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얘기해줄래요?”조금 전, 서수현은 단호한 태도로 부현승에게 친자확인 검사를 해보라고 얘기했고 친자 확인서를 봤을 때는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단순히 연기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서수현이 고개를 푹 떨군 채 침묵을 지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부승민, 민지훈과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 서수현은 그날의 일을 절대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지옥 같았던 경험은 더더욱 얘기해줄 수 없었다.부승민을 떠올리자 서수현은 그가 자리를 뜨기 전,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눈빛을 떠올렸다. 부승민은 마치 서수현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는 듯한 사람처럼 느껴졌다.사실 친자확인 결과가 진짜라는 것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했다.첫 번째로는 서수현의 추측이 틀렸다는 것이다.그리고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그날 밤 자신을 강간했던 사람이... 부현승이었다는 것이다...이 생각이 들자 서수현은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이 가능성은 서수현이 줄곧 무시해 왔다. 부현승처럼 정직하고도 다정하고, 또 침착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난폭한 범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그녀는 온천 리조트에서 민지훈을 마주쳤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민지훈은 이렇게 말했었다.“우리 회사가 지금 단합대회 중이어서요.”단합대회라면 부현승 역시 그 리조트에 있었을 것이다.“수현 씨?”서수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현승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팔로 서수현을 툭툭 쳤다.하지만 이윽고 온몸을 떨며 공포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수현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요?”서수현은 부현승을 살인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저... 저는 괜찮습니다.”서수현은 부현승의 시선을 피하며 무의식적으로 그와 거리를 두었다.“차... 차 세워요... 저 내리고 싶어요.”“방금 질문엔 대답해주고 내려야죠. 저는 솔직한 대답이 듣고 싶다니까요.”“제... 제가 나중에 설명해드릴게요. 그래도 되죠?”이미 뒤죽박죽 마음이 복잡해
서수현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마치 다시 그 어두운 밤으로 돌아간 듯 고통을 꾸역꾸역 억눌렀다. 마치 거대한 손이 그녀를 잡고 지옥으로 끌어들이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서수현은 진실을 얘기해야만 했다. 만약 그녀가 민지훈의 아이를 뱄다고 인정해버리면 준서의 정체는 그대로 확정되어 버릴 것이다.“...”차라리 민지훈의 아이인 편이 낫겠다!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보통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 하나는 사생활이 문란한 경우라고 다른 하나는 성폭행을 당한 경우이다.서수현의 지금 모습과 성격으로 봤을 때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운전기사도 그 둘의 대화를 들으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현승이 말을 꺼냈다.“앞쪽 교차로에서 우회전했다가 길가에 차 좀 세워주세요.”“아... 네.”뒤늦게 정신을 차린 운전기사가 부현승이 얘기한 구역에 차를 세우고는 눈치껏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밖에서 대기했다.깜짝 놀란 서수현이 말했다.“잠깐만요, 어디 가시는 거예요?”운전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저는 밖에서 대기해야죠.”어떤 일들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서수현은 입술을 달싹이다 두려운 눈빛으로 부현승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재빨리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머릿속에서는 부현승이 그날 밤 자신을 강간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 순간부터 서수현은 부현승과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부현승과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운전기사와 부현승 모두 서수현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눈치였다.“서수현 씨?”“이사님, 제가 나중에 다시 설명해 드릴게요.”말을 마친 서수현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지금 장난하는 건가?“뒤쫓아갈까요?”“... 아뇨, 괜찮습니다.”운전기사는 부현승의 말에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가 앉았다.“그럼 저희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할까요?”“집에 가자.”운전기사
“이사님.”서 비서가 문을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와 부현승의 명령을 기다린다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서수현 기억하지?”“네, 저번 인턴이었잖습니까.”“작년 12월부터 최근까지의 행적 좀 조사해줘. 최대한 빨리.”“네.”....부현승의 차에서 내린 서수현이 천천히 걸어 자신의 월세방으로 들어왔다.그녀의 마음이 이토록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었다.서수현의 이성이 지금 그녀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얘기해주고 있었다. 서혜민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운 게 맞았고 준서도 자신의 아이일 가능성이 정말 컸다.하지만 서수현은 어떻게든 부현승이 그날 밤 자신을 강간한 사람이고 믿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두 사람이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한 명은 서수현의 의심이 너무 지나치다고 얘기하고 있었다.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겉보기엔 젠틀한 신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더러운 변태일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서수현은 점점 복잡해지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가장 간단한 방법은 서혜민 몰래 준서와 자신의 친자확인 검사를 해보는 것이었다.만약 성공적으로 서수현과 준서의 모자 관계를 입증해낸다면 그녀는 자신의 매부인 현승을 다시는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부현승과 서혜민의 관계는 또 어떻게 될까?만약 실패한다면 모든 것이 그녀의 망상이었을 뿐이고 그렇게 된다면 서수현은 큰아버지 가족을 다시 마주할 면목이 없을 것이다.서수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냥 이쯤에서 멈춰야 하나.준서의 엄마가 누구든 간에 부현승의 아이인 것은 확실하니 아이는 부씨 가문에서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준서가 자신의 아이임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서수현은 부현승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준서에게 더 나은 삶은 선사해줄 수도 없었다. 그러니 결국 아이는 부씨 가문에 남아야 한다.이 점을 고려해보니 서수현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그녀가 괜
서혜민은 줄곧 부현승과 서수현이 만나는 것을 꺼렸다. 두 사람은 결혼식에서만 한 번 보고 끝난 사이어야 했다.하지만 오늘 점심에 식당으로 향하기 전 아빠에게서 서수현이 부현승의 회사에서 인턴 실습을 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그것도 부현승의 밑에서.하지만 부현승은 서수현을 알아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부현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어땠어?”“꽤 괜찮았어. 나름 우수 인턴사원이었으니까.”“... 그거 좋은 건가?”“졸업하고 나서 BX 그룹에 이력서를 제출했을 때, 우선채용 조건이 될 수 있지.”“아... 우리 사촌 언니 대단하네.”서혜민이 부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큰아버지가 계속 언니 학비도 다 대주고 엄청나게 잘 해주셨거든. 난 중학생 때 집안일 도우라고 자퇴했는데. 가끔 언니가 학교에 가는 걸 보면 정말 부러웠어.”부현승은 서혜민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준서의 얼굴에 고정된 채 뭔가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 같았다.순간 긴장된 서혜민이 물었다.“뭘 그렇게 봐?”“네가 봤을 땐 준서, 나 닮은 것 같아, 아니면 너 닮은 것 같아?”서혜민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몇 개월이나 됐다고. 누굴 닮았는지 벌써 어떻게 알아?”“내가 봤을 땐, 날 더 많이 닮은 것 같거든.”부현승이 대답했다.서혜민은 조금 빨개진 얼굴로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어딘가 모르게 촉촉하게 젖어있었다.“맞다, 준서도 이제 백 일 지났는데... 이제 돌아와서 나랑 같이 살자...”둘이 처음 같은 집에서 지낼 때는 서로가 서먹서먹했다. 그나마 가장 친밀한 스킨쉽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손을 잡는 것 정도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혜민이 임신을 했고 그 이후로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자지 않았다.서혜민이 출산한 후에는 유모가 아이와 엄마를 편히 돌볼 수 있도록 부현승은 아예 자신의 방을 손님방으로 옮겼다.서혜민은 더 이상
“아뇨, 방금 제가 실수한 거였더라고요.”“아, 네...”유모는 서혜민의 잠옷을 흘깃 보았다.상당히 요란하게 노는 스타일 같았다.서혜민은 서재 앞으로 찾아가 문에 두어 번 노크했다.허락을 받자 그녀는 곧장 문을 열고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무슨 일이야?”부현승이 고개를 들어 서혜민을 슬쩍 바라보고는 물었다.“다름이 아니라 다음 달이면 우리 엄마 생신이시거든. 그때 나랑 같이 가줄 수 있어?”“그러지, 뭐.”“무슨 선물을 사면 좋을까?”서혜민은 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애썼다. 그 순간,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부현승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서혜민은 궁금한 마음에 휴대폰 화면을 슬쩍 쳐다보았다. 발신인은 서 비서였다.“네가 알아서 해.”부현승은 서혜민에게 대충 대답하고는 곧장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그래... 알겠어. 지금 바로 갈게.”부현승은 곧장 몸을 일으켜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겉옷을 집어 들고 말했다.“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네.”서혜민의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내일 가면 안 돼?”“급한 일이라 그래. 일찍 쉬어, 나 기다리지 말고.”말을 마친 부현승이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꼭 가야 해? 너희 부이사도 있잖아.”“출장 중이야.”“...”서혜민이 무슨 말을 하든 부현승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부현승이 문을 열고 홀연히 떠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무 물건이나 집어 던지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차에 올라탄 부현승은 점점 불쾌해지는 기분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예전에도 이런 경험이 없었던 게 아니었던 부현승은 오늘따라 왠지 이상한 서혜민을 떠올리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 눈치챘다.서혜민이 자신과 서수현의 관계를 눈치채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겠나?부현승의 표정이 어두워졌디. 그는 운전 기사에게 회사에 가기 전, 병원에 한 번 들러야겠다고 전했다.그때의 BX 그룹은 일부 부서를
이날 밤, 부현승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그는 서혜민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에 긴급한 일이 있어서 한참 바쁠 것이니 바로 회사에서 쉬겠다고 말했다.부현승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며 약에 취해 있던 짜증도 그녀가 약을 섞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럴수록 서혜민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집에 돌아오지 않다니... 혹시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간 건가?’그녀는 속으로 서기찬을 욕했다.‘왜 하필 그때 전화가 와서는!’아침이 되어 부현승은 서수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일이 있어 전화를 받지 못한 줄 알았기에 부현승은 반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뒤늦게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그는 서수현의 SNS를 찾아 메시지를 남겼다.오전의 업무가 끝난 후, 부현승은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역시나 답장은 없었다.그는 이마를 짚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먼저 나를 의심하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나를 무시하는 건가?’4학년이라 수업이 적었던 서수현은 두 명의 친구와 함께 그룹 명의로 대학 연합 학과별 경연 대회에 참가해 자신의 경력을 풍부하게 하려 했다.점심시간이 되어 서수현은 도서관 열람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나와 문제를 토론하며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서수현 씨.”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서수현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멀지 않은 기둥 옆에 서 있던 부현승은 그녀가 쳐다보자 성큼성큼 다가갔다.왼쪽에 있던 친구도 부현승을 보고는 팔꿈치로 서수현을 쿡 찌르며 두 사람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매니저님?”서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음, 점심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괜찮겠어요?”“무슨 일이신가요? 중요하지 않은 일이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부현승은 서수현의 무미건조한, 심지어 차가운 표정을 보며 살짝 웃고는 그녀의 친구들을 쳐다보았다.그러자 서수현은 친구들에게 먼저 말했다.“너희들 먼저 식당에 가서 치킨가스 하나만
부현승은 서수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강요하지 않을게요. 공부 열심히 해요.”그 말을 끝으로 그는 서수현 곁을 지나 도서관을 떠났다.서수현은 부현승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서둘러 식당으로 돌아갔다.이미 두 명의 친구는 자리를 잡아두었고 서수현의 식사까지 준비해두었다.서수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왼쪽에 앉은 친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수현아, 솔직히 말해봐. 그 매니저님이랑 어디까지 간 거야?”그녀는 서수현과 함께 BX 그룹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면접관이 서수현을 길에서 하마터면 부딪칠 뻔한 그 멋진 남자라는 걸 알아챘다.그래서 서수현이 면접을 통과해 입사한 후, 그녀는 서수현이 부현승과 어떤 인연을 맺게 될지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서수현이 인턴십을 마치고 나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녀는 이 일을 잊어버렸다.그러다 오늘 부현승이 학교에 서수현을 찾아오자 그녀의 호기심이 다시 불타올랐다.오른쪽에 앉은 친구도 서수현과 부현승의 ‘인연'에 대해 듣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서수현을 바라보았다.서수현은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오해한 거야. 그분의 아내는 내 사촌 언니야. 그분이 나를 찾아온 건 다른 일 때문이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뭐?”왼쪽에 있던 친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러니까 네 형부 된다는 소리지? 그럼 됐어.”두 사람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대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이엘리아가 구치소에서 나왔을 때, 그녀의 얼굴은 초췌하고 누런빛이 돌았으며 몸도 야위어 있어 이전의 화려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자신을 마중 나온 연도진을 보자 이엘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움츠리며 두려움이 서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빠.”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예전의 오만한 기세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연도진은 그런 이엘리아를 몇 번 훑어보며 말했다.“이엘리아, 가자. 호텔에 가서 정리 좀 해. 내가 저녁 비행기 표를 예약해
필라시 국제공항에서 서희수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마음으로 반 시간을 기다렸다이엘리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서희수의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이 맺혔다.정성껏 키워온 막내딸이 이토록 큰 고통을 겪을 줄이야.이번 일을 계기로 이엘리아가 교훈을 얻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함부로 괴롭히지 않기를 바랐다.모녀가 서로를 마주했지만 할 말은 없었다.그러나 곧 서희수는 이엘리아가 돌아온 후, 너무도 위축되고 무기력해진 것을 알아차렸다.윌슨은 지팡이를 짚고 엄한 얼굴로 이엘리아에게 경고했다.“이제부터 필라시에서 얌전히 지내. 어디도 못 가. 다시 문제를 일으키면 네 다리를 부러뜨리고 말 거야.”이엘리아가 말대꾸를 할 줄 알고 미리 준비까지 하고 있던 윌슨은 그녀가 공포에 서린 얼굴로 급히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아빠,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앞으로 오빠 말 잘 들을게요. 제발 다시 저를 가두지 마세요. 다시는 그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말을 하면서 이엘리아는 두려움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끔찍한 일을 겪은 듯한 모습이었다.빈센트 윌슨은 잠시 말을 잃었다.“...”서희수는 이엘리아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파 다가가 위로했다.“이엘리아,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여기 있어. 아빠도 네가 잘 되길 바랄 뿐이야.”“엄마...”이엘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정말 저 다시 가두지 않으시겠죠?”“그래, 네가 말을 잘 들으면 그런 일은 없을 거야.”“걱정 마세요. 꼭 오빠 말 잘 들을게요. 엄마, 오빠한테 말해 주세요. 저한테 화내지 말라고요. 네?”“그렇게 할게. 많이 피곤하지? 이제 들어가서 쉬어라.”“네.”이엘리아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서희수는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카이사르가 도대체 뭘 한 걸까요? 이엘리아가 이렇게 겁에 질려 하다니... 구치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연도진에 대한 불만이 스며들어있었고 아직 보지 못한 김시연까지 원망하게 되었다.빈센트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