민성주가 도주했다는 사실이었다.정확하게 말하면 실종되었다.민성주의 집 주위에서 잠복근무하던 경찰들은 오전까지만 해도 민성주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오후가 다 지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자 어딘
온하랑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어이없다는 듯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어쩐지 추서윤이 너무 막강한 힘을 행사하고 있더라니, 그 배후에는 부승민이 있었다.온하랑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했던 사람인데, 추서윤과 헤어진 이유도 단순히 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을까.온하랑은 조롱 섞인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추서윤을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매번 부정하고 되려 입을 열 때마다 온하랑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매달렸다. 정말 우스워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사람 갖고 노니까 재미있었나?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으니 바로 마음 약해져서 추서윤이랑 다시 잘 되어보려고 하는 건가?부승민의 곁에 있는 추서윤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몸에 딱 달라붙는 살구색의 드레스를 입은 추서윤은 우아하고도 대범한 자태로 부승민의 팔짱을 낀 채 은은한 미소로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추서윤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해도 온하랑은 그녀에게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초반엔 추서윤이 자신을 공격하는 이유가 그저 부승민과의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현 애인 치우기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추서윤이 일부러 할아버지의화를 돋우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을 때에야 그녀가 얼마나 사악하고 위험한 사람인지 제대로 깨달았다.추서윤은 자신의 복수를 위해 온하랑이 아버지를 위해 하려는 복수를 막을 것이다. 단순히 온하랑의 복수를 막기 위해 자신을 납치했던 납치범의 도주까지 도와주며 도망갈 시간까지 확보해주었다. 온하랑의 상식을 완전히 깨버리는 행동이었다.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지금, 온하랑은 경찰서에서 증언을 해주겠다던 추서윤의 말도 절대 믿을 수 없었다.추서윤은 애초부터 증언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 일을 핑계로 한 달 동안 온하랑을 제대로 괴롭히고 놀려먹을 생각이었겠지.이렇게 된 이상, 온하랑도 더는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고 복
김시연은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며 부승민을 곁눈질로 슬쩍 바라보고는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하랑 씨, 왜 안 가요? 부지런 때문에 남아있을 건 아니죠?”“그럴 리가요?”온하랑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정말 다른 일이 있어서 그래요.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알겠어요.”김시연은 기꺼이 믿어주기로 했다.김시연은 고개를 들어 온하랑의 표정을 살피더니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물었다.“하랑 씨… 질문이 있는데요…”“뭔데요? 얘기해봐요.”“하랑 씨 예전에는… 부지런 엄청 좋아하지 않았어요?”김시연은 온하랑과 부승민이 결혼을 앞둔 그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위태로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을 주고받는 걸로 미루어보았을 때 온하랑은 진심으로 부승민을 좋아했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적어도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만큼은 온하랑이 부승민을 꽤 좋아했던 것 같다.어쩌면 그 감정이 생각보다 깊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고서야 금방 이혼했을 때 온하랑이 그토록 넋 나간 사람처럼 살았을까. 아마도 또 다른 고통은 바로 아이 때문이었으리라…잠시 멈칫하며 대답을 망설인 온하랑이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맞아요.”김시연은 “역시나” 같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엄청 오랫동안 좋아하지 않았어요?”적어도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났을 때부터 온하랑은 누군가를 눈에 띄게 좋아하고 있었다. 어쩌면 김시연이 온하랑을 알기 훨씬 전부터 온하랑은 부승민을 좋아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네.”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으로 포크의 손잡이를 만지작대며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말하자니까 좀 웃기긴 하는데요. 제가 부씨 가문에 입양되던 그해부터 좋아했어요.”김시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정도로 오랜 시간일 줄은 몰랐다. 대충 계산해보면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그럼 지금도 좋아해요?”온하랑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로비에서 한바탕 소란이 들려왔다.두 경찰이 보안
추서윤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이송되었고 온하랑도 그제야 자리를 떴다.로비에서는 사람들이 수군대며 서로 이런저런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따금 부승민을 슬쩍 바라보기도 했다.이 대표의 중재로 파티 현장은 다시 원래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부승민은 주위 사람들에게 “실례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곧장 자리를 떴다.증거를 제공해주고 구술로 정황설명까지 끝내고 취조실에서 나와보니 시간은 이미 밤 10시가 다 되어있었다. 온하랑은 로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김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가요.”김시연이 휴대폰을 도로 집어넣으며 물었다.“이제 다 끝났어요?”“네, 끝났어요. 나중에 또 조사할 일 생기면 그때 가서 소환할 거래요.”점심에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알아버린 김시연은 잔뜩 화 난 표정으로 말했다.“추서윤 그년 생각보다 더 나쁜 년이었네요. 절대 마음 약해지면 안 돼요, 알겠죠? 그 누가 와서 선처를 구하든 절대 용서 해주면 안 돼요. 감옥에서 썩을 대로 썩어야 한다고요, 저런 년은.”김시연이 온하랑에게 또박또박 지시하듯 말했다.온하랑이 가볍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마음 안 약해져요, 시연 씨도 알잖아요”추서윤이 지금 당장 온하랑에게 납치 사건에 대해 증언하겠다고 불러도 온하랑은 절대 추서윤을 용서해줄 마음이 없었다.경찰서에서 나오자 찬바람이 훅 끼쳤다.길거리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온하랑의 차는 길거리에 주차되어 있었다.그 뒤로 검은 차 한 대가 어둠 속에서 눈 부신 헤드라이트를 킨 채 멈추어 서 있었다.온하랑은 그 차를 슬쩍 바라보더니 조롱 섞인 눈빛으로 눈썹을 찌푸렸다.그 차는 다름 아닌 부승민의 차였다.그도 두 사람을 따라 함께 경찰서까지 찾아온 것이다.이렇게나 다급하게 추서윤 대신해서 인맥 찾으러 와준 건가?온하랑은 시선을 거둔 채 곧장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겨 조수석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운전석에 올라탄 김시연이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그곳을 벗어났다.여전히 마음속에 추서
엘리베이터가 10층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왔다.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도 고요한 주차장이었던 탓에 그 발소리는 더욱 선명하게만 느껴졌다.김시연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채 휴대폰으로 타자를 하며 아버지의 소개팅 관련 질문에 폭풍 답변을 하고 있었다.온하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개를 아래로 풀 숙였다.왜인지 모르게 온하랑은 좋지 않은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그 발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부승민의 발소리처럼 느껴졌다.하지만 그래봤자 부승민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하랑아.”등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온하랑이 고개를 돌려 인상을 팍 쓴 채 부승민을 바라보았다.“네가 왜 여기 있어?”부승민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온하랑에게 다가갔다.“여기 집이 다 괜찮길래, 하나 샀어.”부승민이 구입한 집은 바로 온하랑이 사는 곳의 바로 윗집이었다.“…”“띵—”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하자 문이 열렸다.온하랑이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부승민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말을 건넸다.“일단 가지 말고, 할 얘기 있으니까 좀 들어줄래?”“이거 놔!”온하랑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너랑 할 얘기 없어.”“몇 분이면 돼. 몇 분만 나랑 얘기 좀 하자.”온하랑이 귀찮은 듯 눈을 뒤집으며 김시연을 바라보았다.김시연이 뭔가를 눈치 챈 듯 온하라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선처 같은 거 절대 해주면 안 돼요.”말을 마친 김시연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승강이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온하랑이 덤덤한 눈빛으로 부승민을 흘겨보며 말했다.“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말해봐.”부승민이 입을 열려던 그 순간, 온하랑이 먼저 말을 꺼냈다.“만약 나한테 탄원서라도 써달라고 찾아온 거면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아니, 난 탄원서 써달라고 할 생각 없어.”부승민이 진지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점심에는… 아무 일 없었다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상처받은 듯한 부승민의 눈빛을 마주한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으며 쥐고 있던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온하랑은 그저 사실만을 얘기한 것뿐인데?부승민이 왜 상처받은 눈빛을 하는 거지?“그래! 부승민, 네가 이렇게 하는 건 너랑 추서윤 사이에도 절대 좋은 행동이 아니야. 그리고 나 온하랑도 같이 무시하는 행동이나 다름없고. 넌 네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내가 너한테 껌뻑 속아 넘어갈 것 같니? 꿈 깨! 네가 나한테서 얻고 싶은 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그만둬!”온하랑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부승민의 이마 핏줄이 곤두섰다. 두 눈은 올곧게 온하랑만을 응시하고 있었다.“내가 너한테서 뭘 얻고 싶어 한다고..? 네가 얘기해봐, 내가 얻고 싶은 게 대체 뭘까?”“나도 물어보고 싶었어. 그건 너만 알겠지.”온하랑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부승민은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만 나왔다. 그는 혀로 어금니를 쓱 훑으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며 큰 보폭으로 온하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부승민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발뒤꿈치가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벽에 부딪혔다.“너… 너 뭐 하려는 거야?”온하랑은 팔로 벽을 짚고 고개를 서서히 낮추었다. 뜨거운 부승민의 입김이 온하랑의 볼과 귀를 달구었다. 간지러운 느낌이 온하랑이 저절로 몸을 움츠렸다.“나 봐봐.”부승민이 깊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온하랑이 고개를 들어 깊이를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윽한 부승민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은하수의 블랙홀과 같은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부승민의 눈동자에서는 그 어떤 비밀이나 속마음도 알아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온하랑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저도 모르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재촉하듯 말했다.“부승민, 추서윤 씨 지금 경찰서에 잡혀있는데, 안 가볼 거야?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시간 낭비인
온하랑은 덤덤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나한테 증명해 보이겠다는 말이야?”“맞아.”“난 필요 없어. 네가 계속 숨기는 거나 얘기하든지. 그렇게만 해준다면 진위 여부는 내가 판단해.”온하랑의 말에 부승민이 멈칫했다.온하랑은 이미 여러 번 부승민의 도움을 필요 없다며 거절해왔다. 부승민의 도움을 받기도 싫었고 만약 부승민이 온하랑 때문에 추서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한다면…하지만 이번 일을 해명한다면 온하랑은 추서윤을 풀어준 이유까지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온하랑이 임신 시절 찍혔던 사진을 보았다는 말만은 절대 할 수가 없었다.부승민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을 보던 온하랑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못 하겠다면 그래, 이쯤에서 관둬. 네가 뭘 증명하든 난 관심 없어. 나한테서 좀 떨어져 줄래? 그거야말로 네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제일 좋은 일이니까.”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더니 한 주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는 엘리베이터 옆에 있던 두 사람을 슬쩍 보더니 최대한 거리를 두며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을 발견하자 온하랑은 부승민의 큰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타 버튼을 눌렀다.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는 빨리 위로 올라갔다.온하랑이 집으로 돌아오자 김시연이 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부지런이 무슨 곤란한 부탁 같은 건 안 했죠?”온하랑이 대충 현관문을 닫으며 대답했다.“없었어요.”온하랑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추서윤을 위해 탄원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방심하지 마세요. 또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김시연이 경고했다.“네.”…추서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재빨리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구체적인 체포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네티즌들의 추측이 난무했다.추서윤과 광고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던 광고주들도 사석에서 추서윤의 소식을 전해 듣고 계약서에 적혀있던 이름을 조용히 지웠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