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님.”서 비서가 문을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와 부현승의 명령을 기다린다는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서수현 기억하지?”“네, 저번 인턴이었잖습니까.”“작년 12월부터 최근까지의 행적 좀 조사해줘. 최대한 빨리.”“네.”....부현승의 차에서 내린 서수현이 천천히 걸어 자신의 월세방으로 들어왔다.그녀의 마음이 이토록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었다.서수현의 이성이 지금 그녀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얘기해주고 있었다. 서혜민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운 게 맞았고 준서도 자신의 아이일 가능성이 정말 컸다.하지만 서수현은 어떻게든 부현승이 그날 밤 자신을 강간한 사람이고 믿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두 사람이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다.한 명은 서수현의 의심이 너무 지나치다고 얘기하고 있었다.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겉보기엔 젠틀한 신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알고 보면 더러운 변태일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서수현은 점점 복잡해지는 생각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가장 간단한 방법은 서혜민 몰래 준서와 자신의 친자확인 검사를 해보는 것이었다.만약 성공적으로 서수현과 준서의 모자 관계를 입증해낸다면 그녀는 자신의 매부인 현승을 다시는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부현승과 서혜민의 관계는 또 어떻게 될까?만약 실패한다면 모든 것이 그녀의 망상이었을 뿐이고 그렇게 된다면 서수현은 큰아버지 가족을 다시 마주할 면목이 없을 것이다.서수현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냥 이쯤에서 멈춰야 하나.준서의 엄마가 누구든 간에 부현승의 아이인 것은 확실하니 아이는 부씨 가문에서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준서가 자신의 아이임이 증명된다 하더라도 서수현은 부현승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준서에게 더 나은 삶은 선사해줄 수도 없었다. 그러니 결국 아이는 부씨 가문에 남아야 한다.이 점을 고려해보니 서수현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그녀가 괜
서혜민은 줄곧 부현승과 서수현이 만나는 것을 꺼렸다. 두 사람은 결혼식에서만 한 번 보고 끝난 사이어야 했다.하지만 오늘 점심에 식당으로 향하기 전 아빠에게서 서수현이 부현승의 회사에서 인턴 실습을 했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그것도 부현승의 밑에서.하지만 부현승은 서수현을 알아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부현승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응.”“어땠어?”“꽤 괜찮았어. 나름 우수 인턴사원이었으니까.”“... 그거 좋은 건가?”“졸업하고 나서 BX 그룹에 이력서를 제출했을 때, 우선채용 조건이 될 수 있지.”“아... 우리 사촌 언니 대단하네.”서혜민이 부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큰아버지가 계속 언니 학비도 다 대주고 엄청나게 잘 해주셨거든. 난 중학생 때 집안일 도우라고 자퇴했는데. 가끔 언니가 학교에 가는 걸 보면 정말 부러웠어.”부현승은 서혜민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준서의 얼굴에 고정된 채 뭔가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 같았다.순간 긴장된 서혜민이 물었다.“뭘 그렇게 봐?”“네가 봤을 땐 준서, 나 닮은 것 같아, 아니면 너 닮은 것 같아?”서혜민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몇 개월이나 됐다고. 누굴 닮았는지 벌써 어떻게 알아?”“내가 봤을 땐, 날 더 많이 닮은 것 같거든.”부현승이 대답했다.서혜민은 조금 빨개진 얼굴로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어딘가 모르게 촉촉하게 젖어있었다.“맞다, 준서도 이제 백 일 지났는데... 이제 돌아와서 나랑 같이 살자...”둘이 처음 같은 집에서 지낼 때는 서로가 서먹서먹했다. 그나마 가장 친밀한 스킨쉽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손을 잡는 것 정도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혜민이 임신을 했고 그 이후로 두 사람은 같은 침대에서 자지 않았다.서혜민이 출산한 후에는 유모가 아이와 엄마를 편히 돌볼 수 있도록 부현승은 아예 자신의 방을 손님방으로 옮겼다.서혜민은 더 이상
“아뇨, 방금 제가 실수한 거였더라고요.”“아, 네...”유모는 서혜민의 잠옷을 흘깃 보았다.상당히 요란하게 노는 스타일 같았다.서혜민은 서재 앞으로 찾아가 문에 두어 번 노크했다.허락을 받자 그녀는 곧장 문을 열고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무슨 일이야?”부현승이 고개를 들어 서혜민을 슬쩍 바라보고는 물었다.“다름이 아니라 다음 달이면 우리 엄마 생신이시거든. 그때 나랑 같이 가줄 수 있어?”“그러지, 뭐.”“무슨 선물을 사면 좋을까?”서혜민은 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애썼다. 그 순간,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부현승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서혜민은 궁금한 마음에 휴대폰 화면을 슬쩍 쳐다보았다. 발신인은 서 비서였다.“네가 알아서 해.”부현승은 서혜민에게 대충 대답하고는 곧장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그래... 알겠어. 지금 바로 갈게.”부현승은 곧장 몸을 일으켜 의자 등받이에 걸쳐둔 겉옷을 집어 들고 말했다.“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네.”서혜민의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내일 가면 안 돼?”“급한 일이라 그래. 일찍 쉬어, 나 기다리지 말고.”말을 마친 부현승이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꼭 가야 해? 너희 부이사도 있잖아.”“출장 중이야.”“...”서혜민이 무슨 말을 하든 부현승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몰랐다.그녀는 그저 멍하니 부현승이 문을 열고 홀연히 떠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아무 물건이나 집어 던지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차에 올라탄 부현승은 점점 불쾌해지는 기분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예전에도 이런 경험이 없었던 게 아니었던 부현승은 오늘따라 왠지 이상한 서혜민을 떠올리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바로 눈치챘다.서혜민이 자신과 서수현의 관계를 눈치채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겠나?부현승의 표정이 어두워졌디. 그는 운전 기사에게 회사에 가기 전, 병원에 한 번 들러야겠다고 전했다.그때의 BX 그룹은 일부 부서를
이날 밤, 부현승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그는 서혜민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에 긴급한 일이 있어서 한참 바쁠 것이니 바로 회사에서 쉬겠다고 말했다.부현승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며 약에 취해 있던 짜증도 그녀가 약을 섞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럴수록 서혜민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집에 돌아오지 않다니... 혹시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간 건가?’그녀는 속으로 서기찬을 욕했다.‘왜 하필 그때 전화가 와서는!’아침이 되어 부현승은 서수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일이 있어 전화를 받지 못한 줄 알았기에 부현승은 반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뒤늦게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은 그는 서수현의 SNS를 찾아 메시지를 남겼다.오전의 업무가 끝난 후, 부현승은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역시나 답장은 없었다.그는 이마를 짚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먼저 나를 의심하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나를 무시하는 건가?’4학년이라 수업이 적었던 서수현은 두 명의 친구와 함께 그룹 명의로 대학 연합 학과별 경연 대회에 참가해 자신의 경력을 풍부하게 하려 했다.점심시간이 되어 서수현은 도서관 열람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나와 문제를 토론하며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서수현 씨.”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서수현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멀지 않은 기둥 옆에 서 있던 부현승은 그녀가 쳐다보자 성큼성큼 다가갔다.왼쪽에 있던 친구도 부현승을 보고는 팔꿈치로 서수현을 쿡 찌르며 두 사람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매니저님?”서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음, 점심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괜찮겠어요?”“무슨 일이신가요? 중요하지 않은 일이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부현승은 서수현의 무미건조한, 심지어 차가운 표정을 보며 살짝 웃고는 그녀의 친구들을 쳐다보았다.그러자 서수현은 친구들에게 먼저 말했다.“너희들 먼저 식당에 가서 치킨가스 하나만
부현승은 서수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강요하지 않을게요. 공부 열심히 해요.”그 말을 끝으로 그는 서수현 곁을 지나 도서관을 떠났다.서수현은 부현승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서둘러 식당으로 돌아갔다.이미 두 명의 친구는 자리를 잡아두었고 서수현의 식사까지 준비해두었다.서수현이 자리에 앉자마자 왼쪽에 앉은 친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수현아, 솔직히 말해봐. 그 매니저님이랑 어디까지 간 거야?”그녀는 서수현과 함께 BX 그룹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면접관이 서수현을 길에서 하마터면 부딪칠 뻔한 그 멋진 남자라는 걸 알아챘다.그래서 서수현이 면접을 통과해 입사한 후, 그녀는 서수현이 부현승과 어떤 인연을 맺게 될지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서수현이 인턴십을 마치고 나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녀는 이 일을 잊어버렸다.그러다 오늘 부현승이 학교에 서수현을 찾아오자 그녀의 호기심이 다시 불타올랐다.오른쪽에 앉은 친구도 서수현과 부현승의 ‘인연'에 대해 듣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서수현을 바라보았다.서수현은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오해한 거야. 그분의 아내는 내 사촌 언니야. 그분이 나를 찾아온 건 다른 일 때문이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뭐?”왼쪽에 있던 친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러니까 네 형부 된다는 소리지? 그럼 됐어.”두 사람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대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이엘리아가 구치소에서 나왔을 때, 그녀의 얼굴은 초췌하고 누런빛이 돌았으며 몸도 야위어 있어 이전의 화려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자신을 마중 나온 연도진을 보자 이엘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움츠리며 두려움이 서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오빠.”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예전의 오만한 기세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연도진은 그런 이엘리아를 몇 번 훑어보며 말했다.“이엘리아, 가자. 호텔에 가서 정리 좀 해. 내가 저녁 비행기 표를 예약해
필라시 국제공항에서 서희수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마음으로 반 시간을 기다렸다이엘리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서희수의 눈가가 붉어지며 눈물이 맺혔다.정성껏 키워온 막내딸이 이토록 큰 고통을 겪을 줄이야.이번 일을 계기로 이엘리아가 교훈을 얻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함부로 괴롭히지 않기를 바랐다.모녀가 서로를 마주했지만 할 말은 없었다.그러나 곧 서희수는 이엘리아가 돌아온 후, 너무도 위축되고 무기력해진 것을 알아차렸다.윌슨은 지팡이를 짚고 엄한 얼굴로 이엘리아에게 경고했다.“이제부터 필라시에서 얌전히 지내. 어디도 못 가. 다시 문제를 일으키면 네 다리를 부러뜨리고 말 거야.”이엘리아가 말대꾸를 할 줄 알고 미리 준비까지 하고 있던 윌슨은 그녀가 공포에 서린 얼굴로 급히 대답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아빠,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앞으로 오빠 말 잘 들을게요. 제발 다시 저를 가두지 마세요. 다시는 그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말을 하면서 이엘리아는 두려움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마치 끔찍한 일을 겪은 듯한 모습이었다.빈센트 윌슨은 잠시 말을 잃었다.“...”서희수는 이엘리아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파 다가가 위로했다.“이엘리아,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여기 있어. 아빠도 네가 잘 되길 바랄 뿐이야.”“엄마...”이엘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아빠 정말 저 다시 가두지 않으시겠죠?”“그래, 네가 말을 잘 들으면 그런 일은 없을 거야.”“걱정 마세요. 꼭 오빠 말 잘 들을게요. 엄마, 오빠한테 말해 주세요. 저한테 화내지 말라고요. 네?”“그렇게 할게. 많이 피곤하지? 이제 들어가서 쉬어라.”“네.”이엘리아가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서희수는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카이사르가 도대체 뭘 한 걸까요? 이엘리아가 이렇게 겁에 질려 하다니... 구치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그녀의 목소리에는 이미 연도진에 대한 불만이 스며들어있었고 아직 보지 못한 김시연까지 원망하게 되었다.빈센트
‘이 모든 것이 내가 이엘리아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 탓이야...’이엘리아는 서희수의 품에 안겨 흐느끼며 말했다.“엄마, 왜 나를 구하러 오지 않았어요? 그 안에 있는 동안 정말 무서웠어요... 매일 밤잠도 못 자고 엄마가 나를 구하러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왜 안 왔어요...”눈가가 붉어진 채로 서희수가 속삭였다.“미안해... 정말 미안해...”‘이엘리아가 그렇게 오랫동안 구치소에 갇혀 있게 둔 건 내 잘못이야. 조금만 일찍 도진이에게 부탁해 이엘리아를 꺼내오게 했어야 했는데... 내가 안 그랬어.’이엘리아는 흐느끼며 말했다.“난 엄마가 나를 버린 줄 알았어요.”“엄마가 어떻게 너를 버리겠니?”“오빠가 말했어요. 내가 말을 안 들으면 엄마 아빠가 떠난 뒤에 날 집에서 쫓아낼 거라고요...”이 말을 들은 서희수는 속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는 이엘리아를 달래며 말했다.“오빠가 그냥 장난으로 한 말이야. 널 걱정해서 그런 거야.”“정말로요?”“물론이지.”서희수는 이렇게 말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확신하지 못했다.그녀는 연도진이 자신들이 떠난 후에도 이엘리아를 잘 돌봐주기를 바랐지만 연도진은 이미 이엘리아에 대해 지친 것처럼 보였다.‘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보상해주려 노력했는데... 여전히 우리에게 특히 이엘리아에게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정말로 그토록 냉혈한 아이인 건가?’필라시에 돌아온 이엘리아는 눈빛이 텅 빈 채로 전신이 생기를 잃어버렸다.이엘리아는 더 이상 외출을 좋아하지 않았고 매일 방 안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고립시켰다.서희수는 이엘리아가 이렇게 있는 것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 함께 쇼핑을 가자고 제안했다.이전의 이엘리아라면 기쁘게 따라나섰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가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고 서희수가 아무리 설득해도 그녀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활발하고 사랑스러웠던 딸이 이렇게 변한 것을 보며 서희수는 깊은 자책감에 빠졌다.빈센트 윌슨은 이엘리아가 심리 치료를 받
이엘리아의 표정을 보며 앨리스는 미소를 지었다.“이제 연기 그만할래?”그러자 이엘리아는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하지만 앨리스는 이 말을 믿지 않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이엘리아, 내가 널 모를 것 같아? 지금 네 마음속엔 오빠에 대한 증오만 가득할 텐데, 맞지?”자기중심적이고 악랄하며 극단적인 성격인 이엘리아가 스스로 반성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절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리며 스스로가 억울하다고 여기고 있었다.그래서 복수를 꿈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이엘리아가 서희수와 빈센트 윌슨 앞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도 결국은 그들이 카이사르에게 불만을 가지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앨리스는 확신했다.“뭐야? 오빠 때문에 내 실체를 폭로하겠다는 거야?”이엘리아는 더 이상 부정하지 않고 앨리스를 차갑게 노려보았다.앨리스는 만약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카이사르를 위해 이엘리아를 설득하려고 하면 이엘리아가 자신마저도 해치려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설마 내가 그러겠어?”앨리스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원래라면 앨리스는 이 일을 계기로 이엘리아와 카이사르가 화해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이미 김시연과 결혼해버렸으니 그녀는 더 이상 그와의 관계를 꿈꿀 수 없었다. 그런데 왜서 앨리스는 문제를 일으키려 하는 것일까?”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카이사르에게 그 대가가 무엇인지 톡톡히 보여주려는 것이었다.‘카이사르... 당신은 평생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야.’“똑똑하네.”이엘리아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아까 그 말... 오빠가 김시연이랑 결혼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네가 구치소에 있을 때 오빠가 김시연과 강남시에서 결혼식을 올렸어. 그때 알게 된 건데 카이사르 오빠가 진짜 좋아한 사람은 김시연이었지 너나 다른 사람이 아니었어.”이엘리아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정말 내 오빠 맞아? 내가 구치소에서 고생하고 있을 때 자기는 결혼할 생각이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