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이 자신의 아랫배를 가볍게 문지르며 뭐라도 배우려는 듯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준서는 지금 모유랑 분유 섞어서 먹고 있는 건가요?”정은경이 입을 열려던 그때 서혜민이 먼저 입을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렇게 먹이는 게 아이랑 엄마한테 다 좋다고 들어서요.”서수현은 서혜민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발견하고 일부러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너무 이른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 보니까 보통 6개월은 지나고 나서 분유 먹이던데.”“다 상황이 다르잖아. 이래도 문제없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어.”서혜민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싸늘해지더니 더는 이 주제에 관해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비쳤다.정은경이 급히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고 서수현도 다른 쪽으로 신경을 돌리며 방금 한 질문이 별 의미 없었던 것인 양 행동했다.하지만 온하랑은 그 가운데서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모유에는 아이에게 필요한 영양분과 면역 성분들이 들어있어 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최적의 음식이었다. 아무리 분유를 모유처럼 만들었다고 해도 결국 모유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존재하는 법이다.게다가 부준서는 조산으로 태어난 아이였던 탓에 태어난 후에도 인큐베이터에 며칠 동안 머물며 보살핌을 받았고 지금도 아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말라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모유 수유가 분유보다 좋은 게 인지상정인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분유만 먹이기 시작했을까?이상한 생각이 뇌리를 잠깐 스쳤지만 온하랑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아마도 서혜민이 아이에게 먹이는 분유가 모유를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비싸고 영양성분도 가득한 것이리라 생각했다.11시쯤 되자 손님들은 덕만각으로 이동해 파티를 시작했다.서수현은 밥을 먹으면서도 안미영의 동향을 살폈다.파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서수현은 안미영이 화장실 쪽으로 이동하는 걸 바라보았다.그녀는 곧장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두 사람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자연스레 인사를 주고받았다.안미영이 웃으며 물었다.“수현아, 오늘 음
안미영은 초반에 이 모든 일이 다 서혜민이 뭔가를 숨기기 위해 꾸민 것이 아닐까 싶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 생각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친자확인 검사로 이 아이가 정말 부현승의 아이가 맞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아이가 몇 시에 태어났는데요?”안미영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대답해주었다.“저녁 7시.”서수현이 출산한 지 4시간이 지난 후였다.서수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왜 서혜민이 조산을 했던 걸까? 그것도 하필 부씨 가문 사람이 없을 때.왜 젖이 나오지 않는 걸까?그야 서혜민이 낳은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겠지!비록 실질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이 모든 이상한 점들이 서수현에게 서혜민이 안고 있는 아이가 사실은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했다.병원에서는 서수현에게 그녀의 아이가 사산되었다고 얘기해주었지만 그저 봉투만 살짝 열어 아이를 보여주었다.하지만 그 아이가 꼭 서수현의 아이일 것이라는 보장이 있을까?출산 전, 모든 검사가 순조로웠다.서수현이 실수로 넘어졌을 때, 그녀는 곧바로 구급차를 불러 제때 병원으로 옮겨졌고 병원 도착 골든타임도 늦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구급차에 함께 올라탄 의사와 간호사가 차 안에서 그녀의 출산을 도와주었을 것이다.서혜민은 서수현의 임신 사실을 언제 알게 된 걸까?그리고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걸까?그 아이는 애초에 부씨 가문의 아이가 아니었다. 언젠가 부현승에게 들킬 것이 두렵지도 않았던 걸까?안미영은 멍하니 있는 서수현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수현아, 내가 너무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했니?”안미영과 서혜민은 단순히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였지만 서수현과 서혜민은 함께 자라온 사촌 사이었다.안미영은 서수현이 서혜민에게 이 이야기를 할지 말지에 대해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서수현이 자신을 심술궂은 시어머니로 볼까 봐 조금 걱정이 되었다.“그럴 리가요? 혜민이가 실수한 건 맞지만 아이는 무사하잖아요. 잘 먹이고 잘 키운다면 분명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안방에서 잠깐 봤던 것만으로는 부준서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부현승이 서수현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누구랑 닮았는지 어떻게 알아요?”“그럼 준서는 저를 닮은 게 맞아요.”“... 정말요?”서수현이 부현승을 바라보았다.조금 전에는 분명 아직 알 수 없다고 얘기했으면서 이젠 또 닮았다고 주장하는 게 틀림없이 아무렇게나 말하는 게 분명했다.“정말이죠. 왜요?”부현승이 미간을 찌푸리며 서수현을 바라보았다.서수현은 이 일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기로 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혜민이 모유가 안 나온다고 들었어요. 보통 적게 나오는 경우는 있어도 아예 안 나오는 경우는 없거든요.”“혜민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가 조산하게 된 거잖아요. 게다가 아줌마랑 이사님이 계신 곳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병원으로 갔고 아줌마가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이를 다 낳은 후였다고 했죠. 이상하지 않아요?”서수현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던 부현승은 덤덤한 표정으로 서수현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차 안의 분위기는 축 가라앉았다.앞 좌석에 있던 운전기사는 튼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그는 자신에게 권위적인 여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진 운전기사는 귀를 기울여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서수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부현승을 바라보며 말했다.“혜민이 임신한 적 없어요. 임신했다고 해도 유산됐을 겁니다. 준서는 이사님 아이가 아니에요. 혜민이가 다른 곳에서 데려온 아이죠.”말이 끝나자 차 안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적막이 흘렀다.부현승은 놀란 듯한 눈으로 서수현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웃음을 흘렸다.“그렇게 위험한 일을 할 리가 없잖아요. 친자검사 한 번 하면 바로 들통날 일인데. 이렇게 한다고 혜민이한테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래요?”“아줌마가 혜민이 마음에 안 들어 하셨잖아요. 준서를 낳고 혜민이가 부씨 가문
“솔직히 얘기해줄래요?”조금 전, 서수현은 단호한 태도로 부현승에게 친자확인 검사를 해보라고 얘기했고 친자 확인서를 봤을 때는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단순히 연기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서수현이 고개를 푹 떨군 채 침묵을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승민, 민지훈과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 서수현은 그날의 일을 절대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지옥 같았던 경험은 더더욱 얘기해줄 수 없었다.부승민을 떠올리자 서수현은 그가 자리를 뜨기 전,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눈빛을 떠올렸다. 부승민은 마치 서수현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는 듯한 사람처럼 느껴졌다.사실 친자확인 결과가 진짜라는 것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했다.첫 번째로는 서수현의 추측이 틀렸다는 것이다.그리고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그날 밤 자신을 강간했던 사람이... 부현승이었다는 것이다...이 생각이 들자 서수현은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이 가능성은 서수현이 줄곧 무시해 왔다. 부현승처럼 정직하고도 다정하고, 또 침착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난폭한 범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그녀는 온천 리조트에서 민지훈을 마주쳤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민지훈은 이렇게 말했었다.“우리 회사가 지금 단합대회 중이어서요.”단합대회라면 부현승 역시 그 리조트에 있었을 것이다.“수현 씨?”서수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현승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팔로 서수현을 툭툭 쳤다.하지만 이윽고 온몸을 떨며 공포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수현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요?”서수현은 부현승을 살인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저... 저는 괜찮습니다.”서수현은 부현승의 시선을 피하며 무의식적으로 그와 거리를 두었다.“차... 차 세워요... 저 내리고 싶어요.”“방금 질문엔 대답해주고 내려야죠. 저는 솔직한 대답이 듣고 싶다니까요.”“제... 제가 나중에 설명해드릴게요. 그래도 되죠?”이미 뒤죽박죽 마음이 복잡해
서수현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마치 다시 그 어두운 밤으로 돌아간 듯 고통을 꾸역꾸역 억눌렀다. 마치 거대한 손이 그녀를 잡고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서수현은 진실을 얘기해야만 했다. 만약 그녀가 민지훈의 아이를 뱄다고 인정해버리면 준서의 정체는 그대로 확정되어 버릴 것이다.“...”차라리 민지훈의 아이인 편이 낫겠다!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보통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하나는 사생활이 문란한 경우라고 다른 하나는 성폭행을 당한 경우이다.서수현의 지금 모습과 성격으로 봤을 때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운전기사도 그 둘의 대화를 들으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현승이 말을 꺼냈다.“앞쪽 교차로에서 우회전했다가 길가에 차 좀 세워주세요.”“아... 네.”뒤늦게 정신을 차린 운전기사가 부현승이 얘기한 구역에 차를 세우고는 눈치껏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밖에서 대기했다.깜짝 놀란 서수현이 말했다.“잠깐만요, 어디 가시는 거예요?”운전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저는 밖에서 대기해야죠.”어떤 일들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서수현은 입술을 달싹이다 두려운 눈빛으로 부현승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재빨리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머릿속에서는 부현승이 그날 밤 자신을 강간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 순간부터 서수현은 부현승과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부현승과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운전기사와 부현승 모두 서수현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눈치였다.“서수현 씨?”“이사님, 제가 나중에 다시 설명해 드릴게요.”말을 마친 서수현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지금 장난하는 건가?“뒤쫓아갈까요?”“... 아뇨, 괜찮습니다.”운전기사는 부현승의 말에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았다.“그럼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할까요?”“집에 가자.”운전기사
“이사님.”서 비서가 문을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와 부현승의 명령을 기다린다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서수현 기억하지?”“네, 저번 인턴이었잖습니까.”“작년 12월부터 최근까지의 행적 좀 조사해줘. 최대한 빨리.”“네.”....부현승의 차에서 내린 서수현이 천천히 걸어 자신의 월세방으로 들어왔다.그녀의 마음이 이토록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었다.서수현의 이성이 지금 그녀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얘기해주고 있었다. 서혜민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운 게 맞았고 준서도 자신의 아이일 가능성이 정말 컸다.하지만 서수현은 어떻게든 부현승이 그날 밤 자신을 강간한 사람이고 믿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두 사람이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한 명은 서수현의 의심이 너무 지나치다고 얘기하고 있었다.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겉보기엔 젠틀한 신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더러운 변태일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서수현은 점점 복잡해지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가장 간단한 방법은 서혜민 몰래 준서와 자신의 친자확인 검사를 해보는 것이었다.만약 성공적으로 서수현과 준서의 모자 관계를 입증해낸다면 그녀는 자신의 매부인 현승을 다시는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부현승과 서혜민의 관계는 또 어떻게 될까?만약 실패한다면 모든 것이 그녀의 망상이었을 뿐이고 그렇게 된다면 서수현은 큰아버지 가족을 다시 마주할 면목이 없을 것이다.서수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냥 이쯤에서 멈춰야 하나.준서의 엄마가 누구든 간에 부현승의 아이인 것은 확실하니 아이는 부씨 가문에서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준서가 자신의 아이임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서수현은 부현승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준서에게 더 나은 삶은 선사해줄 수도 없었다. 그러니 결국 아이는 부씨 가문에 남아야 한다.이 점을 고려해보니 서수현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그녀가 괜
서혜민은 줄곧 부현승과 서수현이 만나는 것을 꺼렸다. 두 사람은 결혼식에서만 한 번 보고 끝난 사이어야 했다.하지만 오늘 점심에 식당으로 향하기 전 아빠에게서 서수현이 부현승의 회사에서 인턴 실습을 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그것도 부현승의 밑에서.하지만 부현승은 서수현을 알아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부현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어땠어?”“꽤 괜찮았어. 나름 우수 인턴사원이었으니까.”“... 그거 좋은 건가?”“졸업하고 나서 BX 그룹에 이력서를 제출했을 때, 우선채용 조건이 될 수 있지.”“아... 우리 사촌 언니 대단하네.”서혜민이 부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큰아버지가 계속 언니 학비도 다 대주고 엄청나게 잘 해주셨거든. 난 중학생 때 집안일 도우라고 자퇴했는데. 가끔 언니가 학교에 가는 걸 보면 정말 부러웠어.”부현승은 서혜민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준서의 얼굴에 고정된 채 뭔가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 같았다.순간 긴장된 서혜민이 물었다.“뭘 그렇게 봐?”“네가 봤을 땐 준서, 나 닮은 것 같아, 아니면 너 닮은 것 같아?”서혜민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몇 개월이나 됐다고. 누굴 닮았는지 벌써 어떻게 알아?”“내가 봤을 땐, 날 더 많이 닮은 것 같거든.”부현승이 대답했다.서혜민은 조금 빨개진 얼굴로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어딘가 모르게 촉촉하게 젖어있었다.“맞다, 준서도 이제 백 일 지났는데... 이제 돌아와서 나랑 같이 살자...”둘이 처음 같은 집에서 지낼 때는 서로가 서먹서먹했다. 그나마 가장 친밀한 스킨쉽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손을 잡는 것 정도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혜민이 임신을 했고 그 이후로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자지 않았다.서혜민이 출산한 후에는 유모가 아이와 엄마를 편히 돌볼 수 있도록 부현승은 아예 자신의 방을 손님방으로 옮겼다.서혜민은 더 이상
“아뇨, 방금 제가 실수한 거였더라고요.”“아, 네...”유모는 서혜민의 잠옷을 흘깃 보았다.상당히 요란하게 노는 스타일 같았다.서혜민은 서재 앞으로 찾아가 문에 두어 번 노크했다.허락을 받자 그녀는 곧장 문을 열고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무슨 일이야?”부현승이 고개를 들어 서혜민을 슬쩍 바라보고는 물었다.“다름이 아니라 다음 달이면 우리 엄마 생신이시거든. 그때 나랑 같이 가줄 수 있어?”“그러지, 뭐.”“무슨 선물을 사면 좋을까?”서혜민은 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애썼다. 그 순간,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부현승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서혜민은 궁금한 마음에 휴대폰 화면을 슬쩍 쳐다보았다. 발신인은 서 비서였다.“네가 알아서 해.”부현승은 서혜민에게 대충 대답하고는 곧장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그래... 알겠어. 지금 바로 갈게.”부현승은 곧장 몸을 일으켜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겉옷을 집어 들고 말했다.“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네.”서혜민의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내일 가면 안 돼?”“급한 일이라 그래. 일찍 쉬어, 나 기다리지 말고.”말을 마친 부현승이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꼭 가야 해? 너희 부이사도 있잖아.”“출장 중이야.”“...”서혜민이 무슨 말을 하든 부현승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부현승이 문을 열고 홀연히 떠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무 물건이나 집어 던지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차에 올라탄 부현승은 점점 불쾌해지는 기분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예전에도 이런 경험이 없었던 게 아니었던 부현승은 오늘따라 왠지 이상한 서혜민을 떠올리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 눈치챘다.서혜민이 자신과 서수현의 관계를 눈치채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겠나?부현승의 표정이 어두워졌디. 그는 운전 기사에게 회사에 가기 전, 병원에 한 번 들러야겠다고 전했다.그때의 BX 그룹은 일부 부서를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