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13화

Author: 남희은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10-29 19:42:56
배현수는 당연히 믿지 않았다.

“기억력이 이렇게 좋아?”

“네! 엄마가 기억력 좋은 것은 아빠를 닮아서 그렇대요! 우리 아빠 천재예요!”

배현수는 흠칫했다.

“네 아빠가 기억력이 엄청 좋아?”

“네! 왜요, 아저씨?”

배현수는 사실 별생각이 없이 물어봤을 뿐이다. 이 아이가 거짓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손꼽힐 정도다.

그러나 배현수는 귀신에 홀린 듯 일부러 아이를 시험하고 싶기도 해서 자신의 전화번호를 빠르게 읊었다.

“기억했니?”

꼬마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했어요! 아저씨, 제가 미인을 소개해 드릴 테니 기다리고 있으세요!”

배현수는 당연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해 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아무 연관도 없는 꼬마와 이야기하느라 20분이나 보냈다니.

배현수는 일어나서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갈게. 너도 얼른 병실로 돌아가.”

선유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또 봐요!”

경호원은 배현수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배현수는 고개를 들고 다시 한번 의자에 앉아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꼬마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마음속 깊이 가장 부드러운 곳이 뭔가에 걸린 것 같았다.

만약 그때 조유진이 배신하지 않았다면... 배현수와 조유진의 아이도 이만큼 컸겠지.

당시, 배현수는 졸업하자마자 조유진과 혼인 신고하고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해서 가장 좋은 것들을 그녀에게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약은 없다.

배현수와 조유진에게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있을 수 없다.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

배현수는 시선을 차갑게 그 아이에게서 다른 데로 옮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이와 동시에 조유진은 드디어 조선유를 찾았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선유를 껴안았다!

“선유야! 너 왜 말도 없이 나가! 엄마가 엄청 걱정했잖아!”

“윽... 엄마 너무 꽉 껴안았어! 나 숨 막혀!”

조유진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너 왜 여기 앉아 있어? 춥지 않아?”

조선유는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엄마 왜 이제 왔어? 선유 너무 심심했단 말이야. 다행히 멋있는 아저씨를 만나서 선유랑 한참 이야기 나눴어!”

“멋있는 아저씨?”

조유진은 걱정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인신매매범은 아니겠지?

“응! 방금 갔어! 엄마 만약 조금만 일찍 왔으면 그 아저씨를 봤을 텐데! 엄청 잘생겼어!”

조유진은 그 말에 신경 쓸 겨를 없이 얼른 아이를 안고 병실로 돌아가면서 당부했다.

“앞으로는 낯선 사람이랑 이야기하지 마. 만약 그 사람이 너를 납치해 가면 어떡해?”

조유진이 걱정하자 선유는 조유진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알겠어요.”

병실로 돌아온 후 조유진이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을 때 선유는 재빨리 그 멋진 아저씨의 전화번호를 그림책에 적어 놓았다.

‘흥, 멋진 아저씨가 나를 쉽게 보다니. 내가 전화번호를 기억 못 한다고 했지, 내일 당장 내 기억력이 정말 좋다는 걸 알려주게 문자를 보내야지!’

조유진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조선유는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엄마, 나 아직도 병원에 며칠 더 있어야 해?”

“며칠만 있으면 돼. 이제 작은 수술만 받고 선유가 얼른 다 나으면 엄마와 같이 놀이공원에 가서 회전목마 타자, 응?”

오늘 밤에도 조유진은 나이트클럽에 가서 여자처럼 말하는 남자 점장에게 부탁해 일 하나를 잡아달라고 했다.

여자처럼 말하는 그 남자 점장은 말은 독하게 하지만 마음은 착했다. 그는 조유진이 싱글맘인데다가 아이가 아픈 것을 알고 거물급 손님을 소개해 줬다. 듣는데 의하면 팁만 천오백만 정도 된다고 했다.

대제주시에서 가장 비싼 브랜도 호텔에서 비즈니스를 논하는 사람은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 사람이라 팁을 줄 때 아주 시원시원하다.

Related chapters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14화

    일이 순조로우면 조유진은 바로 돈을 모아 선유의 수술비를 댈 수 있다.“엄마, 선유 아픈 거 무서워. 수술하면 엄청 아프지 않아?”조유진은 마음이 아파 아이를 껴안았다. 그녀는 딸의 이마에 뽀뽀하고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선유를 재우고 조유진은 침대 옆에 있는 수납장 위에 잡지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었다. 그리고 표지는 배현수의 사진이었다.조유진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천천히 잡지 속 남자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 지금의 그는 닿을 수 없는 비즈니스 거물이다. 시간이 모든 걸 바꿨다.오늘 저녁에 남초윤은 카톡으로 송인아의 정보를 그녀에게 보냈다.송인아는 최근에 인기가 급상승한 신인 가수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송인아는 송씨 가문의 딸이다. 송씨 가문은 대제주시에서 비록 배현수와는 못 비기지만 그래도 얼굴이 잘 알려진 집안이다.송인아는 얼굴도 예뻐서 배현수와 같이 있으면 잘 어울렸다.인간에게는 호기심이 있기 마련이다. 조유진은 궁금했다. 배현수는 그때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 주던 것처럼 송인아도 아껴줄까?송인아가 생리할 때 따뜻한 생강차를 끓여줄까?그런데 조유진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픈 것을 발견했다.조유진은 그 잡지를 서랍 안에 넣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답답하지 않을 것이다....밤이 된 대제주시는 아주 눈부셨다. 도심 한복판에는 황금색 빛이 반짝거렸다.조유진은 금색찬란한 브랜도 호텔의 VIP 룸 안에 서 있었고 머리 위에서 나오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그녀는 이렇게 빨리 다시 배현수를 만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그리고 배현수와 계약을 하려는 사람이 그녀의 전 약혼자 유승태인 것은 더 예상치 못했다.6년 전 배현수가 교도소에 들어가고 조범은 그녀에게 선 자리를 마련했었는데 그 상대가 바로 서주시 선두 기업인 화용 그룹의 후계자 유승태였다.조범은 그녀를 이용해 유씨 가문과 혼인시켜 자신의 시장 지위에 힘을 보태고 싶었다.그때 조유진은 이미 배현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15화

    배현수는 한 번도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놀랍도록 잘생긴 그 얼굴은 잔잔하면서도 차가운 호수 같았다. 마치 어떤 일에도 파도를 일으키지 않을 것 같았다.배현수를 따라 손님을 만나러 온 강이찬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말을 꺼냈다.“그런 즐겁지 않은 옛일은 꺼내지 맙시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유진아, 노래 두 곡 불러 봐.”유승태는 손가락을 튕겼다.“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조유진 씨가 대제주시 방송과 여신이었다면서요? 얼굴도 예쁘고 목소리도 듣기 좋다고 하던데. 노래로 여기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겠어요. 만약 오늘 유진 씨 노래에 배 대표님이 기뻐서 계약서에 동의한다면 우리 둘 사이의 일은 깨끗하게 끝난 걸로 하죠.”유승태도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조유진이 당당하게 물었다.“그럼 여러분 어떤 노래 듣고 싶으세요?”유승태가 말했다.“오늘 배 대표님이 갑이니까, 배 대표님, 먼저 말씀하시죠.”“전 아무거나요.”배현수는 관심이 없어 그들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강이찬이 곧바로 설명했다.“제 기억에 유진이가 대학교 축제 때 영어 노래 ‘You-and-I’를 불렀었는데 엄청 잘 불렀던 기억이 있어요. 그럼 이 곡으로 하죠?”You-and-I...조유진은 심장이 쿵쾅 뛰었다.유승태는 벌써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했다.“유진 씨, 얼른 불러요!”조유진은 한편에 있는 작은 무대에 서서 바이올린을 어깨에 놓고 줄을 당겼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전주가 울려 퍼졌고 마치 달빛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무대에는 부드러운 불빛이 그녀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조유진은 흰색의 퍼프 소매가 달린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마치 예전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아가씨로 돌아간 듯 자태가 단아하고 우아했다.배현수는 조유진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그러나 그때 그녀는 조씨 가문의 별장 마당에 앉아 있었고, 조범은 그녀를 이름난 아가씨로 키우기 위해 가장 실력 좋은 성악 선생님을 데리고 왔다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16화

    호텔 식당 안의 한 예약룸.배현수가 떠나자 강이찬이 뒤따라갔다.룸에는 유승태와 조유진 두 사람만 남았다.조유진도 바보가 아니기에 예감이 좋지 않음을 바로 느꼈고 바이올린을 들고 빨리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승태 도련님, 저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조유진이 룸 입구까지 걸어 나오자 유승태가 고개를 한번 까닥이더니 입구에 있던 경호원 두 명이 조유진의 앞을 막았다.유승태는 하찮은 표정으로 비웃듯이 말했다. “유진 씨, 못 들으셨어요? 배현수가 당신을 나에게 줬다고요.”조유진은 바이올린을 든 손을 꼭 쥐었고 애써 침착한 척하며 입을 뗐다. “승태 도련님, 무슨 말씀이세요. 배 대표도 말했잖아요. 저는 배 대표의 전 여자친구예요. 현재 여자친구도 아닌데 배 대표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 안 준다 함부로 얘기하는데요.”“조유진,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좋게 말할 때 들어!”유승태는 웃으면서 상냥한 척하며 말하고 있었지만, 전혀 농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조유진은 침을 한번 삼키더니 고개를 돌려 유승태를 바라보았다. “승태 도련님,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예전에 나를 속여서 파혼까지 하게 했던 빚을 오늘 갚아야겠죠? 노래 부르는 것도 돈 벌기 위해서 아니에요? 이 술을 마시면 내가 보내드리죠.”조유진은 의아했다. “이것만 마시면 될까요?”잔 속에 뭐가 들었든지 상관없이 조유진은 반드시 이 술을 마셔야 했다. 이 술을 마셔야 도망갈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이곳에 오기 전에 조유진은 또 술을 마셔야 할까 봐 미리 숙취해소제와 알코올 알레르기약을 먹고 왔었다.그래서 조유진은 일단 잔 속에 있던 술을 바로 마셨다.조유진은 고개를 들어 단숨에 술잔을 비웠고 잔을 뒤집어 머리 위에 두 번 털기까지 했다. 술이 한 방울도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않았다. “승태 도련님, 이렇게 하면 충분할까요?”“짝! 짝!”유승태는 박수를 쳤고 유쾌해 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진 씨, 여린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일하는 게 생각보다 시원시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17화

    조유진은 배현수가 다시 자기를 유승태에게 돌려보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재떨이로 유승태의 머리를 박살 냈는데 이 상황에서 다시 유승태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유승태는 원한이 있으면 반드시 갚는 사람으로 서주시에서 아주 유명하다.조유진이 입고 있던 원피스는 이미 유승태에게 갈기갈기 찢어졌고 새하얀 어깨와 쇄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조유진은 배현수의 다리 위에 앉아 두 손으로 배현수의 목을 끌어안고 뜨겁게 키스했다.배현수가 조유진의 팔을 잡아 조유진을 밀어내려 했다.“나 두고 가지 말아요...”조유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눈물이 배현수의 입술을 타고 내려 짠맛이 났다.배현수는 조유진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보며 당연히 쾌감을 느껴야 하는데 오히려 씁쓸한 감정이 몰려와 가슴이 저도 모르게 아팠다.“똑똑!”누군가 차창을 두드렸다.창문을 내린 강이찬은 눈썹을 찡그리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누가 감히 배 대표님 차를 두드려?”“강 대표님, 죄송합니다! 방금 조유진 씨가 이 차에 타는 것을 봤습니다. 조유진 씨가 방금 승태 도련님의 머리를 물건으로 내리치는 바람에 도련님이 지금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습니다. 저희 보고 조유진 씨를 꼭 데려오라고 해서요.”강이찬은 차 밖을 보며 말했다. “아, 그래. 나는 방금 조유진 씨가 저 앞으로 뛰어가는 것을 봤는데 빨리 쫓아가 봐.”강이찬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자 경호원은 그 자리에 선 채 멍해졌다. “강 사장님, 제가 분명히 봤는데…”“배 대표가 지금 바빠서 이만 가야 할 것 같아. 자리를 좀 비켜줄래?”강이찬이 창문을 닫았다.뒷좌석에 앉아있는 조유진은 찢어진 원피스를 여민 채 손을 꼭 움켜쥐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손은 떨고 있었다. 조유진의 피부가 배현수의 검은 셔츠와 대비되어 더 하얘 보였다. 조유진이 배현수 무릎에 앉아 있었다. 조유진이 위에 있고 배현수가 조유진 몸 아래에 있었다.좁고 폐쇄된 공간에 두 사람의 숨결만 느껴졌고 조유진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18화

    유진아.배현수가 조유진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따뜻한 말투로 귀에 가장 거슬리는 말을 했다.조유진은 얼굴을 붉혔고 그저 웃음이 났다. 배현수는 시선을 내려 고개를 위로 젖히고 있는 조유진을 보았다. 조유진은 배현수의 조롱 섞인 눈빛이 그대로 느껴졌다. “만약 오늘 밤, 내가 스스로 도망치지 못했다면, 당신 마음이 조금은 약해졌을까요?”조유진은 배현수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호텔 룸으로 다시 갔을지가 궁금해졌다.구할 생각이라도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배현수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깊고 차가운 까만 눈동자는 조유진을 노려보며 오랫동안 침묵을 이어갔다.조유진은 왠지 답을 찾은 것 같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조유진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현수 씨, 답을 듣고 싶어요.”구하러 갔는지 아니면 아예 생각이 없었는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그래야 조유진도 배현수라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단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배현수가 갑자기 말했다.“조유진, 그거 알아? 나는 이미 한번 죽었던 사람이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두 번 죽었지. 어떻게 두 번 죽었는지 알아?”6년 전, 조유진이 법정에서 배현수를 배신했을 때가 첫 번째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또 한 번은 조유진도 잘 모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배현수는 조유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네가 법정에서 나를 배신했을 때이고, 두 번째는 감옥 안에서 심장을 찔릴 뻔했을 때야.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어.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나은 날들을 살고 싶지는 않아.”더 황당한 것은, 당시 배현수를 칼로 찌르라고 한 것은 조범이 시킨 것이었다. 그때 육지율은 육씨 가문의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배현수를 수술할 병원에 알아봤고, 구사일생으로 겨우 살았을 때도 배현수는 잠꼬대로 조유진 이름만 불렀다고 했다. 6년 전, 조유진은 배현수의 심장을 감싼 넝쿨과 같았다.그때 배현수는 감옥에 있으면서 심장을 감싸고 있는 넝쿨을 한 가닥, 한 가닥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19화

    조유진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기도 전에 이불이 젖혀졌다.사늘한 기운이 느껴졌고 고막을 찌르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 대표님을 꼬시러 온 거야? 꼴은 그럴 것 같지만 당신 같은 사람들은 그저 한 번 쓰고 버리는 냅킨 같아. 당신 같은 여자들 많이 봤지.”조유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베개로 몸을 가리며 물었다. “누구세요?”여자는 옆에 있는 가죽 소파에 앉아 금방 한 것 같은 네일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조유진을 힐끗 보며 말했다. “나는 배현수 대표님의 약혼녀 송인아.”어젯밤, 배현수가 한 여자와 같이 호텔에 들어간 것이 파파라치에게 찍혔다.그래서 오늘 아침 그 스캔들이 온 세상에 퍼졌다.송인아는 배현수 명의상의 약혼녀로서 오늘 갑자기 터진 스캔들에 체면이 구겨졌다. 그래서 호텔을 찾아와 모든 분노를 조유진에게 쏟고 있었다. 송인아는 너무 의아했다. 배현수는 낯선 사람을 절대 가까이하지 못하게 한다. 평소에도 송인아가 배현수의 팔을 조금이라도 건드리기만 하면 배현수는 무자비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왜 하필 조유진은 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이힐을 신은 송인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침대 옆에 걸어와 기세등등한 태도로 조유진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얼마면 돼? 얼마면 잠자코 있을 거야?”조유진은 옷을 입고 나서 설명했다. “어제 현수 씨와 아무 일도 없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질척대지 않아요.”“하! 그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송인아가 조유진 옷깃을 잡아 벗기려 하자 조유진은 뒤로 한발 물러서며 말했다.“왜 이러세요!”“내가 바보로 보여? 네 목에 키스 마크들 보고도 그저 손만 잡고 잤다고 할 거야? 침대에서 손 잡고 얘기만 했다고?”송인아는 조금 짜증이 났다. 조유진이 조신한 척을 하는 것은 더 큰 야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충분히 설명드렸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못 믿으시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송인아는 조유진과 배현수가 이미 6년 전부터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20화

    “그게 무슨 이유든 유씨 집안 도련님의 머리를 때린 것 자체가 잘못이야! 다행히 도련님이 대인배셔서 안 따지고 그냥 넘어가는 거야. 조유진, 너 당장 서주시로 돌아와서 도련님께 사과해!”사과? 조유진은 왜 본인이 사과를 해야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밤새도록 억눌렀던 감정이 조범의 무분별한 질책 앞에서 터지고 말았다. “서주시로 돌아가요? 아버지, 잊으셨어요? 애초에 서주시에서 저를 쫓아낸 게 아버지예요. 그리고 지금은 나보고 서주시로 돌아가 유승태에게 사과하라고요? 유승태가 진짜 나를 강간이라도 했다면 그것도 내가 사과해야 하겠네요?”조범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말했다. “유진아. 네가 오해하는 게 있는데 유 도련님은 너를 좋아해서 한순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것뿐이야. 유 도련님이 오늘 아침에도 우리 집으로 와서 혼담 얘기를 꺼냈어. 그리고 꼭 너와 결혼하겠다고 했어. 다른 사람은 안 된대. 유 도련님이 너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도 네 복이야. 그러니까 빨리 집으로 와. 참, 그리고 그 양아치는 절대 데리고 오지마. 혹시라도 유 도련님이 보면 이 혼사가 또 깨질까 봐 두려우니까.”조유진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런 복은 다른 사람이나 주라고 해요. 나는 누리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자꾸 그 사람에게 양아치라고 하지 마세요. 저는 절대 유승태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유씨 집안과 관계를 맺고 싶으면 아버지가 결혼하세요.”말이 끝나자마자 조유진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6년 전, 조유진이 직접 유승태와의 혼인을 망쳤다. 그때 조범은 홧김에 조유진을 집에서 쫓아냈다.지난 6년 동안 친아버지인 조범은 조유진에게 한 번도 관심을 주지 않았고, 6년 만에 처음으로 걸려온 전화는 조유진을 괴롭힌 악마에게 사과하라는 것이었다.조유진을 호랑이 굴로 보내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가끔 조범이 진짜 친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그게 아니면 조유진을 이렇게까지 모질게 대하는 게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21화

    이때, 배현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송인아라는 세글자가 떠 있었다. 배현수는 멀리 있지 않은 웃고 떠드는 남녀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배 대표님, 어젯밤에 대표님을 귀찮게 했던 그 여자는 제가 이미 대표님을 대신해서 떨어뜨려 놨습니다. 이제 더 이상 대표님을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 스캔들은 제가 이미 연희 언니를 시켜 해결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어? 어떻게 떨어뜨려 놨는데?”배현수가 귀를 기울이는 척하며 물었다. 송인아는 자신이 한 일에 배현수가 만족해하는 것으로 알고 우쭐대며 말했다. “그 여자는 그저 돈에 눈이 먼 여자예요. 2억을 주니까 다시는 대표님에게 매달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배 대표님, 조유진같이 눈치 없는 여자는 상대할 필요가 없어요.”배현수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그는 이를 악물며 송인아에게 말했다. “잘했어.”송인아는 배현수의 칭찬을 듣고 더욱 기뻐하며 말했다. “배 대표님, 오늘 밤 우리...”송인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현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배현수의 눈빛에 험악함이 스쳐 지나갔다. 2억이면 조유진을 떠나게 할 수 있다는 말... 배현수는 자신이 조유진 마음속에서 이렇게 싸구려일 줄은 몰랐다. 6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배현수는 조유진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다. …“신 선생님, 제가 선유에게 감자 갈비 조림을 만드는 김에 맛 좀 보시라고 갖고 왔습니다. 요 며칠 동안 선유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신준우는 웃으며 보온병을 받았다. “어차피 진찰하는 김에 선유를 돌본 것뿐이에요. 하지만 이 갈비는 맛 보고 싶네요. 저는 이만 또 검진하러 가봐야 해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주세요.”“감사합니다.”  신준우가 자리를 떠나자 조유진은 병실로 돌아가려고 복도 입구로 걸어왔다. 그 순간 갑자기 거센 팔 힘에 의해 복도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그녀의 등이 갑자기 벽에 부딪혔고 뼈가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다.거센

Latest chapter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7화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6화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5화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4화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3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2화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1화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60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 언젠가 다시 만나요   제959화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