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의 읍소를 마친 조효동의 눈가가 촉촉해 보였다.지금 이 순간 만큼은 조효동 본인마저 자신의 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가 자신이 정말 그런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정말 그렇게 일편단심인 사람이었다고 믿고 있었다.“정말 대단한 연설이야!”그때 한쪽에서 듣고 있던 임유환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진짜 온 마음을 다한 예술적인 공연이었어. 넌 연기를 해야 했어, 시청자로서 내가 다 아쉽네.”“왜, 이제 내가 가진 것들이 탐나? 나랑 서우 사이에 남아있는 감정이 부러워?”조효동은 임유환 말에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임유환을 무시하듯 말했다.그런 자신의 기세를 보면 최서우가 제 말을 더 믿어줄 것 같아서였다.“명주야, 도대체 누구 말이 진짜야?”여러 가지 진술들이 겹치는 바람에 진실을 가리지 못해 머리가 복잡해진 최서우는 조명주를 보며 물었다.조명주는 절대 저를 속일 리가 없는데 또 조효동의 입에서 나온 오해라는 말은 믿고 싶었다.어찌 됐든 지금의 최서우는 조효동이 절대 자신을 배신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당연히 내 말이지!”최서우의 질문에 조효동과 조명주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그에 조효동이 이를 악물며 먼저 소리를 질렀다.“서우야, 나한테는 증거가 있어!”“증거요?”“그래!”조효동은 자신만만해 하며 최서우와 대학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최서우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만반의 준비를 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최서우는 역시나 그 사진을 건네받고는 더 혼란스러워진 상황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그리고 이내 그 얼굴에 쑥스러움이 비쳤다.사진 속에 그들은 함께 운동장을 거닐고 있었는데 노을이 환하게 웃고 있는 그들 위로 비치고 있어 아주 아름다워 보였다.사진을 보니 조효동과 자신이 정말 사귄 게 맞긴 한 것 같았다.“이젠 내 말을 좀 믿겠어?”조효동은 부끄러워하는 최서우의 얼굴을 보며 이 정도면 됐겠다 싶은 마음에 물었다.“네...”이런 일엔 유독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최서우는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그런 최서우를 제일 잘 알고 있는 게 조효동이었기에 그는 이런 방법으로 최서우가 임유환에게 가지고 있던 호감마저 빼앗으려 한 것이다.“선배,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거예요?”임유환과 윤서린이 손을 꼭 잡고 찍은 사진에 최서우는 고개를 들어 조효동을 보며 물었다.“바로 며칠 전에 찍은 거야.”조효동은 임유환을 까발릴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대답했다.“알겠어요.”한숨을 내쉰 최서우는 이번에는 고개를 돌려 임유환을 바라봤다.임유환 역시 제 몸에 닿은 최서우의 심문하는 듯한 시선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임유환도 조효동이 윤서린과 제가 함께 찍은 사진까지 공수해 올 줄 몰랐었다.사실 최서우는 윤서린과 임유환 사이를 다 알면서 부탁을 한 거지만 지금의 최서우는 기억을 잃어버렸기에 임유환은 해명하기가 무척 까다로울 것 같았다.“유환 씨랑 윤서린이라는 이분, 사귀는 사이에요?”“네...”하지만 임유환은 조효동처럼 최서우를 속이기는 싫었기에 눈을 감고 사실대로 말했다.“나랑 만나기 전에 사귄 거예요 아니면 나랑 만나고 나서 사귄 거에요?”“서우 씨랑 만나기 전에요.”두 번째 질문에도 사실대로 대답한 임유환에 최서우가 옅은 미소를 띠고는 말했다.“알겠어요, 사실대로 말해줘서 고마워요.”최서우의 웃음에는 슬픔도 분노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최서우 본인조차도 지금 이게 무슨 감정인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연인 사이에서 한 거짓말과 배신이라면 치를 떠는 그녀였는데 임유환 입에서 전해 들은 진실에는 아무런 화도 나지 않았다.임유환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차분해 보이는 최서우에 오히려 걱정스레 물었다.“서우 씨, 이건 다 오해에요. 나랑 명주 씨는 서우 씨를 속인 게 아니에요. 내가 다 설명할게요.”“네.”임유환의 변명에 최서우는 담담히 대답하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서우야, 유환 씨는...”“됐어 명주야, 이 얘긴 그만하자.”조명주가 나서서 임유환을 대신해 해명하려 했지만 최서우가 그녀의 말을
그리고 그 웃음을 본 조명주는 순간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는데 조효동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왔다.“혜성테크놀로지? 양유란이요?”“양유란 여사님이 해외에서 혜성테크놀로지를 경영한 걸 조 중령님은 어떻게 아세요?”“제랑 그때 해외 유학 같이 준비한 분이 바로 양유란 여사님이세요. 그리고 이번에 돌아와서 세울 회사에도 투자를 해주신다고 한 분이시죠.”“그분 도움이 없었으면 저의 유학도 창업도 다 이렇게 순탄하진 못했을 거예요.”“유감스럽게도... 그분은 보름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셨어요.”“제가 의사인데도 그분은 구해내지 못했어요... 사신한테는 당해낼 수가 없더라고요...”그 말을 하는 조효동은 눈을 내리깐 채 슬픔에 잠긴 척했고 최서우는 또 마음 아파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럴수록 조명주는 입만 열면 거짓말인 조효동 때문에 화가 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조효동, 너 진짜 말 잘 꾸며낸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하고 싶어?”“뭔 놈의 상담이고 투자야! 살려낼 수가 없어? 어디서 개소리야!”참다못한 조명주는 조효동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넌 그냥 여자한테 빌붙어 사는 쓰레기야, 어디서 잘난 척이야!”“혜성테크놀로지 지금 주인 너 맞잖아,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봐 어디!”“그리고 국내에 세웠다는 그 의약 회사 이름은 뭔데? 어디 있냐고!”“하하, 조 중령님이 저에 대해 편견이 있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제 말을 이렇게 모조리 의심하시면 안 되죠. 제가 한 말은 다 사실입니다.”“그럼 대답해봐.”조명주의 질문에 조효동이 계속 비아냥대자 당장이라고 그 뺨을 갈겨주고 싶은 충동이 든 조명주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알겠어요, 말할게요.”겉으로는 한숨을 쉬고 있었지만 사실 조효동의 눈에서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조 중령님,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또 저희 사이에 생긴 오해를 풀기 위해서 아까 조 중령님이 하신 첫 번째 질문에 답을 할게요.”“아까 계속 질문하신 혜성테크놀로지의 현 주인은
“말도 안 돼...”이 부관이 보내준 자료들을 훑어보던 조명주는 너무 놀라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조효동이 가지고 있던 혜성테크놀로지는 진짜 해외 자선 기업에 기부되어 있었고 드림 그룹도 정말로 건설 중이었다.건설 장소 그리고 완공 시간마저 조효동의 말과 완벽히 일치했다.회사의 법인 역시 조효동이었다.그리고 이런 조명주의 반응을 예상하였던 조효동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사실 이 모든 건 정우빈이 도와준 일이었다.조효동의 계획을 전해 들은 정우빈은 조효동 소유로 되어있던 혜성테크놀로지를 해외 자선 기업에 양유란의 이름으로 기부해준 것이다.하지만 그 회사에 있던 2만 억의 자산은 이미 조효동의 주머니로 들어가 있어 사실상 빈 껍데기를 기부한 격이었다.그리고 드림 그룹 역시 정우빈의 도움으로 건설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정우빈이 아니었다면 그 큰 부지를 정부에서 조효동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빨리 내어주진 않았을 것이다.아무리 생각해도 완벽한 거짓말에 조효동은 겸손한 듯 웃고 있었지만 우쭐대고 싶은 감정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조 중령님도 사람 시켜서 알아보셨으니 이제 제가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란 걸 믿으시겠죠?”설레발을 치며 물어오는 조효동에 조명주는 이를 악물었다.조명주는 전에 임유환이 흑제를 시켜 알아본 결과와 상반되는 자료를 당연히 믿지 않았고 분명 조효동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임유환도 당황스러운 상황에 조명주의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잘 짜인 판인 걸 보니 임유환은 누구의 짓인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명주야, 나도 보여줄래?”“그게...”그때 부드럽게 물어오는 최서우에 조명주는 잠시 고민을 했지만 어차피 안 보여준다고 쉽게 포기하지 않을 최서우를 알기에 그냥 보여주기로 했다.그리고 자료들을 확인한 최서우는 조효동이 한 말이 다 사실이었다는 생각에 눈동자가 흔들렸다.“서우야, 이제 나 믿지?”“네.”그리고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던 조효동이 웃으며 묻
“미안해요 선배...”최서우는 난감해하는 조효동을 보며 미안한 듯 말했다.분명히 조효동과 다시 잘해볼 마음이 있긴 한데 왜 몸이 이렇게 거부하는지 최서우 본인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걸 본 임유환과 조명주는 깜짝 놀라더니 서로 같은 걸 생각했는지 허공에서 시선이 맞물렸다.아무래도 남자 혐오증이 이렇게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기억은 잃었어도 무의식 속에 남아있던 이성에 대한 혐오와 배척이 최서우를 움직인 것이다.“괜... 괜찮아.”그에 조효동은 멋쩍게 웃으며 다급히 말을 돌렸다.“나는 네가 모자 쓰고 있는 게 너무 더워 보여서... 그러면 상처도 빨리 안 나을 것 같고 해서 모자 벗겨주려던 거야.”“걱정해줘서 고마워요.”조효동의 말에 짧게 대답하고 입술을 말아 물던 최서우는 제 관자놀이 쪽에만 비어있는 머리 때문에 못생겨진 얼굴이 생각나 축 처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근데 내가 수술한 지 얼마 안 돼서 머리카락이 좀 밀렸거든요. 그게 보기 흉해서 모자로 가리고 있었던 거에요.”“뭐가 보기 흉해, 머리가 다 밀려버렸어도 네가 제일 예뻐.”“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일부러 큰 소리로 예쁘다고 해주는 조효동에 최서우는 마음은 그새 간질간질해졌다.그에 조효동은 또 위선적인 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뭐 이런 걸로 고맙다고 해,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그래도 모자는 벗는 게 어때? 그러면 상처도 빨리 나을 것 같고 또 나도 네 얼굴 제대로 볼 수 있잖아.”“나도 너 오래 못 봐서 보고 싶어...”말하면서도 탄식을 뱉는 조효동에 그가 저를 정말 그리워했다고 생각한 최서우의 시선이 흔들렸다.하지만 지금 제 모습을 보여주기엔 아직 용기가 부족했던 최서우는 부드럽게 거절했다.“근데 지금 제 모습이... 정말 별로라서... 선배가 보면 실망할 것 같아요...”“그럴 리가 없잖아. 내 마음속에서는 네가 제일 예쁜 사람이야. 언제나 그건 변하지 않아.”최서우의 이쁘장한 얼굴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던 조효동은 다급히 그녀를 달
조효동은 최서우의 모습을 보고 잠시 벙쪄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아냐... 하나도 안 못생겼어.”말은 저렇게 했지만 조효동의 표정은 제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조효동이 좋아하는 건 관자놀이가 텅 비어버린 최서우가 아닌 완벽히 아름다운 본래의 최서우였다.하지만 머리카락은 언제고 다시 자라날 것이니 조효동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조효동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은 건 아주 잠시였지만 그걸 또 보아 낸 최서우는 실망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아까 방에서 임유환에게 얼굴을 보였을 때 임유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오히려 저를 위로해줬기에 자연스레 조효동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선배, 나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요. 이만 가봐요, 병문안 와줘서 고마워요.”그래서 한껏 설레던 마음도 가라앉아버린 최서우는 다시 모자를 눌러쓰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서우야, 나 아직 말 다 못했는데...”조효동은 최서우가 정말 피곤해서 들어가겠다는 줄로 알고 서둘러 그 뒤를 쫓아가며 말했지만 그 상황을 눈여겨 보고 있던 임유환에 의해 제지당했다.“꺼져.”그에 화가 난 조효동이 임유환을 노려보았지만 임유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은 여기서 더 다가오면 죽여버리겠다는 경고를 날리고 있었기에 조효동은 순간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이미 임유환의 실력을 몸소 경험한 적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의 땅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자운별장의 규칙도 있었기에 일부러 당당한 척 소리치고는 별장을 떠났다.“넌 나중에 두고 봐.”그런 조효동에 임유환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간신히 억누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여기서 조효동에게 주먹을 휘두르기라도 한다면 최서우가 화를 낼 게 분명했기에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미친놈, 다신 오지 마!”조명주 역시 임유환과 같은 생각이었기에 화만 낼뿐 손을 대진 않았다.기억을 잃은 최서우가 충격을 받아서 회복에 불리할까 봐 최선을 다해 참고 있는 중이었다. 최서우만 아니었으면 조
임유환은 자신을 속이고 바람까지 피운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위해서 총알을 막아주는 게 옳은 일이었던 걸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었지만 최서우는 도무지 임유환을 원망할 수가 없었다.모든 게 의문이었고 어떠한 해답도 떠오르지 않았다.지난날의 일들을 떠올려 보려고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생각나는 게 없자 최서우는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그때 핸드폰이 울리더니 처음 보는 번호로 문자가 와 있었다.자세히 보니 조효동에게서 온 문자였다.[서우야, 나 효동 선배야.][아까 네가 너무 급하게 가버려서 못한 말이 많아.][그래도 너 금방 퇴원했으니까 많이 쉬어야 하는 건 알아.][저녁에 시간 괜찮으면 같이 밥이라도 먹는 건 어때? 연경에 아주 잘하는 중식집 하나 알아놨거든. 가서 보양식도 좀 먹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자.][아까보니까 안색도 안 좋아서 마음 아프더라.][일단은 좀 쉬어, 답장 기다릴게.]조효동의 문자를 본 최서우는 기뻐하는 게 당연했지만 자꾸만 아까의 그 실망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오히려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갇힌 듯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후.”깊은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편 최서우는 바로 조효동의 문자에 답장하지 않고 피드부터 훑어봤다.병원에 있던 며칠 동안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기에 이제라도 좀 봐보려고 카카오톡을 확인했는데 그때 임유환과 주고받았던 문자가 눈에 띄었다.핸드폰에는 전에 그들이 나눴던 채팅이 전부 남아있었다.그에 호기심이 동한 최서우는 스크롤을 내려 제일 위에서부터 읽기 시작했다.2023년 7월 23일 처음으로 친구추가를 했다는 안내문자가 떡하니 쓰여있었다.7월 23일이면 한 달 전쯤인데 둘이 알게 된 지 한 달 밖에 안된다는 사실에 최서우는 살짝 당황한 채로 첫 문자부터 읽었다.첫 문자는 최서우 본인이 보낸 것이었는데 그 내용이 조금 낯부끄러웠다.[잘생긴 환자분, 아까 왜 친구추가 거절했어요, 누나 속상해요 이
때마침 방으로 들어온 조명주와 임유환은 혼자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최서우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서우야, 너 괜찮아?”“응.”최서우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서우야, 조효동 그놈 말은 절대 믿으면 안 돼.”돌려 말하는 데에는 원체 소질이 없던 조명주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속사포로 내뱉었다.“그놈은 진짜 사기꾼이야. 네가 기억을 잃은 틈을 타서 또 네 감정을 이용하려 드는 거라고.”“그리고 유환 씨는 진짜 남자친구가 아니라 네가 부탁해서 남자친구인 척해줬던 것뿐이야.”“진짜 좋은 사람이니까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근데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좀 복잡해.”말하자면 긴 얘기였기에 조명주는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그때 뒤로 돈 최서우가 초조해 보이는 조명주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명주야, 유환 씨 그런 사람 아닌 거 나도 알아.”“어?”느닷없는 최서우의 말에 그녀가 화나서 아무 말이나 하는 줄 알고 조명주는 다급히 해명하기 시작했다.“서우야, 진짜 내 말 한 번만 믿어줘. 유환 씨는...”“알아, 나 화난 거 아니야.”“진짜?”“응, 진짜?”아직 의심이 가시지 않은 듯 되묻는 조명주를 향해 최서우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뭐라고?”최서우의 거듭되는 말에도 조명주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남자의 배신을 제일 싫어하는 최서우가 왜 임유환만은 이렇게 빨리 용서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그래서 조명주는 최서우가 화가 났는데도 그냥 표현하지 않는 것뿐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고 폭풍전야 같은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다시 한번 더 해명하려고 입을 벌렸는데 그때 최서우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명주야, 진짜 나 걱정 안 해도 돼. 나 너 믿어. 그리고 유환 씨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믿어.”“진짜야?”“그렇다니까.”“그리고 나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또다시 되묻는 조명주에 최서우는 여전히 같은 대답을 했다.“알겠어.”그에 일단은 최서우의
임유환과 윤여진은 최서우의 병이 악화될까 염려하여 일부러 그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임씨 집안으로 향했다.임씨 집안으로 가는 차 안에서 윤여진은 사건의 자초지종에 대해 간략하게 전해 듣게 되었다.영상 속의 그 여자는 임유환의 시중을 들던 나비라는 이름의 메이드이고 그 메이드를 남자들에게 건네준 이가 임준호라는 사실까지 다 듣고 난 윤여진도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윤여진이 알고 있는 임준호는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조차도 없는 잔인한 행동에 15년 전 자신의 친아들을 직접 내쫓던 그때의 임준호가 떠올라 윤여진은 온몸이 오싹해났다.아마도 15년 전 그날부로 임준호가 완전히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30분 뒤 그들은 임씨 집안에 도착했지만 워낙 깊은 밤이라 저택의 대문은 당연히 잠겨있었고 흑기군을 데리고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대기하고 있던 흑제가 임유환을 보고 인사를 건네왔다.“임 선생님.”“오셨어요?”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계 제일 갑부의 느닷없는 등장이 윤여진은 놀랍기만 했다.임유환을 대하는 흑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해 그 둘의 사이가 궁금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할 때라서 윤여진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영상에서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윤여진이 다시 표정을 굳히자 아까부터 냉랭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임유환이 앞으로 나서더니 대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임준호, 당장 나와!”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저택 사람들 몇 명이 눈을 떴고 하인 두 명이 달려 나왔다.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던 하인 두 명은 익숙한 임유환의 얼굴에 깜짝 놀랐지만 그런 놀라움도 얼마 오래가진 못했다.하인들은 이내 비아냥거리며 임유환을 향해 말했다.“어머, 이게 누구야, 우리 임유환 도련님 아니세요?”입으로는 도련님이라 하고 있었지만 그 말투 속에 진하게 녹아나 있는 조롱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을 정도였다.“무슨 도련님이야, 버려진 도련
임유환의 몸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주인님, 그건 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이 영상도 그 경찰에 대해 조사할 때 경찰 시스템을 뒤지다 발견한 겁니다.”“경찰 시스템?”“그럼 이것도 정씨 집안에서 한 짓이란 말이야?”“그것까진 아직 모르겠는데... 제가 알아본 바로는 저 여자분은 주인님... 아버님께서 직접 저 남자들 손에 넘긴 거였습니다.”이 일이 임유환의 아버지와 관련되어있기도 했고 영상 속의 여자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더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 같아 흑제는 대답을 망설였다.“아버지?”“네, 주인님.”흑제의 말에 당황하던 임유환은 재차 확인을 거친 후에 또다시 기운을 뿜어내며 당장이라도 임준호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임유환은 어떻게 자신이 직접 데려온 아이를 또 내다 버릴 수가 있는지 임준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당연히 제 한 목숨 부지하고자 행한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저 사람들 손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내어준 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짓인지 의문이 갔다.영상 속 사람들이 말하는 비밀 열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임유환은 나비가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임준호!”갑자기 소리 지르는 임유환 때문에 방 안에 있던 윤여진은 화들짝 놀랐다.“흑제.”“예, 주인님.”“지금 당장 흑기군 준비해서 나랑 임씨 집안으로 간다.”“예, 주인님.”지금 임유환은 약해빠진 임준호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다.그래서 직접 집으로 쳐들어가서 대체 나비를 누구에게 넘겨준 것인지, 나비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따져 물을 생각이었다.살아있다면 직접 얼굴을 봐야 했고 죽었다면 그 시체라도 봐야 진정될 것 같았다.임유환은 나비가 그 짐승 같은 놈들 손에 놀아나도록 두고 볼 수가 없었다.살아있다면 당장 데려다가 직접 치료를 해줄 것이고 죽었어도 데리고 와서 묻어줄 생각으로 눈이 빨갛게 충혈된 임유환은 차오르는 분노와
“나비?”아까는 얼굴이 제대로 안 보여서 몰랐는데 영상 속의 여자는 바로 임유환만 보면 도련님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나비였다.그렇게 밝고 예쁘게 웃던 아이가 피범벅이 된 채 모진 고문을 견뎌내는 걸 보고 임유환은 낯빛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울려왔으면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서 쫓겨난 지도 15년이니 나비도 많이 커서 얼굴만 보면 못 알아봤겠지만 나비 문양의 반점 덕분에 한눈에 그녀의 알아볼 수 있었다.나비라는 아이는 5살의 어린 나이에 임씨 집안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이름도 없어서 나비도 임유환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나비는 어릴 때 강도들의 손에 부모님을 잃고 그들에게 이끌려 여기저기 팔려 다니던 이이였는데 그런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임준호가 큰돈을 들여 데리고 오는 바람에 임씨 집안에서 메이드로 일을 하게 된 것이다.나비는 임유환을 보자마자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때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웅크린 몸을 떨고 있는 아이가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임유환은 아직까지도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임유환이 임씨 집안에 들어온 이상 더는 그 어떤 괴롭힘도 없을 거라고 다독여봐도 나비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었다.다른 메이드들을 시켜 깔끔히 씻기고 머리도 빗겨주고 깨끗한 옷까지 갈아입혀 주니 왼쪽 얼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반점도 드러났다.임유환이 그 반점을 바라보고 있으니 나비는 신분이 낮은 제가 얼굴에 난 반점으로 임유환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어 동굴 속에서 강도들에게 폭행당하던 것처럼 맞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반점을 가리며 몸을 떨었다.그에 임유환은 바로 나비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천천히 타일러주었다.그리고는 나비의 긴장과 두려움을 해소해주기 위해 정원 산책까지 데리고 갔다.드넓은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었고 그것들이 함께 조화로운 향도 만들어내고 있었다.이런 아름다운 곳은 처음 보는 나비는 처음에는 몸이 굳어버리며 어색해했지만 이
“아!”남자의 행동과 함께 흘러나온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밀실을 가득 채웠다.화면을 뚫고도 전해지는 여자의 절망과 고통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임유환의 몸도 떨려왔고 마찬가지로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윤여진도 임유환 쪽으로 다가오며 화면을 바라보았다.“어머!”사람한테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영상 속 인간들 때문에 윤여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소리쳤다.너무 집중해서 본 나머지 옆에 윤여진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임유환이 다급하게 화면을 가리며 말했다.“여진아, 넌 보지 마.”“오빠, 이 사람들 누구예요?”“아직 모르겠어.”얼굴과 입술이 창백해진 윤여진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임유환은 한숨부터 쉬며 대답했다.“여진아, 네 방 화장실 좀 쓸게.”말을 마친 임유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다시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화면 속의 여자는 여전히 은침에 찔린 손을 들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온몸을 비틀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는 마치 불판 위에 올라간 미꾸라지 같기도 했다.하지만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그런 여자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차가운 눈을 하고 두 번째 은침을 꺼내 들어 여자의 다른 손가락에 찔러넣었다.“아!”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여자는 순간 고개를 확 젖혀버렸고 이미 흑과 말라 굳어버린 핏자국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이 여자의 얼굴을 가렸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몰라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그냥 날 죽여줘요 제발...”“죽여주세요...”남자가 아까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여자는 울며불멸 죽기를 애원하고 있었다.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죽는 걸 원하고 있을까 싶어 임유환은 비통하다 못해 화까지 나고 있었다.“말했잖아, 얘기하면 죽여준다고.”말을 마친 남자는 섬뜩하게 웃더니 나머지 손가락에도 하나하나 은침을 꽂아 넣었고 여자는 온몸에 경련이 일듯 몸을 떨어대다가 한계에 다다른 건지 다시 한번 기절했다.은침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열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들은 빠르게 작은 웅덩이
“마음의 준비요?”의미심장한 흑제의 말에 임유환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영상인데 그래요?”“혼자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암호 걸어서 이메일 보내놨어요.”임유환이 영상을 보면 어떤 반응일지 알기에 흑제는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알겠어요.”임유환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나서 빠르게 흑제가 보내온 이메일을 확인했다.이메일의 정체는 5분쯤 되는 영상이었는데 영상의 장소는 어두운 밀실같이 보였다.밀실 안에는 똑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들은 전부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임유환은 그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핸드폰 화면으로만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무시무시한 그들의 기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남자들의 발밑에는 거의 죽어가는 젊은 여자 하나가 누워있었다.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몸에는 채찍에 맞느라 생긴 생채기들이 한가득이었다.생채기 주위의 살들은 진작에 터져나갔고 팔은 안에 있는 뼈가 다 보일 정도로 앙상했다.그리고 몸에 난 상처는 그뿐만이 아니라 담배로 인해 생긴 작은 화상 자국들도 빼곡했다.옛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새로 난 상처들은 이미 옷과 붙어버려 여자의 처참한 상태를 더욱 잘 보여주고 있었다.영상을 보고 있던 임유환도 서서히 여자가 불쌍해졌다.다섯 남자들은 대체 누구길래 여자한테 이토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그리고 여자는 또 누구인지 임유환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영상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을 보니 아직 5분 1밖에 진행되지 않은 영상에 임유환은 계속해서 화면을 들여다봤다.화면은 빠르게 전환됐고 여전히 같은 복장을 한 남자 다섯 명과 아까와 다를 게 없는 밀실이 나타났지만 아까 그 일로부터 며칠은 지난 듯 보였다.영상 속의 남자는 찬물을 들어 쓰러져있는 여자의 몸 위로 뿌렸고 여자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고통 속에서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비밀 열쇠 어딨는지 말해.”검은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입을 열자 나머지 네 명도 여자를 차갑게 바라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검사할 거예요 오빠?”그때 귀를 간질거리는 윤여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부끄러워하면서도 도발적인 말을 뱉어내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심장이 쿵쾅거렸다.“여진아, 나는...”오해를 풀어보려고 고개를 돌려 윤여진을 보던 임유환은 몸을 앞으로 숙인 탓에 훤히 드러난 검은색 슬립 아래의 몸매에 다시 말을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임유환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은 시각 동물인지라 완벽한 몸매와 유독 눈에 띄는 풍만한 가슴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반응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그 감정도 이내 임유환의 이성에 묻혀버렸다.“후...”임유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말했다.“여진아, 진짜 이제 그만해. 진짜 실수한다니까.”“오빠는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나긋나긋하게 말할 때마다 흘러나오는 뜨거운 숨결 때문에 점점 본능이 들끓고 있었던 임유환은 이대로 있었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윤여진이 임유환의 손을 덥석 잡아 오자 우유 크림처럼 부드러운 그 느낌에 임유환은 일어서려던 다리마저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유환 오빠,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니까요.”윤여진은 여전히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하며 잡고 있던 임유환의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환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고 이 손을 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그런데 마침 타이밍 좋게 울린 전화벨 소리에 둘 다 화들짝 놀랐고 임유환도 또 한 번 울리는 벨 소리에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윤여진도 겁먹은 고양이마냥 손을 빼내며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나... 전화 좀 받을게.”임유환이 어색하게 말하자 윤여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네.”아까의 대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부끄럼 타는 고양이 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리던 임유환이 전화를 받았다.흑제에게서 온 전화라 조금 긴장한 채로 받았는데 역시나 전에 지시했던 일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지만 임유환은 애써 윤여진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장난치지 말라니까.”윤여진이 여전히 장난을 치는 거라고 생각한 임유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아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했잖아, 그거 알려줄게.”“그 얘긴 나중에 하고, 오빠 아직 내 말에 대답 안 했잖아요.”“어... 그 얘기 먼저 하자, 불 끄면 졸려서 못 할 것 같아.”임유환은 기대에 찬 윤여진의 얼굴이 보였지만 어떻게든 이 숨 막히는 상황부터 끝내보고자 평소답지 않게 우겨댔다.그리고 사실 윤여진이 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도 가지 않아 아까부터 심장이 떨리고 있었다.장난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장난이 아니라면 아주 어색해질 것 같았다.“오빠, 왜 아까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는 것 같죠?”그때 임유환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보며 윤여진이 부드럽게 물어왔다.“그... 그래?”“긴장한 거예요 설마?”임유환에게 질문을 하며 코앞까지 다가온 윤여진 때문에 둘의 거리는 3㎝도 채 남지 않게 되었다.정말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닿을 것같이 가까운 거리라서 임유환은 윤여진이 내뱉는 호흡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숨결과 함께 풍기는 향기에 임유환은 헛기침을 하며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여진아, 이제 진짜 그만해.”사람 둘은 족히 앉을 정도로 떨어져서야 임유환은 잔뜩 긴장했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장난 아니라니까요.”임유환이 저에게서 멀어지자 윤여진은 살짝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연애 수첩 제1항을 떠올린 그녀는 다시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그래서 윤여진은 긴장한 듯 굳어있는 임유환을 보며 익살스레 웃어 보였다.“유환 오빠, 누가 그러는데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이상하게 긴장을 한대요.”“오빠 설마 나 좋아하는 거예요?”윤여진이 이 질문을 할 때 임유환은 이게 장난이든 진심이든 간에 서둘러 이 화제가 지속되는 것부터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둘이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이상해지는 방 안의
“어...”단도직입적인 윤여진의 말에 임유환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임유환의 생각이 불순한 건 맞지만 그게 오로지 임유환의 잘못은 아니었다.이미 성인이 된 그들은 15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윤여진은 얼굴이며 몸매며 누가 봐도 예쁜 여자로 성장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도 멀쩡할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임유환 역시 남자였으니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슬립까지 입고 제 눈앞을 돌아다니고 있는 윤여진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슬립 아래로 보일 듯 말 듯 한 윤곽이 아까부터 자꾸 눈앞에 아른거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임유환은 지금 온 정신력을 다 쏟아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자신의 눈이 윤여진의 몸으로 향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었던 임유환이기에 당연히 같이 자자는 그녀의 요구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모든 남자들의 워너비인 그 몸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밤을 조용히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오빠, 이상한 생각 한 거 맞죠?”한편 윤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임유환을 보며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장난스레 물었다.“어...”임유환은 이젠 정말 자신이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를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말 윤여진을 두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에는 그는 윤여진이 동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녀의 몸만 보면 저절로 뜨거워지는 가슴이 대신해서 부정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여진아, 사실... 나는...”다그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해명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진심이 전달될지 몰라 말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임유환에게 윤여진은 여전히 15년 전 꼬맹이였고 임유환 또한 그때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그는 윤여진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원치 않았고 또 윤여진도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대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여전히 그때처럼 윤여진이 힘들 때 그녀에게 힘이 돼주는 든든한 오빠가 되고 싶었는데 이 마음을 전하기에 말 한마디
“아니야, 그냥 네가 아까 한 말 생각하고 있었어.”“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있고 싶은 거예요?”다급히 해명하는 임유환에 시무룩해 있던 윤여진은 다시 밝게 웃으며 물었다.“그럼.”임유환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사실 그와 윤여진이 말한 같이 있는다는 서로 전혀 다른 뜻이었다.“그럼 오빠, 오늘 밤은 나랑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임유환의 팔을 감싸 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말하는 윤여진에 임유환은 몸이 먼저 반응할 뻔한 걸 간신히 참고는 물었다.“여기서 너랑 같이 밤을 보내자고?”“네!”윤여진이 이런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임유환이기에 제 팔에 닿아오는 말랑거리는 그 느낌도 까맣게 잊은 채 놀랐다.그런 임유환의 반응을 보던 윤여진은 혹시라도 거절당할까 봐 다급하게 한마디 더 보탰다.“여기서 자는 건 처음이라 좀 무서워요, 워낙 낯설기도 하고...”“어...”윤여진의 부탁도 일리가 있어 보여 임유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오빠, 그냥 남아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요?”윤여진은 임유환의 팔을 좌우로 흔들며 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임유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예쁜 얼굴인데 애교까지 부리니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모습이 섞여 있어 웬만한 남자라면 다 윤여진한테 넘어갈 것 같았다.인내심과 자제력 하나는 자부하면서 살아왔던 임유환도 윤여진의 애교 공세에 3초도 못 버티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알... 알겠어.”임유환은 저도 모르게 긍정의 대답을 해버렸다.정말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바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저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보내는 윤여진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역시, 오빠는 내 말 들어줄 줄 알았어요!”결국 제 말을 들어준 임유환에 윤여진의 촉촉한 눈망울에서는 빛이 나기 시작했다.“너랑 같이 있어 줄 수는 있는데, 난 바닥에서 잘 거야.”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는 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 돼버렸으니 임유환은 나름대로 그 안에서 최선책을 찾으려고 노력했