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가 10층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왔다.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도 고요한 주차장이었던 탓에 그 발소리는 더욱 선명하게만 느껴졌다.김시연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채 휴대폰으로 타자를 하며 아버지의 소개팅 관련 질문에 폭풍 답변을 하고 있었다.온하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개를 아래로 풀 숙였다.왜인지 모르게 온하랑은 좋지 않은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그 발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부승민의 발소리처럼 느껴졌다.하지만 그래봤자 부승민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하랑아.”등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온하랑이 고개를 돌려 인상을 팍 쓴 채 부승민을 바라보았다.“네가 왜 여기 있어?”부승민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온하랑에게 다가갔다.“여기 집이 다 괜찮길래, 하나 샀어.”부승민이 구입한 집은 바로 온하랑이 사는 곳의 바로 윗집이었다.“…”“띵—”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하자 문이 열렸다.온하랑이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부승민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말을 건넸다.“일단 가지 말고, 할 얘기 있으니까 좀 들어줄래?”“이거 놔!”온하랑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너랑 할 얘기 없어.”“몇 분이면 돼. 몇 분만 나랑 얘기 좀 하자.”온하랑이 귀찮은 듯 눈을 뒤집으며 김시연을 바라보았다.김시연이 뭔가를 눈치 챈 듯 온하라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선처 같은 거 절대 해주면 안 돼요.”말을 마친 김시연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승강이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온하랑이 덤덤한 눈빛으로 부승민을 흘겨보며 말했다.“하고 싶은 말이 뭐야, 말해봐.”부승민이 입을 열려던 그 순간, 온하랑이 먼저 말을 꺼냈다.“만약 나한테 탄원서라도 써달라고 찾아온 거면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아니, 난 탄원서 써달라고 할 생각 없어.”부승민이 진지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점심에는… 아무 일 없었다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상처받은 듯한 부승민의 눈빛을 마주한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으며 쥐고 있던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온하랑은 그저 사실만을 얘기한 것뿐인데?부승민이 왜 상처받은 눈빛을 하는 거지?“그래! 부승민, 네가 이렇게 하는 건 너랑 추서윤 사이에도 절대 좋은 행동이 아니야. 그리고 나 온하랑도 같이 무시하는 행동이나 다름없고. 넌 네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내가 너한테 껌뻑 속아 넘어갈 것 같니? 꿈 깨! 네가 나한테서 얻고 싶은 게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쯤에서 그만둬!”온하랑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부승민의 이마 핏줄이 곤두섰다. 두 눈은 올곧게 온하랑만을 응시하고 있었다.“내가 너한테서 뭘 얻고 싶어 한다고..? 네가 얘기해봐, 내가 얻고 싶은 게 대체 뭘까?”“나도 물어보고 싶었어. 그건 너만 알겠지.”온하랑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부승민은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만 나왔다. 그는 혀로 어금니를 쓱 훑으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며 큰 보폭으로 온하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부승민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발뒤꿈치가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벽에 부딪혔다.“너… 너 뭐 하려는 거야?”온하랑은 팔로 벽을 짚고 고개를 서서히 낮추었다. 뜨거운 부승민의 입김이 온하랑의 볼과 귀를 달구었다. 간지러운 느낌이 온하랑이 저절로 몸을 움츠렸다.“나 봐봐.”부승민이 깊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온하랑이 고개를 들어 깊이를 감히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윽한 부승민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은하수의 블랙홀과 같은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부승민의 눈동자에서는 그 어떤 비밀이나 속마음도 알아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온하랑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가시방석에라도 앉은 듯 저도 모르게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재촉하듯 말했다.“부승민, 추서윤 씨 지금 경찰서에 잡혀있는데, 안 가볼 거야?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시간 낭비인
온하랑은 덤덤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나한테 증명해 보이겠다는 말이야?”“맞아.”“난 필요 없어. 네가 계속 숨기는 거나 얘기하든지. 그렇게만 해준다면 진위 여부는 내가 판단해.”온하랑의 말에 부승민이 멈칫했다.온하랑은 이미 여러 번 부승민의 도움을 필요 없다며 거절해왔다. 부승민의 도움을 받기도 싫었고 만약 부승민이 온하랑 때문에 추서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거라고 한다면…하지만 이번 일을 해명한다면 온하랑은 추서윤을 풀어준 이유까지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온하랑이 임신 시절 찍혔던 사진을 보았다는 말만은 절대 할 수가 없었다.부승민이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을 보던 온하랑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못 하겠다면 그래, 이쯤에서 관둬. 네가 뭘 증명하든 난 관심 없어. 나한테서 좀 떨어져 줄래? 그거야말로 네가 나한테 해줄 수 있는 제일 좋은 일이니까.”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더니 한 주민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는 엘리베이터 옆에 있던 두 사람을 슬쩍 보더니 최대한 거리를 두며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을 발견하자 온하랑은 부승민의 큰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타 버튼을 눌렀다.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는 빨리 위로 올라갔다.온하랑이 집으로 돌아오자 김시연이 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부지런이 무슨 곤란한 부탁 같은 건 안 했죠?”온하랑이 대충 현관문을 닫으며 대답했다.“없었어요.”온하랑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추서윤을 위해 탄원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방심하지 마세요. 또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김시연이 경고했다.“네.”…추서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사실은 재빨리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구체적인 체포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네티즌들의 추측이 난무했다.추서윤과 광고 계약을 체결하기로 했던 광고주들도 사석에서 추서윤의 소식을 전해 듣고 계약서에 적혀있던 이름을 조용히 지웠
부현승은 여자친구를 데리고 부모님을 찾아뵌 적은 없지만 서혜민과 함께 데이트를 나갔는지 아닌지를 둘째 숙모는 잘 꿰고 있었다.세상 그 어느 엄마가 아들이 마음 맞은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을 마다할까?사실 초반에 둘째 숙모도 서헤민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가정환경도 평범했고 부모님 역시 사업가가 아닌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밑으로는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는, 돈 나갈 일이 많은 여동생 두 명과 남동생 한 명이 있었다. 게다가 나이가 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몸 여기저기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고 서혜민의 큰아버지는 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총체적으로 서혜민의 집안은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서헤민 본인도 중학교를 자퇴하고 백화점 의류 매장에서 판매 직원으로 일하는 신세였다.부현승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하층민이나 다름없었다.다행히도 둘째 숙모가 집안 환경을 크게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구에만 심취해 있던 아들이 어렵게 연애를 한다고 하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혜민의 조건을 바로 수락해버렸다. 분명 서헤민에게 아들이 좋아할 만한 특징이 분명히 있으리라는 신념만 갖고 말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자기 아들이 이런 조건의 서혜민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미래 며느리에 대해 궁금한 게 아주 많던 둘째 숙모는 바로 며칠 전, 친하게 지내던 부잣집 사모님 한 명과 함께 쇼핑하며 서헤민이 근무하고 있는 매장을 방문했다.그때 가게에는 다른 손님들도 있었다.한 쌍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두 여학생이 옷을 입어보고 있었다. 겉모습부터 평범했던 두 여학생에게 서혜민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둘이 무엇을 하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수시로 가게 입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둘째 수고 일행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고등학생 손님 두 명을 제쳐두고 환한 미소로 둘째 숙모 일행을 맞이했다.그 순간, 둘째 숙모의 표정이 슬슬 굳어가기 시작했다.하지만 서혜민은 그런 둘째 숙모의 표정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누가 봐도 큰
온하랑이 부정하며 말했다.“형님,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저는 그저 시아를 좋아할 뿐이에요.”“그런 거였군요…”온하랑은 소청하의 표정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워진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형님, 왜 그러세요?”소청하는 온하랑의 질문에 손에 들고 있던 간식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낮게 중얼거렸다.“어제 그이가 또 그 여자랑 통화하는 걸 들었어요…”소청하의 말에 온하랑이 화를 내며 대답했다.“아주버님도 참,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이혼 생각을 품고 있던 소청하도 아이가 생기자마자 바로 이혼이라는 생각 자체를 접어버렸는데 부민재는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온하랑이 함께 화를 내주는 모습을 보자 소청하는 덩달아 슬퍼졌는지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온하랑의 손을 잡고 말했다.“하랑 씨, 저도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온하랑이 본 소청하의 상태는 생각보다 좋지 못했다. 전보다 살도 많이 빠졌고 얼굴도 훨씬 초췌해 보였다.홑몸도 아닌데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절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정”이라는 단어가 참 묘한 것 같다. 형태도 없이 다가와 사람을 죽이고 흉터 하나 없이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정”이라는 이유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져도 쉬이 놓을 수가 없다.만약 부민재와 소청하가 단순히 집안끼리 맺어진 사실혼 사이였다면 소청하가 이 정도로 심하게 아파하지는 않을 것이다.“형님, 형님은 이 아이, 낳고 싶으세요?”소청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저도 모르겠어요…”사실 소청하는 어떻게든 아이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어제저녁 부민재의 통화를 엿들어버린 순간, 소청하도 자신의 진심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사람들 말 틀린 것 하나 없었다. 이미 바람을 한 번 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분명 두 번째, 세 번째가 존재한다고. 부민재가 계속해서 외간여자와 연락을 이어나가는데 소청하가 계속해서 이 결혼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깔끔하게 이혼
온하랑은 부민재의 표정을 확인하더니 순간적으로 그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기 가늠이 되지 않았다.만약 정말이라면 부민재와 그 여자는 어떤 사이인 걸까? 왜 함께 사는 사람인 소청하에게는 얘기해주지 못 하는 것일까?만약 거짓이라면 부민재가 했던 말은 다 무슨 의미일까?온하랑은 묻고 싶은 것이 더 있었지만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말이 끊겼다.온하랑은 휴대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하재범에게서 걸려온 전화라는 것을 확인하자 온하랑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그녀는 부민재에게 간단히 눈짓하고는 최대한 멀라 떨어진 곳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장국호 잡혔어요?”전화를 받자마자 온하랑이 다급하게 물었다.수화기 너머의 하재범이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합니다. 장국호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간 것 같아요.”온하랑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더니 이윽고 쿵쿵 뛰는 심장박동 소리를 느끼며 물었다.“누구한테 넘어갔나요?”배후의 어떠한 세력이 장국호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 것은 아닐까?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이상, 장국호를 다시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추서윤도 증언을 원하지 않았다.어떻게…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을까?“네, 장국호를 뒤쫓을 때 저희를 막는 세력이 두 개나 있었습니다. 제가 뒤늦게 발견한 걸로는 두 세력이 절대 한 사람이 보낸 것 같지는 않다는 겁니다. 그중 하나는 장국호를 구하려던 사람들 같았고 다른 한쪽은 어떤 목적이 있는지 파악이 안 됩니다. 장국호는 후자에게 넘어갔습니다.온하랑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장국호가 구조팀으로 넘어간 것만 아니라면 아직 어느 정도의 기회는 남아있을 것이다.“그럼 장국호를 잡은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좀 알아봐 주세요. 그 사람들이 장국호를 잡아들인 목적은 뭔지도요. 빨리요. 돈은 더 드리도록 할게요.”온하랑이 말했다.민성주가 도주한 것은 상관이 없었다. 민지훈을 통해 민성주의 소식을 들을 수 있으니까. 왕대운과 장국호도 분명 서로 아는 사이일 게 뻔했다. 그러니
온하랑은 부시아의 첫 등교를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부시아는 바닥에 닿을 정도로 큰 종이 쇼핑백들을 들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숙모, 못 들겠어요. 저랑 같이 들어가 주시면 안 돼요?”똑똑한 아이 같으니라고. 재빨리 자신의 숙모와 삼촌이 싸웠다는 걸 눈치챈 부시아였다.정확히 말하면 숙모는 아무 일 없는 듯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중인데 삼촌만 유난히 난리 치는 중이었다.지금 마침 삼촌도 집에 있는데,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부시아가 아니었다.온하랑이 두 눈을 깜빡이며 아이의 발그스레한 작은 볼을 살짝 꼬집으며 부시아의 손에서 종이 쇼핑백들을 받아들었다.“가자, 숙모가 데려다줄게.”온하랑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분명 그이와의 일에 부시아를 끌어들이지 않으리라 다짐했건만 조금 전, 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부승민이 보기 싫어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뇌를 지배하고 있었다.게다가 티가 너무 많이 났던 탓에 아이도 눈치챈 듯했다.온하랑은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을 만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거살 문을 열자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따뜻한 불빛이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온하랑은 부승민을 집까지 들여보내 주었다. 거실에는 그 아무도 없었다.온하랑이 물건들을 소파 위에 올려놓자 아이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가더니 2층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삼촌! 저 왔어요!”“…”온하랑은 부시아를 슬쩍 바라보았다.부시아는 작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온하랑이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부시아의 몸을 간지럽히려던 그 순간,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듯한 발소리가 들렸다.“온하랑 씨, 시아 아가씨.”연민우가 서류 하나를 들고 두 사람을 향해 웃으며 위층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회장님께서는 아직 회사에 계십니다. 저는 심부름으로 서류만 챙기러 온 거고요.”연민우를 본 부사아의 작은 얼굴에 크게 실망이라는 단어가 나타났다. 아
온하랑은 놀란 기색으로 눈을 크게 떴다.부승민이 온하랑을 위해 추서윤과 거래를 했다는 건가?그러니까 추서윤한테 있었던 그 모든 게, 그날 저녁 파티도 전부 다 추서윤이 내걸었던 계약 조건이었다는 건가?“그게 정말이에요? 저 속이시는 건 아니죠?”온하랑이 의심하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진짜입니다!”연민우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추서윤 씨가 회장님께 오늘 파티에만 같이 가준다면 법정 증언을 해주겠다 약속했습니다. 뭐, 지금 저렇게 된 건 유감스러운 일이지만…”온하랑이 가볍게 코웃음을 흘렸다.“부승민 진짜 멍청하다. 그딴 조건만 들어주면 추서윤이 정말 증언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말도 안 되지.”당연히 온하랑 본인도 멍청했다.두 사람이 같이 멍청한 짓을 해왔다. 둘 다 추서윤의 장난에 신나게 놀아났다.연민우가 살풋 웃으며 말했다.“어찌 됐든 다 하랑 씨를 향한 회장님의 마음이니까요.”“부승민은 너한테 알리길 원하지 않는다면서요. 비서님께서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해주시는 이유가 뭐예요?”온하랑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연민우가 코를 비비며 대답했다.“… 최근 들어 회장님 기분이 좀 안 좋으십니다…”온하랑은 순식간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제 질문에 대답 한 번만 두 해주실래요?”“말씀하세요.”“전에 추서윤이 정신병동에 갇혔을 때 말이에요. 그때 부승민은 왜 걜 거기서 꺼내준 거예요?”온하랑이 물었다.온하랑의 질문을 들은 연민우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이더니 말했다.“이건… 저도 잘 모릅니다…”온하랑의 정체와 그녀가 임신 시절 찍혔던 사진만큼은 절대 얘기해줄 수 없었다.온하랑은 연민우의 표정을 살피더니 입꼬리를 쓱 끌어올리며 물었다.“진짜 몰라요?”“모릅니다!”연민우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그럼 이만 돌아가 주세요.””예?““예는 무슨 예예요?”온하랑이 두 팔로 가슴을 끌어안으며 말했다.“부승민 심복이라는 사람이 왜인지도 모른다고 대답해 버
간단한 몇 마디 인사로도 두 사람 사이엔 짙은 긴장감이 흘렀다.온하랑은 살짝 부승민을 힐끔 보았다.‘오늘 밤 여기에 머무르겠다고? 뭐, 괜찮네.’메이슨이 하품을 하며 졸린 기색을 내비쳤다.“졸려? 위층에 가서 잘래?” 온하랑이 물었다.“네.” 메이슨은 조그맣게 대답하며 손에 들고 있던 체스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카펫을 짚고 일어서더니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고는 작게 말했다.“엄마, 이야기 해주시면 안 돼요?”“그래, 엄마가 이야기 들려줄게.”온하랑은 메이슨의 손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최동철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카펫 위에 흩어진 장난감과 보드게임을 간단히 정리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부승민에게 말했다.“편히 있어.”그 말과 함께 최동철도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메이슨은 세수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이불 속에 들어갔고 온하랑은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동화책을 펼쳤다.책 속 두 번째 이야기의 첫 페이지를 넘기며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몇 문장 읽었을 때 최동철이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온하랑은 잠시 멈칫했지만 최동철이 손짓으로 계속 읽으라는 신호를 보냈다.그는 천천히 침대 끝에 앉아 온하랑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었다.고요한 방 안에는 온하랑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목소리만이 흘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잔잔한 시냇물처럼 공간을 가득 채우며 은은하게 번졌다.방 안의 분위기는 조화롭고 따뜻했다. 부드러운 조명이 구석구석을 비추며 아늑함을 더했고 평온함이 감돌았다.최동철은 침대 끝에 조용히 앉아 온하랑의 이야기를 들으며 평화로운 이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그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했는데 마치 깊고 맑은 호수처럼 고요하면서도 그 속에 담긴 감정은 한없이 깊었다.언제부터였는지 메이슨은 점점 고른 숨소리를 내며 꿈나라로 빠져들었다.이야기가 끝에 다다랐고 온하랑은 마지막 문장을 읽은 후 책을 조심스럽게 덮었다.의자를 원래 자리로 옮기고 일어났다.최동철도 온
최동철은 영어로 낮게 속삭이며 메이슨에게 말했다.“메이슨, 엄마 전화야. 직접 말씀드려.”“엄마, 보고 싶어요. 언제 돌아오세요?”메이슨의 어린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부승민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는데 그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온하랑은 메이슨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고 모자 간의 정은 쉽게 끊을 수 없는 법이었다.그건 마치 그가 부시아를 포기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다만 최동철의 교활함이 문제였다. 아이를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온하랑은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엄마 지금 외식 중이야. 금방 돌아갈게.”“네. 그럼 엄마 돌아오면 자러 갈게요.”메이슨의 목소리가 끝나자 수화기 너머로 최동철이 다시 말을 이었다.“하랑아, 혹시 불편하면 안 돌아와도 돼. 내가 메이슨을 잘 달래볼게.”부승민은 그 말을 듣고 냉소를 터트렸다.‘목적을 이루고 나서도 마치 배려심 깊은 척 연기까지 하다니.’온하랑은 부승민을 한 번 힐끗 보더니 최동철에게 말했다.“불편하지 않아요. 곧 돌아갈게요.”최동철은 부승민의 냉소를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그래, 여기서 기다릴게.”전화가 끊기자 부승민은 최동철의 말투를 따라 하며 비꼬듯 말했다.“그래, 여기서 기다릴게.”온하랑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말했다.“나 샤워 좀 할게.”그러나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그녀는 부승민에게 다시 눌려졌다.“좀 이따 가. 우리 아직 ‘저녁’ 다 안 먹었잖아.”“...빨리 끝내.”메이슨이 너무 오래 기다릴까 봐 그녀는 서둘렀다.부승민은 이를 꽉 물고 말했다.“그래, 빨리 끝낼게.”그러고는 온하랑을 다시 한 번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이번엔 정말 빨랐다.그의 움직임이 빨랐고 그녀가 여러 번 절정에 다다르는 시간도 짧았다.끝난 뒤 온하랑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결국 부승민이 그녀를 안아 욕실로 데려가 간단히 씻겨 주었다.샤워를 마친 뒤 옷을
저녁 식사 후, 온하랑은 부승민과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부승민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문을 닫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그러면서도 무심한 듯 물었다.“샤워할 거야?”온하랑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고 그들의 시선이 맞닿았다.온하랑은 그의 눈 속에 타오르는 불길을 발견했다.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그의 말에 담긴 속뜻을 이미 충분히 이해한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다.“응.”그녀는 천천히 욕실로 걸어갔고 부승민은 그런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샤워기의 물소리가 욕실 가득 울려 퍼지면서 따뜻한 김이 허공을 채웠다.온하랑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그의 허리에 감겨 있었고 몸은 공중에 떠 있었다.뜨거운 물줄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폭우 속에서 흔들리는 작은 꽃처럼 그녀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떨리고 있었다.온하랑은 두 손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좀... 좀 천천히 해...”오랜만이라 그런지 부승민은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는 충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는 잠시 멈춰 샤워기를 껐고 긴 팔을 뻗어 수건을 집어 그녀의 몸 위에 덮었다. 그리고는 가뿐히 그녀를 안고 욕실을 나섰다.온하랑은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붉어진 눈가를 하고는 그가 힘을 준 팔뚝을 붙잡고 말했다.“빨리 가.”“알겠어.”“...아니, 그렇게... 빠르게가 아니야... 으응...”그녀는 그가 터치할 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했다.“알아.”그는 그녀의 말을 따르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고 이내 창가에 도착했다.“안 돼...” 온하랑은 그의 팔을 꽉 잡았다. 아래를 힐끗 보니 차들이 오가며 번화한 거리와 길게 늘어진 가로등 불빛이 보였다.눈을 위로 돌리자 별이 가득한 밤하늘이 펼쳐졌는데 천장이 없는 듯한 탁 트인 느낌이 들었다.부승민은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문지르며 속삭였다.“긴장하지 마. 건너편엔 높은 건물이 없으니 아무도 볼 수 없어.”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내려놓았고 그녀의 허리를
어두운 조명과 검은색 자동차가 어우러져 최동철의 실루엣이 희미해졌고, 거기에 부승민이 거의 다 왔다고 메시지를 보낸 터라, 온하랑은 무심코 그가 부승민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하필 이때 최동철이 올 줄은 말이다.“너 내 차가 온 걸 보고서도 그 사람한테서 안 떨어지고 오히려 머리를 돌려서 못 본 척하더라.”그는 최동철이 일부러 그와 비슷한 차를 몰고, 비슷한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에 온 걸 보면 내일 출장을 핑계로 별장에 묵으려는 게 뻔했다.“...!”온하랑은 난감해서 울상 지었다.“못 본 척한 게 아니라 진짜 못 봤어...”눈 부신 헤드라이트 불빛이 쫙 비친 순간 온하랑은 아무것도 안 보였다. 그냥 지나가는 이웃 차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내가 경적 안 울렸으면, 넌 내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그 사람이랑 얘기했겠네?”“아니거든.... 사람 잘못 본 걸 발견하고 나서 바로 옆에 있던 네 차를 알아봤어.”온하랑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며 변명하듯 말했다.부승민이 말없이 그녀만 지그시 바라보자 온하랑은 눈을 깜빡였다.“왜 그렇게 쳐다봐? 혹시 내가 그 사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거야?”“그렇다면?”온하랑은 콧방귀를 뀌었다.“그럼 바로 널 차버렸지. 뭐 하러 여기 앉아서 연기하겠어?”“...”온하랑은 문득 차창 밖을 보다가 여전히 차 옆에 서 있는 최동철을 발견했다. 그를 보는 순간 다시 민망해져서 부승민 팔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우리 이제 가자.”부승민은 갑자기 몸을 기울여 온하랑 뺨에 입을 맞췄다.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몸을 살짝 뒤로 빼고 투명한 창문 너머로 최동철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 나서 가속 페달을 밟아 단지 밖으로 차를 몰았다.차 안에는 난방이 빵빵하게 돌아서 훈훈했다.온하랑은 얼굴이 달아올라 입고 있던 패딩을 벗어 뒷자리에 던졌다. 그러곤 바깥 풍경을 힐끗 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우리 어디 가서 밥 먹을 거야?”부승민은 대답 대신 갑자기 차를 길가에 세웠다.“왜 멈춰?”
온하랑은 하루 종일 메이슨과 밖에서 신나게 놀다가 해 질 무렵이 돼서야 돌아왔다. 차를 타고 오는 도중에 메이슨은 이미 잠이 들었다.도착하자 도우미가 저녁 식사를 먼저 할 거냐고 물었다. 온하랑은 메이슨이 잠에서 깨면 같이 먹겠다고 했다.오후 늦게쯤, 메이슨이 조금 출출해해서 온하랑이 그를 데리고 디저트 가게에 갔고 같이 케이크를 먹었기에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온하랑은 노트북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테이블에 앉아 업무를 처리했다.창밖은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온하랑이 기지개를 켜려는 순간 휴대폰이 두 번 울렸다. 확인해 보니 부승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지금 데리러 갈게. 야식 먹자. 거의 다 왔어.]온하랑은 답장을 보냈다.[좋아, 나도 아직 저녁 못 먹었어.]그리고 노트북을 덮고 도우미에게 말했다.[잠깐 밖에 나갈 건데 언제 들어올지 몰라요. 30분 뒤쯤에 메이슨 깨워서 밥 먹여 주세요.]도우미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방으로 올라가 다시 메이크업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방에서 나오며 베란다를 지나칠 때 무심코 밖을 내다봤다.부승민의 차가 이미 별장 입구에 와 있었다.차 옆에는 듬직한 남자가 서 있었는데, 한 손을 차 문 위에 올리고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였다. 불빛이 빨갛게 깜빡이고 있었다.온하랑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신발을 갈아 신고 밖으로 나왔다.부승민이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담배를 피우고 있자, 온하랑은 조용히 다가가더니 갑자기 달려들어 그의 허리를 뒤에서 꽉 껴안았다.“서프라이즈!”남자는 온몸이 움찔했다. 뜨거운 손이 온하랑이 교차한 두 손을 덮었고, 다른 손에서 담배가 땅에 떨어졌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담배꽁초를 발로 짓눌렀다.마침 그때, 앞쪽 코너에서 자동차 한 대가 환한 헤드라이트 불빛을 비추며 다가왔다. 눈이 부실 정도였다.온하랑은 고개를 돌려 남자 등 뒤에 얼굴을 묻은 채 물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해?”“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이게 꿈인 것 같아.”낯설지
“그러면 이젠...”“네가 기회를 봐서 사모님을 도발해 봐. 사모님이 열받아서 너를 미워하게 만들어야 해.”간하림이 말했다.그 말이 떨어지자 전화기 너머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간하림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설윤이 내 의도를 알아챈 거 아니야?’“내가 임신한 척해서 사모님을 자극하고 사모님이 열받아서 나를 밀면 유산한 척한다... 이런 걸 말하는 거야?”“맞아.”간하림이 한숨을 내쉬며 맞장구쳤다.“바로 그거야!”‘때가 되면 사모님이 널 밀기는커녕 오히려 네 거짓 임신을 들춰내 버릴걸.’“근데...”“왜?”“나, 진짜 임신했어.”“진짜 임... 뭐라고? 네가 진짜로 임신했다고?”간하림이 깜짝 놀랐다.“응.”설윤 목소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어제 집에 돌아왔는데 자꾸 가슴이 답답하고 매스꺼워서 문득 생리가 밀린 게 떠올라 임신 테스트기를 사 봤거든. 근데... 정말로 임신이라고 나오더라.”간하림은 속이 쓰린 듯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나이도 많은 최국환이 그녀를 임신시킬 줄도 몰랐다.‘운도 참 좋지.’만약 아이를 낳아서 최씨 가문의 재산을 조금이라도 물려받게 되면 설윤은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늦둥이는 더 귀여움을 받기 마련이다.“맞다.”설윤은 혼잣말하듯 계속했다.“아직 병원에는 안 가 봤어. 언제 가지?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너 임신한 거 회장님한테 말했어?”간하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 병원에서 검사받은 다음에 보고서 들고 가서 서프라이즈로 보여주려고.”“그렇구나... 음, 윤아. 네가 임신했다면 아까 그 방법은 쓰면 안 돼. 네 몸 상하면 안 되지. 내가 좀 더 고민해 볼게.”‘사모님께 한번 물어보고 나서 다시 얘기해야겠다.’“하림아, 만약 내가 아이를 낳으면 회장님한테도 양육 의무가 생기지 않아? 그럼 사모님도 날 쉽게 쫓아내지 못할 텐데 굳이 지금 상대할 필요가 있나?”“...”전화를 끊고 나서, 간하림의 마음속에는 부러움과 질투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라 견딜
임연지도 임가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임가희는 그녀가 너무 성급했다고 나무랐다.임연지는 입으로는 잘못을 인정했지만 속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그녀는 일부러 설윤의 정체를 드러내서 가방을 손에 넣으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오후가 되자, 임연지는 예상대로 점원에게서 설윤이 환불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녀는 곧바로 가방을 예약하고 직접 가게에 가서 찾아왔다.가방을 손에 넣은 임연지는 후련한 기분으로 예쁜 사진을 찍어 한진에게 보냈다.[나 가방 받았어.]시간을 보니 이때쯤 한진은 막 일어났을 것 같았다.잠시 후 한진이 답장을 보냈다.[진짜 예쁘네! 처음 나왔을 때부터 딱 꽂혔는데 네가 준다니까 사양 안 할게.][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내 쪽에 맡겨뒀다가 네가 귀국할 때 가져갈래, 아니면 누가 대신 가져다주게 할까?][며칠 뒤에 우리 오빠가 갈 거야. 나 대신 가져다줄 수 있어. 너 언제 시간 돼? 시간 맞춰서 오빠를 보낼게.][난 지금도 괜찮아. 나 센트럴 백화점 4층 커피숍에 있어.][좋아, 내가 오빠한테 전화해 볼게.]몇 분 뒤, 한진이 다시 연락했다.[오빠가 지금은 바쁘대. 그래서 오빠 비서가 대신 갈 거야. 거기서 좀 기다려 줘. 곧 도착할 거야.][알겠어.]임연지는 커피를 시켜 천천히 마시면서 한진과 채팅을 이어갔다.[진아, 근데 네 방법 진짜 효과 좋아. 내가 이틀 정도 오재*을 냉대했더니 바로 전처럼 나한테 잘하려고 해.][그 사람 몰래 귀국해서 부모나 친구들한테도 알리지 못하고 호텔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어. 결국 너밖에 연락할 데가 없잖아? 계속 차갑게만 대하면 안 돼. 가끔 잘해주기도 하면서 밀당해 봐. 그래야 헷갈릴 거야.][알겠어.]카페에서 20분쯤 기다리자,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깔끔한 청년이 들어와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곧장 임연지에게 다가왔다.임연지는 그 청년이 비서임을 확인한 뒤 가방을 건네주고 커피숍을 나왔다....간하림은 임가희의 지시를 따르기로 했지만 속으로는 난감해졌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